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포함) 외국문화 초기 수용이라는게, 좀 많이 윗세대에서는 '진리의 빛이 퍼져나가는' 것 처럼 묘사하곤 했고,

그 다음 세대쯤 가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

그 다다음 세대쯤 가니, '주체적 전유' 같은게 유행하다가, 

요즘와서는... 세대랑 무관하게 거의 모든 이야기가 뒤엉켜나오는 편이다.

 

가장 극단적 두 주장을 꼽아본다면,두 가지 쯤이 아닐까

ⓐ 그냥 쿨하게, 어설프게 베낀걸 인정하자는 주장부터

ⓑ 본연적으로 '모방'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은 한다. ⓑ에서 말하는 '모방/베끼기'라는게 존재하기에 앞서서, 대상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철학적인 문제까지 갈 것 없이, 예시를 하나 들자면, '14세기 원나라 유학'을 당시 고려시대 유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닌'일이 아닐까. 

 

사실 '핵심적 일부'든, '전체적인 상'이든, 뭐든지 우리가 경험한 시선이, 그리고 목격한 경험과 문헌들이 14세기 고려의 유학자들과 같을 수는 없다.그냥 생각나는 유의점 몇몇만 난삽하게 짚어본다.

 

ⓐ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가 그들이 '실제로 잠시라도 본 자료'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생각보다 고려인들이 자료를 '많이' 보았을 가능성.

ⓑ 고려인들이 '남겨둔 자료'중 우리에가 남은 것이 극히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 그들이 '사실은 더 핵심적인 것'을 남겨두었을 가능성.

ⓒ 그들이 자료를 검토한 '시선'이 우리가 아는것과 다를 수 있다. - 우리 생각보다, 그들이 자료를 긍정적/부정적으로 편향되게 보았을 가능성.

 

... 

 

