사람됨은 사람됨이고, 책 읽기는 책 읽기이다. 무릇 만약 사람이 열번 읽어서 깨치지를 못한다면 20번을 읽고, 또 깨치지 못한다면 30번에서 50번까지 읽는다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는 데가 있을 것이다. 50번을 읽어도 어두워서 깨닫지가 못해야 기질이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열번도 읽지도 않으면서 도를 깨우칠 수 없다고 말한다.

"주자어류" 학4 '독서법'上 57조목 중.

爲人自是爲人, 讀書自是讀書. 凡人若讀十遍不會, 則讀二十遍; 又不會, 則讀三十遍至五十遍, 必有見到處. 五十遍暝然不曉, 便是氣質不好. 今人未嘗讀得十遍, 便道不可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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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겸해서 예전에 살펴본 주자어류 중..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전습록의 왕수인은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독실한, 일견 종교 지도자 쯤에 가까운 사람이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딱딱하고 면도날 하나 안 들어갈 수도승 같은 이미지로 생각한 주희가 생각보다 꽤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는데에는 꽤 놀랐다. 

오히려 과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선생님 내지 학자분들이라면, 그 꽤나 엄격한 듯 하면서도 그 만큼 공부에 골몰하는 그 점이 당연할만큼 오히려 주희 스타일이라는 느낌..


201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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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시점으로부터도 더 예전인 학부 시절의 명청사 수업에서 레퍼런스가 포함된 "사상가들의 대화록"을 만들어 오랬던가? 하는 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양명학에 사로잡힌 당시의 나는 당연히 주희-육구연의 대화 속에 왕수인이 끼어드는 포맷?을 골랐었던 기억.

어제 완독한 '크리에이션'을 읽으면서, 그 시절 과제가 생각이 났다. 


201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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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많이 받는 질문 중에 “어떤 빵을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이 있는데, 저는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전 파리바게뜨의 찹쌀 도너츠와 소세지빵, 두 가지를 제일 좋아합니다. (웃음) 몇년 전이죠. 한참 대기업 빵집이 골목 빵집을 다 죽인다는 이슈가 있었어요. 이 주제로 기자들이 저에게 인터뷰 요청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제가 “대답을 하면 그대로 기사화할 수 있는지 약속해달라”고 했어요.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시길래 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파리바게뜨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요.   

  
전 파리바게뜨 빵이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동네 빵집 얘기를 해볼까요. 30년 동안 빵집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옆에 막 결혼한 새댁이 뭘 해야할 지 몰라서 파리바게뜨를 차렸어요. 그랬더니 30년 된 빵집 매출이 반으로 꺾였어요. 이유가 뭘까요. 빵이 맛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게 제 대답입니다. 예전엔 동네 빵집은 어디나 잘 팔렸어요. 빵집이 많이 없었거든요. 돈이 잘 벌리니 굳이 맛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지낸 거에요. 30년 빵집이라고 하지만 주인이 실제로 빵 만든 건 10년 밖에 안돼요. 그 뒤론 사장도 자기 빵을 먹어보지도 않아요.   
  
저는 사명감을 갖고 빵을 만드는 분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정한 품질의 빵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이 있으니 맛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스타벅스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급 커피 시장이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커피 맛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을 만든 거죠. 그래서 전 오히려 파리바게뜨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에요.
...(하략)
"
[출처: 중앙일보] '오월의 종' 빵집사장의 도발 "파리바게뜨 많아져야 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233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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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화'와 '예술성'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나름대로 오랜 시간 붙들고 가는 고민거리 중 하나다.

(노블리티에 대한 찬탄을 모른다며 이따금 매도당하곤 하지만) 나조차도 "좋은 것"은 사실 그 기준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나아가 이를 누군가 알아주거나 설득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서술을 뛰어넘는, 무리지은 합의를 뛰어넘는, 직관의 영역에서 맴도는 '탁월함'이란,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2) 하지만, 동시에 그 '탁월함'의 세계란, 그 자체만으로는 서술이나 설득이 동반되 않기에 재생산될 수도 없고, 그 까닭에 부싯돌의 불꽃처럼 나타났다 흩어져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잘 안다. 그 뿐인가. 그 일시성 비정형성은 그 탁월함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회의적 입장에 제법 취약하기도 하다. 서술-설득이 빠진 탁월함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 아니냐는 비단 타인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제기되는 시니컬한 냉소에 답변하지 못한다. 


- 물론 아까도 말했듯 '탁월함'은 합의의 산물이 아니므로, 달리 설득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세에 발 딛는 존재로서, 인간이란 자족적 에고만으로는 저 자신 하나의 삶조차 감당해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최근 소세키의 "마음"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인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회와 세계에 대한 혁명적-선지자적 야심을 꿈꾸는 게 아닌, '심미적 탁월함'을 꿈꾸는 이에게도 어떤 '표준'의 존재는 여전히 절실한 것이 된다.



3) 동네 빵집이 대기업보다 탁월할 수 있다. 오히려 개성의 독자성, 유연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보다 못한 게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그 까닭에 파리바게뜨 유행이 그 탁월한 개성의 세계를 획일화한다는 지적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그 '탁월함'이 찰나의 우연을 뚫고 스스로의 존재를 현세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수용자의 측면에서든 생산자 자신의 측면에서든 '표준'의 존재가 "생각보다는" 중요하다. 그 까닭에 당위적 측면에서 잘 된 동네 빵집은 '파리바게뜨'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기사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201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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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적인 정신과 한국적인 사상이 무엇인지 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인 판타지 세계의 모습과 그 세계의 규칙, 특징, 기술 수준, 제도, 신분 계층 같은 것을 차근차근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작가들이 그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꾸밀 것이라 했다. 누구는 열심히 연구하고 토론해 세계를 만들고, 누구는 그렇게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열심히 소설을 쓴다. 그러다 보면 그게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소수파에 속했다. 그렇게 사상과 원리에 따라 세계를 구민 뒤 그 세계 속에 이야기를 집어넣는 방식은 너무나 원대한 꿈이고 품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힘든 일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다들 이것이 정말 한국적이라 공감하는 세계를 합의 끝에 만들어낸다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그런 일은 아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사상, 규칙, 세계를 만들어주면 아래에서는 거기에 따라 이야기를 만든다는 발상은 얼핏 체계적이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반대로 답답하고 지겨운 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시절부터 나는 그런 식으로 한국형 판타지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국 전설 속의 괴물이나 신기한 보물 같은 것을 목록으로 정리해두고, 그런 자료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같이 돌려 보는 것 정도가 실용적인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렇게 여러 작가가 저마다 자기 생각 자기 이야기 속에서 이리저리 활용하다 보면 저연히 그 중에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 같아 보이는 것도 점차 나타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늘어놓고 아래에서부터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자연히 그에 따라 사상, 규칙, 세계 등 이야기 위에 있는 것도 생긴다고 믿었다.

