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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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한국의 단일성과 동질성이 강력한 제도의 형성이나 촌락과 군주 사이의 자발적인 제휴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성곽도시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사회, 봉건영주와 대저택, 반독립적인 상인 사회, 도시국가, 길드, 그리고 독립적인 지위와 정치행동의 중심지로서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응집력 있는 계급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단계적으로 대략 점점이 흩어져 있는 촌락, 작은 저자가 있는 소도시, 벌족이나 지역 소유의 서원이나 향교 내지 사찰로 구성되어왔으며, 이들은 주로 국가권력과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상호 간 교류를 해 왔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전형적으로 원자화된 개체로 구성되어 있고 개체 상호 간의 관계는 주로 국가권력에 대한 관계로 규정되며, 엘리트와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집단의 힘이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직접 대결하게 되고, 여러 사회관계가 비정형화되고 고립되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대중사회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앙집권과 독재정치를 지향한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들과 구분되고 있는데, 그것은 종류에서가 아니라 진행된 추세에서 보인 극단적인 수단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한국은 좁은 국토에다 인종도 종교도 정치도 언어도 혹은 다른 어떤 기본적인 원천도 적대적인 요소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이런 보편적인 가치 구조가 각 그룹으로 나뉘는 데 깊이나 계속성 혹은 선명도가 거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기득권, 종교적 반목, 기본적 정책의 차이 및 이데올로기적 분열은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장기간에 걸쳐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정치형태 안에서 그런 것들이 적당한 지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집단을 만드는 것은 주로 구성원들을 권력에 접근시키기 위한 기회주의적 수단이었으며, 서로 간 별 상위점이 없기 때문에 각 집단은 구성원의 개성과 그 당시 권력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집단을 만드는 것은 파당을 만드는 것이며 파당으로부터 실질적인 정당을 벼려내는 토론과 관심은 한국과 같이 동질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극도로 구심적인 역학 패턴이 나타나게 되는데, 영토가 협소하기 때문에 그것의 격렬성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좀 더 광대한 대중사회에서나 감내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역학 법칙은 사회의 여러 능동적 요소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빨아올리는 하나의 강력한 소용돌이 형태를 띠게 되었다.
유럽이나 일본식 봉건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취약한 하부구조를 가진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에서는 수직적으로 강력하게 내리누르는 힘이 이런 상승기류 속에서 서로 간 보완관계를 갖게 된다. 말하자면 수평적 구조의 취약성이 강력한 수직적 압력을 크게 증가시킨 것이다.중앙에서 내려누르는 수직적 압력을 그것을 억제할 만한 지방 세력이나 혹은 독립적인 집단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형성된 소용돌이를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작용이 걸리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간집단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현기증 나는 상승기류는 모든 구성원들이 더 낮은 수준에서 응집되기 전에 권력의 정점을 향해 원자화된 형태로 그들을 몰아대기 위해 서로의 구성요소들을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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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헨더슨(박행웅 이종삼 역),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아카데미, 45~46쪽. (문단구성은 가독성을 위해 일부 조정)_원문은 '그 결과 극도로 구심적인..'을 기점으로 한 2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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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더슨의 주장을 간명하게 요약하면 대충 이런 구조인 것 같다.
(a).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열쇠는 동질성과 중앙 집중에 있다.
- 일찍부터 인종 문화 언어적 동질성이 있고, 안정적 지리적 경계를 유지하면서 농업국가로서 중앙집권화된 과두제를 수립. 그 결과 지방권력이 말살된 비경쟁적 중앙관료 통치를 유지했다.
(b). 엘리트와 대중 간에 매개 그룹이 없는 사회관계로 인해 한국 정치의 역학은 사회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을 태풍의 눈인 중앙권력을 향해 치닫게 한다.
- 한국의 이런 통일성 동질성은 촌락과 중앙권력 사이에 강력한 제도적 기구나 자발적 결사체 같은 중간 매개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는 대중사회를 만드는 작용을 했다.(즉 계급적 응집성이 없고, 무정형-고립성이 특징적인 '원자화 사회'를 낳았다는 것)
- 사회 전반에서 전문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대체 불가능성(개인별 차이보다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권력 그 자체')를 지향함.
(c). 이러한 중앙 집중적 환경 속에서 한국 정치는 당파성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한다
- 중앙 집중적 환경의 정점에 있는 평의회에 들어가기 위한 한국의 지위 쟁탈전은, 계층-종교-이데올로기적 차이가 아니라 자파 구성원에게 권력을 나눠주기 위해 일어났고 이들 대립의 결과로 4색 당파가 형성됨.
- 이와 같은 지위 쟁탈 자체에 목적이 집중된 한국의 당파 투쟁은 한국 정치의 핵심 내용을 '이슈'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에 두게 했고, 타협과 양보보다는 투쟁이 특징을 이루게 했다.
(d) '소용돌이치는' 환경의 문제는, 다원성만이 해답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정말 그런가.." 싶은 느낌)
2) 예전에 한국 역사학의 레토릭을 낯설게 보지 못하던 시절에는 비판만 미리 수용하느라 덮어놓고 백안시했던 이야기들이, 나중에 들어 좀 스스로의 판단을 정제하다 보니 비판할 부분들과 별도로 그 진가가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나에게는 그 분야의 최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근 들어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에서"에서 그리는 한국의 지역-친족 사회의 폐쇄성 담론이라든지, 한국에서 발표된 일련의 향촌사회사 연구들의 논쟁들을 따라가면서 갸웃한 부분들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해보니, 과연 헨더슨의 통찰이 옳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3) 물론 헨더슨의 주장은 '한국사 전체'에 적용시키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 책이 68년에 초판이 나왔고, 88년 6월에 개정판을 냈다고 했다) 소위 '80년대 이후의 변화'에 상당히 둔감하게 처리된 경향이 있다.
(a)일단 헨더슨 본인부터가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오히려 빨리 소용돌이 행위를 포기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경제성장이나 수도 이외의 자원 개발, 전문직종 증가 등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88년 서문'에 쓰고 있다(51~2쪽) 그 부분이 아니라도, "1987년 현재 전문가 인구가 대폭 늘어났으며 이들을 채용한 산업과 비지니스관계 회사도 크게 늘어나 20년전의 문제는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371쪽)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b) 핸더슨 자신의 생각과 별개인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국의 정치 필드에서 '영호남 갈등'이 주력 문제로 부상한 것이 그 서문을 쓰던 87년 이후의 일이라는 것도 주목의 가치가 있다. 헨더슨이 그리도 없다고 말했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지역주의'로 표출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c) 동시에, 87년 이후의 보통선거제 정착으로 대표되는 많은 변화가 '생각보다' 한국 사회의 정치참여도나 시민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동시에 '국제화'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다..
소위 '현재의 한국'을 만든 여러 요인들의 변화가 헨더슨이 제시한 패턴대로만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4) 다만, 이런 생각도 동시에 한다. 3)에서 말한 '87년 이후의 긍정적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외환위기와 각종 경제불황을 포함한 2019년까지의 추세까지를 포함한다면 어디까지 "소용돌이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지역주의의 성격은 최근들어 상당히 완화되는 대신, 도농갈등은 조금도 극복되지 않았고 점차 더 심해지고 있음을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회 레벨에서 공무원 시험 열기가 고도로 과열되고, 지방대가 줄줄이 폐쇄 위기에 놓인 국면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심화되기만 할 뿐이다.
정치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이슈'보다는,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환경에서 얼마나 우리는 벗어나 있을까? 그 의미에서 오히려 (20년 전보다도) 지금 들어서 새삼스레 읽히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2019.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