지난 수업 첫 시간에 '시대구분'에 대한 개설강의를 했다.
여러번 강의하면서, 거의 모든 수업에서 첫 시간에는 꼭 하는 이야기인데, 매번 이걸 어떻게하면 더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게 된다. 이번년도 버전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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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압 환경의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다고 보통 말합니다마는, 찬찬히 따져보면 그 설명이란게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과학사의 디테일을 더하면 복잡해지지만) 사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게 아니라, 물이 끓는 온도를 어느순간부터 '100도'라고 말하기로 약속한 것이지요. 그걸 '100'이라는 숫자로 말해야 한다는 것 부터, 모든게 '물이 끓는 일' 그 자체하고는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약속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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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구분이니 왕조교체니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게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 혹은 근대가 되어야/혹은 됨으로써 무언가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그 와중에 그 틀에 안 맞는 케이스는 '예외'로 치부하거나 하면서요. 하지만 이 또한 순서가 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수많은 변화들이 있을 때, 그 변화 중 도드라지는 시점을 임의로 설정해서, 그 기준과 시점을 단순하게 설명하기 위해 붙여둔 이름이 '시대' 같은 '역사학적 개념'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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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역사학을 공부할 때... 큰 틀에서 시대든, 제도든, 사상이든, (가령 고려는 귀족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저는 그것도 반만 믿지만-, 조선은 유교적 사회.. 의정부 서사제는 신권 위주의 정치운영론.. 등등) 어떤 완성된 틀을 먼저 상상한 뒤에, 혹여 거기 안 맞는 사례가 있으면 그걸 예외로 치부하는.. 그런 순서로 생각해야 하는게 아니라.. 
먼저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삶의 흐름이 있고, 그걸 시간을 중심으로 대략이나마 간추려서 사리에 맞게 정리해둔 것이 여러분들이 흔히 교과서에서 만나게 되는... XX시대/XX제도/XX사상/이들의 특징인 XX성... 등등의 개념들임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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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같아보이지만, 절대 그 둘은 헷갈려선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역사학의 개념화된 지식이 죽은 지식이고 쓸모가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더욱 곤란합니다.. 저는 오히려 같은 전공을 하는 또래 동료들 중에서는, 비교적 앞서 말한 XX시대.. 등등의 추상적 개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여러분들도 그 소중함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입니다.(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큰 역할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중요하다 여기는 만큼, 여러분들께 그 위상을 혼동하지 않기를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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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정리하다가 심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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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자 논쟁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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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 창제자'가 누구냐 하는 사안에 대해 거진 80년 치 연구사가 축적되어 있는데, 대충 3가지 갈래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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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이를 직접 창제했다(친제설)
ⓑ집현전 학사, 신미, 정의공주 등에게 세종이 명해 다른 사람에 창제되었다(비친제설)
ⓒ상기한 인물들 중 일부가 세종을 도왔다(협찬창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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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실록 등에 나온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 세종이 '친제'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는 그 외 여러 소수의 외부 기록들, 혹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여러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사실 제일 문제되는 게 ⓒ의 주장이다. 그나마 믿거나 말거나 명확한 입장과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하는 ⓐ ⓑ와는 달리, ⓒ는 정말 '상식적으로 국왕이 혼자 하는 일이라는게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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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 근간이 되는 '상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좀 거칠게 말해 전근대 국왕의 하루에서 '혼자서' 있는 시간이 있기나 하겠는가. 붓글씨 한자를 써도 옆에서 먹 갈고 종이 가져다주는 것도 '협조'고, (그 목적이 문자 창제라는 것을 모른 채) 책 한권을 구해다주거나, 심지어 요 앞까지 가져다주는 것도, 모든걸 다 '협조'라고 한다면, 당연히 한글은 '협찬'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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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식으로 내관/궁녀/그 외의 보조인력들의 모든 도움까지도 '협조'의 영역으로 넣어야 한다면, '국왕이 친히 하다'는 개념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혹시 '국왕의 주도하에' 한 일이 친히 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지간한 대소사는 국왕의 재가 하에 이루어지니, 국왕의 정치 중에 '친히' 하지 않은 일은 없다. 반대로 앞서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일만이 '친히 한 일'이라면, 국왕 뿐이겠는가. 그냥 문명사회의 인류는 무언가를 '친히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까닭에, (구체적인 협찬 주체를 밝히지 않은) 협찬창제설은, '말이 되는 것은 맞지만, 논의 대상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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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가 이렇게 소모적으로 흘러갈바엔 차라리 관련 논의를 아래와 같이 '같은시기 학자관료집단과의 합의'를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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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글 창제는,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사업에 공감하기는 커녕 그 추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있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혹은
② 한글 창제는, 같은시기 집현전 학사나 조정대신들과의 어느정도 공감대 내지 합의를 형성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즉 최만리 등은 극소수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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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쟁점은 '거기에 세종 이외의 사람이 손을 얼마나 조금이라도 거들었냐'에 있는게 아니라, 그 창제 사업이 반포교서를 내리기 전부터 충분한 정보가 공유되어어느정도의 공감대를 얻고 있었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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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최근의 '외교적 배경설'(용어는 내가 지었다)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외교적 배경설이란 '한글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종래 ⓐ 협찬창제설과 마찬가지의) 상식적 반론 하에, 당시의 불안정한 조명관계, 한글 창제 이전부터 세종이 보여온 중국 운서에 대한 관심 등등이 한글 창제의 배경이 된다는 최근의 설명이다(짐작하겠지만 '한글 발음기호설/파스파 문자 기원설'과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글이 한자 발음기호로 쓰기위해 만들어졌느냐 문제, 내지 한글 자형이 파스파 문자에서 연원하는가 문제와 별도로, 한글 창제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은 상식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 창제에 요구되는 언어적 지식을 세종 혼자서, 하루아침에 모두 독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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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을 감안했을 때, 과연 '한글 창제를 하겠다는 직접적인 사업'은 조정대신의 합의 하에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언어나 외교에 대한 거시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 자체는 세종의 독단or파행의 산물이었을까.. 그 문제로 접근하는게 사안을 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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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보면, 한글의 명시적인 반대자 최만리에 대한 평가 방법도 좀 더 명쾌해진다. (내가 어느쪽에 찬성하는가, 그리고 역사가 이후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별도임.)
- ①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시기 유학자 관료집단들은 '외국어 교육/언어를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었고, 최만리 또한 당시 유학자/관료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맞게, 평범한 반응을 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럴 경우 '세종시기 원리주의'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최만리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주장에 따라 15세기는 그런 “꼴통 성리학자”의 시대가 아니라는 종래 설명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다.)
- ②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대 실무관료-대신들은 대체로 외국어 교육/언어학을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최만리는 그야말로 유교적 원리주의자로서 그 전반적 동의에 강경하게 반대를 강행한 사람이 된다.(물론 이럴 경우, 그 보편적이던 한글에 대한 공감대가 왜 순식간에 흐지부지되어버렸는지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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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식으로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의의를 재분류하는 것은,  연구사를 내 입맛대로 조작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식의 정리를 바탕으로 할 때, 친제/협찬창제 논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나.

