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하단 링크 참조)

 

이 책의 성근 구성이나, 언뜻 보면 교과적인 '당연한' 이야기가 그 자체로 불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서평의 기준은 '내가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기준을 맞춰 보려는 편인데, 솔직히 나더러 쓰래면 이 정도 수준의 구성을 갖추기도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 앞서, 책의 내용을 매개로 이 분야 연구의 관행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또한 '지는 얼마나 잘하냐' 싶은 부분이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노력해서라도 안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저자께는 이자리를 빌어서나마 감사의 마음을 다시금 전해본다.

 

2025.2.16

 

https://www.webzineriks.or.kr/post/%EC%A1%B0%EC%84%A0%EC%A0%84%EA%B8%B0-%EB%AC%B8%EB%AA%85%EC%9D%98%EC%8B%9D-%EC%9D%84-%EB%8B%A4%EB%A3%AC%EB%8B%A4%EB%8A%94-%EB%82%9C%EC%A0%9C-%EC%A0%95%EC%B6%9C%ED%97%8C-2024-%E3%80%8E%EC%A1%B0%EC%84%A0%EC%A0%84%EA%B8%B0-%EB%AC%B8%EB%AA%85%EC%A0%84%ED%99%98%EA%B3%BC-%EB%8F%99%EA%B5%AD%EB%AC%B8%EB%AA%85%EC%9D%98-%EC%A7%80%ED%8F%89%E3%80%8F-%EC%84%9C%ED%8F%89-%EC%9D%B4%EC%83%81%EB%AF%BC

 

조선전기 ‘문명의식’을 다룬다는 난제- 정출헌, 『조선전기 문명전환과 동국문명의 지평』 서

들어가며     조선 왕조 성립의 역사적 의미라는 문제는 한국 전근대사를 다루는 한국학 분야의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시대에 대한 긍정/부정적 기대감의 과열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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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곳에 연구실적을 제출할 때, "대표 업적"을 체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 무난하게 박사논문이나, 그와 가장 유관한 논문을 체크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커리어를 대표하는 글이라면 그 글이고, 내 많은 작업들이 이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솔직히' 진정성있게 내가 '아끼는' 논문을 꼽으라면, 두 편의 논문을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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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2023). 조선 초기 지방지배와 향촌교화에 대한 연구와 쟁점. 역사와 실학, 80, 197-256.
ⓑ이상민. (2024). Unanticipated Achievements: The Diffusion of Finger Severing and Relevant Discourse at the Joseon Court in the 15th–16th Centuries. Korea Journal, 64(3), 15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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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이 대단한 마스터피스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 논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러모로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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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문은, 연구사 비평 논문인데(나름대로는 '사학사'논문이라고 의미부여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식민지시기부터 지금까지 15세기 지방사회사는 국가 지배로 이해하거나// 국가+사회 길항으로 이해하거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당사자가 이를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 중 한가지 전제를 따랐다).그러다 70~90년대 말에는, 국가+사회 길항으로 이해하는 전통에 따라 국가의 한계, 국가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연구들이 조선 초 사회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90년대 말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연구들은 70-90년대 말 까지의 연구들에 대한 비판이 유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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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이후의 연구들은, 70~90년대 사회사 연구들이  중앙-지방 세력간 갈등에 주목하였던 것을 비판하고, 15세기 이루어진 지방지배의 제도 내적인 논리에 집중한다. 나아가 15세기 조선이 그 체제의 공적 역량이나 지방 세력과의 공조 등을 통해 안정적이고 역동적인 지방지배질서를 창출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의 비판이 (스스로는 표방하지 않았지만) 종래의 국가의 집권력을 강조한 전통을 잇고 있으며, 종래 연구의 실증적 미비함을 보완하였다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국가 및 중앙 조정의 논의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측면들이 있는 만큼 종래 비판적으로 보았던 사회사 연구의 문제 의식 또한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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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의 내가 그 때까지 고민했던 흔적,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내 필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상당히 날것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내 마음대로 분류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내가 솔직히 이해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최대한 표현해보고자 했다. 박사논문 단행본 작업에 합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의 단행본 작업의 '도론' 정도로 재정리하고 싶은 작업이기도. 나중에 이 분야로 박사를 받은, 그전까지 모르던 사이였던 L선생님이, 이 논문에 재미있는 지점이 있었다고 콕 집어 말씀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어느때보다 기쁜 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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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문은 작년에 쓴 단지(斷指)에 대한 영어 논문이다. 나름의 '버킷 리스트' 같은 느낌으로 영어로 내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영어로 내길 잘했다/괜히 영어로 냈나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어로 소재적으로든, 문제의식상으로든 좀 더 확장해보고 싶은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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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내용이다.
15세기 지방통치/사회사는 거의 언제나 관권/국가의 압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특히 '유교화'문제에 있어서 16세기 이전까지는(최근 연구에서는 16세기 이후조차도) 중앙 유학자 관료의 기획에 따라 지방이 '감화' 되었다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5세기 사례를 살펴보면, '교화/감화/동화'는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단지(斷指)가 서북지방의 토착 의료 풍습임을 밝혔다. 조선 초 조정에서는 이러한 단지를 '효행의 모범 사례'로 (약간의 찝찝함을 감수하고) 홍보하였고 이는 외견상 '성공적으로' 전국화되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달랐다. 같은시기 단지를 주로 행했던 민간의 비 엘리트층에서는 정신병을 치료하는 처방의 출처로 단지 케이스를 소비하였다.
결국 전국적으로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은 전국의 효자가 한 일이 아니냐면 그건 맞다. 하지만 '선대의 효행사례를 통해 무지한 백성들의 효심을 감발(感發)하게 한다'는 중앙관료들의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의도치 않은 성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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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이디어 추수적인 글이다 보니, 한국어로 내면 불필요한 '눈치'를 초고 단계부터 많이 보다가, 글이 밋밋해질까 싶어 영어로 내었었는데, 막상 대표업적으로 제출하지 못하게 되니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것도 다 이 글의 운명이려니..생각하고 있다.

