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반년만에 글을 쓰는데, 그 반년전 글도 박사논문 관련이고 이번 글도 박사논문 소개글이다. 반년전 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약간은 의식하고 쓴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박사논문에서는 '복수의 유교의 존재가능성' 내지 '시기에 따른 유교적 규범의 성립-변화과정.' 같은걸 말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너무나 많은 내용을 때려박은 나머지, 실제 논문에서는 어지럽게 섞여있지만 일단은 내 스스로는 그리 생각한다. 하기사 어쩌면 박사논문을 쓰고 나서, 1년정도 박사논문 소개글//박사논문 소개발표를 여러 차례 준비하면서 곱씹다보니 깨닫게 된 사실인 부분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떠냐 싶지만..

 

솔직히, 지금 박사논문은 너무나도 서술이 난삽해서, 단행본 작업을 할 때는, (보통 하는 '증보작업' 대신.) 한 20% 정도는 아예 내용을 싹 덜어내고, 한 5%정도 모자란 부분 보태면 어떨까 상상만 하고 있다.(책 내주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그냥 계획은 계획이니..) 

 

어찌되었건, 박사논문을 '털어낼' 준비를 하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유교란게 얼마나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는데 뭔 이렇게 말이 길었나 싶기도 하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는게 없음을 아는게 박사학위 취득으로 얻는 덕목"이라는 오래된 농담에 따르면, 나도 어느새 아주 어엿한 박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써 보고 싶은 글감은 이것저것 있는데, 아직 박사논문만큼 호흡이 긴 중장기작업을 잘 상상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박사논문을 털어내면, 한 몇편정도는 박사논문에서 다룬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메꿀 수 있는, 인물사 작업같이, 조금은 더 미시적인 문제를 다루어볼까 생각도 하곤 한다. 강단에 올라가보니 내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밖에 못하는구나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20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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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view/5770

 

[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역사를 향한 열린 시선, 한국역사연구회

www.koreanhistory.org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024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 교수신문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www.kyosu.net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교수신문 특집연재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_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게재일시 : 2024.02.22 08:59

이상민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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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에 의뢰받은 이래, 오랜시간 고심했던 원고가 드디어 나왔다. 박사논문에 대해서는 대충 5번은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뭔가 찜찜함이 많지만, 아마도(?) 이 글로서, 대충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공유한 셈 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자리에서 또 말할 기회가 있다면, 이젠 해 놓은 범위에서 응용하게 될거란 말씀.)

 

신문 기고는 처음인데, 새삼스럽지만 글이라는게, 적당한 편집을 거치면 색이 확 달라진다는걸 깨달은 계기이기도 했다. (대의가 어긋난 것은 없지만) 수정 과정에서 아마 나한테 모든걸 전담시켰다면 하지 않았을 문장 호흡, 문단 구성, 말투 등의 편집이 가해지니까, 처음에는 영 어색했는데, 보다보니까 오히려 깔끔하고 좋다는 평도 적잖게 들을 수 있었다. 당초 혼자서 잘 하면 제일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도움을 거절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또다시) 해 보기도 했다.

 

2024. 2. 26

'역사의 교훈' 같은 걸 운운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런걸 찾는 일이 유익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짧은 역사 공부를 통해 믿게 된 한가지 '개똥 역사철학'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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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현재적 처신이나 노력은 당사자가 열망한 미래 목표의 도달(혹은 그 목표의 좌절)과는 대체로 무관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말해 스스로의 삶에 충실한 것은 그 자신의 내적인 구원을 위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귀중한 삶의 자세이지만, 최소한 그 노력이 '목표달성'과 명확한 인과관계를 갖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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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맥락에서, '미래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란 말은 몇 가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는 현 시점 누군가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거야'라고 '가스라이팅'하는 바에 그리 심하게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그 미래의 시점에 내가 원하는 성취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섣부르게 스스로의 어떤 잘못이란걸 찾으려 들 필요도 없다는 뜻이며, 설혹 내가 기대 이상의 성취를 얻었다고, 내 자신의 어떤 대단한 미덕을 찾으려 우쭐댈 일도 아니게 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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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를 통해 만나 온,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데 실패한 과거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그랬듯, 현재의 내 행동/처신들이 내 미래에 얼마나 유의미할지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삶은 무엇보다 현재를 위해 유가치한 일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개똥 역사 철학을 가지고 있다.(정확히는 이를 상기하려고 자주 노력하고 있다.)