오래 전에 쓴 메모이지만, 최근들어 다시 되풀이할 기회가 있어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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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연구하는 사회과학 전공자 선생님들과 나름 오랜시간 세미나를 참여중인데, 개중 멤버가 교체될 때 마다, '인구'에 대한 질문을 잊을만할라면 한번씩 받게 된다. 그 만큼 인구란 것이, 제대로 그 숫자를 알 수 만 있다면 그 시기 정치-사회-경제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인 탓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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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름 그 시대 연구자로서 이런 말밖에 못 드리는걸 좀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발굴된 자료 내에서 판단컨대, 이는 알 수 없는 정보에 속한다. 적어도 17세기 중엽 이전까지의 인구데이터는, 심지어 해당 전공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추산치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어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백보 양보해 어떤 방식으로 추산해 어떤 결과를 지지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를 토대로 2차적인 논의의 근거로 삼는 시도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좀 더 알기쉽게-폭력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이걸 수치비교가 가능할만큼 구체성있게 던지는 이야기'는 정말 대부분은 저자의 상상 내지 기대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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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조차도 조선 초 이야기고, 고려시대 이전으로 가면 더 심각하다. 좀 자극적으로 말해, 호적을 비롯한 이 때의 지방행정 전반이 '국가가 세금과 병력 동원을 어디까지 시도할 수 있는가'의 가이드라인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정보값도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근대 행정과 비교해서 그렇다는거고, 당시의 행정기록들이, 당시 시대상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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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보다는 살짝 더 조심스러운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물가/가격'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정 물품의 '미곡/면포 대비 교환비'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격'내지 '물가'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주 가끔씩 논문 중에서도 이를 '과감하게' 지르는 글들을 보게 되는데, 그분들의 일도양단 자신감에는 경의를 보내나, 더 솔직히는 '정말 겁도 없으시군요' 싶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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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한국 전근대사 연구란게 늘 이런 식이다. '궁금한 것'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의 범주를 설정해, 그 안에서, '의미있는 해명'을 해 내는 작업의 연속이다. 그 '해명'을 조금만 까탈스럽게 따지면 사실 아무것도 입증할 만한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주어진 자료 내에서 가능한 설명들 중 이 정도가 최선'이라고 대꾸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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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맹자가 쓴 책을 읽어 보니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시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옛날의 고인을 벗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비가 천고의 벗을 사귀고자 한다면 그 시대를 논할 뿐만 아니라 또 그 당대의 행적을 논하고 반드시 그가 다녀갔던 곳을 직접 가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속에 진정으로 감흥이 일어 유익함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마침내 아득히 동쪽 모퉁이에 살면서 읽는 것은 중국의 책이고 지키는 것은 옛 사람들이 남긴 찌꺼기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그 일을 말할 경우에, 마치 원거(鶢鶋)가 풍악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하거나 소경이 단청(丹靑)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 그 지향할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마땅히 그 땅에 가서 지극히 크고 지극히 밝은 곳을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시경》과 《서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들어 보지 못한 것을 더 많이 알게 해 준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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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문집"(성현), 권6,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권숙강(권건)을 전별하는 시의 서문送權叔强以書狀官赴京詩序_성종 12년 작성 추정_ 고전번역원의 김종태 역을 토대로 좀 다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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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틈 나는대로 용재 성현(1439~1504)의 문집이며를 통독하고, 실록 기록도 대조해보며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몇 달 전부터 성현의 "부휴자담론" 관련 논문을 준비중인데, "부휴자담론" 하나만 가지고 대충 눈에 밟히는 구절을 뽑아서 이리저리 의미를 뽑아내는 작업은 다 끝내두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영 하나마나한 이야기밖에 못 하는 거 같아서, 가능한 확신을 가지려면 다른 텍스트와 충분히 겹쳐읽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도 그러다 걸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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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생각해야 할 변수가 더 많지만, 적어도 조선 왕조 건국 후에, 명에 실제로 (여러 번) 다녀온 사람 치고. 그 나라의 '실제 모습'이 자신의 기대에 충족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대체로는 생소한 것에 대한 감탄에 이어, 그 구체적인 감상은 적당히 건조하게 뭉개놓지만, 그 감상을 디테일하게 꼭 남기는 경우엔, '기대에는 못 미치는 어떤 모습'에 대해서 코멘트를 조금씩이라도 남기는게 대부분이다(후마 스스무 선생의 논문에 소개된 조헌-허봉 케이스가 가장 극단적으로, 경우에 따라 '진짜 감상'과 '보고용 감상'을 분리하기까지 한다).