 

20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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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다시 읽기

정몽주의 탄생과 성장과정부터 최후의 순간까지를 재조명하며 그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생애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벗긴 뒤에, 기록을 따라 정몽주가 탁월한 성리학자, 군사 행정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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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메모에 보니 8월 28일로 쓰여져 있다. 과연 그맘때쯤 읽은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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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앞서 두 가지만.

1. 저자는 학계에 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여말선초 사상사 분야의 손 꼽히는 전문가 중 한 분이다.

2. 정몽주 관련 전문서/평전은, '정몽주의 지명도 대비해서는' 놀랄만큼 별로 없음. 아마 이 책 이전에 잘해야 한두권정도 더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책의 기획이랄까 만듦새에 대해서만 말을 좀 얹어본다.

 

이 책을 어찌 보았는지 물어본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정몽주에 대해 '연구자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내용들을 잘 정리한 책."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여느 대중교양서가 다 그렇지 않느냐 할수도 있지만, 이 책은 특히 더 그렇다)

 

일단 하나만 확실히 해 두자면, 정몽주가 충절의 상징이 아닌, 다시말해 학술 외의 정치/외교/군사 등의 실무에도 능력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나무위키 정몽주 문서만 봐도 이미 어느정도는 알려진 되어 있는 사실이다.(정확성과 별도로, 이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란 소리다.) 따라서 대중 차원으로 보아도 '새로운 발견'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히 정몽주에 대해 자료 중심으로 차분히 정리한 체계화의 의미는 크다. 당연히 그 나무위키 수준의 정리가 정교한 정리냐면 그것도 그렇지 않은건 말할 것도 없다. 정몽주 관련된 '책'이 일단 그 지명도에 비해 너무 적은 것도 사실인지라(자료가 적어서..) 고급 교양서라고 보기엔 손색이 없는 책인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초반 거의 두 챕터를 차지하고 있다. 확실히 정몽주는,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라는 레이어를 먼저 제시하고, 그보다 심도있는 영역을 음미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아쉬운 부분.