트위터 등에 짤막하게 쓰고 있던 것인데, 타래가 이어지고 복잡해져서, 줄글로 모아보고자 정리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트윗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보니 호흡이 많이 짧을테고,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횡설수설한 썰풀이에 가깝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덧붙인 글이라서 엄청 장황하다. 나중에 좀 더 간명하게 글을 정리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여기에 내용을 더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트렌드(?)에 맞게 핵심주장 정리.
1.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 질문은, 대체로 구체적인 구매 대상자와 그 잠정적 지불 액수 등이, '사회 전체의-폭넓은 지원' 식으로 막연하게 설정되어 있는게 문제다. 그 질문의 막연함을 정정하지 않은 채 답변을 시도하니까 모두가 제대로된 대답을 못하거나 딴 길로 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2. 누구의, 무엇을 위한, 어떤 쓸모냐는 것은, 상황마다 다른 것이니 그 구체적 상황에 맞게 답변을 준비하면 될 문제다. 상황을 막론하고 통용되는+익명의+회의적인+다수 청중을 설득시킬 수 있는 쓰임새 논변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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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문학의 '무쓸모론'

사실 '학문의 쓸모'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설득이 된 가운데, 이를 그 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게 관건인 문제일 뿐, '시민 사회 전체에게 직관적으로 그 지불을 납득시킬만한 논리의 창출'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게 가능한 종류의 학문분과가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게 좀 까다로운 분과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게 까다로운, 업계 은어를 빌려 '기초학문' 분야에다가, '일반 시민들이 직관적으로 납득할' 논리를 만들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긴 하죠. (더 정직하게, 그런게 있던 시절이 지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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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하던 논리지만, 국내-한국학 분야가 오랜시간 '민족문화'라는 국가종교를 장악하면서 이를 사회 구성원에게 납득시켜왔기에, 그 세를 크게 키워왔고. 그 경향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단일민족' 메시지가 힘을 많이 잃어, '낯선 과거에 왜 그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는가'의심받곤하는 지금조차도, '국가 간 역사전쟁'같은 살벌한 표현 앞에서는 국가/시민사회의 적극적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솔직히, '동북공정/위안부/독도'이슈에 대한 업계 종사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 전쟁'같은, 좀 살벌한-한시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도, '역사학'의 쓰임새는 지자체의 관광상품, 조금 적극적으로는 개별 정책연구원에서 2차 정책 연구를 위한 레퍼런스 제공 등의 활용양상을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활용가능성과 '학문의 쓸모'는 개념의 무게가 좀 다른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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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개인이, '자기 공부의 향후 쓰임새'에 대해 말하기 힘든 건 거칠게 말해, 두 가지인듯 합니다.

1) '향후의 활용 가능성'같은 어마어마하게 불확실한 미래를 당장 연구자가 '모조리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2) 연구자의 작업은, 일단 자신의 눈 앞의 작업물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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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연구자가 2)의 공예가의 마음만으로 '오로지' 살 수는 없습니다. 가혹하지만, 연구자에게는 어느정도 '사회'를 향한 연구 세일즈의 의무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고, 더 솔직히는, 연구를 평가해야 할 '같은 연구자' 사이에도 타인 연구의 가치는 당장은 알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나아가 두 가지는 중요하게 첨언될 필요가 있습니다.