.

...(중략)..

.

전문적인 조사 자료나 학술 논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괴물 전설을 밝히는 학술 논문들은 주로 구비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극히 "한국구비문학대계"나 그와 비슷한 현대에 채록된 이야기 자료를 근거로 괴물의 특징이나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는 논문들을 나는 주로 접했다.


그런데 "한국구비문학대계"만 해도 1970년대에 말이 되어서야 조사가 시작된 자료다. 1970년 말이면 이미 한국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되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서도 여러 전설이 각색되어 소개된 뒤였다. 그렇다면 이런 시점에 어떤 지역의 노인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조사한다 해도 그 이야기는 현대의 작가들이 가공하고 꾸민 영화, 소설 TV, 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내용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흉측한 귀신의 모습을 조사할 때 무심코 며칠 전에 본 영화 속 귀신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조사하면서 정확히 어느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원전을 정확히 밝히면서 한국 괴물 이야기를 모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곽재식 2018 "한국 괴물 백과" 워크룸, 1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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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사회-문화의 가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결국 해당 분야 종사자의 업이라는 것은 고민거리도 못 되지만, 그에 반해 적어도 그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오랜시간 나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되어 왔다.

그걸 늘 의식해 온 까닭에, 내 스스로는 그 방법에 대한 굉장히 오래된 철학-역사학(그리고 그 중간쯤? 혹은 둘 다가 아닌 애매한 곳에 넓게 자리잡은 문학) 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제법 경청해 온 편이다. 



2) 그 긴장을 요약한다면 둘 정도 인 것 같다.

역사학이 오래 견지해 온 '개별 자료의 수집이 특정 전통의, 타 전통과 구별되는 '특징'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낸다'는 입장. 그리고, ('한국학' 필드를 전제로 한) 철학/사회과학 분야에서 견지해 온, 해당 전통의 특성론을 일단 가설값으로 꾸준히 제시하되, 그 가설값을 뒷받침-수정하는 논거로서 개별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말이다.

(그 가치의 우열과 별도로, 사실 철학/사회과학에서 제기될 연역적 입장은, 언제고 스스로 세워둔 그 로직이 '한국적 특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늘 함유하고 있다. 한국학 같은 '지역성'을 장르의 기본 전제로 한 링에서는 그 '센터'자리를 자주 역사학 혹 문학-중에서 1차 텍스트 다루는 필드가 가져가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3) 역사학, 그 안에서도 자국사 다루는 필드에 몸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귀납적 케이스 수집에 '익숙한' 성향을 띨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케이스의 가치/그에 집중력을 어디까지 소모시켜야 하는가. 문제는 굉장히 오랜시간 스스로를 갈등케 만든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메시지'가 추출되지 않은 순수한 과거의 흔적 자체에는, 동료들 중에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당장 눈앞에 가시화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수백년 전의 어떤 부분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것 자체에는 사실 큰 감동이 없다. 그 까닭에 '사실관계' 그 자체에 감탄할 수 있고, 그 사실관계 파편을 목적없이 모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건대 사실은 지금까지도 거부감과 질투심이 섞인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지금쯤 오니 우회적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에도 그 의미를 잘 도출할 수 있게"된 편이지만, 실은 그 '의미 도출癖'마저도 그 사실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조차도 상당한 훈련을 거쳐 최근에야 틀을 갖추는 중인 테크닉이기도 하다)



4) 오히려 최근 들어서 그 갈등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역시 내가 밥먹고 살아야 하는 판이 그런 귀납의 판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탓도 컸고, 수년 전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국 핵심 없는 언어유희'라는 자조 속에서 크게 좌절한 탓도 컸고.. 어쨌든 그 푸닥거리 속에서 정말 간신히 '논리'와 '사실나열'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안정시킨 참이다.

- 충격적이게도. 박사 이후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답사를 사랑하는 호고주의자에, 개별 과거 사실을 나열하는 게 당초 익숙하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 진짜 역덕후를 안 만나봤구나 생각/ 내 나름의 실천이 빛을 발한 것인가? 생각이 겹침과 동시에. 사람은 상대적-가변적-다면적이기 마련이라는 내 인간관을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5) 대충 정리된 바는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는, '둘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그 차이를 굳이 드러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싸움에 비유한다면, 스스로의 DB를 잘 갖추는 것은 튼튼한 무기이며", "스스로의 방법론이 있는 것은 그 무기를 다루는 테크닉이다" 정도의 양립성일까. 정말 고도로 단련된 테크닉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맨손으로도 중무장한 사람을 이길 수 있고, 무기가 정말 좋으면 초심자 조차도 달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물론 역사학 필드의 오랜 전통은 그 "물리적 무기"를 모으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평가할 때에도 그 무기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를 1차로 보는 걸 "더 가치있는 일"로 여기겠지만(그 때문에, 본의아니게 타전공 종사자를 만나면 그 입장을 대변하게 되지만), 어쨌든 원시인에게 총과 총알을 따로 쥐어줘봤자 쇠몽둥이 쇠조각에 불과한것처럼, 테크닉의 연마도 필요한 것이다.