그러나 역시나, 해당 분야 연구자(혹은 정몽주-고려 말에 대한 기초 이상의 교양을 쌓은 일반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심도있는 설명이 역시 조금은 더 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은 있다(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목록만 있을 뿐 각주가 아예 없음). 차라리 각주를 안 붙일만큼 '자유로운' 지면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내용을 과감하게 써 주셔도 좋지 않았을까.. 반대로 좀 더 '포멀하게' 작업이 될 것이라면 조금 더 종래 연구들과의 비평적 긴장을 살려도 좋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책. 

좌우간 다시 서두의 말을 반복하면 "워낙 절대 수가 적은 정몽주 평전"의 축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정몽주 관련 뭘 읽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가 좀 편해졌달지.. (종래 정몽주만 궁금하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줄것도 없었고, 그닥 읽을걸 주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 의미에서 확실히 가뭄의 단비같은 책이다.)

 

2024. 8. 28

(성리학 포함) 외국문화 초기 수용이라는게, 좀 많이 윗세대에서는 '진리의 빛이 퍼져나가는' 것 처럼 묘사하곤 했고,

그 다음 세대쯤 가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

그 다다음 세대쯤 가니, '주체적 전유' 같은게 유행하다가, 

요즘와서는... 세대랑 무관하게 거의 모든 이야기가 뒤엉켜나오는 편이다.

 

가장 극단적 두 주장을 꼽아본다면,두 가지 쯤이 아닐까

ⓐ 그냥 쿨하게, 어설프게 베낀걸 인정하자는 주장부터

ⓑ 본연적으로 '모방'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은 한다. ⓑ에서 말하는 '모방/베끼기'라는게 존재하기에 앞서서, 대상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철학적인 문제까지 갈 것 없이, 예시를 하나 들자면, '14세기 원나라 유학'을 당시 고려시대 유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닌'일이 아닐까. 

 

사실 '핵심적 일부'든, '전체적인 상'이든, 뭐든지 우리가 경험한 시선이, 그리고 목격한 경험과 문헌들이 14세기 고려의 유학자들과 같을 수는 없다.그냥 생각나는 유의점 몇몇만 난삽하게 짚어본다.

 

ⓐ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가 그들이 '실제로 잠시라도 본 자료'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생각보다 고려인들이 자료를 '많이' 보았을 가능성.

ⓑ 고려인들이 '남겨둔 자료'중 우리에가 남은 것이 극히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 그들이 '사실은 더 핵심적인 것'을 남겨두었을 가능성.

ⓒ 그들이 자료를 검토한 '시선'이 우리가 아는것과 다를 수 있다. - 우리 생각보다, 그들이 자료를 긍정적/부정적으로 편향되게 보았을 가능성.

 

... 

 

