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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다시 읽기

정몽주의 탄생과 성장과정부터 최후의 순간까지를 재조명하며 그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생애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벗긴 뒤에, 기록을 따라 정몽주가 탁월한 성리학자, 군사 행정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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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메모에 보니 8월 28일로 쓰여져 있다. 과연 그맘때쯤 읽은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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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앞서 두 가지만.

1. 저자는 학계에 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여말선초 사상사 분야의 손 꼽히는 전문가 중 한 분이다.

2. 정몽주 관련 전문서/평전은, '정몽주의 지명도 대비해서는' 놀랄만큼 별로 없음. 아마 이 책 이전에 잘해야 한두권정도 더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책의 기획이랄까 만듦새에 대해서만 말을 좀 얹어본다.

 

이 책을 어찌 보았는지 물어본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정몽주에 대해 '연구자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내용들을 잘 정리한 책."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여느 대중교양서가 다 그렇지 않느냐 할수도 있지만, 이 책은 특히 더 그렇다)

 

일단 하나만 확실히 해 두자면, 정몽주가 충절의 상징이 아닌, 다시말해 학술 외의 정치/외교/군사 등의 실무에도 능력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나무위키 정몽주 문서만 봐도 이미 어느정도는 알려진 되어 있는 사실이다.(정확성과 별도로, 이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란 소리다.) 따라서 대중 차원으로 보아도 '새로운 발견'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히 정몽주에 대해 자료 중심으로 차분히 정리한 체계화의 의미는 크다. 당연히 그 나무위키 수준의 정리가 정교한 정리냐면 그것도 그렇지 않은건 말할 것도 없다. 정몽주 관련된 '책'이 일단 그 지명도에 비해 너무 적은 것도 사실인지라(자료가 적어서..) 고급 교양서라고 보기엔 손색이 없는 책인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초반 거의 두 챕터를 차지하고 있다. 확실히 정몽주는,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라는 레이어를 먼저 제시하고, 그보다 심도있는 영역을 음미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아쉬운 부분.

그러나 역시나, 해당 분야 연구자(혹은 정몽주-고려 말에 대한 기초 이상의 교양을 쌓은 일반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심도있는 설명이 역시 조금은 더 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은 있다(대표적으로, 참고문헌 목록만 있을 뿐 각주가 아예 없음). 차라리 각주를 안 붙일만큼 '자유로운' 지면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내용을 과감하게 써 주셔도 좋지 않았을까.. 반대로 좀 더 '포멀하게' 작업이 될 것이라면 조금 더 종래 연구들과의 비평적 긴장을 살려도 좋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책. 

좌우간 다시 서두의 말을 반복하면 "워낙 절대 수가 적은 정몽주 평전"의 축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정몽주 관련 뭘 읽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가 좀 편해졌달지.. (종래 정몽주만 궁금하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줄것도 없었고, 그닥 읽을걸 주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 의미에서 확실히 가뭄의 단비같은 책이다.)

 

2024. 8. 28

(성리학 포함) 외국문화 초기 수용이라는게, 좀 많이 윗세대에서는 '진리의 빛이 퍼져나가는' 것 처럼 묘사하곤 했고,

그 다음 세대쯤 가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

그 다다음 세대쯤 가니, '주체적 전유' 같은게 유행하다가, 

요즘와서는... 세대랑 무관하게 거의 모든 이야기가 뒤엉켜나오는 편이다.

 

가장 극단적 두 주장을 꼽아본다면,두 가지 쯤이 아닐까

ⓐ 그냥 쿨하게, 어설프게 베낀걸 인정하자는 주장부터

ⓑ 본연적으로 '모방'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은 한다. ⓑ에서 말하는 '모방/베끼기'라는게 존재하기에 앞서서, 대상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철학적인 문제까지 갈 것 없이, 예시를 하나 들자면, '14세기 원나라 유학'을 당시 고려시대 유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닌'일이 아닐까. 

 

사실 '핵심적 일부'든, '전체적인 상'이든, 뭐든지 우리가 경험한 시선이, 그리고 목격한 경험과 문헌들이 14세기 고려의 유학자들과 같을 수는 없다.그냥 생각나는 유의점 몇몇만 난삽하게 짚어본다.

