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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학문적 가르침은 해석상의 차이를 갖게 마련이며, 원칙에 맞는 해석이 항상 원칙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학문의 세계에서도 진정한 판단은 역사적으로나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며, 정치적 승패도 권력의 유무로 판결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최후의 순간에는 학문과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신념과는 달리 학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학문은 결국 정치적 현실을 합리화시켜 주는 구실로 전락할 따름이었음을 조선의 역사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두희, 2000, "조광조", 아카넷, 291-292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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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가르침이 정치적인 이상으로 이어지길 바랐던 과거의, 그리고 지금의 수많은 학도들의 꿈이 이러한 사실 하나에 무의미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적어도 학문이 정치화 되는 순간 학문은 그 자체로 '권력 장악'이라는 이권 다툼의 명분론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라는 사실만큼은 앞서의 말들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기억할 필요가 있는 부분일 것이다...


2013. 6. 17

이색은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와 그의 시문들을 통해 인간적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초상화 속의 이색은 체구가 비대하고 얼굴도 좀 큰 편이며, 대머리였다. 그렇지만 그는 아프기도 자주했고, 치아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을 즐기는 편이어서 스트레스 해소는 여기에 의존 했던 듯하다. 두뇌는 명석해서 글을 잘 지었지만, 외국어 능력이 좀 떨어졌다.

개인적 성격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외향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색 자신이 정치적 리더가 되려고 주체적으로 사교와 활동 영역을 넓혀 갔던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은 매우 컸는데, 그 바탕은 문장력과 엘리트적 성취감이었다.


김인호. 2013. 역사적 인물로 본 이색(李穡)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에서. 역사와현실, 8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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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들어 엎겠다는 정도전의 엘리트의식에 비교해 자주 가려지는 경향이 없지않아 있지만, 이색 또한 자기 입지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마저도 끝까지 유지했던 나름의 엘리트의식이 분명 있었을것이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악착같이 원칙을 붙들고 늘어지는 집념으로 똘똘뭉친 혁명가의 선민의식은 충분히 엘리트주의적이다. 

하지만, 어쩌면 필요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변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변통가의, '내가 정한 원칙을 아무리 바꾸어도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변통론이야말로 진정으로 지독스런 엘리트주의적 자신감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2013. 10. 31