지난 수업 첫 시간에 '시대구분'에 대한 개설강의를 했다.
여러번 강의하면서, 거의 모든 수업에서 첫 시간에는 꼭 하는 이야기인데, 매번 이걸 어떻게하면 더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게 된다. 이번년도 버전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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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기압 환경의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다고 보통 말합니다마는, 찬찬히 따져보면 그 설명이란게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과학사의 디테일을 더하면 복잡해지지만) 사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게 아니라, 물이 끓는 온도를 어느순간부터 '100도'라고 말하기로 약속한 것이지요. 그걸 '100'이라는 숫자로 말해야 한다는 것 부터, 모든게 '물이 끓는 일' 그 자체하고는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약속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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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구분이니 왕조교체니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게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 혹은 근대가 되어야/혹은 됨으로써 무언가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그 와중에 그 틀에 안 맞는 케이스는 '예외'로 치부하거나 하면서요. 하지만 이 또한 순서가 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수많은 변화들이 있을 때, 그 변화 중 도드라지는 시점을 임의로 설정해서, 그 기준과 시점을 단순하게 설명하기 위해 붙여둔 이름이 '시대' 같은 '역사학적 개념'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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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역사학을 공부할 때... 큰 틀에서 시대든, 제도든, 사상이든, (가령 고려는 귀족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저는 그것도 반만 믿지만-, 조선은 유교적 사회.. 의정부 서사제는 신권 위주의 정치운영론.. 등등) 어떤 완성된 틀을 먼저 상상한 뒤에, 혹여 거기 안 맞는 사례가 있으면 그걸 예외로 치부하는.. 그런 순서로 생각해야 하는게 아니라.. 
먼저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삶의 흐름이 있고, 그걸 시간을 중심으로 대략이나마 간추려서 사리에 맞게 정리해둔 것이 여러분들이 흔히 교과서에서 만나게 되는... XX시대/XX제도/XX사상/이들의 특징인 XX성... 등등의 개념들임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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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같아보이지만, 절대 그 둘은 헷갈려선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역사학의 개념화된 지식이 죽은 지식이고 쓸모가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더욱 곤란합니다.. 저는 오히려 같은 전공을 하는 또래 동료들 중에서는, 비교적 앞서 말한 XX시대.. 등등의 추상적 개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여러분들도 그 소중함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입니다.(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큰 역할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중요하다 여기는 만큼, 여러분들께 그 위상을 혼동하지 않기를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관련 자료 정리하다가 심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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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자 논쟁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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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 창제자'가 누구냐 하는 사안에 대해 거진 80년 치 연구사가 축적되어 있는데, 대충 3가지 갈래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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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이를 직접 창제했다(친제설)
ⓑ집현전 학사, 신미, 정의공주 등에게 세종이 명해 다른 사람에 창제되었다(비친제설)
ⓒ상기한 인물들 중 일부가 세종을 도왔다(협찬창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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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실록 등에 나온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 세종이 '친제'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는 그 외 여러 소수의 외부 기록들, 혹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여러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사실 제일 문제되는 게 ⓒ의 주장이다. 그나마 믿거나 말거나 명확한 입장과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하는 ⓐ ⓑ와는 달리, ⓒ는 정말 '상식적으로 국왕이 혼자 하는 일이라는게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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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 근간이 되는 '상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좀 거칠게 말해 전근대 국왕의 하루에서 '혼자서' 있는 시간이 있기나 하겠는가. 