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그런 것이냐'는 아내의 질타는 정도전에게 뼈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정도전의 질문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고 싶었던 정직한 질문이었다.


정도전 또한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깨끗하게 처신했단' 아버지 정운경에게 늘 속으로 묻고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기록한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 따르면 정운경은 청도교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 자신의 입신양명의 꿈에는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충동은 남이 눈치 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청백리 아버지를 역할 모델로 해서 살아왔고, 또한 신유학의 정체성 형성에 맞는 생활 양식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아는 금지된 충동이 표출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반동형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반대적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제인 반동형성에 따른다면, 정도전 자신의 무의식 가운데 입신양명해서 가문에 영광을 가져오리라는 내적 충동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혹시 아내가 눈치 챌까 두려워 정도전 스스로 억압해왔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출세와는 정반대의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어왔고 그 결과,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망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철영, 2004,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170~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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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위 '심성사' 연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정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일기. 시문 등에 등장하는)개인의 사적인 기록물을 토대로, 해당 개인의 정신세계나 나아가 해당 시대의 담론을 도출해내는 경향'이라고 한다면, 여말선초 한정으로는 00년대 초반 쯤부터 시작해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가, 최근들어서 부쩍 그 성과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나름의 '최신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엔 이색에 대해서라면 이익주 선생님의 "목은 이색의 삶과 생각"이, 이규보에 대해서라면 김용선 선생님의 "생활인 이규보"가, 정도전에 대해서라면, 본문의 내용이 "인간 정도전"으로 보완-정리되어 출간된 바 있다)


2) 당연하지만, 개인 기록에 대해 묘사하는 것인 만큼, 입론의 디테일이나 정밀성이 성글고, 다소 앞질러나간 해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소 파격적일만큼 내러티브가 실험적이고 섬세한 것은 상당히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다만, 이를 토대로 어떤 방법으로 '거대 서사'를 수정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미 몇 차례, "개인적 기록이, 결과적으로 기존의 연구담론을 재차 강화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 혹은 "해당 기록물 연구가, 문학연구와 어떤 차별점(혹은 비교우위)을 둘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지적사항이 제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켜봐야 할 문제.


201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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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성사' 연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게 된다. 그 이후로 몇년 새에 이에 대해 잘 쓰여진 사례라고 소개받은, 뚜웨이밍의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나,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를 읽어보기도 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성사가 기존의 거대서사에서 커버하지 못한 '미싱 링크'를 찾아낸다는 면에서 유의미할 것이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여전히 '큰 흐름'을 달리 서술하기에는, 여전히 '기존 견해의 재확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지금까지도 크게 극복되지 않았다. '디테일'을 첨가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연이 아니며 결국 서사를 정돈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선학들의 경구가 옳다고 한다면, 적어도 2019년인 아직까지도 '심성사' 연구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단계를 넘어서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어느쪽이든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볼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많은 '인문학적 신식 방법론'이 저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또한 지금 와선 조금은 아이러니다)


* 덧 : 고려든 조선이든, '심성사'에 관심이 있다는 또래-이하의 사람들을 '해양사' 다음으로 많이 봐서, "대관절 그 많은 사람들이 애정해 마지않는 해양사-심성사는 어디서 어디까지 정의-범주가 제각각일까"에 대해서 한번 마음을 먹고 계통을 정리해보고 싶은 심경마저 들곤 한다. 



2019.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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