중국에 안 다녀와도 마찬가지다. 이미 최근의 많은 연구들에서 지적되다시피, "(관념상의)중화와 (현실 국가로서의)중국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은 조명관계의 초장부터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진지한 연구자들 중에서, 유학자들의 '중화'에 대한 지향을 동시기 중국으로의 변화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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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시나 헷갈리는 것은, 성현과 같은 저런 발언이다. 일단 성현 본인부터가 중국을 한번은 다녀왔던 사람인데, 그 성현에게 있어서 공간으로서의 '중국'은, 어찌되었건 스스로가 늘 손에 쥐고 읽어왔던 고전과 분리된 관념의 공간이 아니다. 마치 현대의 역사 교육자들이 '답사'를 강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이유로, 성현은 고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에 실제로 가보고, 보다 정확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성현에게는 '중국=중화‘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을지라도, 중국과 중화가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좀 더 치사하게 말하자면, 현실 중국인보다 동쪽의 조선인이 중화에 더 근접하는 것이 대단히 많이 불리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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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계속 가지고있는 궁금증은, 그렇다면 왜들 그렇게 '실망'들을 하느냐는 것이다. 중국과 중화는 다르지만, 중국이 그래도 중화에 근접할만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지점까지 생각이 다다랐다면, '현실의 중국에서 그 중화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자족하면 될텐데, (물론 성현 당대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다들 그렇게도 끝없이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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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빤한 결론이지만, 역시나 조선 사람들의 시선이 (심지어 '중국땅을 밟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조차도) '실제 중국'을 완전히 직면하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범범하게 말해, '중국'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정치/사회/학문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탈출구로서, 그리고 그 해결에 힘쓰는 스스로의 분투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으로서 존재할 뿐, 정말로 명나라/명나라 사람/명나라 땅에 대한 리얼리티가 관건이었는지는 뜨뜻미지근하게 느끼고 있는것 아니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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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는 실망에도 '기대'를 끝내지 못하는 마음을 그 이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몇 주 전에 다른 곳에 메모한 것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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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군도(群盜)문제는 박사논문에서 꽤 다루었던 사안이지만, 나름 열심히 추적한 입장에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남겨진 자료만으로는 “양적 추세”를 알 수 없으며, 그 까닭에 이를 기반으로 한 '시대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박사 예심~본심 사이에 정말 작심하고 몇주간 통계를 내다가 포기했던 기억을 두고 남기는 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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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좀 오랜 연구에서는 조선 건국 후, 수조권의 해체와 더불어 나타난 사적 소유권 증대, 농업생산력 발전과 함께 나타난 경제적 수탈, 민의 의식 성장 등등이 항쟁으로 발현된 게 군도라고 정리하기도 했고,(=사실상 민중운동과 군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후의 연구에서는 흉년이나 세금수취, 재정 파탄 등, 국가의 위기, 민의 생활고 등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어느쪽이든, 군도가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서, 이후로 심화되었다는 것에는 대강의 합의를 이루고 있다.
사실은 나도 이러니저러니, 박사논문에다가 '세조시기 보법'을 이유로 군도가 늘어난 결과, '덕형절충'이 성종시기를 거쳐 '유교적 규범의 법제화'로 귀결되게 되었노라 썼으니, 그 기존 연구의 흐름에 맞춰 정리한 셈이다.
다만 종래의 다양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실제 통계화하는 작업은 녹록치가 않다(나도 실패했다는 뜻이다). 가령, 어떤 시기엔 도적의 발생이 나름 세심하게 보고되기도 하지만, 어떤시기엔 그냥 “전국에서 수백/수천 인”이런식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세종 후반-명종대 사이 실록 기록을 통해서 확실히 도적 문제가 조정의 심각한 사안이었음이 확인되지만, 지방통치의 역사적 추이를 염두에 두면 민간의 비체제적 무장집단은 관의 지방지배가 느슨했던 12-13세기에 한명이라도 많아도 더 많은게 당연하다. 그리 본다면, 대관절 군도는 수백년 내 '줄어든'것인가 '늘어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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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원적으로, 남겨진 군도에 대한 기록이 “군도에 대한 중앙 조정의 적극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인지,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이런 판국이니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군도 그 자체가 상시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과, “때에 따라서 이를 조정에서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그 정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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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솔직해질 부분은 솔직해져야 하는데, 우리가 확인가능한건, '군도에 대한 국가 지배층의 반응'이지, '정말로 사회가 (이전 시기보다)혼란한 현상' 자체가 아니다. 거칠게 말해, 도적 얼마를 잡아서 얼마를 처형했고, 얼마는 풀어주었고, 그 중 재범은 어떻게 삼범은 어떻게 하자. 구구절절 길게 써넣을 수 있는 시기는, 어쩌면 '도적이 팔도에 창궐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다'고 짧게 쓴 시기보다는 (상대적으로는) 더 '안정된' 시기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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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어차피 같은 집단이 일괄적으로 정리한 실록인 이상, 실록에서 긍정적으로 쓴 부분은 '조정의 치세를 과장하고자 쓴 기록'이고, 부정적으로 쓴 부분은 '시대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이고.. 그럴 수가 없다.
실록이 무오류의 사실이라든가, 완벽하게 정리된 기록이라는 뜻이 아니다. 어느 부분은 믿고 어느 부분은 안 믿고를 판별하는 건 거의 최후의 최후까지 유보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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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15