ⓐ 눈 앞의 연구를 제대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도의 심도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제대로'가 무언지 정의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같은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가치를 설득하지 못하는 연구'가 대체로 '제대로된 연구'일 가능성은 희박할 것입니다.
여기서 '최소한으로도 그 가치를 설득할수 있어야 할 -같은 분야-'는 어디까지인가.. 그것도 어려운 문제인데... 순전히 제 주변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러라고 <(국)사학과>라는 단위를 만들어 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다만 이건 학과마다 사정이 좀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네요)
- 학과 단위에서 학위논문 심사에 앞서 '예비발표'제도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과 다른 전공 교수/대학원생'들도 자리에 동석해, 그 논문의 연구가치-내지 논증 등에 대해 이런저런 토론이나 지적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논문 통과하려면) 거기 동석한 사람에게는 연구가치를 입증하라는 요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결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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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 길었네요, 어쨌거나, 흔히 제기되는 "쓸모를 입증하라"는 요구는 그냥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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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에 대해 일각에서 "시민 교양을 위한 고등교육론"으로서의 인문학의 필요론(그 사례 제시로서의 연구 가치론)이 최근 뜻있는 분들에게서 제기되고 있음을 알고, 그분들의 입장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해당 분과 심화연구"의 필요성까지를 정당화하는지는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예컨대 "지금과 동떨어진 시공간의 사람들이, 그들의 기준에서 내린 지적인 여정을 파악하여, 우리의 사고 훈련을 유도한다"는 방식의 대의명분에 공감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사고 훈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교육/사범계열"의 전문영역인 것이지 "인문-문헌학"분야의 일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필요에 따라 그, 연구 가치를 '보편적으로' 어필해야 할 타이밍이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게 논문이나 저서 서론에다가 일일이 밝혀야 할 만큼) 언제-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어필할 '준비'가 될 필요는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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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연 '쓸모론'은 그 자체로 맞는 질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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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는 대체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학문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쓸모'를 논하려면. 'A컨텐츠가 → B집단으로 잠정된 소비자로 하여금 → C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게 할 → 가치 D' ..라는 의미로, A/B/C가 구체화된 가운데서 D란 무엇인가.로 접근해야 알찬 질문이 되는 것인데, 대부분은 특정하기도 힘든 소비자층이, 한정없는 범용성을 염두에 두고 쓸모를 묻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답변도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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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같지만, 극단적으로 '돈벌이'에만 한정해서 말하면, '취직한 대학의 전임교원'들에게, 당장 강의 등을 해야 할 자기 전공분야만큼 '중요하게 쓸모있는' 지식은 없습니다. 공학이나 반도체 기술같은거 다 필요없고, 자기가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제대로 아는게 제일 '중요한 쓸모'가 있는 일이죠. 이게 말장난 같지만 완전한 말장난은 아닙니다. 예컨대 수험생들이 대입 수험과목을 위해 기꺼이 수천 수억을 가져다바치는 것은, 그 지식-시험 트레이닝이 자기 인생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학원 강사들은 그 '쓸모있는 컨텐츠'를 생산해서 밥벌이를 하니, '대입 지식'은 학원가 수요상 '쓸모있는' 일이 됩니다.
왜 말장난이 아닌지 조금만 더 부연하겠습니다. 아무리 인문학이 그 대상을 '범 시민사회'로 설정하고, 그 지원자금도 '국세'쯤으로 범범하게 설정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특정한 목적을 띤 지불 담당자에게, 특정한 형태로 책정된 예산을 지원받는 일입니다. 설혹 국책사업에 지원을 받는달손 쳐도 '시민사회 전체'를 설득하는 일은 사실 실제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일도, 이루어질 일도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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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만든 지식컨텐츠를, 1차 소비자/투자자 외의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게끔 재가공'하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판매를 위한 적당한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냉정하게 말해, 이 '마케팅 포인트 확대' 조차도, 한번에 '사회 전체'쯤으로 도약하길 기대하는 경우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바보같은 예시지만, 에어컨 개발에서, 마케팅 타겟을 넓히는 요구가 나온다면, 이는 공기청정기 수요층까지를 노리라는 뜻이지, 한번에 인류 사회의 공공복리 증진같은걸 노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지금의 인문학 (무)쓸모론은 그런 황당한 도약 시도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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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말해지는 인문학의 쓸모. 라는 걸 따져보면 둘 중 하나 (혹 그 중간쯤)에서 답변이 이루어질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의 교육정책 담당자가 내 전공의 연구-교육에 예산을 할당해야 하는 이유

