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철학사상(philosophical ideas)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이러한 부인은 나름 정당하다. 역사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진행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심했는데, 이러한 의심 역시 나름 정당하다.

나는 이 양자의 중간에 처해 있다. 인간은 본성상 모두 신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유학의 철학은 유아론적 헛소리(solipsistic drivel)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나는 놓여있다.....(후략)"


피터 k 볼(김영민 역), 2010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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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당연하고 어쩌면 또 상식적인 말이지만, 과거의 텍스트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분야(국문/철학/정치학/사회학/역사학 등등..) 중에 유독 중국사상(정확히는 중/한 사상) 연구분야에서만 특별히 좀 미진해지는 경향이 있는 바를 정확히 짚어 준 대목이다.


2) 본문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 중, 전자의 경향대로 경전이나 문집 자체를 잠언화하여 해당 텍스트를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보편적 메시지로 정돈하는 경우 (철학과 등에서 숱하게 나오는, 예컨대 '누구누구 사상가의 무슨무슨 사상-대개 교육/수양 등의 비교적 현대적인 개념의 사상-에 대하여' 류의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그 '사상' 자체가 가지는 시대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서, 그 텍스트가 가진 적확한 의미를 뭉뜽그려 버리게 된다.

-이런 경향성이 유/불/선 중 어디가 가장 심한가는 도무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나마 '현실'에 가장 맞닿아 있고, 그 자체로 정치성을 가장 강하게 띤 유학이 그 경향을 그나마 덜 띠고있다고 개인적으로는 믿고 싶지만, 그 어마어마한 '현대유학자'들의 연구 분량은 그 판단에 자신을 잃게 만들어 준다..


3) 한편 후자의 경향대로 철학적 이데올로기들이 (선생의 표현을 빌어)'유아론적 헛소리'라고 전제하고, 해당 텍스트 저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위상과 그 지향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정돈하는 경우. (역사학에서 다수 이루어진 개혁사상(국가관, 안재선발론, 토지개혁론)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분명 텍스트의 '성격' 분석에는 큰 대강을 제시해줌에 틀림없지만, 그에 따라 각 텍스트들의 의미를 전자와는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계급이나 정치 지향 속에서도 생각에는 다양한 '꼴'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들 간의 의미 차이, 혹은 그러한 '생각의 다양한 꼴'이 발생하게 되는 여러 관념(개념)의 흐름 또한 엄연히 '인간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양자 간의 균형관계가 유독 중/한의 유불선에 한정하여 왕왕 무너지곤 하는 것은 혹자의 평 대로 '동양사상은 아직 자가붕괴하지 않았기 때문' 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 원인과는 별도로 앞서 인용된 '양자의 중간'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사상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양자 모두가 가지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후자의 경향이 더 학문의 본연에 충실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사상사'같은 모호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굳이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분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5) 다만 굳이 후자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사상이라는 분야를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의아니게 때로는 대단히 나쁜 의미로 전자의 지향성을 깊게 가진 연구들에게 상당량을 빚지게 됨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부디 사상 자체에 너무 깊게 빠지지는 말게" 하는 역사학의 선학들이 남긴 전통적인 일침은 그 상황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균형감'에 대한 뜻깊은 충고지 않을까.



읽은 지 좀 된 책이지만, 다시 생각해고 또 생각해도 탁월한 구절인 것 같아 한동안 되뇌이다 공유해 본다.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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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이 책은 이 글을 끼적이던 6년 전에도 "읽은지 좀 된 책"이었는데, 그로부터 또 몇년 뒤인 작년에 또 다시 꼼꼼히 읽어 볼때쯤 들어서는, 이 책에 대한 인상깊은 부분 선별이나 그에 대한 견해 전반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그러고보면 과연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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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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