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하단 링크 참조)

 

이 책의 성근 구성이나, 언뜻 보면 교과적인 '당연한' 이야기가 그 자체로 불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서평의 기준은 '내가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기준을 맞춰 보려는 편인데, 솔직히 나더러 쓰래면 이 정도 수준의 구성을 갖추기도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 앞서, 책의 내용을 매개로 이 분야 연구의 관행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또한 '지는 얼마나 잘하냐' 싶은 부분이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노력해서라도 안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저자께는 이자리를 빌어서나마 감사의 마음을 다시금 전해본다.

 

2025.2.16

 

https://www.webzineriks.or.kr/post/%EC%A1%B0%EC%84%A0%EC%A0%84%EA%B8%B0-%EB%AC%B8%EB%AA%85%EC%9D%98%EC%8B%9D-%EC%9D%84-%EB%8B%A4%EB%A3%AC%EB%8B%A4%EB%8A%94-%EB%82%9C%EC%A0%9C-%EC%A0%95%EC%B6%9C%ED%97%8C-2024-%E3%80%8E%EC%A1%B0%EC%84%A0%EC%A0%84%EA%B8%B0-%EB%AC%B8%EB%AA%85%EC%A0%84%ED%99%98%EA%B3%BC-%EB%8F%99%EA%B5%AD%EB%AC%B8%EB%AA%85%EC%9D%98-%EC%A7%80%ED%8F%89%E3%80%8F-%EC%84%9C%ED%8F%89-%EC%9D%B4%EC%83%81%EB%AF%BC

 

조선전기 ‘문명의식’을 다룬다는 난제- 정출헌, 『조선전기 문명전환과 동국문명의 지평』 서

들어가며     조선 왕조 성립의 역사적 의미라는 문제는 한국 전근대사를 다루는 한국학 분야의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시대에 대한 긍정/부정적 기대감의 과열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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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따지려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영역까지 따져야 하는 책이라, 오히려 파편적인 감상을 옮겨보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1) 솔직히 처음 읽을때는 목차부터 내용까지, 너무나 산만하다고 느꼈는데, 두번째 세번째 읽을 때 되어서야 이거구나. 싶은 감탄이 나오는 책이다. 오히려 (시간 순서대로 쓰여진) 통사적 역사서술을 읽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처음에 더 헤메게 된다.

제목을 보면서도 놓치게 되는 것인데, 이 책의 핵심은 '장인과 닥나무'로 쓰여진 역사라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닥나무'를 역사서술 주체로 삼는,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적극 차용하여 글을 구성해낸 것이 파격적이다. 도대체가 '닥나무'가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그에대해 저자는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대신, 책 전체 구성과 내용을 빌어 이를 서술해냈다. 그게 저자의 대단한 기량이자, 그러한 이론적 전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읽기의 난관이 될 수도 있다.

 

2) 차라리 방법론적인 타당성, 정밀함보다, 저자가 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였는가, 이는 가치있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는가에 주목하는게 생산적일 것 같다. '구 민중사'가 한동안 유행한 이후 대강 21세기를 전후해서 그 열기는 시들어갔다. 생활사의 유행, 여성사의 부흥 등의 여러 새로운 바람이 불었지만 (무엇보다 전근대) '비 엘리트의 역사'는 성립시키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은근한 회의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도 했다. 당연히, 다른 무엇보다도 자료의 문제 때문이다. 전근대 여성사 연구의 큰 비중을 왕실 여성 연구가 차지하고 있고, 최근들어서 그 비중이 더 높아져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같은 복잡한 길을 택하게 된 것도, 기지機智같은 가시화하기 난해한 개념을 채택한 것도, 여러 난관 속에서 '비 엘리트의 기술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분투의 방편으로 읽어봄직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민중사'의 새로운 트렌드를 열어낼 수 있을까? 그건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 어려운 과제에 기어이 성공해 냈다. 한국 전근대사 서술의 참신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저자에게도, 비 엘리트적 과학기술사의 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해 본다.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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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그럼에도” 덧붙여 말하자면, 최근 10년 내 읽은 조선시대 연구서 중, 가장 특이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관련 분야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책이라는 점은 또다시 강조해보고자 한다. 특히 연대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특정 장절이 '시기'를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을거라고 저절로 예상하면서 글을 읽게되는 나 같은 사람은, 처음 읽을 땐 멀미가 날 수도 있다. 목차를 아주 신중히 음미하고 읽지 않으면 특히 그렇다. 닥나무>장인>종이>지식>기술.. 이라는 순서가 해당 장의 테마로 설정된 가운데, 해당 장 내에서는 시점이 앞뒤로 상당히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사실 서술체계의 차원에서는 좀 혼란하고 산만하다고도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 책이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즉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중요한 메시지로 삼고 있다)는 평을 접하면서, 순간 갸웃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기별 특징을 귀납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일 수가 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일독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분명 이 책은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이 맞다. 다만 정돈가능한 변화의 “법칙” 내지 “경위”에 대해 다루는 책이 아닐 뿐이다. 따지자면 닥나무-제지기술의 변화상을 시기별로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역동성-다이내믹스 그 자체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고 있노라를 다루는 책인 것이다. 그게 이 책의 독특한 점이겠다. 새롭게 정리한 바를 다시한번 곱씹어본다.