ⓑ내 전공에 무지한 일반 대중이, 내 전공에 대한 교양강좌를 듣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의 영역은 '잘 알면 훌륭한' 능력이지만, 그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연구자로 함량 미달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고, ⓑ의 경우, '일반 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전공에 대한 무지'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이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를 흐릿하게 설정한 채 기대치만 한없이 높여놓으니, 대답이란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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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쓸모가 '무엇이냐'와 별도로, 쓸모는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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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정말로 인문학자 자신에게 필요한 '쓸모'는 냉정하게 말해, 두 가지 요건만 만족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단언컨대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 스스로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 이를 잠정적인 독자층(+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쯤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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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교의'를 만들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말입니다. '학문의 쓸모'를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납득시킬 논리같은 게 지금 추세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내가 납득이 된 가운데. 이를 필요에 맞게 응용만 하면 될 일인 것이지요..
- 물론 '펀딩 주는 사람 따라서 생각하자'정도로 자족한다는 뜻은 아니고, 당연히 더 넓은 전망을 고민할 필요는 있죠. 다만 '시민 교양'이라는 말(을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속에서도 워낙 다양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으니, 그에 맞는 적절한 논리는 따로 필요하다..그런 생각에 가깝습니다.
- 사실 스스로에게 연구의 구체적 쓰임새가 설득이 안 되어도 굳이 상관없습니다. 필요한 국면에 맞는 세일즈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이를 자신의 확신속에서 믿는건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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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 와중에도 악을 쓰고 안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갈길 가시게 보내드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 아닐까요.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라는 요구마저도 가끔 보면 인문학에는 너무 흔하게 요구됩니다. '나는 확고하게 이게 돈 낭비/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돌려보라'는 요구는, 어느 정도까진 시도됨직 하지만, 거기에 본격 투신하는건 별도의 영역이니까요. 그 의미에서, 누군가 저에게 '당신 강의/연구는 쓸모가 없소'라고 무례하게 지적한다면 (무례에 대한 응대를 담은)적당한 대답은 '딱히 댁이 꼭 들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딱히 댁한테 연구비 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를 깔고 "안녕히 가세요" 쯤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요. '쓸모'에 대한 문제를 시니컬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별 연구의 (독창성/논리적 엄정성/학술장에의 기여 등을 염두에 둔)'학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소비자의 지불 의사를 염두에 둔)'쓸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 '네 논문 별로야.'와 '네 논문 쓸모 없어.'는 설혹 겹치는 영역이 있다 해도 완전 다른 이야기란 뜻입니다.


4. 나가며

종합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의 효용"에 매번 답을 내리기 실패하는 것은, 어쩌면 한없이 묽은 질문에, 전가의 보도같은 답변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진 결과 나타난 필연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무거운 질문"자체는 유의미하지만, 일단은 연구를 일단 "제대로"하면서, 여러 상황에 맞게 그 가치를 그때그때 세일즈할 준비를 하는편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믿습니다.

"큰 대안을 가진 큰 스승"을 지향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결국 결과론적으론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하고 계신 바로 그 일들과 같이) 일단 상황에 맞는 구체적 대안을 낼 생각을 "그때그때-제대로"내는게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주절주절 말이 길었습니다.

1. 이따금 정말 견딜 수 없을만큼 생각이 복잡해지고 예민해질 때가 있다.

말 한마디, 글 한 결귀를 쓰는 것에서부터 온갖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이래도 되나/이게 맞는건가/혹시 탈 나진 않을까/뒷감당 못하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에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요새들어는 부쩍 자주) 찾아오곤 한다.

 

대학원생 신분이란게, 제 밥벌이 하나 못하는 '유예된 처지'인 탓일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정말 일상 자체가 휘발유를 뒤집어쓴 채, 주변인의 '불안'의 불씨에, 언제고 활활 발화될 준비가 된 상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A하지 않으면 B에 이르게 될거야"식 화법, "너 그러다가 C 된다"식 화법의, 사람을 흔드는 말에 거의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라고 말해도 될 성 싶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때로는 악의없는(가끔은 악의 있는) 지나가는 사소한 말들 하나하나에 매번 흔들리고 꼼짝달싹 못하는 기분이 드는 일상이라는 뜻이다.

 

(가장 서글픈 대목은, 스스로 불안한 사람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불안을 주변에 전염시킨다는 부분일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했겠지. 닿을지 모를 사과의 말을 전해 본다.)

 

 

2. 턱 밑까지 차오른 불안감에 우왕좌왕하다 못해, 생각을 조금 다시 먹기로 했다.

솔직히 전업 대학원생(?)으로서의 현 상태란, 부모의 도움이든, 자잘한 부대 수입이든 생활비가 모조리 떨어지면 당장 내일이라도 관둬야만 할 극히 불안정한 상태다.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은 먼 미래를 꿈꿀 만큼 뭐라도 좀 보장이 된 사람의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면, 거창하게 저 멀리, 다가오지 않은, 그리고 사소한 일상사의 세심한 위험까지 이거 저거 깊게 따질 필요가 있나 싶다. 천리 밖의 미래를 상상해 봤자, 당장 내일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허무감을 상상해보면, 불안감의 양분이 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건 대체로 퍽이나 무망한 일이 된다.

 

 

3. 예상과는 달리 씩씩한 급 마무리지만, 아무튼, 불안감을 견디다 못해, 너무 많은 것들을 깊게 생각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당장 내일 관둬도 후회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단 되는데까지만 오늘 할 일을 해 보기로 했다.

