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고민중인 것.
: 단장취의와 독해의 다변성 문제.
어떤 사상가에게든 복합적인(때로는 언뜻 보기엔 상충되는) 요소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고, 특히나 주희같이 써 놓은 저술의 분량이나, 그 저술의 권위가 둘 다 거대해지기 시작하면, 같은 주희 저술군 내에서도 이렇게 볼 부분과 그 반대로 볼 부분이 이리저리 나와버리기까지 한다.(조선시대 들어, 주자어류를 논할 때, 그 내용을 단장취의하지 않게끔 조심하라는 감계가 단서처럼 붙어 떠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은 저술이 하나 뿐이라도, 그 '해석'의 범주에서 견해가 엇갈리기 마련인데, 저술 자체가 압도적으로 많아버리기까지 하니, 이제는 '문자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유학자들마저도 저마다 다 서로 다른 할 말들이 있으신 것이다.
이런식의 '저자와 독자의 간극'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이걸 '간극이 있었다(항상 있었다)'는 식으로 매듭짓는 것 만큼 시시한 말은 없다... 결국 역사학(최소한 한국 전근대사?)연구에서 이를 의미있는 논의로 격상시키려면
ⓐ 그 독해의 간극이 발생한 핵심 결절점이 무엇이었는지,
ⓑ그 포인트에서 각자의 독자들은 왜 서로 다른 해석을 지지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만들어진 서로 다른 해석이 제도 수립 등의 단계에서, 2차 3차적 입장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장기적 흐름에서, 결국 이러한 독해의 흐름은 어떻게 귀결되었으며, 종합적으로 그 전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이런 문제가 더 따져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
종래 많은 연구들에서는(결국 이 이슈에 대해 기본 감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해당 저자(=주희)의 입장을 하나로 요약가능한 것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그 이후의 독해에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한 쪽의) 이유 있는 오독' 심할때는 '(둘 다)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정도로 메꾸는 경향이 있었던 듯 싶다. '둘 다가 철저한 주자학자인데, 주자학에 대한 계승의지에도 불구하고 (독해란건 본디 아전인수라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아전인수'가 발생했다는 점은 그리 만족스럽게 파고들어진 것은 아닌것 같다.
.. 그게 아니면, 독해의 다변화가능성을 건너뛰고 재빠르게 '현실 정치=즉 정쟁 목적', 다시말해 정쟁의 수단이었다는 식으로 논의를 굳혀버리는데.. (사실상 노론/남인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역사학계 연구들이 약간 그런 구도로 디자인이 되어 있다).. 그건 그거대로 중요한 부분이지만, 적어도 앞서부터 말한 '독해의 다변화가능성'은 결국 직면하지 않고 돌아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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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를 나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래의 프로세스가 필요한 듯 하다.
① 일단, 해당 사상가의 저술 내에, 실제로 언뜻 문자적으로는 모순되는 듯한 발언들이 병존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힌다.-그게 '문자적으로는 모순될 수 있음'을 일단 열어두는게 포인트.
(필요하다면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된 저술상 맥락을 구절별로 복원을 시도해본다)
② 그 안에서 조선 전기 사상가들이 어떤 지점들에 '각자' 착목하여 사상적 입장, 및 이를 근거로 한 제도 정비의 방향을 제시했는지를 정리한다.
(사실 조선후기라도 상관없지만 '제도화'문제까지를 따지기엔 전기가 더 설명하기 유리하다는 판단.)
③ ②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이견들을 야기했는지를 포착한다.
(우리가 상상가능한 조선 유학사 전개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일 것이다.. 조선 전기 기준으로, 대부분, '니가 주희에 대해 뭘 안다고'식으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실제 제도에 대한 논의이므로, 하지만 이 또한 깊게 따져보면 각자가 생각한 주자학에 대한 서로 다른 규범적 이미지가 엇갈린다)
④ 그 결과, 해당 제도가 장기사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정리하고, 그것이 ①~③의 사안들을 감안할 때 어떻게 종합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본다.
(사상적 자원의 전유? 같은 말이 떠오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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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 후속 논문을 뭘 쓸까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일단 학위논문 이전에 발표를 해 버려서 '빚을 갚는' 투고 건이나, 그 외에 여러 이유로 '써야만 하는 글'을 제외하고라면.. 아마도 이 주제가 가장 먼저 쓰여지지 않을까 싶음.. 오늘 아침에 결정된 것을 기념하며;; 얼기설기 메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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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어찌 보면 아이디어의 노출일수도 있는데,