박사논문, 나아가 지금까지도 계속 붙들고 있는 '조선의 유교화' 문제에 관련된 명제인 '유교사상이 사회화된다or혹은 영향을 넓게 미친다or성리학 사회가 되었다'.. 식의 이야기는 대충 세 가지 질문과 관련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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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사조를 따르는 행위(하다못해, 그 사조를 따른다고 표방하는 행위)가, 지식인층 내지 일반 사회내 어디까지 권위or강제력or통일성or보편성 등을 확보하고 있는가. (지식인층이냐 일반 사회냐도 사실은 구분되는 논점)
ⓑ 특정 사조가 정치 제도 내지는 사회 관행, 의례 등등의 '개변'에 유의미한 근거로 사용되었는가.(확산의 정도나 통용 여부가 아니라 '개변의 근거'가 포인트.)
ⓒ 상기한 a,b 모두의 측면에서, 해당 사조의 경합가능한 대안 구심점이 존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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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에 입각하여 '성리학의 영향력'을 말하는 작업, 그리고 그 반론적 성격의 작업 모두 훌륭한 성과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좀 아쉽게 느끼는 점은, 세가지가 '섞여서' 설명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층위 혼돈이 사실 조선 후기 연구에선 덜 고민되는 문제인데(내가 볼 때 그 바닥 고민은 또 다른 곳에 있음), 성리학 도입사의 차원을 다루게 되는 13~15세기 (유교)사상사 연구에선 그 혼돈의 문제가 거의 숨쉬듯이 발생중이다. 화를 낼 일도 아니고, 애둘러 말하는 것 아니고, 누굴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분야 연구 전체에 공기와 같이 만연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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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마구 섞이는 상황은 박사논문 작업의 동기이자 그 과정상의 오랜 난관이었다. 박사논문은 나름 저 중에선 ⓑ를 중점으로 다루는 걸 목표로 그걸 좀 분리해보려는 시도였다. 내 딴에는 ⓐ~ⓒ 중에서는 ⓑ의 구체적 성과가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작업이 박사논문이다. 나름대로는 ⓐ ⓒ의 성취로 ⓑ가 상식 선에서 납득이 되었다고 적당히 넘어간 연구가 많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예컨대 '유교국가가 되었다-체제정비가 되었다'라고 느슨하게 그렇게 설명을 해 놓고, 그 근거를 들어야 할 타이밍에는 ⓐ의 견지에서 권근or김종직or조광조 등의 성취를 제시하거나, 아니면 고려 말 불씨잡변으로 ⓒ에 해당하는 문제를 제시하면서 메꿔온 경우가 많아 보였고, 그래서 이를 좀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길게 보면 석사논문으로 쓴 "삼강행실도" 문제도, 그 책이 앞서 '물타기'의 주제가 되어왔음을 문제시하고자 쓴 것도 컸다.).
박논을 쓰려고 볼 때의 선행연구도 혼란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쓰여진 논문에 대한 반론을 받을 때조차도 그에 대한 혼란을 계속 목격했어야 했다. ⓐ의 차원에서 '덜 성리학적인 성리학자의 선례' 내지는 '중앙 엘리트가 원하는대로 잘 돌아가지 않은 사례'를 들어 '그 시대가 그 만큼 성리학적이냐'라고 질문을 받거나, 심지어 ⓐ를 근거로 ⓒ를 이끌어내, "그 시대는 아직 불교or다른 사상이 '강한' 시대 아니냐"(사상 사조 뒤에 '강하다'는 서술어는....솔직히 조금 괴롭다.). 식의 패턴을 다수의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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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니, '조선은 유교국가or사회다'...혹은 그에 미진했으나 점차 그렇게 변화해 갔다.. 내지는 유교국가or사회가 아니다. 모두가 다... 그 개별 작업들의 지적 성취들과는 별도로. 근본적으로 '같은 현상'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경우가 너무 많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건 어딜가나 마찬가지지만, 내 전공 관련해서는 이 문제에 유독 만연해있다는 뜻이다.(당연히 내가 잘한다or잘했다는 뜻도 아님.. 나보다 훨씬 대단하고 성실하고, 그에 값하는 충분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분들께도 이 문제가 예외가 아니더라. 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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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쓰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거듭, '우리가 정말 같은 대상or층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되짚어보는게 정말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 만큼 남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읽는 일이 연구의 실무적인 차원에서도 정말 중요한 일이며... 좀 놀라울만큼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반성적으로) 곱씹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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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논 쓰던 시기, 어떤 날의 일기장 비스끄므레한 노트를 보고 생각이 나서 써 본다.
* 옛날에 썼던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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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작년 하반기 쯤에 어디다가 끼적였고, 그 이후 언제쯤인가 트위터 쯤에다가도 비슷하게 휘갈기고 잊어버린 메모였는데, 더 놔두면 아주 잊어버릴까 싶어 생각난 김에 여기다가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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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척화파를 비롯한 '당장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신념윤리 실천자'들에 대한 제일 독한 비난은, "솔직히 척화파들은, 설마 저런다고 정말 죽지는 않겠지 싶은 안일한 만용을 부린 게 아니었겠냐" 라고 생각한다. (그 응용으로 '실제로 척화파 중에 죽은 사람이 몇이나 있냐'도 있다) = 어느쪽이든 그에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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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든 누구든, 어떤 '래디컬한 정치가 겸 사상가'에 대한 발표 자리에서, 질문자나 토론자 등이 "사상가의 물질적인 이익추구 욕망"에 대해 지적을 할 때, 발표자인 사상사 연구자께서 눈에 띄게 난감해하거나, 혹은 날을 세워 적대적으로 대응하시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목격의 순간마다 작게나마 유감(정말 이따금은 실망)을 하게 된다. 그 방어적-적대적 대응을 통해, '사상가들의 명예회복'이라는 본심을 들켜버리신 것이 아닌가 싶어지기 때문이다.(물론.. 후술할 바와 같이 '본심'이 무엇이냐와 그 연구의 가치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실망' 이라고 해 두자. - 이게 더 가혹하나싶기도 하지만;; 암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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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답해야 했는가. 정답이야 있겠냐마는, 내 '취향'에 맞는 대답은,(어쩌면, 연대 학풍?에도 모순되지 않는 답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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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의 정치경제적인 기반이나, 그로부터 출발된 속류 욕망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행동의 동기를 따진다면 그에 가까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번에 제가 말씀드리는 주제는, 그 사상가의 지적인 활동이 '어떤 동력(욕망)으로부터 추동되었는가'가 아닌, 그 욕망을 위해서 그 사상가가 '하필' 특정 언어를/논리를 채택하게 된 이유와 맥락에 대한 문제임을 다시한번 강조드리고자 합니다"