6) 사설이 무척 길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특정 문화적 전통을 밝히는 1차적 행위로서의 사실관계 나열/DB구축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까진 해본 적 없지만) '회의'와 '긍정'사이에서 꽤 오랜시간 갈등해왔다. 그 까닭에, 그 결론인 "생각보다는 훨씬 중요한 한 축이다"는 입장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자 한다. 해당 '백과'의 존재가 참으로 반갑고도 기쁜 이유이다.



2019. 1. 20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그런 것이냐'는 아내의 질타는 정도전에게 뼈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정도전의 질문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고 싶었던 정직한 질문이었다.


정도전 또한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깨끗하게 처신했단' 아버지 정운경에게 늘 속으로 묻고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기록한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 따르면 정운경은 청도교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 자신의 입신양명의 꿈에는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충동은 남이 눈치 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청백리 아버지를 역할 모델로 해서 살아왔고, 또한 신유학의 정체성 형성에 맞는 생활 양식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아는 금지된 충동이 표출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반동형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반대적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제인 반동형성에 따른다면, 정도전 자신의 무의식 가운데 입신양명해서 가문에 영광을 가져오리라는 내적 충동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혹시 아내가 눈치 챌까 두려워 정도전 스스로 억압해왔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출세와는 정반대의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어왔고 그 결과,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망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철영, 2004,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170~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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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위 '심성사' 연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정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일기. 시문 등에 등장하는)개인의 사적인 기록물을 토대로, 해당 개인의 정신세계나 나아가 해당 시대의 담론을 도출해내는 경향'이라고 한다면, 여말선초 한정으로는 00년대 초반 쯤부터 시작해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가, 최근들어서 부쩍 그 성과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나름의 '최신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엔 이색에 대해서라면 이익주 선생님의 "목은 이색의 삶과 생각"이, 이규보에 대해서라면 김용선 선생님의 "생활인 이규보"가, 정도전에 대해서라면, 본문의 내용이 "인간 정도전"으로 보완-정리되어 출간된 바 있다)


2) 당연하지만, 개인 기록에 대해 묘사하는 것인 만큼, 입론의 디테일이나 정밀성이 성글고, 다소 앞질러나간 해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소 파격적일만큼 내러티브가 실험적이고 섬세한 것은 상당히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다만, 이를 토대로 어떤 방법으로 '거대 서사'를 수정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미 몇 차례, "개인적 기록이, 결과적으로 기존의 연구담론을 재차 강화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 혹은 "해당 기록물 연구가, 문학연구와 어떤 차별점(혹은 비교우위)을 둘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지적사항이 제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켜봐야 할 문제.


201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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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성사' 연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게 된다. 그 이후로 몇년 새에 이에 대해 잘 쓰여진 사례라고 소개받은, 뚜웨이밍의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나,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를 읽어보기도 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성사가 기존의 거대서사에서 커버하지 못한 '미싱 링크'를 찾아낸다는 면에서 유의미할 것이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여전히 '큰 흐름'을 달리 서술하기에는, 여전히 '기존 견해의 재확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지금까지도 크게 극복되지 않았다. '디테일'을 첨가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연이 아니며 결국 서사를 정돈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선학들의 경구가 옳다고 한다면, 적어도 2019년인 아직까지도 '심성사' 연구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단계를 넘어서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어느쪽이든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볼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많은 '인문학적 신식 방법론'이 저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또한 지금 와선 조금은 아이러니다)


* 덧 : 고려든 조선이든, '심성사'에 관심이 있다는 또래-이하의 사람들을 '해양사' 다음으로 많이 봐서, "대관절 그 많은 사람들이 애정해 마지않는 해양사-심성사는 어디서 어디까지 정의-범주가 제각각일까"에 대해서 한번 마음을 먹고 계통을 정리해보고 싶은 심경마저 들곤 한다. 



2019. 1. 19

"(전략).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철학사상(philosophical ideas)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이러한 부인은 나름 정당하다. 역사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진행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심했는데, 이러한 의심 역시 나름 정당하다.

나는 이 양자의 중간에 처해 있다. 인간은 본성상 모두 신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유학의 철학은 유아론적 헛소리(solipsistic drivel)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나는 놓여있다.....(후략)"


피터 k 볼(김영민 역), 2010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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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당연하고 어쩌면 또 상식적인 말이지만, 과거의 텍스트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분야(국문/철학/정치학/사회학/역사학 등등..) 중에 유독 중국사상(정확히는 중/한 사상) 연구분야에서만 특별히 좀 미진해지는 경향이 있는 바를 정확히 짚어 준 대목이다.


2) 본문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 중, 전자의 경향대로 경전이나 문집 자체를 잠언화하여 해당 텍스트를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보편적 메시지로 정돈하는 경우 (철학과 등에서 숱하게 나오는, 예컨대 '누구누구 사상가의 무슨무슨 사상-대개 교육/수양 등의 비교적 현대적인 개념의 사상-에 대하여' 류의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그 '사상' 자체가 가지는 시대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서, 그 텍스트가 가진 적확한 의미를 뭉뜽그려 버리게 된다.

-이런 경향성이 유/불/선 중 어디가 가장 심한가는 도무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나마 '현실'에 가장 맞닿아 있고, 그 자체로 정치성을 가장 강하게 띤 유학이 그 경향을 그나마 덜 띠고있다고 개인적으로는 믿고 싶지만, 그 어마어마한 '현대유학자'들의 연구 분량은 그 판단에 자신을 잃게 만들어 준다..