 

ⓐ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가 그들이 '실제로 잠시라도 본 자료'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생각보다 고려인들이 자료를 '많이' 보았을 가능성.

ⓑ 고려인들이 '남겨둔 자료'중 우리에가 남은 것이 극히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 그들이 '사실은 더 핵심적인 것'을 남겨두었을 가능성.

ⓒ 그들이 자료를 검토한 '시선'이 우리가 아는것과 다를 수 있다. - 우리 생각보다, 그들이 자료를 긍정적/부정적으로 편향되게 보았을 가능성.

 

... 

 

지난 수업 첫 시간에 '시대구분'에 대한 개설강의를 했다.
여러번 강의하면서, 거의 모든 수업에서 첫 시간에는 꼭 하는 이야기인데, 매번 이걸 어떻게하면 더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게 된다. 이번년도 버전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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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압 환경의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다고 보통 말합니다마는, 찬찬히 따져보면 그 설명이란게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과학사의 디테일을 더하면 복잡해지지만) 사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게 아니라, 물이 끓는 온도를 어느순간부터 '100도'라고 말하기로 약속한 것이지요. 그걸 '100'이라는 숫자로 말해야 한다는 것 부터, 모든게 '물이 끓는 일' 그 자체하고는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약속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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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구분이니 왕조교체니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게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 혹은 근대가 되어야/혹은 됨으로써 무언가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그 와중에 그 틀에 안 맞는 케이스는 '예외'로 치부하거나 하면서요. 하지만 이 또한 순서가 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수많은 변화들이 있을 때, 그 변화 중 도드라지는 시점을 임의로 설정해서, 그 기준과 시점을 단순하게 설명하기 위해 붙여둔 이름이 '시대' 같은 '역사학적 개념'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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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역사학을 공부할 때... 큰 틀에서 시대든, 제도든, 사상이든, (가령 고려는 귀족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저는 그것도 반만 믿지만-, 조선은 유교적 사회.. 의정부 서사제는 신권 위주의 정치운영론.. 등등) 어떤 완성된 틀을 먼저 상상한 뒤에, 혹여 거기 안 맞는 사례가 있으면 그걸 예외로 치부하는.. 그런 순서로 생각해야 하는게 아니라.. 
먼저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삶의 흐름이 있고, 그걸 시간을 중심으로 대략이나마 간추려서 사리에 맞게 정리해둔 것이 여러분들이 흔히 교과서에서 만나게 되는... XX시대/XX제도/XX사상/이들의 특징인 XX성... 등등의 개념들임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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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같아보이지만, 절대 그 둘은 헷갈려선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역사학의 개념화된 지식이 죽은 지식이고 쓸모가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더욱 곤란합니다.. 저는 오히려 같은 전공을 하는 또래 동료들 중에서는, 비교적 앞서 말한 XX시대.. 등등의 추상적 개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여러분들도 그 소중함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입니다.(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큰 역할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중요하다 여기는 만큼, 여러분들께 그 위상을 혼동하지 않기를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관련 자료 정리하다가 심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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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자 논쟁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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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 창제자'가 누구냐 하는 사안에 대해 거진 80년 치 연구사가 축적되어 있는데, 대충 3가지 갈래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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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이를 직접 창제했다(친제설)
ⓑ집현전 학사, 신미, 정의공주 등에게 세종이 명해 다른 사람에 창제되었다(비친제설)
ⓒ상기한 인물들 중 일부가 세종을 도왔다(협찬창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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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실록 등에 나온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 세종이 '친제'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는 그 외 여러 소수의 외부 기록들, 혹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여러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사실 제일 문제되는 게 ⓒ의 주장이다. 그나마 믿거나 말거나 명확한 입장과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하는 ⓐ ⓑ와는 달리, ⓒ는 정말 '상식적으로 국왕이 혼자 하는 일이라는게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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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 근간이 되는 '상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좀 거칠게 말해 전근대 국왕의 하루에서 '혼자서' 있는 시간이 있기나 하겠는가. 