→상기한 대답이 유별나게 좋은 정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내 취향에 가까운 답변 방향인데, 어쨌든 만나기는 어려운 답변이라 좀 아쉽게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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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동기로서 특권의식이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학술이나 사상적 표현이, 그러한 설혹 욕망을 실현, 혹은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더라도)....그와 별도의 차원에서 사상적 행위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방향의 답변을 자주 만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건대, 사상가로 대표되는 개인의 학술활동에 담긴 '진정한 동기(심지어 '선의와 악의'로 구분되는 윤리적 가치)'을 찾고자 한다는 전제가, 사상사적 방법의 지지자께도/(선후배들 사이에도 종종 계시는) 사상 무용론자께도 모두 공유되고 있는 탓이 아닐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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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서 그런 '주된 동기/부차적 동기'같은게 그닥 분별되기도 힘들고, 막상 그 '개인 차원의 동기'가 그의 정치/사상적 행위를 설명하는 절대적인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입장에서, 역시나 작은 유감을 가지게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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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컨대, 척화파의 주장이, 주화파 논자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증오감을 기반으로 도출된 것임이 '빼도박도않게' 증명되는 문헌이 어디선가 새로 발굴된다고 가정을 해 보자.. 물론 척화파 연구의 아주 흥미로운 맥락을 더해주는 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딱히 그렇다 해도, 척화파의 주장이 가진 연구 대상으로서의 정치적/사상적 가치가 (그 풍부함이 보충됨으로써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크게 떨어질거라고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가의 저술 동기로서의 사적 욕망-사익 추구의 문제는, 그 저술을 풍부하게 이해하는(때로는 그 성격을 새롭게 부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해당 저술을 분석하는 '절대적' 잣대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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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 관련은 내 전공과 무관한... 사실상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분야이지만, 어쩌다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생각이 나서 메모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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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경 작성
2023. 8. 6 약간 다듬어서 새로 올림.
* 요즘 고민중인 것.
: 단장취의와 독해의 다변성 문제.
어떤 사상가에게든 복합적인(때로는 언뜻 보기엔 상충되는) 요소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고, 특히나 주희같이 써 놓은 저술의 분량이나, 그 저술의 권위가 둘 다 거대해지기 시작하면, 같은 주희 저술군 내에서도 이렇게 볼 부분과 그 반대로 볼 부분이 이리저리 나와버리기까지 한다.(조선시대 들어, 주자어류를 논할 때, 그 내용을 단장취의하지 않게끔 조심하라는 감계가 단서처럼 붙어 떠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은 저술이 하나 뿐이라도, 그 '해석'의 범주에서 견해가 엇갈리기 마련인데, 저술 자체가 압도적으로 많아버리기까지 하니, 이제는 '문자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유학자들마저도 저마다 다 서로 다른 할 말들이 있으신 것이다.
이런식의 '저자와 독자의 간극'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이걸 '간극이 있었다(항상 있었다)'는 식으로 매듭짓는 것 만큼 시시한 말은 없다... 결국 역사학(최소한 한국 전근대사?)연구에서 이를 의미있는 논의로 격상시키려면
ⓐ 그 독해의 간극이 발생한 핵심 결절점이 무엇이었는지,
ⓑ그 포인트에서 각자의 독자들은 왜 서로 다른 해석을 지지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만들어진 서로 다른 해석이 제도 수립 등의 단계에서, 2차 3차적 입장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장기적 흐름에서, 결국 이러한 독해의 흐름은 어떻게 귀결되었으며, 종합적으로 그 전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이런 문제가 더 따져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
종래 많은 연구들에서는(결국 이 이슈에 대해 기본 감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해당 저자(=주희)의 입장을 하나로 요약가능한 것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그 이후의 독해에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한 쪽의) 이유 있는 오독' 심할때는 '(둘 다)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정도로 메꾸는 경향이 있었던 듯 싶다. '둘 다가 철저한 주자학자인데, 주자학에 대한 계승의지에도 불구하고 (독해란건 본디 아전인수라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아전인수'가 발생했다는 점은 그리 만족스럽게 파고들어진 것은 아닌것 같다.
.. 그게 아니면, 독해의 다변화가능성을 건너뛰고 재빠르게 '현실 정치=즉 정쟁 목적', 다시말해 정쟁의 수단이었다는 식으로 논의를 굳혀버리는데.. (사실상 노론/남인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역사학계 연구들이 약간 그런 구도로 디자인이 되어 있다).. 그건 그거대로 중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앞서부터 말한 '독해의 다변화가능성'은 결국 직면하지 않고 돌아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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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를 나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래의 프로세스가 필요한 듯 하다.
① 일단, 해당 사상가의 저술 내에, 실제로 언뜻 문자적으로는 모순되는 듯한 발언들이 병존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힌다.-그게 '문자적으로는 모순될 수 있음'을 일단 열어두는게 포인트.
(필요하다면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된 저술상 맥락을 구절별로 복원을 시도해본다)
② 그 안에서 조선 전기 사상가들이 어떤 지점들에 '각자' 착목하여 사상적 입장, 및 이를 근거로 한 제도 정비의 방향을 제시했는지를 정리한다.
(사실 조선후기라도 상관없지만 '제도화'문제까지를 따지기엔 전기가 더 설명하기 유리하다는 판단.)
③ ②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이견들을 야기했는지를 포착한다.
(우리가 상상가능한 조선 유학사 전개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일 것이다.. 조선 전기 기준으로, 대부분, '니가 주희에 대해 뭘 안다고'식으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실제 제도에 대한 논의이므로, 하지만 이 또한 깊게 따져보면 각자가 생각한 주자학에 대한 서로 다른 규범적 이미지가 엇갈린다)
④ 그 결과, 해당 제도가 장기사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정리하고, 그것이 ①~③의 사안들을 감안할 때 어떻게 종합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본다.
(사상적 자원의 전유? 같은 말이 떠오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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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 후속 논문을 뭘 쓸까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일단 학위논문 이전에 발표를 해 버려서 '빚을 갚는' 투고 건이나, 그 외에 여러 이유로 '써야만 하는 글'을 제외하고라면.. 아마도 이 주제가 가장 먼저 쓰여지지 않을까 싶음.. 오늘 아침에 결정된 것을 기념하며;; 얼기설기 메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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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어찌 보면 아이디어의 노출일수도 있는데,