3) 한편 후자의 경향대로 철학적 이데올로기들이 (선생의 표현을 빌어)'유아론적 헛소리'라고 전제하고, 해당 텍스트 저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위상과 그 지향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정돈하는 경우. (역사학에서 다수 이루어진 개혁사상(국가관, 안재선발론, 토지개혁론)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분명 텍스트의 '성격' 분석에는 큰 대강을 제시해줌에 틀림없지만, 그에 따라 각 텍스트들의 의미를 전자와는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계급이나 정치 지향 속에서도 생각에는 다양한 '꼴'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들 간의 의미 차이, 혹은 그러한 '생각의 다양한 꼴'이 발생하게 되는 여러 관념(개념)의 흐름 또한 엄연히 '인간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양자 간의 균형관계가 유독 중/한의 유불선에 한정하여 왕왕 무너지곤 하는 것은 혹자의 평 대로 '동양사상은 아직 자가붕괴하지 않았기 때문' 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 원인과는 별도로 앞서 인용된 '양자의 중간'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사상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양자 모두가 가지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후자의 경향이 더 학문의 본연에 충실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사상사'같은 모호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굳이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분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5) 다만 굳이 후자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사상이라는 분야를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의아니게 때로는 대단히 나쁜 의미로 전자의 지향성을 깊게 가진 연구들에게 상당량을 빚지게 됨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부디 사상 자체에 너무 깊게 빠지지는 말게" 하는 역사학의 선학들이 남긴 전통적인 일침은 그 상황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균형감'에 대한 뜻깊은 충고지 않을까.



읽은 지 좀 된 책이지만, 다시 생각해고 또 생각해도 탁월한 구절인 것 같아 한동안 되뇌이다 공유해 본다.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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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이 책은 이 글을 끼적이던 6년 전에도 "읽은지 좀 된 책"이었는데, 그로부터 또 몇년 뒤인 작년에 또 다시 꼼꼼히 읽어 볼때쯤 들어서는, 이 책에 대한 인상깊은 부분 선별이나 그에 대한 견해 전반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그러고보면 과연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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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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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초 관료층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면서 신흥사대부설에서 말하는 지배층의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정체성이나 안정성과 같은 역사 서술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분권적인 성격인 농후한 고려 전기와 중앙집권체제가 훨씬 강해진 조선 전기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경제 세력들의 등장을, 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내재적 발전론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전근대 중앙집권관료체제가 사회 분화 등의 여러 여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역사사회학자 Eigenstadt의 연구를 해석의 틀로 빌려, 고려 일대를 통해서 이루어진 지방세력의 약화와 강력한 중앙지배층의 성장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초기 중앙집권체제의 강화가 결국 중앙지배층의 권익을 반영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나마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Eisentadt는 Weber를 따라 문화 체계를 거의 독립적인 변수로 내세웠지만 나의 입장은 문화적 현상을 실질적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말선초의 유학 사상의 여러 갈래를 검토한 결과 개인의 수신과 지방 엘리트 중심의 향약과 같은 반자치적인 조직을 통해서 사회를 재건하려던 남송 이래의 정주성리학 만큼이나 중앙의 통치력을 이용해 사회를 개혁하려던 북송과 같은 고문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조선왕조의 건국을 연구하면서 15세기의 유학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을 알게 된 나는 조선의 유학을 비좁고 탄력성 없는 정주성리학의 정통론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정통론 때문에 조선왕조가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보는 미국 한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에 불만을 느꼈다. 철학적 사유의 전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권양촌이나 이퇴계와 이율곡, 송우암과 같은 몇 명의 사상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사상사(history of idea)의 접근방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중국과 일본의 복잡성을 논하는 UCLA의 동료 교수들의 연구에 힘입어 Annales 학파에서 말하는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즉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다시 검토해보면 통론에서 말하는 일변도의 정주성리학 정통론과는 달리 사회계층과 사회 정치적 위치,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하고 활력 있는 정신적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과거제의 구조나 운영보다 내용에 중점을 두고 중국의 명청 과거제도와 조선의 과거제도를 비교하면...명청 전반기에는 시를 짓는것을 부수적으로 여기전 정주의 입장을 취하지만... 조선의 문과에서는 거의 시종일관하게 중장에서 시나 부를 짓는 시험을 했다.
"


존 B 던컨, 2003, 서양 사학과 한국 전근대사 "한국사 연구방법의 새로운 모색" 경인문화사
(2002. 6 국제학술회의 발표원고의 재수록) 70~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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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던컨 선생의 대학원 강좌를 몇 학기 정도 수강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때 누차 강조하던 내용이었는데,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든 책에서 좀 더 깔끔히 정리된 것을 보니 새삼 반가운 기분이다.



2) 해당 인용문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듯이, 던컨 선생의 핵심논지는 단순히 "왕조교체의 연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국을 일으킨 기반으로서의 지배층 교체'만을 부정할 뿐, 중앙정치제도 및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고하고 있으며, 그 사회 변화를 추동한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북송 고문학'이 기반이 된) 성리학의 역할을 적어도 흔히 오해받는(혹은 이상한 대목에서 찬양받는) 바 보다는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아이젠슈타트도 검토를 좀 해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던컨이 비판받으면서 함께 비판을 받았던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일독의 가치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3) 이와 별도로 사소한 것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석사생 시절 던컨선생의 수업시간에


"저는 사상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한데, 지식인 개인의 실천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안 가고, 오히려 사회의 여러 변화가 제반 문화현상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지식인의 작업으로 수렴되는데 관심이 있다" 고 하자.


"그러면 평시군의 관심사는 '사상사(history of idea)'가 아니라,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와 '문화사(cultural history)'의 중간 쯤 있는 것이라고 하는게 맞겠네"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던컨 선생의 규정법에서는 문화사는 그렇다치고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에 대한 개념정의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이 글에서도 나오듯이,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 정의내리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던컨 선생의 그 답변은 '나의 관심 방법론'같은 것을 좀 자세히 설명할 때 요긴한 방법으로 활용 중이다.