붓글씨 한자를 써도 옆에서 먹 갈고 종이 가져다주는 것도 '협조'고, (그 목적이 문자 창제라는 것을 모른 채) 책 한권을 구해다주거나, 심지어 요 앞까지 가져다주는 것도, 모든걸 다 '협조'라고 한다면, 당연히 한글은 '협찬'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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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식으로 내관/궁녀/그 외의 보조인력들의 모든 도움까지도 '협조'의 영역으로 넣어야 한다면, '국왕이 친히 하다'는 개념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혹시 '국왕의 주도하에' 한 일이 친히 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지간한 대소사는 국왕의 재가 하에 이루어지니, 국왕의 정치 중에 '친히' 하지 않은 일은 없다. 반대로 앞서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일만이 '친히 한 일'이라면, 국왕 뿐이겠는가. 그냥 문명사회의 인류는 무언가를 '친히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까닭에, (구체적인 협찬 주체를 밝히지 않은) 협찬창제설은, '말이 되는 것은 맞지만, 논의 대상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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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논의가 이렇게 소모적으로 흘러갈바엔 차라리 관련 논의를 아래와 같이 '같은시기 학자관료집단과의 합의'를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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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글 창제는,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사업에 공감하기는 커녕 그 추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있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혹은
② 한글 창제는, 같은시기 집현전 학사나 조정대신들과의 어느정도 공감대 내지 합의를 형성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즉 최만리 등은 극소수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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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쟁점은 '거기에 세종 이외의 사람이 손을 얼마나 조금이라도 거들었냐'에 있는게 아니라, 그 창제 사업이 반포교서를 내리기 전부터 충분한 정보가 공유되어어느정도의 공감대를 얻고 있었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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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최근의 '외교적 배경설'(용어는 내가 지었다)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외교적 배경설이란 '한글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종래 ⓐ 협찬창제설과 마찬가지의) 상식적 반론 하에, 당시의 불안정한 조명관계, 한글 창제 이전부터 세종이 보여온 중국 운서에 대한 관심 등등이 한글 창제의 배경이 된다는 최근의 설명이다(짐작하겠지만 '한글 발음기호설/파스파 문자 기원설'과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글이 한자 발음기호로 쓰기위해 만들어졌느냐 문제, 내지 한글 자형이 파스파 문자에서 연원하는가 문제와 별도로, 한글 창제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은 상식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 창제에 요구되는 언어적 지식을 세종 혼자서, 하루아침에 모두 독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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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을 감안했을 때, 과연 '한글 창제를 하겠다는 직접적인 사업'은 조정대신의 합의 하에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언어나 외교에 대한 거시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 자체는 세종의 독단or파행의 산물이었을까.. 그 문제로 접근하는게 사안을 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
.
3.
이렇게 보면, 한글의 명시적인 반대자 최만리에 대한 평가 방법도 좀 더 명쾌해진다. (내가 어느쪽에 찬성하는가, 그리고 역사가 이후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별도임.)
- ①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시기 유학자 관료집단들은 '외국어 교육/언어를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었고, 최만리 또한 당시 유학자/관료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맞게, 평범한 반응을 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럴 경우 '세종시기 원리주의'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최만리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주장에 따라 15세기는 그런 “꼴통 성리학자”의 시대가 아니라는 종래 설명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다.)
- ②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대 실무관료-대신들은 대체로 외국어 교육/언어학을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최만리는 그야말로 유교적 원리주의자로서 그 전반적 동의에 강경하게 반대를 강행한 사람이 된다.(물론 이럴 경우, 그 보편적이던 한글에 대한 공감대가 왜 순식간에 흐지부지되어버렸는지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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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식으로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의의를 재분류하는 것은,  연구사를 내 입맛대로 조작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식의 정리를 바탕으로 할 때, 친제/협찬창제 논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나.