ⓐ 실제 '이러한 도식'하에 넣어서 설명할만한, 구체적 사례는 글에 쓰지 않은 채 따로 있음. 사실 '큰 틀에서의 구도'보다도 '그래서 무엇을 통해 이걸 보여줄거냐'가 훨씬 중요한 사안.. 그건 나중에 논문이 되면 그 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그럴 수 있을 것인가)...
 
ⓑ 굳이 페북에다 출간도 안 된 연구 아이디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예민한 분들은 항상 '이러다가 연구 주제 빼앗긴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에서 '말 안했다고 말한' 내 소재가 아니라도, 누가 좀 제발 이 도식으로 된 논문 좀 (특히 조선시대-더 특히 양란 이전의 사상사 분야에서) 많이 좀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임... '누군가의 정확한 독해가 있음'을 전제한 서술도, 반대로 '정치적 목적'하의 대립으로 환원시키는 것도 (거칠게 말해 죄송하지만) 살짝 넌덜머리가 나서 그럼.(* 내가 그렇지 않게 잘 썼다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쓴 글부터 내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뜻)
 
ⓒ공식에다가 x y값만 다르게 대입할만한 좋은 사례 있으시면, 마음껏 많이 가져다 쓰셔서 많이 써 주십사..
- 물론.. 실제로는 '적절한 사례'를 찾아내는게 제일 어려움.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 내셨다면, 추후 인용으로 사례하겠습니다(←하나도 안 매력적인 제안;;)
 
 
** 추기2
결국 제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언어맥락주의'의 전통 그 자체에 접속한 구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의 설명에 상당히 착안했음을 초장부터 밝혀둔다.

.한국사 연구에서 (휘그적 전통에 준할 만한) '역사성을 결여한 입장'의 전통도, '반실증주의의 도전'도, 진지하게는 만나지 않은 게, 언어맥락주의적 실물 연구를 하기가 어려운 난관이라고 보는데.....그 중에서 어쩌면 유교/성리학 등을 은연중에 '본질주의적' 입장으로 접근해왔던 연구들에 대해서만큼은,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해봄직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 단 그 경우라고 할지라도, 앞서 말한 것 처럼, '정치적 목적(정쟁을 위한 수단or그 외 특별한 제도운영론 등을 염두에 두고, 그 이념적 권위를 위해 차용된 수단)'으로 수단적 설명을 시도하는 연구 전통과의 선을 명확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이미 한국사 내에서 아주 넓고도 두터운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이쪽으로 설명가능한 부분에 대해, (당연히 안 다룰수도 없겟지만) 그 ''비중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면''.... 언어맥락주의는 물론이고, 그냥 '복수의 독해법이 공존할 가능성' 자체가 전체 논지에서 거의 불필요한 사족이 되어버리게 된다.