2019. 1. 17

1) 정당문학 권중화가 서연(書筵)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다가 위징(魏徵)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하는 감정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다 같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능히 감정을 조절하여 정도에 알맞게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감정대로 행동하여 실수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니 폐하께서도 항상 능히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여 시종이 여일하다면 후손 만대까지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신우가 말하기를
“아름답다! 이 말이여! 그대는 위징을 본받아 나를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였다. 권중화는 대답하기를
“다만 전하께서 저의 말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어찌 감히 마음과 힘을 다 바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우 열전, 신우 정사 3년.)

 

2) 왕(우왕)이 정관정요의 내용을 알고 싶어 정몽주를 시켜 강의하게 하자, 윤소종이 나아가 말했다. “전하의 중흥에 마땅히 이제삼왕으로 법을 삼아야 하지, 당태종은 취하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대학연의를 강의하시고, 이로서 제왕의 정치를 선포하소서" 
왕이 그러하라 하였다. (고려사 윤소종 열전 중.)
王欲覽貞觀政要, 命鄭夢周講之, 紹宗進曰, “殿下中興, 當以二帝三王爲法, 唐太宗不足取也. 請講大學衍義, 以闡帝王之治.” 王然之.

 

3) 왕이 경연(經筵)에 나갔다. 강독관(講讀官) 성석연(成石珚)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은 바른 말을 듣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말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이 이것을 잘 알고 언제나 얼굴에 화기를 띠고 말을 받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왜 나를 위하여 말하여 주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옛날의 착한 임금들은 천하의 지혜를 자기의 지혜로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소 먹이는 아이들의 말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도 견문(見聞)을 넓히어서 참작하여 쓰기를 바랍니다 (고려사 세가 공양왕 경오 2년 )

 

4) 예조 의랑(禮曹議郞) 정혼(鄭渾)과 교서 소감(校書少監) 장지도(張志道)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서 올리게 하였다. (태조 4년 9월 4일(을미). )

 

5) 임금이 경연(經筵)에 앉아서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태조 7년 10월 5일(정미). 번역본 참조)

 

6) “내가 일찍이 상왕(上王)의 명을 받고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주(註)를 붙인 바 있다.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진서(晉書)》를 찬술(撰述)하였는데, 이를 평론하는 자가 이르기를, ‘서사(書史)를 찬술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힘쓸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제 내가 《정관정요》에 주(註)를 붙이는 것은 당나라 태종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러 사무가 번다하여 겨를이 없으니, 너희들이 그 주를 다 붙여서 올리도록 하라.” (세조 1권, 윤6월 19일(계해).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7) (양성지 상서문 중) 오늘부터 계속하여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통감(通鑑)》을 강(講)하는 것을 마치고, 다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자경편(自警編)》·《정관정요(貞觀政要)》·《송원절요(宋元節要)》·《대명군감(大明君鑑)》·《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국조보감(國朝寶鑑)》, 또 사서(四書) 가운데 《논어(論語)》, 오경(五經) 가운데 《상서(尙書)》를 강하여 항상 관람하시면 심히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예종 1년 6월 29일(신사) .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8) 광종이 처음 즉위하였는데 하늘의 꾸짖음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왕은 화복이 오기를 바랐는데 이에 정관정요로서 우선함은 어째서였을까. 왕의 마음은 당종의 다스림이 되어, 순·탕보다 넉넉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요의 설은 전책(典冊)을 넘어섰으나 개탄하고 원모하여 쫓아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 왕의 미혹함이 많이 보인다. 당태종[唐宗]은 이름날리길 좋아한 군주로서 정요에 실린 바가 비록 하나둘 정도 가히 칭할 만하나, 그것들은 거짓된 인의요 공리를 구제한 것이니 참람된 덕이 또한 많았다. 한고조와 비해서도 광종은 일찍이 또한 미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감히 순·탕에 비하겠는가. (최부 동국통감론 중. 직접 번역. 내용이해상 차이 있을 시 오역교정바람) 

光宗初卽位。天之譴告切至。王欲祈禳。而乃以貞觀政要爲先。何哉。王之心以爲唐宗之治。優於舜湯。政要之說。過於典冊。慨然遠慕而欲追之乎。多見其王之惑也。唐宗。好名之主。政要所載。雖有一二之可稱。假仁義。濟功利。慙德亦多。比漢高 光。尙且不及。況敢擬於舜湯乎
-2) 광종 원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므로 왕이 이런 재앙을 물리치는 방도를 물으니 사천관(司天官)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이 제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왕이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당나라 태종 정관 년간에 만든 정치 서적)》를 읽었다.(고려사 오행지 3, 토.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9.) 그 외 성종 3년에 2회, 10년에 1회 각각 정관정요를 강 했다는 사료가 있음. 내용 자체로는 정관정요 인식의 추출은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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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a)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에 따르면, 2)에 근거하여 고려시대의 정치사상이 "정관정요"로 수렴되고, 여말선초에 들어 "대학연의"로 단절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앞서 제시한 자료상으로 보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당 태종관 관련해서 서술한다면 더 복잡해질 진다. 그에 관해서는 부정적 기록과 긍정적 기록이 마구 겹치기 때문이다.)

 

(b) 본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 2)의 우왕시기 윤소종의 언급, 그리고 8)의 동국통감론에 나온 성종시기 최부의 언급이 실질적으로 주목되는 정관정요에 대한 직접적 부정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첫째 앞서 괄호로 부연한 바, 몇차례 드러나는 당 태종 부정론 둘째 본문에서 소개한 자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대학연의에 관련한 기록들 그 양자를 토대로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문제를 설명되고 있다. 
다만 이미 2) 8)을 제외한 사료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별 문제 없이 정관정요가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현상이 여전히 이 문제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점을 가로막기도 한다. 