 

2024. 1. 12

- 지난달에 다른 곳에 써 뒀던 것을 옮겨옴.

-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학회 웹진에서 1월 초 기한으로 요청받았고, (코멘트 일부를 살릴 순 있어도) 일단은 좀 더 진지한 형태로 써 볼 계획이다.(평가의 방향을 수정한다는 뜻은 아니고, 생각할만한 주제를 더 짚어본다는 뜻)

- 블로그를 잘 보고 있노라는 코멘트를 서평의 저자이신 모 선생님께 들었는데, 무척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진지하게, 어떤 이유에서든 재미있게 본 책만을 서평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아주 부끄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진짜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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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발간 직후에 곧장 사서 읽은 책이라, 뭐라도 메모를 남겨야지. 하던 결심은 한참 전부터 했었는데(여러번 밝힐테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코멘트를 달기가 참 쉽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많았던 주제라서,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지는 통에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참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담백하게 쓰긴 써야지 싶은 마음으로 감상평.. 이라기보다는 중언부언이나마 '추천의 변'을 써 본다.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득하는 것보다, 독자로 하여금 '질문'을 떠오르게 만드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개인적으로는 별로 크게 체감한 적이 없는 감정이다(그만큼 종래의 책이 안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반대가능한 주장'을 더 높이 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예외다. 읽는 동안 여러 방면의 '질문'을 생각해보게 된다.
제목의 절묘함이 아주 발군인데,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라는 제목을 책을 읽는 내내 정말 여러번 곱씹어보았다. '한국어로 본 한국사'도 아니고, '한글의 한국사'는 더더욱 아니고,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라는 제목은 책을 한번 다시 읽고 다시 보면 더 우러나는 측면이 크다.
내가 읽기에, '한문'으로는 한국사(-한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들의 모든 생각/감정들의 양상)을 다 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혼자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생각이 퍼져나간다. 과연 '한문'은 '한족 왕조의 역사'나마 제대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좀 엄격하게 말해 '문자'는 '역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언어로 따져봐도 '문어'는 누군가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일까. 온전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제대로된/온전성'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뭐라도 하려고 했던' 과거인들의 행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들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다.
분명히 두껍지 않은 교양서인데, 생각하고 읽을 수록 만만치 않은 책. 개인적으로는 '학술적 교양서'의 좋은 전범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다. 일독을 권해 본다.
 