"특정 제도를 만들고 싶어서.. 내지 정쟁(키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같은 학술 외적인 의도성을 인정해버리는 순간...혹은 그 의도성의 문제를 도외시해버리는 순간.. 정말 거칠게 말해 '주희의 생각은 하나로 정리가 가능하지만,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 개별 사상가들이 일부러 꼬아 읽어서 해석이 갈린 거다'고 몰고가도 그만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즉 본질주의적 사상사 이해에 대한 타격감을 전혀 주지 못하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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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도 추가로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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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한국사학자들이 '이론을 모른다'는 핀잔을 듣는 것도 이젠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솔직히 대부분은 다 공감하는 문제제기지만, 개인적으론 그 찬반과 별도로 그 말이 (나를 포함한) 한국사 전공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오해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좀 있다. 그에 대해 내 스스로부터가 깝깝함을 느껴 이런저런 메모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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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생각에, 적어도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있어) '이론을 안다/모른다'고 하면, 세 가지 정도에서 문제시되고, 순응/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 어떤 권위 있는 이론서를 세미나 등을 통해 열심히 읽었느냐,
ⓑ 이를 논문 초장에 연구 가치를 설명하는 란에다가, "본 연구는 이러저러한 관점과도 부합한다." 식으로 써 붙여 두었느냐,
ⓒ 더 신랄하게 말해, 서론 후반부 <연구 방법> 항목 쯤에다가 각주로 그러한 권위있는 해외 문건들을 많이 달아 두었느냐...
... 물론 셋 모두가 나름대로 '이론을 소비하고 또 지향하는 방법'임은 분명하고, 동시에 앞으로 후술할 '이론화의 조건'을 본격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 쳐가는 절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 대학에서, 일반적인 국사학의 학제상 훈련을 받은 (나 같은) 분들이 (내가 그러고 있듯) 자주 놓치게되는 부분은  ⓐ~ⓒ가 아닌 딴 부분에 있다.. 그 점이 문제라고 생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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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사 전공자들 이론 잘 모른다' 손가락질하는 이야기도 정말 짧게 쳐도 수십년 째 나오던 얘기다..
그에 대해서 꽤 오랜시간, 그 세대의 기성-원로 학자군에서는 '이론을 추수하지 않는 게 한국사 전공의 정체성'이라고 반발하고, 그 와중에 그 세대의 주니어 연구자들은 몰래몰래-각자 모여(?) 연구서 열심히 읽어나가고.. 이런 역사의 반복도... 적어도 내가 증언으로, 그리고 여러 '방법적 시론'형태의 글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바.. 거의 수십년째 반복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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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이쯤되면 좀 가슴을 펴도(?)좋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의 의미에서의 '이론 공부'는 (쌩쌩한 업데이트가 느릴 뿐/그리고 한국어 번역에 의존할 뿐) 국내 연구자들이 안 보는게 아니다. 그냥 티를 안(못) 내는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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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에도, 그로인해 한국사 전공자들이 '이론에 무심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도의 이야기로 이론의 문제를 '퉁 치고 넘어가느라' 정말로 이론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외국인 이론가들 책을 많이 읽었냐는 것도 모두 부차적인 문제다. 그냥 여러 (정말 훌륭하신 많은 선학 선후배들이 아닌, 나 같은 고만고만한 필부 수준의) 한국사 연구자들 자신들이 아래와 같은 '초보적인'문제에 관심들이 너무 없다는게 문제다. 
모두 나 같은 필부도 다 아는, 짧게 말해 '서론-연구사 정리를 제대로 좀 하고, 논지를 좀 일관되게 가져가라'는 뜻으로도 요약가능한 문제들이다. 그래도 자세히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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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연구는, 좋든 싫든 '시대'에 대한 거시적 전망을 해당 장르의 공통된 목표로 삼고 있고, 그 만큼 이를 다루어 온 종래 전망에 대한 비평적인 아이디어를 (계승을 택하든, 수정 보완을 택하든) 표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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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대로 된 연구를 통해 제기된 주장(서사)은, 필연적으로 선대의 거시적 전망/미시적 관찰에 대한 일부분의 계승, 그리고 그 반대편에 대한 반대를 내포하게 된다. 
만일 계승을 표방하고(+그럼에도 A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고 덧붙이며 그러니 A로 논문을 쓰겠다며) 끝낸 소박한 경우라고 해도, 그 계승 대상인 선행자가 반대한 전망을 함께 반대하겠다는 입장이 당연히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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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우에 따라 '절충'을 택할 수도 있다. 이제 그럴 때는, 종래의 '절충되지 않았던 결과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몇배는 더 까다로운 비평을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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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국 서론에서의 관점 정리든, 본문 서술상의 상세한 서사 제시든 간에, '하나를 주장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머지 하나를 주장하지 않는다(혹 반대한다)'는 것임을 반드시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냥 자료상 나오는 이런저런 성격의 사안들을 모두 다 노출하고, '복합적 현상' 쯤으로 뭉개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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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이걸 잘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고, 나도 내가 쓴 논문들 보면 아주 화딱질이나 속이 다 뒤집어질 지경인데..
앞서 1)~4)부터가 별로 선행되지 않은 채, '이것저것', 양립불가능한 사안, 양립불가능한 설명들을 모조리 집어넣어둔 채,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다'고 마무리하고...결정적인 견해를 밝혀야 할 순간조차 '많은 이야기가 나왔고 모두 다 중요한 이야기들이다'쯤으로 뭉개놓는 일들이, 멀리 볼 것 없이 당장 내가 쓴 논문들조차도 썩 자유롭지가 못한 실정이니...
이게 반복되는 상황에서 '이론'이 ⓐ~ⓒ의 의미로 열심히 소비되어본들 무슨 소용인가 싶고.. 한 1년 전쯤에 새로 배운 단어로, 결국 Name-dropping 이 어디 별거냐 싶기까지 한 기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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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나온 내 박사논문에 연계된 후속/보완 논문 투고를 준비하다보니, 내가 봐도 내가 쓴 글들이 너무 깝깝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이미 잘 하고 계시는 수많은 분들이 아닌), '나 같은 사람들'은 좀 열심히 잘 좀 해야하지 않겠냐. 싶은 마음에 주절주절 길게도 메모를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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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들께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리게 되어, 본문 아래에 추신을 달아두자면.
 
'거시 전망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한다'는 것은, 그 전망이 '참신성'이 있느냐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정말로 딱히 새로운 의견이 없어도 좋다. 스스로가 "나는 우리 업계에서 통용되던 관습을 계승하여, 이를 확대재생산 하고자 하는 입장이다"라고, 다른 방향에서 스스로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구설의 계승-지지 또한 (명확하게 서 있기만 하다면) 훌륭한 '이론적 입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비록 신선함이 부족한 게 아쉬울지언정, 구설을 '명시적으로', 합리적 근거에 입각해 일관된 논리로 지지하는 쪽이....
오히려 내 관점에서는.. 스스로는 (자신의 전망은 커녕) '구설 지지조차도' 할 생각 없이... 구설 및 이를 지지하는 행위를 덮어놓고 깎아내리는 법만 아시는 경우보다는... 학문적으로 명확히 더 건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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