(c) 그리고 2)를 보면 태조대 정관정요가 경연되고 있고, 이 까닭에 윤소종 류의 건국세력 사대부의 입장이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8)의 경우 당 태종, 더 나아가 광종 자체에 대한 부정론이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점을 8-2)에 대한 고려사 찬술자와는 사뭇 다른 인식을 통해 일부 엿볼 수 있다..) 등은 위 문제의 추가적인 혼란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정리 수준에서 잠시 묵혀 둔 채 나중에 천착할 기회를 도모하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 변화라는 것이 그리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d) 그리고 본문 내용과는 상관없이 중요한 거 하나는, 막상 정관정요 관련 기록 자체가 근본적으로 엄청 적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려사 전체에서 다 쳐도 채 20개가 안 되며, 그 중 원간섭기 이전 자료는 광종, 예종, 덕종대 드러난 3개 사료가 고작이다. 고려사의 기록 부재와 더불어 오히려 교체기에 들어서서야 정관정요가 언급되는 문제 또한 감안되어야 한다.

 

(e) 물론 그렇다고 대학연의-정관정요의 세대교체가 '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설령 정관정요가 그 이후까지 의미있었고, 대학연의가 이를 대체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들, 대학연의는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관철되었든) 고려 말부터 16세기까지 중요도가 '부상'한 서적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대의 것을 완전히 대체해야만 의미있는 변화인 것은 아니다. 보편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얕고 사소한 첨가만으로도 경우에따라 유의미한 '변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변화를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우선적으로 감안되어야 할 리얼리티는 그 '사소함'일지도 모른다.

 

 

 

2013. 11. 15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현암사 판)
"마음"(웅진출판사 판)
"그 후"(민음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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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의 감상을 쓰기에 값할만큼 소설에 대해서 자신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받은 느낌과 감상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 본다.

- 해당 세 소설에는 스토리에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유민적 성격'이 중심적으로 부각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고등 유민적 삶이란 무얼까. 고등교육으로 무장되어 스스로의 탐미적 취향을 갈고닦으나, 그 배움의 당위적 목적이나 사회적 실천같은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은둔시키는 존재 정도로 설명하면 거칠게나마 정리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은 여러 의미에서 '죽림칠현' 정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몇 가지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해 이렇게저렇게 상상해봤다.


1)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삶이란 '이상'을 잃은 속류적 은둔 유희일 뿐인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소명' 같은 당위명제로부터 담을 쌓은듯한 그들이지만, 속류적 이기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고등유민의 에고이스트적 삶이란 소명어린 삶 그 이상의 높은 기준을 지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공민-시민적 소명 등과는 무관한, 일종의 '미감적 에고이스트(aesthetic egoist)'로서의 섬세하고 예민한 결벽일지도 모른다.


2)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에고이즘이 지향하는 기준이란 확실한 이상주의일까?
사실 그것도 조금은 불분명하다. 세 소설의 (준)주인공들이 골몰하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스나가는 지오코를 '사랑'했을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사랑'했을까? '선생님-K'는 '사모님'을 '사랑'했을까? 그들이 꿈꾼 "마음의 자연"이 정녕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갈망이었을지는 불분명하다. 외려 분명한 것은 다이스케의 "타들어가는 빨강"으로 가득할 삶이란, K의 죽음을 맛본 '선생님'의, 그 전까지 그리도 갈망하던 '사모님'에 대한 냉담함 만큼이나 위태롭다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의미에서 고등유민들의 에고이즘은 목표가 있는 이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목적지없는 낭만이며, 더 나간다면 '사회적-제도적-소명적'(어쩌면 이 셋을 합쳐낸 의미에서의 '세간 도덕적') 삶 전반에 대한 목적지없는 반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그 '실체가 불분명한' 에고이즘이 '고등유민'인 K와 선생님을 어떻게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일까? 
누구보다도 자신에 천착한 그들의 에고는 역설적이게도 결국 자신의 삶 마저 갉아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목표가 불분명하지만 한없이 높기에, 그들의 삶은 때로 두문불출은 할 수 있지만 안빈낙도에 도달할 만큼 낙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타율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회로부터의 유리를 낳는 '고등유민'의 에고는, 삶이 이를 원만히 버텨내지 못한 채 고등유민 자신들을 (약간은 뒤르켐 식의 "egoistic suicide"가 연상되는) 죽음으로 이끈다. K의 고독감이든지, 선생님의 죄책감이든지, 어느쪽이든 에고를 감당하지 못한 삶의 후퇴가 죽음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K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의미에서 선생님의 죽음은 K와 다르지 않다.) 

- 일전 한 대화에서 "폭력남편을 참게 되는 고등 여성 지식인의 심성"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게 되는 타협적 심성"같은게 그 폭력남편에 의한 희생을 부른 것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의 (세상 도덕과 기준으로부터 벽을 쌓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에고이즘'이야말로 그들 자신을 도그마로 만들어진 고통의 세계에 몰아넣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4) 그렇다면 그들의 삶에 구원이란 없는 것일까?
그 마지막 단계에서 "고등유민"이 도달할 만한 마지막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와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마음으로의 소통'일지도 모른다. 혈연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인간관계를 넘어, 하지만 에고이즘적 '반제도-반도덕'마저도 (상당부문 일치하지만) 넘어서 만들어지는 관계맺음이 결국 "고등유민"이 도달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의 에고이즘마저도 오롯이 감당해낼 수 없는 흔들리는 존재다. 그 까닭에 그 "마음의 소통"이란, 그 가능성마저도 사실은 2)의 이상-사랑들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불륜으로 실행된)'마음의 자연'에 준할만큼 탐미적 매혹의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결국 어떤식으로든 구원을 위해 다시금 걸어봄직 한 불분명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2019. 1. 16

중종실록 중종 39년 1월 26일(을축)