 
2023. 11. 15

작업하면서 김용섭 선생의 논문을 좀 살펴보다, 갑자기 '필'이 받아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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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이 농민 전체를 위한 것이면서도, 그 중 대지주 중심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15세기에 대한 일견 오락가락한 설명이,  어쩌면 15세기 초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내지는 앞으로 제대로 더 설명해야 하는 핵심 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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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 '이중성'을 '이중적-다원적-복합적이다'라고 말하고 '때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시기를 한정하더라도) 일관되게 설명할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게 또 내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다. (물론 이걸 일관적으로 제시하게 되면, 시대의 복합성을 단순화했다든가/단선화시켰다는 비판이 반사적으로 등장하게 되겠지만, 최소한 '복합적이다'하고 말아버리는 상황보단 그게 낫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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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암튼 요새 한창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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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의 농서로서의 성격은 그것이 어떠한 농민층을 생산의 주체 또는 ‘표준농민’으로 삼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농사직설』은 국가의 권농정책, 국왕의 지시에 따라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건국 초기의 국가기반 확립. 세원 확대를 위한 농업생산의 증진을 위하여 편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농사직설』이 농업생산을 담당하는 전 농민층에게 그 지침서로서 이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 따라서 『농사직설』 에서의 생산의 주체는 국가재정을 위하여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전 농업생산자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봉건적인 지주경영과 자경하는 대농경영 소농경영을 함께 그 경제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농정책으로서 편찬되는 『농사직설』이 어떤 특정 계층만을 위주로 하여 편찬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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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농사직설』의 농업생산의 주체나 표준농민에 대한 관심은 특정 계층 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물론 『농사직설』이 그 기술 내용으로 보아 집약적인 소규모 경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 이는 농업생산자에게 경영확대의 길을 열어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전 농업생산을 운영해 나가려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생산자는 병작하는 양반지주. 농장경영자, 가작·자작으로 대농경영을 하는 자, 소농 상층의 부유한 대농층이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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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농사직설』이 여러 대목에서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하게 된다. 신전 개발은 이 시기 권농정책에서의 중요한 국면이었으며, 이 사업을 통한 농지 확대는 누구에게나 장려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업을 지원하고, 강제하고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이미 부유한 양반 지배층(대·중·소지주)이거나 최소한 소농 상층의 경제적 능력이 있는, 대농층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간을 통해서 농지를 확대하고 대토지 소유자가 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농지개발 정책은 주로 이들에게 의존했다. 농업정책의 기본이 그러하였으므로 『농사직설』은 그들의 경영규모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기술적 재정적 측면에서 그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터이다
...국가가 농업생산의 표본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농업생산을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것은 당시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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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농학사연구"(김용섭, 2009, 지식산업사, 100~101쪽)

 

2023. 2. 6

문득 책장을 보다가 학부때 읽었던 책을 무의식적으로 펼쳤는데, 요새 한창 생각하고 있는 주제와 비슷한 문장이 딱 나왔다. 암요, 월선생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요 엉엉 ㅠㅠ

최근들어 '국가or국왕'의 권위와 지배력 등을 강조하는 방식의 연구들이 주변에 많이 늘었는데(각 연구들에서는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어떤 방식이든 간에, 그 가치판단을 위한 비교군 설정을 신중히 해야한다는 생각..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전대와 비교해 강해졌다'는 한정적인 단서 하에서 의미를 부여하는건 몰라도, 그 이상의 결론으로 앞질러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 관행화된 것에 비해) 동의하기 힘든 시각이라고 생각해왔다.
(최소한 권력의 '종류'를 세분화하기 전까지는 특히나 그렇다)

 