붓글씨 한자를 써도 옆에서 먹 갈고 종이 가져다주는 것도 '협조'고, (그 목적이 문자 창제라는 것을 모른 채) 책 한권을 구해다주거나, 심지어 요 앞까지 가져다주는 것도, 모든걸 다 '협조'라고 한다면, 당연히 한글은 '협찬'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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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식으로 내관/궁녀/그 외의 보조인력들의 모든 도움까지도 '협조'의 영역으로 넣어야 한다면, '국왕이 친히 하다'는 개념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혹시 '국왕의 주도하에' 한 일이 친히 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지간한 대소사는 국왕의 재가 하에 이루어지니, 국왕의 정치 중에 '친히' 하지 않은 일은 없다. 반대로 앞서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일만이 '친히 한 일'이라면, 국왕 뿐이겠는가. 그냥 문명사회의 인류는 무언가를 '친히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까닭에, (구체적인 협찬 주체를 밝히지 않은) 협찬창제설은, '말이 되는 것은 맞지만, 논의 대상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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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가 이렇게 소모적으로 흘러갈바엔 차라리 관련 논의를 아래와 같이 '같은시기 학자관료집단과의 합의'를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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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글 창제는,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사업에 공감하기는 커녕 그 추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있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혹은
② 한글 창제는, 같은시기 집현전 학사나 조정대신들과의 어느정도 공감대 내지 합의를 형성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즉 최만리 등은 극소수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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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쟁점은 '거기에 세종 이외의 사람이 손을 얼마나 조금이라도 거들었냐'에 있는게 아니라, 그 창제 사업이 반포교서를 내리기 전부터 충분한 정보가 공유되어어느정도의 공감대를 얻고 있었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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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최근의 '외교적 배경설'(용어는 내가 지었다)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외교적 배경설이란 '한글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종래 ⓐ 협찬창제설과 마찬가지의) 상식적 반론 하에, 당시의 불안정한 조명관계, 한글 창제 이전부터 세종이 보여온 중국 운서에 대한 관심 등등이 한글 창제의 배경이 된다는 최근의 설명이다(짐작하겠지만 '한글 발음기호설/파스파 문자 기원설'과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글이 한자 발음기호로 쓰기위해 만들어졌느냐 문제, 내지 한글 자형이 파스파 문자에서 연원하는가 문제와 별도로, 한글 창제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은 상식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 창제에 요구되는 언어적 지식을 세종 혼자서, 하루아침에 모두 독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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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을 감안했을 때, 과연 '한글 창제를 하겠다는 직접적인 사업'은 조정대신의 합의 하에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언어나 외교에 대한 거시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 자체는 세종의 독단or파행의 산물이었을까.. 그 문제로 접근하는게 사안을 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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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보면, 한글의 명시적인 반대자 최만리에 대한 평가 방법도 좀 더 명쾌해진다. (내가 어느쪽에 찬성하는가, 그리고 역사가 이후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별도임.)
- ①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시기 유학자 관료집단들은 '외국어 교육/언어를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었고, 최만리 또한 당시 유학자/관료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맞게, 평범한 반응을 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럴 경우 '세종시기 원리주의'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최만리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주장에 따라 15세기는 그런 “꼴통 성리학자”의 시대가 아니라는 종래 설명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다.)
- ②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대 실무관료-대신들은 대체로 외국어 교육/언어학을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최만리는 그야말로 유교적 원리주의자로서 그 전반적 동의에 강경하게 반대를 강행한 사람이 된다.(물론 이럴 경우, 그 보편적이던 한글에 대한 공감대가 왜 순식간에 흐지부지되어버렸는지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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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식으로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의의를 재분류하는 것은,  연구사를 내 입맛대로 조작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식의 정리를 바탕으로 할 때, 친제/협찬창제 논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나.

생각해보니 반년만에 글을 쓰는데, 그 반년전 글도 박사논문 관련이고 이번 글도 박사논문 소개글이다. 반년전 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약간은 의식하고 쓴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박사논문에서는 '복수의 유교의 존재가능성' 내지 '시기에 따른 유교적 규범의 성립-변화과정.' 같은걸 말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너무나 많은 내용을 때려박은 나머지, 실제 논문에서는 어지럽게 섞여있지만 일단은 내 스스로는 그리 생각한다. 하기사 어쩌면 박사논문을 쓰고 나서, 1년정도 박사논문 소개글//박사논문 소개발표를 여러 차례 준비하면서 곱씹다보니 깨닫게 된 사실인 부분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떠냐 싶지만..