사간(司諫) 허백기(許伯琦)가 아뢰기를,
“교화의 도구로서 이를테면 《삼강(三綱)》·《이륜(二倫)》 등의 서적은 다 급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학교(學校)는 교화의 근본인데 지금은 또한 쇠퇴하였거니와, 태학(太學)은 교화를 먼저 이끄는 곳이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또한 사람의 큰 윤상(倫常)인데, 접때 관중(館中)에서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한 자가 있었습니다. 태학도 이러하다면 외방(外方)은 논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중략)
지사(知事)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유생이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이고 서로 시비하여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데, 향당(鄕黨)이라면 나이에 따라 벌여 앉는 것이 옳겠으나 국학(國學)은 작은 조정이니, 승보(升補)·입학(入學)을 선후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더구나 학궁(學宮)의 제도는 조정에서 정하였으므로 유생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닌데, 이제 조정의 명이 없는데도 스스로 하니, 이것은 위를 업신여기는 것인 듯합니다
(중략)
허백기는 아뢰기를,“신의 생각으로는 예조에 신보하지 않았더라도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은 유자의 일이므로 무방할 듯합니다.”하고, 성세창은 아뢰기를,“학궁의 일은 조정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략)
하니, 상이 이르기를,“나이에 따라 앉으면 나이 많은 유학이 도리어 생원 위에 있게 되어 생원과 유학의 분별이 없게 될 것이니, 일에 있어서는 어그러지는 듯하다.”----
중종시기 소학의 도입과 더불어 '장유유서'가 새로이 더 중시됨에 따라, 그 안의 절차(여기서는 학교에서 자리 앉는 순서)문제가 과연 입학 년수(요즘말로는 학번) 순으로 하는지, 나이 순으로 하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썩 믿음직한 구분법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전통적 분류법에 따라 '사림'이라고 불려질법한 류들은 나이순, '훈구'라고 평가될만한 부류들은 향당에서는 양보하겠지만 적어도 중앙의 국학에서만큼은 학번순을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러한 '학번VS나이' 논쟁은 선조 6년에 다시 발발했을때까지는 '학번'이 이기는 추세였지만, 이후 숙종 23년에 들어서부터는 결국 '나이순'이 승리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대학가의 '학번VS나이'서열문제의 성패 여부는 '재수생의 비율'에 달린 문제로 많이 귀결이 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재수생이 많지 않은 과의 경우 학번순, 재수생 수가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경우 나이순). 이러한 조선사의 경우 '나이순 서열'자체를 중요시하는 소학강조의 사상사적 흐름과 더불어 성균관 자체의 분위기가 유생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한번 생각할 만한 주제이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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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사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로 (연구 자체에서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김성우,2008,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의 제 5장 부분을 참고하였다. 

2) 김성우 선생님도 지적하신 바이긴 한데, 이미 (소위) 학번순/나이순의 대결 구도와 상관없이 이미 중종 말엽애는 소위 '학번순 지지층'이라고 해도 중앙의 성균관을 제외한 향당 향교 등의 사안에서는 나이순 체제를 (억지든 자의든)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본 사료의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질서가 이미 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대세라면 대세였다는 것..

 

 

3) 첫 번째 부연과 연결해서.. 해당 사료의 사평도 재미있다. 결국 '소학'과 '장유유서'를 동일시하여 생각하고 있으며, 장유유서를 우선하지 않는 태도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사관은 평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소학》을 강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별히 권강할 것 없다 하고 장유(長幼)에 차서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앉는 차례를 앞세울 것 없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을 인도하여 도리에 맞게 하는 뜻에 맞겠는가? 

4) 다만 이 논의랑은 별도로, 조직의 구속력 강약과 사회 보편 규범의 강약이 반비례관계를 이룬다는 내용은 상당히 음미할 만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보편 규범'적 기준(소학)이 '조직적 구속'(대학연의 혹은 정관정요)을 고의적으로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슬로건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강했는데, 이 현상 자체는 조직의 구속력 자체의 강약관계에 따라 보편규범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 것의 붕괴'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연구가 이미 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오래된 통설'과는 다르게 숙고가 필요한 설명법인 것이다.



5) 정말로 여담.이 테마에 대해 미묘하게 형용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어쩌다보니 대학 학부를 두 군데를 다녔는데, 한 군데는 

그래뵈도 꽤 엄격한 학번순이 유지되고 있었고, 다른 한 군데는 당연한 듯 나이순이 체계화 되어 있어  그 갭에 사실은 꽤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당연히 서열 구분이 없는게 가장 낫다는 건 자명하지만)양측 학교는 각각 서로 다른 이유의 학내 갈등이 있기도 했다. 학번순 학교는 '자기 동기간에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부르게 (동아리 등 그룹의 룰로서) 허용해 달라(즉 '장유의 호칭 쟁탈 운동'이 제기)'가 꾸준한 갈등요인이었다.

그런데 후자의 학교에서는 '동기든 선후배든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하지 말자'(즉 주로 장유의 호칭 멸살 운동이 제기)가 제기되었다. 

이를 지금와서 돌이켜 본다면, 학번제 학교가 동아리와 학과간의 이중적 조직화(?)를 통해서 학내 사회가 꽉 짜여있던 것이 그런 '학번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비결이겠고, 상대적으로 후자의 학교는 규모도 큰 대신 학과의 조직력은 상대적으로 약했고(거기다가 자유주의적 풍토도 훨씬 강했고), 그 까닭에 '학번제' 자체의 운영부터가 이미 느슨했던 것은 아닐까.




201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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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유불문제/불교 비판문제에서 그 존재가 거론되었지만 동시에 더 섬세하게 천착될 필요가 있는 테마가 바로 '포용적 우월론'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종교적 정체성과 학문적 정체성의 공존 가능성'을 설명했는데 그것과 별도로 성리학적 정체성을 긍정하면서도 불교 비판의 부분에 한정해서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이러한 요소를 '모모 인물이 상대적으로 성리학에 불철저한 결과'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는 단순히 철저/불철저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당초에 '정체성의 투철함'을 점수로 매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분야에 따라 저술점수, 척불성, 등등으로 항목화시켜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후에 의미있는글을 많이 남겼지만 그 논문이 간학문적 성과/대중교양서가 대부분인 역사학자와, 저술 수는 적지만 순수 아카데믹한 저술밖엔 남기지 않은 역사학자 중에 누가 더 '철저한 역사학자'냐는 것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래 소개된 사례는 그 '포용적 우월론'에 대해 실마리를 주는 율곡 이이의 저술이다.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참조하되 일부 철학적 논의에서 논리적으로 꼬이는 부분 몇몇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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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풍악산에 구경 갔을 때에,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몇 리쯤 가니 작은 암자 하나가 나왔는데, 늙은 중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 일어나지도 않고 또한 말 한마디 없었다.