근데 나름 학부때는(아마도 2010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는지는 아예 모르고 있었음. 심지어 밑줄까지 쳐 져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과거의 낯설음'에 대한 체감을..(근데 어쨌거나, 아래 구절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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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이 새로운 군주제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절대'군주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마치 그들이 무한한 힘을 지녔음을 선포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나, 실상 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무한한 힘은 물론이고 그 힘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절대군주는 단지 무한한 권력을 가질 권리만 요구했을 뿐이다. ‘절대적 ’(absolute) 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absolutus 에서 기원하였는데, 이 용어는 군주가 무한한 권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군주가 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곧 법 앞에서는 언제나 무죄 absolved from the laws라는 것), 따라서 통치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실행하는것은 법적으로 그 어떤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권력에 임의성을 부여하였지만, 그렇다고 군주가 실제적인 권력을 지녔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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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더러 우리가 생각하는 실제적인 권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실질적 권력의 결여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결과, 근대 세계체제의 초기부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적어도 1970년대까지) 존재해 왔던 장기적 추세 가운데 하나인 실질적인 국가권력의 느리고 완만한 성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1661-1715년에 재위한) 프랑스 루이 14세의 실질적인 권력을, 예컨대 2000년의 스웨덴 수상의 권력과 비교해 본다면, 실질적 권력의 측면에서는 2000년의 스웨덴 수상이 171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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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이매뉴얼 월러스틴 이광근 역, 2005, 당대),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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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군주 평전 시리즈 4권. 이 평전은 ‘이도’라는 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다. 사후의 칭송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행적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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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평전과 '균형잡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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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서술에서 특정 인물 등을 '미화와 폄훼 없이 중립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범위에서도 90년대 이후 아주 일상화된 슬로건이지만, 사실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특히 공들여 잘 쓰여진 서술일수록, 저자의 '관점'이 개입되기 마련이며, 그 '관점'에는 (저자 자신의 주장이 어찌되었든) 가치판단이 안 들어갈 수 없다. 
종래 이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되곤 한 것이 '공과론-양면성'서술이다. 다시말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보여주자는 방식의 접근법을 시도한 경우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엔 '공칠과삼'류의 분량-역점 배분의 문제 속에서 결국 한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어, 중립성을 확보하는데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다.(더군다나 세종은, 현대 한국의 조선시대 소비의 중심에 있는 특성상, 특히나 그에 성공하기 힘든 소재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중립적 서술을 그나마 성공시킬 수 있는 한 가지 고전적인 방법은, 서술 대상이 놓인 '역사적 조건-과제'에 역점을 두고 인물의 행적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결과적으로 해당 인물의 개성 내지 선택의 범주를 축소시키고, 해당 인물을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장본인'으로 나타내게 되기 마련이지만, 균형있는 서술을 이루어내기에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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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 판단컨대 '세종 평전'을 두고 저자가 시도한 '균형잡기'의 전략 또한 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론에서 명시하지는 않은 터라 아주 자신하긴 어렵지만), 저자의 '균형잡기'는 종래 '중립적 서술'의 장에서 자주 차용하던 '공과론-빛과 그림자'전략과는 분명 색채가 다르다. 