ⓐ 실제 '이러한 도식'하에 넣어서 설명할만한, 구체적 사례는 글에 쓰지 않은 채 따로 있음. 사실 '큰 틀에서의 구도'보다도 '그래서 무엇을 통해 이걸 보여줄거냐'가 훨씬 중요한 사안.. 그건 나중에 논문이 되면 그 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그럴 수 있을 것인가)...
 
ⓑ 굳이 페북에다 출간도 안 된 연구 아이디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예민한 분들은 항상 '이러다가 연구 주제 빼앗긴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에서 '말 안했다고 말한' 내 소재가 아니라도, 누가 좀 제발 이 도식으로 된 논문 좀 (특히 조선시대-더 특히 양란 이전의 사상사 분야에서) 많이 좀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임... '누군가의 정확한 독해가 있음'을 전제한 서술도, 반대로 '정치적 목적'하의 대립으로 환원시키는 것도 (거칠게 말해 죄송하지만) 살짝 넌덜머리가 나서 그럼.(* 내가 그렇지 않게 잘 썼다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쓴 글부터 내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뜻)
 
ⓒ공식에다가 x y값만 다르게 대입할만한 좋은 사례 있으시면, 마음껏 많이 가져다 쓰셔서 많이 써 주십사..
- 물론.. 실제로는 '적절한 사례'를 찾아내는게 제일 어려움.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 내셨다면, 추후 인용으로 사례하겠습니다(←하나도 안 매력적인 제안;;)
 
 
** 추기2
결국 제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언어맥락주의'의 전통 그 자체에 접속한 구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의 설명에 상당히 착안했음을 초장부터 밝혀둔다.

.한국사 연구에서 (휘그적 전통에 준할 만한) '역사성을 결여한 입장'의 전통도, '반실증주의의 도전'도, 진지하게는 만나지 않은 게, 언어맥락주의적 실물 연구를 하기가 어려운 난관이라고 보는데.....그 중에서 어쩌면 유교/성리학 등을 은연중에 '본질주의적' 입장으로 접근해왔던 연구들에 대해서만큼은,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해봄직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 단 그 경우라고 할지라도, 앞서 말한 것 처럼, '정치적 목적(정쟁을 위한 수단or그 외 특별한 제도운영론 등을 염두에 두고, 그 이념적 권위를 위해 차용된 수단)'으로 수단적 설명을 시도하는 연구 전통과의 선을 명확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이미 한국사 내에서 아주 넓고도 두터운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이쪽으로 설명가능한 부분에 대해, (당연히 안 다룰수도 없겟지만) 그 ''비중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면''.... 언어맥락주의는 물론이고, 그냥 '복수의 독해법이 공존할 가능성' 자체가 전체 논지에서 거의 불필요한 사족이 되어버리게 된다.

"특정 제도를 만들고 싶어서.. 내지 정쟁(키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같은 학술 외적인 의도성을 인정해버리는 순간...혹은 그 의도성의 문제를 도외시해버리는 순간.. 정말 거칠게 말해 '주희의 생각은 하나로 정리가 가능하지만,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 개별 사상가들이 일부러 꼬아 읽어서 해석이 갈린 거다'고 몰고가도 그만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즉 본질주의적 사상사 이해에 대한 타격감을 전혀 주지 못하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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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도 추가로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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