암자 안을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을 짓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되어 보였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중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무얼 먹고 굶주림을 면하오?” 하니, 중이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내 양식이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솜씨를 시험하려고 묻기를, “공자(孔子)와 석가(釋迦)는 누가 성인(聖人)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선비는 늙은 중을 속이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오랑캐의 교(敎)이니 중국에서는 시행할 수 없소이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순(舜)은 동이(東夷)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사람이니, 이들도 오랑캐란 말이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불가(佛家)의 묘(妙)한 곳이 우리 유가(儒家)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하필이면 유가를 버리고 불가를 찾아야겠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 같은게 있소.” 하자, 


내가 말하기를, “맹자가 성선(性善)을 얘기할 때에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소. 다만 우리 유가에서 본 것이 실리(實理)를 얻었을 뿐이오.” 하니,


중은 긍정하지 않고 한참 있다 말하기를,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오?” 하자, 


내가 말하기를, “이것도 앞에서 말한 경우라오.” 하니, 

중이 웃었다.


내가 이내 말하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색이오, 공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말은 진여(眞如)의 본체(本體)이니, 어찌 이러한 시(詩)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겠소.” 하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이오, 어찌 이를 본체라 하겠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유가의 묘(妙)한 곳은 말로써 전할 수 없고, 부처의 도(道)는 문자(文字)밖에 있지 않은 것이 되오.” 하니, 


중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당신은 시속 선비가 아니오. 나를 위하여 시(詩)를 지어서,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글귀의 뜻을 해석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니, 중이 보고 난 뒤에 소매 속에 집어 넣고는 벽을 향하여 돌아앉았다. 나도 그 골짜기에서 나왔는데, 얼떨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사흘 만에 다시 가 보니 작은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중은 이미 떠나 버렸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진데 / 魚躍鳶飛上下同

저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로세 / 這般非色亦非空

심상히 한 번 웃고 신세를 돌아보니 / 等閒一笑看身世

지는 해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서 있네 / 獨立斜陽萬木中


율곡전서 1권. 풍악산(楓嶽山)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贈小庵老僧)에게 주다 

(저술시기 1555년 즈음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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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율곡이 여기서 요순과 부처를 동일시한 점, 동시에 非色非空의 불교적 문자를 유교적 개념과 연결하여 이해한 점 등은 분명 '척불적 성향'이라고 정의내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점일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율곡이 스스로가 유학자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하산 이후의 시기로 추측되는 본 저술에서 유학자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가 어느 부분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불교의 저술을 성리학적으로 흡수해 내려고 하는 시도를 율곡이 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대한 율곡의 명백한 자부심을 방증해주는 것이라는 과감한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그의 성향이 이전의 출가 전력과 맞물려 공박받게 된 점과, 그의 이후에 율곡 문하에서 율곡을 평가할 때 불교적 포용성에 대해서 언급을 피하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성리학 발전의 심화에 따른 사상적 척불의 당위성 강화' 측면보다는 성리학의 학문적 전승 형태의 (양적 심화가 아닌)질적 변화와, 그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한 정치적, 학문적 변화요인들을 검토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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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1)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말은 시경(대아 한록)과 중용 12장에서 활용된 이래 理와 道의 보편성을 설명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구절이다. 사실상 성리학의 정수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구절.(이를 요약한 연비어약鳶飛魚躍론은 퇴계詩의 핵심 키워드로 평가받기도 한다.)

즉 이 구절로 승려를 완전히 설복시켰다는 저 내용은 사실 불교에 대한 포용성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표출시킨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한 이 저술의 의미를 따질 때에는 이 글의 집필시기가 율곡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1559년 이전의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도 있다. 설령 율곡이 그 전에 하산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본인이 아직 관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술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은 돌려 생각해보면 관직에 있던 인물들 또한 '불가능한 저술'로서 쓰지 못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더 개인적인 저술의 영역에서 더 따져볼 문제겠다.


3) 이러한 '개인적 저술'의 영역을 '사적 교유'. 혹은 '개인적 신앙'의 영역에서 한정시키려고 하는 것 또한 기존 연구에서 흔히 이루어져왔던 접근법이다.

다만 이는 설득력있는 주장임에도, 극복할 필요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순수한 인적 교유의 측면이 아니라 율곡의 경우처럼 지적 사유가 분리되지 않은 경우도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적 파편들이 실제로 사유 저변에서 복류하여 이후로 전승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척불론 관련해서 빠져선 안 될 또 다른 함정은, 불교를 '성리학에 대치한 생존의 투쟁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불교는 숱하게 공격당한 것도 맞지만, 그 자체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말해지기에는 또 나름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도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즉 중요한 것은 성리학 사회에서 불교가 배척받았다는 것을 기본으로 두되, 그 와중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의 양상, 과정을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


5) 이건 부연이라기보다는 여담인데, 저 승려는 불교 자체의 견지에거 본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강단을 더 부려도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감이 있기도 하다.

사실 율곡의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운운은 일견 언어철학적인 견지에서 '형식으로서의 언어가 가진 의미'를 역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이를 랑그-시니피앙 운운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선불교적 진리관은 이런 언어적 형식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월론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철스님이 했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본다' 화두 식으로 밀어붙여도 안 될 것도 없었다....저 둘이 좀 더 많은 얘기를 더 했으면 좋았을텐데 저 상황 자체는 아쉽다면 아쉬운 일인 것이다.


20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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