저자에게 세종은 그 자체로 유능/무능, 선/악의 판단의 대상이기에 앞서,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시대적 과제에 '성실히'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은 예시지만, 저자가 세종의 통치 원칙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기점을 '1436년 가뭄-다시말해 세종의 의지 밖의 천재지변'으로 설정한 것은 아주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결국 최근의 '성군 논쟁'에 이은 여러차례 평전 작업들보다 나은 '균형'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도 그 선택을 통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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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에서 중요한 축으로 설정한 '권력과 이념의 대립'이라는 틀 또한, 언뜻 보면, ⓐ 이념이라는 조건 하의 권력 추구라는 선택.. 내지는, ⓑ 권력이라는 조건 하의 이념추구의 지향.. 등의 질적 층위구분을 연상시키지만, 저자는 둘을 굳이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어느쪽이 세종의 '본심/진면목'인지 굳이 밝히려들지 않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자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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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 세종의 인물평 또한, '성실성'으로 축약될 것인데, 사실 '성실성' 또한 (적어도 역사 서술의 영역에서) '개성'내지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한 인물의 특성으로서 잘 다루어지는 키워드는 아니다. ("성실한 사람이 불성실한 사람과 어떻게 차별화된 정치적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과문하지만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의미에서 저자의 작업을 정말 굳이 비판적으로 말해야만 한다면, 세종의 '개성'이 (종래의 여러차례 긍정-부정적으로 재현된 세종 상에 비해) 오히려 선명하지 않게 표현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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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러한 흐릿한 지점들을 모두 감내하였기에, 이 책이 그렇게나 오랜 시간동안, (심지어 최근 몇년 내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세종 평전' 작업 중, 단연 돋보이는 '균형'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종래의 세종 평전 작업과 명확히 다른 길을 간 작업인지라 '우열'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종래의 세종 평전과 '차별화된' 작업이라는 점 만큼은 아낌없이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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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吏曹)에서 아뢰었다. 일전 각 도에서 천거한 효자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자'를 몰라서[不解文字] 맡은 일을 감당하지 못할 자가 많으니, 효행(孝行)만을 취하고 재주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서 모두 동반의 벼슬을 내리면, 반드시 관직을 버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 빈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여러 해 동안 채용하지 못한다면, 권장하는 뜻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이들을 서울로 보내게 하고 몸가짐과 말하는 것을 동반·서반에서 관찰하게 하여 그 재주와 기량[才器]에 따라 채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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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45권, 성종 5년 7월 23일 병자 5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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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유학의 유행 이후, 유학자-관료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관념을 "(선한)본성으로부터 지식과 능력 등이 연역될 수 있다" 쯤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개인 차원의 도덕을, 직무에 필요한 능력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 태도"가 강화된 것이 그 이후 나타난 현상이라 설명하는 것은 그리 낯선 설명방식이 아니다. 
한국사를 기준으로 할 때, 고려 말부터 '경전에 밝고 덕행을 닦은 선비[經明行修之士]'가 정치가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그와 연결된 설명이다. 다시말해 품행이 충분히 '유학자답다'는 것을 해당 시기의 가이드라인에 맞게 납득시킬수만 있다면, 실무 능력은 차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대강 여말선초를 거쳐 발생했다는 것이다.