 

솔직히, 지금 박사논문은 너무나도 서술이 난삽해서, 단행본 작업을 할 때는, (보통 하는 '증보작업' 대신.) 한 20% 정도는 아예 내용을 싹 덜어내고, 한 5%정도 모자란 부분 보태면 어떨까 상상만 하고 있다.(책 내주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그냥 계획은 계획이니..) 

 

어찌되었건, 박사논문을 '털어낼' 준비를 하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유교란게 얼마나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는데 뭔 이렇게 말이 길었나 싶기도 하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는게 없음을 아는게 박사학위 취득으로 얻는 덕목"이라는 오래된 농담에 따르면, 나도 어느새 아주 어엿한 박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써 보고 싶은 글감은 이것저것 있는데, 아직 박사논문만큼 호흡이 긴 중장기작업을 잘 상상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박사논문을 털어내면, 한 몇편정도는 박사논문에서 다룬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메꿀 수 있는, 인물사 작업같이, 조금은 더 미시적인 문제를 다루어볼까 생각도 하곤 한다. 강단에 올라가보니 내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밖에 못하는구나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20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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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view/5770

 

[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역사를 향한 열린 시선, 한국역사연구회

www.koreanhistory.org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024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 교수신문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www.kyosu.net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교수신문 특집연재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_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게재일시 : 2024.02.22 08:59

이상민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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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에 의뢰받은 이래, 오랜시간 고심했던 원고가 드디어 나왔다. 박사논문에 대해서는 대충 5번은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뭔가 찜찜함이 많지만, 아마도(?) 이 글로서, 대충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공유한 셈 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자리에서 또 말할 기회가 있다면, 이젠 해 놓은 범위에서 응용하게 될거란 말씀.)

 

신문 기고는 처음인데, 새삼스럽지만 글이라는게, 적당한 편집을 거치면 색이 확 달라진다는걸 깨달은 계기이기도 했다. (대의가 어긋난 것은 없지만) 수정 과정에서 아마 나한테 모든걸 전담시켰다면 하지 않았을 문장 호흡, 문단 구성, 말투 등의 편집이 가해지니까, 처음에는 영 어색했는데, 보다보니까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는 평도 적잖게 들을 수 있었다. 당초 혼자서 잘 하면 제일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도움을 거절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또다시) 해 보기도 했다.

 

2024. 2. 26

오래 전에 쓴 메모이지만, 최근들어 다시 되풀이할 기회가 있어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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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연구하는 사회과학 전공자 선생님들과 나름 오랜시간 세미나를 참여중인데, 개중 멤버가 교체될 때 마다, '인구'에 대한 질문을 잊을만할라면 한번씩 받게 된다. 그 만큼 인구란 것이, 제대로 그 숫자를 알 수 만 있다면 그 시기 정치-사회-경제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인 탓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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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름 그 시대 연구자로서 이런 말밖에 못 드리는걸 좀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발굴된 자료 내에서 판단컨대, 이는 알 수 없는 정보에 속한다. 적어도 17세기 중엽 이전까지의 인구데이터는, 심지어 해당 전공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추산치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어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백보 양보해 어떤 방식으로 추산해 어떤 결과를 지지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를 토대로 2차적인 논의의 근거로 삼는 시도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좀 더 알기쉽게-폭력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이걸 수치비교가 가능할만큼 구체성있게 던지는 이야기'는 정말 대부분은 저자의 상상 내지 기대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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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조차도 조선 초 이야기고, 고려시대 이전으로 가면 더 심각하다. 좀 자극적으로 말해, 호적을 비롯한 이 때의 지방행정 전반이 '국가가 세금과 병력 동원을 어디까지 시도할 수 있는가'의 가이드라인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정보값도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근대 행정과 비교해서 그렇다는거고, 당시의 행정기록들이, 당시 시대상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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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보다는 살짝 더 조심스러운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물가/가격'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정 물품의 '미곡/면포 대비 교환비'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격'내지 '물가'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주 가끔씩 논문 중에서도 이를 '과감하게' 지르는 글들을 보게 되는데, 그분들의 일도양단 자신감에는 경의를 보내나, 더 솔직히는 '정말 겁도 없으시군요' 싶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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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한국 전근대사 연구란게 늘 이런 식이다. '궁금한 것'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의 범주를 설정해, 그 안에서, '의미있는 해명'을 해 내는 작업의 연속이다. 그 '해명'을 조금만 까탈스럽게 따지면 사실 아무것도 입증할 만한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주어진 자료 내에서 가능한 설명들 중 이 정도가 최선'이라고 대꾸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4. 2. 14

