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곳에 연구실적을 제출할 때, "대표 업적"을 체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 무난하게 박사논문이나, 그와 가장 유관한 논문을 체크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커리어를 대표하는 글이라면 그 글이고, 내 많은 작업들이 이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솔직히' 진정성있게 내가 '아끼는' 논문을 꼽으라면, 두 편의 논문을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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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2023). 조선 초기 지방지배와 향촌교화에 대한 연구와 쟁점. 역사와 실학, 80, 197-256.
ⓑ이상민. (2024). Unanticipated Achievements: The Diffusion of Finger Severing and Relevant Discourse at the Joseon Court in the 15th–16th Centuries. Korea Journal, 64(3), 15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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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이 대단한 마스터피스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 논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러모로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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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문은, 연구사 비평 논문인데(나름대로는 '사학사'논문이라고 의미부여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식민지시기부터 지금까지 15세기 지방사회사는 국가 지배로 이해하거나// 국가+사회 길항으로 이해하거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당사자가 이를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 중 한가지 전제를 따랐다).그러다 70~90년대 말에는, 국가+사회 길항으로 이해하는 전통에 따라 국가의 한계, 국가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연구들이 조선 초 사회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90년대 말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연구들은 70-90년대 말 까지의 연구들에 대한 비판이 유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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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이후의 연구들은, 70~90년대 사회사 연구들이 중앙-지방 세력간 갈등에 주목하였던 것을 비판하고, 15세기 이루어진 지방지배의 제도 내적인 논리에 집중한다. 나아가 15세기 조선이 그 체제의 공적 역량이나 지방 세력과의 공조 등을 통해 안정적이고 역동적인 지방지배질서를 창출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의 비판이 (스스로는 표방하지 않았지만) 종래의 국가의 집권력을 강조한 전통을 잇고 있으며, 종래 연구의 실증적 미비함을 보완하였다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국가 및 중앙 조정의 논의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측면들이 있는 만큼 종래 비판적으로 보았던 사회사 연구의 문제 의식 또한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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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의 내가 그 때까지 고민했던 흔적,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내 필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상당히 날것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내 마음대로 분류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내가 솔직히 이해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최대한 표현해보고자 했다. 박사논문 단행본 작업에 합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의 단행본 작업의 '도론' 정도로 재정리하고 싶은 작업이기도. 나중에 이 분야로 박사를 받은, 그전까지 모르던 사이였던 L선생님이, 이 논문에 재미있는 지점이 있었다고 콕 집어 말씀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어느때보다 기쁜 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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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문은 작년에 쓴 단지(斷指)에 대한 영어 논문이다. 나름의 '버킷 리스트' 같은 느낌으로 영어로 내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영어로 내길 잘했다/괜히 영어로 냈나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어로 소재적으로든, 문제의식상으로든 좀 더 확장해보고 싶은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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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내용이다.
15세기 지방통치/사회사는 거의 언제나 관권/국가의 압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특히 '유교화'문제에 있어서 16세기 이전까지는(최근 연구에서는 16세기 이후조차도) 중앙 유학자 관료의 기획에 따라 지방이 '감화' 되었다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5세기 사례를 살펴보면, '교화/감화/동화'는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단지(斷指)가 서북지방의 토착 의료 풍습임을 밝혔다. 조선 초 조정에서는 이러한 단지를 '효행의 모범 사례'로 (약간의 찝찝함을 감수하고) 홍보하였고 이는 외견상 '성공적으로' 전국화되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달랐다. 같은시기 단지를 주로 행했던 민간의 비 엘리트층에서는 정신병을 치료하는 처방의 출처로 단지 케이스를 소비하였다.
결국 전국적으로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은 전국의 효자가 한 일이 아니냐면 그건 맞다. 하지만 '선대의 효행사례를 통해 무지한 백성들의 효심을 감발(感發)하게 한다'는 중앙관료들의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의도치 않은 성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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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이디어 추수적인 글이다 보니, 한국어로 내면 불필요한 '눈치'를 초고 단계부터 많이 보다가, 글이 밋밋해질까 싶어 영어로 내었었는데, 막상 대표업적으로 제출하지 못하게 되니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것도 다 이 글의 운명이려니..생각하고 있다.
20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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