[* 단서 : 이와 같은 설명은, 신유학 도입 이전의 고려 인사제도가 실용적-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한 '공정한' 시스템이었으리라는 기대를 종종 야기하곤 하고.. 이따금은 그 분야 종사자들조차도 그 기대를 방조하게 되는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사료가 야기한 착시'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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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인용된 성종 5년 이조의 계문(啓文)에서 잘 보여주듯, 그러한 '믿음이 나타나기 시작한'것과, '정말로 그런 믿음만으로도 일이 돌아갔다'는 것은 완벽히 다른 문제다. 아무리 전근대 국가의 운영이라는게 매사가 주먹구구 식이라고 해도, 그리고 온갖 난해한 행정이 서리-향리 등에게 떠맡겨진 상태였다고 해도, 정말로 '능력'그 자체를 도외시한 채 돌아갈만큼 관료의 일이라는게 만만한 것일 리가 없다.
해당 자료를 통해 파악컨대, 지방에서 효자라는 이름만으로 뽑혀나온 이들에게 빈발했던 문제는 '문자'를 몰랐다는[不解文字]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자文字'란, 비슷한 시기 용례상 ⓐ'한문' 내지 ⓑ'한문으로 쓰여진 공문서' 쯤을 뜻하는데, 맥락상 후자에 가까워보이긴 하지만 단정짓기는 어렵다. 어쨌든간에, 관료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의 인물을 효행 하나만 보고 뽑았다가 난감한 일이 생겨난 경우가 많긴 하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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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제도를 운영해야하는 효율성의 강제력은 생각보다 강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식으로 주는 벼슬이래도 결국엔 시작은 참봉 역할에 그친다. 어찌보면 '효자로서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전문성의 효용을 추구해야 한다는 마땅한 강제력과, 덕행이 있는 이를 뽑아야 한다는 입장 간의 긴장은, 성종대 여러 차례에 걸쳐 발견된다. 사천 출신의 효자 최소하는 참봉 생활 하다가 경연관에 천거되는 사안으로 잡음이 있었고(성종 6/2/15), 

청주 출신 효자 경연(慶延) 같은 경우엔 효행으로 알려져 참봉으로 생활하다가 그 참봉 생활마저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한 것으로 유명해져, 성종이 친히 만나서 면접(?)을 통해 벼슬을 내리기도 한다.(성종 7/6/12. 이 때의 그 '면접'에서 경연이 준비한 멘트가, 너무 '준비된 대답'이라서 보다보면 좀 황당하게 보일 정도다.) 경연은 결국 이산 현감까지 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케이스는 많을래야 많아지기가 힘들다. 앞서 사천 출신 최소하 건에 대한 동부승지 이경동이, "효행은 잘 모르겠지만, 일처리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孝行則未可知也, 治事固無異於人者]"(성종 9/4/16)고 시큰둥하게 대꾸한 상황은 당연히 발생한다. 그 이후로, 경연, 최소하 같은 사례는 두고두고 '효자를 천거한 선례'로 몇 번 거론되고, 이후로 16세기에도 여러 차례 다시 '효자 천거'를 활성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지만, (적어도 내가 살펴본 바로는) 그 이후로는 '효자라는 이유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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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말 시니컬한 결론에 빠지는게 능사인 것인가. 펑퍼짐하게 본다면, 어쨌거나, 효자를 천거하라는 명령은 고려 초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고, 그조차 15세기 즈음에 좀 하다가 말아버리는 일이니, 모든게 다 거기서 거기인 듯도 싶다. 미시적인 역학에 집중하다보면, 결국 (사상/제도 따위로 설명되는) '거시적 추세'라는건 단순한 수식어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운영 차원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앞의 형세적인 역학-타산이며, 그 외에는 모두가 다 일종의 기만 쯤으로 보기가 쉽다는 뜻이다.