한국어판 걸작선 끝에 보면 저자 자신의 코멘트와, 그에 이어서 이후 이 작품에 대해 언급한 이들의 짤막한 대담집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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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쇄본 말미의 것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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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의 정수를 추출한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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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미치타로-교토대학 명예교수
나다 이나다-작가,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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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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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어느 종교학자가 마이니치 저널에 실은 「종교서 북가이드」 같은 글에 "불교에 대해서는 테즈카 오사무의 「붓다」야말로 최고의 입문서일지 모른다"라고 썼더군요. 글 속에서 그 학자는 엘리아데의 「생과 재생」이니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제상」이니 꽤나 어려운 종교서를 늘어 놓고 있던데, 그 중에 테즈카 오사무의 「붓다」가 들어 있는지라 「어라?」하고 생각했습니다. 종교학자의 눈으로 봐도 「붓다」는 불교입문서로 뛰어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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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공감해요. 활자에 의한 어설픈 불교 입문서보다 「붓다」가 훨씬 불교의 본질에 가깝거든요. 아마도 테즈카 씨는 불교를 무엇보다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명제를 추구한 사상으로 다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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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붓다」의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죽는 것은 무섭다"는 감정이에요. 우선 주인공 붓다가 소년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강렬하게 느끼고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극명하게 그려집니다. 그 후에도 붓다 외의 다른 캐릭터가 "죽는 것은 무섭다"고 느끼는 모습이 반복해서 그려집니다. 붓다라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 갔나, 또 어떻게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했나... 그 과정을 독자는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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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아힘사라는 살인귀가 죽음 직전에 붓다와 대화를 나누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제9권, "루리 왕자와의 재회").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는 아힘사도 딱 한 번 어린아이를 죽이지 않고 놓아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붓다는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면 "나는 어린아이를 살려준 아힘사다!"라고 가슴을 펴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힘사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죠. 이 에피소드 자체는 테즈카 씨의 창작이지만, 불교가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추구하는 사상이란 것을 상징적인 형태로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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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물론 불교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이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와중에 탄생했습니다. 플라톤도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다" 라고 했어요. 하지만 붓다의 사상은 한층 더 죽음과 마주하기 위한 사상이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나는 붓다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에 그런 사상을 낳을 만한 토양이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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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무슨 말씀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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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붓다가 왕으로 태어나고 자란 카필라바스투는 벼농사가 성했어요.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벼농사가 성했던 지역이라더군요. 그리고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자면, 필연적으로 미래를 예측해야만 합니다. 올해 작황은 어떨지, 어떻게 하면 내년의 풍작을 확보할 수 있을지... 벼농사 그 자체에 미래 예측의 요소가 강한 거죠. 그래서 인도 굴지의 벼농사 지대였던 카필라바스투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강했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기에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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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네에. 붓다는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죽음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다 출가에 이르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카필라바스투의 지역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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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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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죽음을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만화의 세계에선 달리 없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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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만화뿐만 아니라 어떤 표현 분야에도 죽음의 문제를 추구한 작품 자체가 현대에는 별로 없어요. 현대는 아무래도 죽음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강한 시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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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그렇죠. 타인의 죽음을 접할 기회가 예전에 비해 극히 적은 탓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들이 죽음을 직시하려 하지 않아요. 죽음을 불길한 것으로 여겨 은폐하고 일상생활에서는 가능한 의식하지 않으려 하죠. 그러다 보니 죽음은 추상화되어 제대로 실감하지 못 해요. 난 얼마 전 남동생을 잃었는데요, 그때 멋도 뭣도 없는, 현대 일본식 화장에 강한 위화감과 공포감을 느꼈어요. 시신을 태우는 불은 특별히 성스러운 불도 뭐도 아닌, 그저 중유를 사용한 물리적인 불이에요. 그런 화장에는 한 사람이 죽었다는 구체적인 느낌이 없어요. 동생의 유골과 마주했을 때, 나는 죽음의 공포를 강렬하게 느꼈어요. 죽어서 이렇게 불타게 된다면 죽는 것은 무섭다고... 그래서 그 후에 「붓다」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죽는 것은 무섭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어요.
오키나와의 쿠메지마에 갔을 때 그곳의 장로격인 한 노인과 대화하던 중, 인상적인 말을 들었어요. 그 노인은 "야마토에서 오키나와로 건너온 온갖 새로운 풍습 중에 화장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말을 내게 하더군요. 자신이 죽은 후 유해가 불에 탈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이런 감수성을 대부분의 일본인은 잃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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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메몬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하위징아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건 그것이 보다 좋은 생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산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죽음을 외면하기만 하는 사람은 생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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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죽음을 은폐하려는 사회다 보니 요즘 젊은이는 주변 사람의 죽음을 인생에서 처음 맞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이 엄청납니다. 죽음에 직면하기 위한 예행연습 같은 것을 일절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89년에 일어났던 「여아 연쇄 살인 사건」의 미야자키 츠토무는 재판 기록에 따르면 자신을 예뻐해줬던 조부의 죽음에 직면한 뒤로 죽음이란 것에 이상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흥미가 마침내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거죠. 조부의 죽음과 어린 여자 아이를 살해하는 것-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얼핏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지만 나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습관을 갖지 못 하다 보니 현실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과도한 충격을 받아 '쇼트'해 버린 거죠.

