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현암사 판)
"마음"(웅진출판사 판)
"그 후"(민음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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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의 감상을 쓰기에 값할만큼 소설에 대해서 자신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받은 느낌과 감상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 본다.
- 해당 세 소설에는 스토리에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유민적 성격'이 중심적으로 부각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고등 유민적 삶이란 무얼까. 고등교육으로 무장되어 스스로의 탐미적 취향을 갈고닦으나, 그 배움의 당위적 목적이나 사회적 실천같은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은둔시키는 존재 정도로 설명하면 거칠게나마 정리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은 여러 의미에서 '죽림칠현' 정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몇 가지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해 이렇게저렇게 상상해봤다.
1)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삶이란 '이상'을 잃은 속류적 은둔 유희일 뿐인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소명' 같은 당위명제로부터 담을 쌓은듯한 그들이지만, 속류적 이기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고등유민의 에고이스트적 삶이란 소명어린 삶 그 이상의 높은 기준을 지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공민-시민적 소명 등과는 무관한, 일종의 '미감적 에고이스트(aesthetic egoist)'로서의 섬세하고 예민한 결벽일지도 모른다.
2)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에고이즘이 지향하는 기준이란 확실한 이상주의일까?
사실 그것도 조금은 불분명하다. 세 소설의 (준)주인공들이 골몰하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스나가는 지오코를 '사랑'했을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사랑'했을까? '선생님-K'는 '사모님'을 '사랑'했을까? 그들이 꿈꾼 "마음의 자연"이 정녕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갈망이었을지는 불분명하다. 외려 분명한 것은 다이스케의 "타들어가는 빨강"으로 가득할 삶이란, K의 죽음을 맛본 '선생님'의, 그 전까지 그리도 갈망하던 '사모님'에 대한 냉담함 만큼이나 위태롭다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의미에서 고등유민들의 에고이즘은 목표가 있는 이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목적지없는 낭만이며, 더 나간다면 '사회적-제도적-소명적'(어쩌면 이 셋을 합쳐낸 의미에서의 '세간 도덕적') 삶 전반에 대한 목적지없는 반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그 '실체가 불분명한' 에고이즘이 '고등유민'인 K와 선생님을 어떻게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일까?
누구보다도 자신에 천착한 그들의 에고는 역설적이게도 결국 자신의 삶 마저 갉아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목표가 불분명하지만 한없이 높기에, 그들의 삶은 때로 두문불출은 할 수 있지만 안빈낙도에 도달할 만큼 낙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타율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회로부터의 유리를 낳는 '고등유민'의 에고는, 삶이 이를 원만히 버텨내지 못한 채 고등유민 자신들을 (약간은 뒤르켐 식의 "egoistic suicide"가 연상되는) 죽음으로 이끈다. K의 고독감이든지, 선생님의 죄책감이든지, 어느쪽이든 에고를 감당하지 못한 삶의 후퇴가 죽음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K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의미에서 선생님의 죽음은 K와 다르지 않다.)
- 일전 한 대화에서 "폭력남편을 참게 되는 고등 여성 지식인의 심성"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게 되는 타협적 심성"같은게 그 폭력남편에 의한 희생을 부른 것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의 (세상 도덕과 기준으로부터 벽을 쌓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에고이즘'이야말로 그들 자신을 도그마로 만들어진 고통의 세계에 몰아넣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4) 그렇다면 그들의 삶에 구원이란 없는 것일까?
그 마지막 단계에서 "고등유민"이 도달할 만한 마지막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와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마음으로의 소통'일지도 모른다. 혈연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인간관계를 넘어, 하지만 에고이즘적 '반제도-반도덕'마저도 (상당부문 일치하지만) 넘어서 만들어지는 관계맺음이 결국 "고등유민"이 도달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의 에고이즘마저도 오롯이 감당해낼 수 없는 흔들리는 존재다. 그 까닭에 그 "마음의 소통"이란, 그 가능성마저도 사실은 2)의 이상-사랑들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불륜으로 실행된)'마음의 자연'에 준할만큼 탐미적 매혹의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결국 어떤식으로든 구원을 위해 다시금 걸어봄직 한 불분명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2019.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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