.'도덕적인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채용의 기준'으로 작동되기에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부도덕한 인간이 자리를 부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치 못한 귀결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쟁/탄핵의 논리로 사용되는 것'이 고려 말~조선시기 신유학자들의 목표였을까? 아마 아닐 확률이 클 것이다. 다만 성공/실패, 진보/퇴보에 대한 경직된 판단을 좀 미뤄두고 생각하면,  거시적 변화는 '예기치 못한 귀결'의 형태로 설명될 때 더 의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기도 한다. 세상사라는게, 진퇴로 단순화되기엔 복잡한 것이지만, 무작정 말초적/미시적인 복잡성으로 빠져드는 것이 꼭 해답인 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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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력'내지 '효율'을 정의내리는 건 생각보다는 복잡한 문제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사실 우리가 '신유학적'이라고 말하는 도덕주의 등 원칙도, 당시 신유학자들의 판단에서는 현실 정치에 도움이 되는 '효율적 정책'으로 파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어디까지나 편의상 직무 수행 능력과 직결되는 부분을 효율이라고 말하였다.]

'세조'라는 주제는 조선 초 전공자들에게 상당히 큰 쟁점에 속한다. 여기서 쟁점이란, 정말로 세조를 주제로 한 논쟁이 가시화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세조에 대한 기본 평가가 학자나 학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고, 그 평가의 향방이 조선 초의 정치-제도-사상사 전반을 평가하는 기준과도 큰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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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계유정난을 '구국의 용단'인양 평가하는 학자는 (적어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세조 이후에 벌어진 여러 사업들에 대해, (전후의 국왕들과 비교해) 평가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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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그 평가는 결국 '치적이냐 파행이냐'로 단순화된다. 그 '치적'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경우, 세조대 벌인 제천제, 단군 사당 신설, 자국사 편찬사업과 같은 '민족문화 부흥'(으로 평가되었던) 사업들, 그리고 호패법/보법으로 대표된 부국강병책과 대외정벌 등의 '자주적' 사업들이나, 세종대 만들어진 훈민정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규모의 불전 언해 사업들(다시말해 불교 진흥+훈민정음 활용 정책)에 대해 집중한다. 그러한 많은 성과들을 만든 세조의 성과를 강조하는 것이 '치적' 전통 위의 서술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파행에 집중하는 경우도, 굳이 '계유정난의 부도덕'문제보다도, 세종대까지 형성된 질서의 파괴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군신공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현전을 폐지하고, 유교적 이상군주제를 무너뜨린 것...그리고 수많은 '막말' 등의 파행으로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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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극단적으로 "경국대전" 간행 사업을 누구를 중심으로 조명하는가부터도, 연구자들 사이에 '전투 없는 전선'을 만드는 문제다. 과연 "경국대전" 간행의 공을 돌려야 한다면, 혹은 그 특징을 가장 반영한 시대를 꼽아야 한다면 어떤 국왕을 들어야 할까? 해당 사업을 시작한 세조일까, 이를 매듭지은 성종일까? 어쨌거나 '둘 다'라고 단순화하기에, 양 국왕의 너무나 다른 성향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해당 시기-주제로 논문 쓰는 저자는, (정말 밍숭맹숭하게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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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의미로 세조시기는 너무나도 '독특한'시기이자, 동시에 그 독특함에 대한 판단-그 판단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15세기 정치사에 대한 이해 등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라, 그리 길지 않은 시기임에도 다루기가 쉽지가 않다. 그 난감함은 여말선초 주제로 장기사적인 논문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인데, 세조를 한번 다루려고 하면 한 챕터를 할애하지 않을 수 없고, 짧게 다루느니 안 다루는게 낫다는 문제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결론으로는, 후자에 조금 힘이 실리는 듯도.. 별도의 챕터는 별고를 기약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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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작업에서는, 그러한 치적/파행의 한 부분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가능한한 많은 사건들을 최대한 건조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이나, 혹은 '세조만의 방식', '과감하지만 성급한 결정' '초월적 예치를 꿈꾸었으나 결국 미완으로 마감' '권력과 권위의 충돌'..등의 수식어를 사용해, 그 양면성을 가능한한 함께 다루려는 노력 등이 그에 속한다.
(저자의 작업은, 앞서의 분류에서 굳이 따지자면 치적에 집중하는 전통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한 그 '단서'를 달아두려 했다고나 할까. 언뜻 읽기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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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논쟁점에 대해 한쪽 편을 지지하지 않은 '중간'을 지키는 태도보다는, 한쪽을 명확하게 지지하고 보충하거나, 아니면 아예 제3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취향에서, 저자의 그 '중립적 태도'가 썩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 개의 전통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을 일반 독자에게 '세조가 가진 두 얼굴'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세조에 대한 '본격적인 단행본'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 상황에서, 읽어봄직한 책으로 감히 일독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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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대에 대한 평가의 기반이 되는 "세조실록"에 대한 문헌적 신뢰 및 세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 문제도 까다로운 사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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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층위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세조의 정통성 그 자체는 세조 사후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어쨌거나 명시적으로는 부정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육신 등이 추숭되는 와중에까지도 세조 본인의 정통성은 '병립'되는 문제이다.
ⓑ 그럼에도, 세조가 이행한 '독특한 제도운영'에 대해서는 세조 사망 직후부터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실록만을 따라 읽는다면, 세조의 '제도적 파행'이 세조 사후 예종~성종대에 이르러 정비되었다는 식으로 읽히는 부분도 매우 많다.
ⓒ 덧붙여, 세조실록 편찬자 자신들은 숭모의 의미로 내세웠지만, (현재를 포함한) 후대인이 읽기에는 낯뜨거운 내용들도 많다.. 일례로 세조의 '술자리 정치'는 분명 실록 맥락상으로는 세조의 호탕한 인품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 있겠지만,(불과 수십년 뒤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현대의 독자들에게 도무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 더 정직하게 말해, 재위 시절 세조의 많은 모습들을 보며, 나로서 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아무튼, 그런 요소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세조에 대한 평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그 긍정/부정론 자체가 본인 나름의 조선전기 인식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반복해 보겠음.