생각해보니 반년만에 글을 쓰는데, 그 반년전 글도 박사논문 관련이고 이번 글도 박사논문 소개글이다. 반년전 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약간은 의식하고 쓴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박사논문에서는 '복수의 유교의 존재가능성' 내지 '시기에 따른 유교적 규범의 성립-변화과정.' 같은걸 말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너무나 많은 내용을 때려박은 나머지, 실제 논문에서는 어지럽게 섞여있지만 일단은 내 스스로는 그리 생각한다. 하기사 어쩌면 박사논문을 쓰고 나서, 1년정도 박사논문 소개글//박사논문 소개발표를 여러 차례 준비하면서 곱씹다보니 깨닫게 된 사실인 부분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떠냐 싶지만..

 

솔직히, 지금 박사논문은 너무나도 서술이 난삽해서, 단행본 작업을 할 때는, (보통 하는 '증보작업' 대신.) 한 20% 정도는 아예 내용을 싹 덜어내고, 한 5%정도 모자란 부분 보태면 어떨까 상상만 하고 있다.(책 내주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그냥 계획은 계획이니..) 

 

어찌되었건, 박사논문을 '털어낼' 준비를 하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유교란게 얼마나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는데 뭔 이렇게 말이 길었나 싶기도 하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는게 없음을 아는게 박사학위 취득으로 얻는 덕목"이라는 오래된 농담에 따르면, 나도 어느새 아주 어엿한 박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써 보고 싶은 글감은 이것저것 있는데, 아직 박사논문만큼 호흡이 긴 중장기작업을 잘 상상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박사논문을 털어내면, 한 몇편정도는 박사논문에서 다룬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메꿀 수 있는, 인물사 작업같이, 조금은 더 미시적인 문제를 다루어볼까 생각도 하곤 한다. 강단에 올라가보니 내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밖에 못하는구나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20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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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view/5770

 

[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역사를 향한 열린 시선, 한국역사연구회

www.koreanhistory.org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024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 교수신문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www.kyosu.net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교수신문 특집연재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_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게재일시 : 2024.02.22 08:59

이상민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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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에 의뢰받은 이래, 오랜시간 고심했던 원고가 드디어 나왔다. 박사논문에 대해서는 대충 5번은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뭔가 찜찜함이 많지만, 아마도(?) 이 글로서, 대충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공유한 셈 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자리에서 또 말할 기회가 있다면, 이젠 해 놓은 범위에서 응용하게 될거란 말씀.)

 

신문 기고는 처음인데, 새삼스럽지만 글이라는게, 적당한 편집을 거치면 색이 확 달라진다는걸 깨달은 계기이기도 했다. (대의가 어긋난 것은 없지만) 수정 과정에서 아마 나한테 모든걸 전담시켰다면 하지 않았을 문장 호흡, 문단 구성, 말투 등의 편집이 가해지니까, 처음에는 영 어색했는데, 보다보니까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는 평도 적잖게 들을 수 있었다. 당초 혼자서 잘 하면 제일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도움을 거절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또다시) 해 보기도 했다.

 

2024. 2. 26

오래 전에 쓴 메모이지만, 최근들어 다시 되풀이할 기회가 있어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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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연구하는 사회과학 전공자 선생님들과 나름 오랜시간 세미나를 참여중인데, 개중 멤버가 교체될 때 마다, '인구'에 대한 질문을 잊을만할라면 한번씩 받게 된다. 그 만큼 인구란 것이, 제대로 그 숫자를 알 수 만 있다면 그 시기 정치-사회-경제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인 탓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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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름 그 시대 연구자로서 이런 말밖에 못 드리는걸 좀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발굴된 자료 내에서 판단컨대, 이는 알 수 없는 정보에 속한다. 적어도 17세기 중엽 이전까지의 인구데이터는, 심지어 해당 전공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추산치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어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백보 양보해 어떤 방식으로 추산해 어떤 결과를 지지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를 토대로 2차적인 논의의 근거로 삼는 시도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좀 더 알기쉽게-폭력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이걸 수치비교가 가능할만큼 구체성있게 던지는 이야기'는 정말 대부분은 저자의 상상 내지 기대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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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조차도 조선 초 이야기고, 고려시대 이전으로 가면 더 심각하다. 좀 자극적으로 말해, 호적을 비롯한 이 때의 지방행정 전반이 '국가가 세금과 병력 동원을 어디까지 시도할 수 있는가'의 가이드라인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정보값도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근대 행정과 비교해서 그렇다는거고, 당시의 행정기록들이, 당시 시대상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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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보다는 살짝 더 조심스러운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물가/가격'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정 물품의 '미곡/면포 대비 교환비'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격'내지 '물가'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주 가끔씩 논문 중에서도 이를 '과감하게' 지르는 글들을 보게 되는데, 그분들의 일도양단 자신감에는 경의를 보내나, 더 솔직히는 '정말 겁도 없으시군요' 싶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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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한국 전근대사 연구란게 늘 이런 식이다. '궁금한 것'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의 범주를 설정해, 그 안에서, '의미있는 해명'을 해 내는 작업의 연속이다. 그 '해명'을 조금만 까탈스럽게 따지면 사실 아무것도 입증할 만한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주어진 자료 내에서 가능한 설명들 중 이 정도가 최선'이라고 대꾸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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