복잡하게 따지려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영역까지 따져야 하는 책이라, 오히려 파편적인 감상을 옮겨보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1) 솔직히 처음 읽을때는 목차부터 내용까지, 너무나 산만하다고 느꼈는데, 두번째 세번째 읽을 때 되어서야 이거구나. 싶은 감탄이 나오는 책이다. 오히려 (시간 순서대로 쓰여진) 통사적 역사서술을 읽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처음에 더 헤메게 된다.

제목을 보면서도 놓치게 되는 것인데, 이 책의 핵심은 '장인과 닥나무'로 쓰여진 역사라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닥나무'를 역사서술 주체로 삼는,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적극 차용하여 글을 구성해낸 것이 파격적이다. 도대체가 '닥나무'가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그에대해 저자는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대신, 책 전체 구성과 내용을 빌어 이를 서술해냈다. 그게 저자의 대단한 기량이자, 그러한 이론적 전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읽기의 난관이 될 수도 있다.

 

2) 차라리 방법론적인 타당성, 정밀함보다, 저자가 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였는가, 이는 가치있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는가에 주목하는게 생산적일 것 같다. '구 민중사'가 한동안 유행한 이후 대강 21세기를 전후해서 그 열기는 시들어갔다. 생활사의 유행, 여성사의 부흥 등의 여러 새로운 바람이 불었지만 (무엇보다 전근대) '비 엘리트의 역사'는 성립시키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은근한 회의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도 했다. 당연히, 다른 무엇보다도 자료의 문제 때문이다. 전근대 여성사 연구의 큰 비중을 왕실 여성 연구가 차지하고 있고, 최근들어서 그 비중이 더 높아져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같은 복잡한 길을 택하게 된 것도, 기지機智같은 가시화하기 난해한 개념을 채택한 것도, 여러 난관 속에서 '비 엘리트의 기술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분투의 방편으로 읽어봄직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민중사'의 새로운 트렌드를 열어낼 수 있을까? 그건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 어려운 과제에 기어이 성공해 냈다. 한국 전근대사 서술의 참신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저자에게도, 비 엘리트적 과학기술사의 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해 본다.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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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그럼에도” 덧붙여 말하자면, 최근 10년 내 읽은 조선시대 연구서 중, 가장 특이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관련 분야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책이라는 점은 또다시 강조해보고자 한다. 특히 연대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특정 장절이 '시기'를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을거라고 저절로 예상하면서 글을 읽게되는 나 같은 사람은, 처음 읽을 땐 멀미가 날 수도 있다. 목차를 아주 신중히 음미하고 읽지 않으면 특히 그렇다. 닥나무>장인>종이>지식>기술.. 이라는 순서가 해당 장의 테마로 설정된 가운데, 해당 장 내에서는 시점이 앞뒤로 상당히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사실 서술체계의 차원에서는 좀 혼란하고 산만하다고도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 책이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즉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중요한 메시지로 삼고 있다)는 평을 접하면서, 순간 갸웃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기별 특징을 귀납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일 수가 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일독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분명 이 책은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이 맞다. 다만 정돈가능한 변화의 “법칙” 내지 “경위”에 대해 다루는 책이 아닐 뿐이다. 따지자면 닥나무-제지기술의 변화상을 시기별로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역동성-다이내믹스 그 자체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고 있노라를 다루는 책인 것이다. 그게 이 책의 독특한 점이겠다. 새롭게 정리한 바를 다시한번 곱씹어본다.