aladin.kr/p/xynT1

 

무당과 유생의 대결

조선시대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 시작돼

www.aladin.co.kr

 

* 새해맞이 독후감 하나.

 

한승훈 선생님의 신간인 이 책을 입수한지도 거진 2주가 다 되어간다. 나름 전공의/유관심분야와 밀접한 책이다 보니, 뭐라도 코멘트를 남겨야지 하다가, 좀 더 자신의 관점을 더 정제해/ 제대로 정리를 해 보려고 차일피일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이대로 다른 일들에게 우선순위를 무작정 미루다가는 정말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생각나는대로 대강이나마 메모를 해 본다.

-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런지 평소만큼 ‘말/글빨’이 도무지 안 난다. 말들이 정돈되지 않더라도 부디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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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계 내의 합의부터가 그리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조선 왕조를 ‘유교(정확히는 송대 이후의 신유학을 의미하고, 사실 ’유교‘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것 자체가 정교한 서술을 방해하지만, 일단 편의상 유교로 지칭)’를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은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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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인, ‘가부장제/신분제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를 상상하든, ‘숭유억불/중농억상/사대자소/군약신강’의 이념으로 무장한 학자·정치가들을 상상하든, 조선의 사상·문화를 설명하는 기초로 ‘유교’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대중 레벨에서 ‘유교’와 ‘조선시대’는 사실상 뗄 수 없는 키워드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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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관련 연구를 살펴 본 사람들에게는, ‘조선시대 유교’가 왕조 내내 동일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익숙한 설명일 것이다. 이른바 조선이 점차 ‘유교화’, 그러니까, 중앙 정계든 지방 사회든 ‘유교적 전환’을 겪어나간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유의미한 수준까지’ 유교화가 이루어진 기점이 어디인가는 학자마다 제각각 다르게 설명되었는데, 四書가 과거 과목이자 국학의 교과목으로 제정된 14세기부터, 16세기, 양란 이후, 18세기..등 다종다양한 설명들이 이루어졌다.(그 ‘조선의 유교화 시점을 설정하는 기준의 다양성’에 대해 열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거운 연구사 정리 논문의 소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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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훨씬 많은 것이 복잡해진다. 좀 거칠게 질문을 던져, 대관절 ‘유교화’가 이루어진 시기가 조선에 있기는 한 것일까.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어느 시기의 어떤 투철한 사상가조차 개인의 삶 모두를 그 사상에 일치시킬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투철한 유학자의 출현’으로 이를 기준삼기는 곤란하다. 지식인 사회 레벨에서 보려고 해도, ‘정통 유학/정통 성리학’이란 말로 연상되는 안정된 합의를 확고하게 구축된 시기가 대관절 언제냐(혹은 있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답변하기 쉽지가 않다. 일반적인 일상의 사회·문화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조선시기 어느 인물/사회/시기를 표본으로 삼아, ‘유교화의 완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좀 짓궂은 표현으로, “충분히 유교적이지 않은 사례는 조선 전기에도 후기에도 나오는데, 단지 차이는, 조선 전기에 그 사례가 나오면 ‘유교화가 충분치 않아서’그렇다고 말하고, 후기에 나오면 ‘사상적 권위에 균열이 발생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만이 다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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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한 가지 가능한 대안은 조선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교”(혹은 그에 준하는 사상·문화적인 요소들)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억불정책’은 조선의 멸망 시점까지 완전히 관철되지 못했고, 민간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부계적 질서(를 ‘유교’와 동일시할수 있을지는 또 설명이 필요하지만) 또한 스며들지 못한 사례가 고문서자료를 통해 발견되는 등, ‘유교화’의 완성태를 500여년 중 단 한순간도 거론할 수 없으니, 그냥 조선 사회의 변화는 유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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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또한 고려시기는 물론,, 조선 실록 등 자료에서도 꽤나 다양하게 나타나는 여러 유교적 변화의 징후들을 감안할 때 석연치는 않다. 지방 사회에서 벌어진 (그것이 '완전한 성공'으로 귀결된 적은 없지만) 사찰의 파괴, 엘리트 중심으로 하지만 점차 피지배층까지 전파되는 '불교적' 상장례 의식의 변화, 급기야 18세기 이후에는 유교가 피지배층의 '저항적' 언어로 전유되는 과정에 이르는 일련의 사례들이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제출되었다. 따라서 ‘이것만이 유교화의 징후이다’라는 식의 만족스러운 설명은 어려울지라도 무언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마저도 포기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변화된 것과, 변화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하는”(되다 말았다/미진했다 식의 설명보다는 당연히 더 정교한)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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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유생의 대결-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은 그 한 가지 유용한 설명의 틀을 제공한다. 종교사 연구자인 저자는, ‘공식종교/민속종교’라고 하는 두개의 종교 무대를 설정하여 그 난점을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의 지배세력의 합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공식종교의 장에서 이루어진 유교화’는 건국 초부터 ‘권도로서의 무속과 정통행(orthopraxy)로서의 유교’의 대립구도 하에서 ‘경전과 의례 실행에 대한 전례의 순수화’의 형태로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속종교의 장에서 이루어진 유교화’는 신이나 망자에 대한 스스로의 전문성을 주장하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들과 죽은 자들을 포괄하는 신앙체계 내의 영적 권위 확보’ 과정에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역 문화 내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지방관·재지사족 등 유자들과, 기존의 무당 및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을 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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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종교의 영역에서 나타난 이들의 ‘대결’은 어느쪽의 ‘승리’로 단순화되지도,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공존’으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본서에서 소개하고있는, 시기별로 그 무대를 달리하는 다종다양한 ‘대결’의 치열한 양상들은, ‘유교화’의 역동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특정 시기의 완성을 전제로 한, 양적 팽창으로 단순화할수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 의미에서 (물론 ‘조선의 유교화’라는 중대한 문제가 저자의 설명만으로 완결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조선 건국 이후의 일련의 상황을 ‘종교개혁’에 빗대는 저자의 과감한 시도는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경청해 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2021.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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