나다 - 고도성장 시대에서 버블 시대를 거쳐 일본인은 이른바 "죽음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겠죠. 「붓다」는 그러기 위한 계기를 만들어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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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늘 고뇌하는 붓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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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붓다」에는 붓다 사상의 정수가 가득 들어 있어요. 가령 전편의 모두에 등장했고, 이야기 종반에 인상적인 형태로 다시 그려진, 토끼가 스스로 몸을 던져 굶주린 수행승에게 잡아먹히는 에피소드. 거기에 표현된 것은 자기희생의 정신만은 아니에요.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서로 관계하고 의존하며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는 불교의 「인연」 사상의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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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네에, 그 사상은 붓다 자신의 대사로도 몇 번 등장해요. "인간이 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지고..." (제6권, "야타라 이야기(2)")라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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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맞아요. 거기에는 강한 자가 승리하고 약한 자가 진다는 세계관과는 전혀 이질적인 세계관이 잇어요. 뛰어난 인문지리학자이기도 했던 소우카 학회 초대 회장인 마키구치 츠네사부로는 「인생 지리학」에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공존적, 융화적으로 다루는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고 있어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그 시선은 이콜로지 사상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사실 그건 불교의 「인연」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붓다야말로 이콜로지 사상의 진정한 선구자인 셈이죠. 마키구치나 크로포토킨 등, 20세기 인문 지리학자들이 겨우 도달한 자연관이 이미 붓다의 사상 속에 잇었어요. 그리고 「붓다」에도 그 내용이 충실하게 그려져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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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그리고 내가 신선하게 느낀 건 테즈카 씨는 붓다를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고뇌하는 산 인간으로 그렸다는 점이에요. 불교에 어두운 사람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붓다는 전혀 고뇌하지 않는 그야말로 신 같은 존재라 믿는 경향이 있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도 역시 붓다는 늘 고뇌했습니다. 단 깨달음을 얻기 전과는 고뇌의 질이 달랐죠. 자신의 번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게 되었지만 사람들을 어떻게 고통에서 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생 고민합니다. 테즈카 시는 바로 그 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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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 분명 우리 현대 일본인은 「붓다」에 의해 비로소 붓다를 한 인간으로 다룰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붓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아마 머릿속에 제일 먼저 테즈카 씨가 그린 붓다가 떠오를 거예요(웃음).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붓다상은 이제까지 활자로는 그려진 적이 없으니까요.