 

2024.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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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맹자가 쓴 책을 읽어 보니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시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옛날의 고인을 벗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비가 천고의 벗을 사귀고자 한다면 그 시대를 논할 뿐만 아니라 또 그 당대의 행적을 논하고 반드시 그가 다녀갔던 곳을 직접 가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속에 진정으로 감흥이 일어 유익함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마침내 아득히 동쪽 모퉁이에 살면서 읽는 것은 중국의 책이고 지키는 것은 옛 사람들이 남긴 찌꺼기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그 일을 말할 경우에, 마치 원거(鶢鶋)가 풍악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하거나 소경이 단청(丹靑)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 그 지향할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마땅히 그 땅에 가서 지극히 크고 지극히 밝은 곳을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시경》과 《서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들어 보지 못한 것을 더 많이 알게 해 준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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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문집"(성현), 권6,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권숙강(권건)을 전별하는 시의 서문送權叔强以書狀官赴京詩序_성종 12년 작성 추정_ 고전번역원의 김종태 역을 토대로 좀 다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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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틈 나는대로 용재 성현(1439~1504)의 문집이며를 통독하고, 실록 기록도 대조해보며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몇 달 전부터 성현의 "부휴자담론" 관련 논문을 준비중인데, "부휴자담론" 하나만 가지고 대충 눈에 밟히는 구절을 뽑아서 이리저리 의미를 뽑아내는 작업은 다 끝내두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영 하나마나한 이야기밖에 못 하는 거 같아서, 가능한 확신을 가지려면 다른 텍스트와 충분히 겹쳐읽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도 그러다 걸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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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생각해야 할 변수가 더 많지만, 적어도 조선 왕조 건국 후에, 명에 실제로 (여러 번) 다녀온 사람 치고. 그 나라의 '실제 모습'이 자신의 기대에 충족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대체로는 생소한 것에 대한 감탄에 이어, 그 구체적인 감상은 적당히 건조하게 뭉개놓지만, 그 감상을 디테일하게 꼭 남기는 경우엔, '기대에는 못 미치는 어떤 모습'에 대해서 코멘트를 조금씩이라도 남기는게 대부분이다(후마 스스무 선생의 논문에 소개된 조헌-허봉 케이스가 가장 극단적으로, 경우에 따라 '진짜 감상'과 '보고용 감상'을 분리하기까지 한다).
중국에 안 다녀와도 마찬가지다. 이미 최근의 많은 연구들에서 지적되다시피, "(관념상의)중화와 (현실 국가로서의)중국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은 조명관계의 초장부터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진지한 연구자들 중에서, 유학자들의 '중화'에 대한 지향을 동시기 중국으로의 변화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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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시나 헷갈리는 것은, 성현과 같은 저런 발언이다. 일단 성현 본인부터가 중국을 한번은 다녀왔던 사람인데, 그 성현에게 있어서 공간으로서의 '중국'은, 어찌되었건 스스로가 늘 손에 쥐고 읽어왔던 고전과 분리된 관념의 공간이 아니다. 마치 현대의 역사 교육자들이 '답사'를 강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이유로, 성현은 고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 실제로 가보고, 보다 정확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성현에게는 '중국=중화‘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을지라도, 중국과 중화가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좀 더 치사하게 말하자면, 현실 중국인보다 동쪽의 조선인이 중화에 더 근접하는 것이 대단히 많이 불리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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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계속 가지고있는 궁금증은, 그렇다면 왜들 그렇게 '실망'들을 하느냐는 것이다. 중국과 중화는 다르지만, 중국이 그래도 중화에 근접할만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지점까지 생각이 다다랐다면, '현실의 중국에서 그 중화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자족하면 될텐데, (물론 성현 당대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다들 그렇게도 끝없이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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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빤한 결론이지만, 역시나 조선 사람들의 시선이 (심지어 '중국땅을 밟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조차도) '실제 중국'을 완전히 직면하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범범하게 말해, '중국'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정치/사회/학문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탈출구로서, 그리고 그 해결에 힘쓰는 스스로의 분투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으로서 존재할 뿐, 정말로 명나라/명나라 사람/명나라 땅에 대한 리얼리티가 관건이었는지는 뜨뜻미지근하게 느끼고 있는것 아니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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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는 실망에도 '기대'를 끝내지 못하는 마음을 그 이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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