201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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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의 구어인 한아언어(漢兒言語)를 기반으로 형성된 문장어를 '몽문직역체'와 '한문이독吏牘체'로 나누어 생각한 학자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문이독체가 북송때부터 시작되었고 몽문직역체는 원대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나 필자는 원대 북경지역의 구어인 한아언어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전자는 이를 문어화한 것으로 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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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그 주장은) 원대 이독문이 사법에서 사용될 때는 죄인의 공초라든지 소송의 소장에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구어를, 그것이 어떤 언어든지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어떤 언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북경지역에서 코이네로 사용되던 한아언어이며 원대 이독문에는 이러한 구어를 몽문직역체란 이름으로 잠정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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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원대에 사법이나 행정에서 주로 사용한 한문이독체를 '한이문'으로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한 '한문이독체' '몽문직역체'라는 한문의 변문은 실제로 원대 이문으로 구어를 직사한 것, 즉 그대로 베낀 것을 말한다. 특히 '한문이독체' 즉 원대 이후 발달한 중국의 이문을 고려 후기 이후부터 한반도에서 쓰이던 이문과 구별하여 한이문漢吏文이라 부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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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장"에 따르면 당시의 구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어휘가 있으며 고문이라면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어휘가 빈번하게 혼용된다....이러한 예로부터 필자는 원대의 한문 이독이 '한아언어'라는 구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다시말해 한아언어가 구어라면 원대 이문은 그에 의거한 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사 한이문 즉 한문의 이독 문체는 어디까지나 중국어이며 문법적으로는 고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아언어는 비록 어휘나 문법요소에서 몽고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법구조는 중국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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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문 이독 문체는 하급관리인 한인이 통치자인 몽고인에게 올리는 일체의 행정문서에서 일괄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전적 교양을 중시하던 옛 중국의 관습은 무너지고 실무의 지식과 기능이 중시되었다. 이때 선비보다는 실제 법률 지식이 풍부한 서리가 우대를 받았다. 몽고인의 통치를 받고 있는 원대에 한인이 출세하는 길은 버률, 행정 문서작성과 같은 실무 지식과 한이문에 정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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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필자는 원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이독의 한문 문체를 한이문으로 보려고 한다. 조선 전기에 한이과를 개설한 것은 사대문서를 작성하는데 한이문에 정통한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 때의 출제서로 앞서 소개한 한이문 교재들이 선택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렇나 한이문 학습을 이도 라고 하였으며 이독은 원래 한이문으로 쓰인 문서였으나 점차 한이문 작성 자체를 뜻하게 된다. 즉 일정한 공문서 서식에 따라 작성된 이문을 이독이라고 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전자에 대해 吏頭, 후자에 대해 吏讀로 한 글자를 고쳐 술어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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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어를 배우고 한자를 익혀 한문으로 된 각종 문헌을 읽고 또 스스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기록했다. 한문은 고립적인 문법구조를 가진 중국어를 표의문자인 한자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읽을 대는 우리말로 풀어 읽거나 교착적인 우리말의 문법구조에 따라 조사와 어미를 첨가하여 읽었다.. 이런 한문 독법 때문에 전자를 석독이라 하고 후자를 순독 혹은 송독이라 하며 이 때 삽입되는 우리말의 문법요소, 즉 조사와 어미를 구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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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말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에는 먼저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자로 쓰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한 한문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중국어로 번역 표기하는 경우 번역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이 있는데 인명 지명 고유의 관직명이 그러하다. 이 경우에는 한자로 번역하거나 발음대로 표기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신라 무장 거칠부居柒夫를 荒宗으로 적는 방법이다. 이것은 실제 신라어를 한자를 빌려 발음대로 표기하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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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대국어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의 어순으로 한자를 표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신서기석의 표기 방법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말 어순에 맞춰 한자로 표기한 문장을 지금까지 향찰문 혹은 이두문으로 불렀고 여기에 사용된 한자들을 향찰 혹은 이두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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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한자로 어순에 맞춰 표기하는 이두문에는 중국에는 없는 고유명사나 문법요소 같은 것을 한자의 뜻과 발음을 빌려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이두가 한자로 우리말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것이라면 구결은 한문을 읽을 때 삽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두문은 문법구조가 우리말에 기반을 둔 것이며 구결문은 중국어의 문법구조에 따른 한문 문장에 우리말의 형태부인 구결을 삽입한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구결이 우리말의 어미 및 조사와 같은 형태부를 기록하는 것에 국한되는 반면 이두는 고유명사를 표기하면서 의미부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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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토吐 가 있다. 이것은 이두나 구결에서 특히 우리말의 형태두, 즉 조사나 어미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을 말하며, 구결토와 吏吐가 있다. 이토의 경우에는 이두가 간혹 의미부를 기록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따로 독립되어 구별될 수 있지만 구결토는 구결이 대부분 형태부를 기록하는 것이므로 구별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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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문이 바로 이문이 아님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즉 한이문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변체 한문을 이용하여 공문서 작성에 유용한 문장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의 이문이 언제부터 정식으로 공문서의 공용문어가 되었는지는 아직 아무런 연구가 없다. 그러나 한이문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문이 이루어졌다면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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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문은 조선시대 공문서의 공용문어로서 모든 공문서는 이문으로 작성되어야 효력을 발생헀다.... 언문으로 쓴 것, 증인이 없거나 쓴 사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채권의 효력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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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종조에 최세진이 편찬한 이문대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조선 이문의 학습서로서 한이문에 정통한 최세진이 그것과 비견되는 조선이문 학습서를 편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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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이문은 한이문의 문체에 맞춘 것으로 이두문과는 구별되었다. 다만 이문대사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형식이 있고 특수한 관용구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쓴느 한문을 이문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문의 특수 관용구는 이두문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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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대사의 권두에 소개된 관용구는 대부분 이두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한이문의 문체를 사용한다.... .사자성구를 많이 사용하는 한문 문체는 한이문의 특징으로서 조선이문이 이를 본받은 것이다.  吉川辛次郞(1953)은 "원전장"의 한문 이독의 문체적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1) 사자구, 혹은 그 변형을 기본으로 하는 리듬

2) 어떤 종류의 구어적 어휘를 포함한 이독 특유의 말을 빈번하게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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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조선이문도 한이문과 같이 사자구를 기본으로 하는 문체적 리듬이 있고 구어적 표현을 가미했으며 이문에만 사용되는 관용구를 빈번하게 써 공문서로서의 구ㅕㅓㄴ위와 긴장을 유발한 것으로 봉니다. 이것은 이문이 한이문의 문체를 본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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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따라서 조선이문은 원의 한이문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며 한이문이 이른바 몽문직역체로 알려진 한아언어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 처럼 조선이문은 우리말 문법에 의거하여 신라시대의 향찰표기에 기반을 둔 이두문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항이문의 한문 문체를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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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이문은 갑오경장에서 한글을 공문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칙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유일한 공용 문어였다. 몇백년간 지속된 유일한 공용 문어인 조선이문에 대한 연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국어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37~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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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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