 

주변에게 인정받는 가치있는 글, 주변에게 미움받지 않는 좋은 처신에 대한 고민도 다 좋지만,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당장에 내가 하고 싶은 것,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틀려서 문제가 되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치면 그만이다. 다시한번 반복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당장 내일도 관둬야 할지 모르는 게 지금 처지의 공부하는 일상이다. 이것저것 재다가 어느새 관두고 스러지는 것 보다는, 잘못이란 걸 한 뒤에 손해보고 고칠 미래가 있는 쪽이 아무래도 훨씬 긍정적이다..

 

 

4. 요 며칠, 하던 일들이 죄다 잘 풀리지 않아서 좀 괴로웠는데, 그 중 한 꼭지를, 주저에 고민만 반복하다 정작 내용은 없고 죽도밥도 안 되는 상태로 마감에 쫓겨 내던지면서 다시한번 생각해 봤다. 오래간만의 푸념 끝.

 

 

2020. 5. 13

최근 읽은 연구서 서문 중,(주장의 찬반 여부와 별도로) 연구자로서의 연구 대상을 보는 태도 전반에서 눈에 띄게 큰 감동을 준 글이기에, 혹여 나와 비슷한 감동을 받을 분이 계실지 몰라 오며가며 짬을 내어 옮겨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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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필생의 과제로 삼은 '연암 박지원 평전'을 한창 집필하던 중 '홍대용'이라는 큰 산을 만났다. 연암이 삼십대 중반에 담헌 홍대용과 처음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으로 북학사상을 품게 되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붓이 멈춰 버린 것이다. 애초 생각으로는 홍대용에 대한 학계의 선행 연구가 적지 않으니 그에 힘입어 순조롭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존의 연구 성과에 의거해서는 지금껏 집필해 온 연암 평전의 수준을 유지하며 그 대목을 써 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연암에 대해서만큼 홍대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지 못하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2015년부터 집필에 전력한 끝에 5년 만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 3부작인 "연기" "간정필단" "을병연행록"을 새롭게 읽음으로써, 1765~1766년의 연행을 계기로 그의 사상에 일어난 중대한 발전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홍대용과 북학파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이를 통해 심화되기를 기대하였다.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로 책 제목을 정한 이유는 당시 북경에서 항주 출신의 비범한 선비 엄성,반정균,육비를 만난 것이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부 21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핵심부인 3. 4. 5부에 속하는 도합 12개의 장이 전적으로 항주 세 선비와 관련한 논의에 바쳐져 있다. 홍대용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다룬 1부와, 연행의 경위와 북경 체류 당시의 활동을 살펴본 2부는 이러한 핵심부의 논의를 뒷바딤하기 위한 서설로 쓰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학술서로서 높은 수준을 견지하면서도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평전의 글쓰기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홍대용의 삶과 사람됨, 항주 세 선비와의 진솔한 우정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사상에 공감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학술적인 논의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전문 용어나 한자어를 가급적 줄이고 현대 일상어로 평이하게 서술하려고 애썼다. 주석은 미주로 돌리고 본문만 읽어도 충분히 내용이 이해되게끔 배려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1,300여 개의 주석이 달려 있어, 본문 500여 쪽에다 미주가 250여 쪽에 달한다. 이처럼 공들여 주석을 달았으므로, 본문에서 제시한 학술적 견해의 근거를 알고자 하는 전문가들은 미주를 눈여겨보아 주시기 바란다.

 

최근의 우리 학계를 돌아보면 소박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구태의연한 실학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탈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실학을 폄하하고 그 역사적 실체마저 의심하는 경향이 드세지고 있다. 홍대용 연구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실정이다. 실학이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만큼, 실학 연구는 더더욱 철저하게 실사구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대용의 생애에 관한 정확한 규명이나 그가 남긴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검토 등 실증적인 기초 연구가 여전히 부실한 상태에서 독단적이고 허풍스러운 담론이 횡횡하는 현상을 목도한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연암과 담헌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주장이다. '북학'을 주창한 사상적 동지로서 서로 존경하며 지극한 우정을 나누었던 이 두 분의 사이를 억지로 가르고, 한쪽을 터무니없이 추켜세우면서 다른 한쪽을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또는  홍대용을 탐관오리나 이중인격자로 속단하고 위선적인 인물로 혹평하기도 한다. 이 같은 억설들은 결국 북학파를 격하하거나 '해체'하려는 것으로, 조선 시대 선비로서 홍대용이 지녔던 드높은 도덕성과 우정의 윤리를 몰이해한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에서 항주 세 선비나 청나라 황족과의 우정을 논한 이 책의 4부는 홍대용과 북학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도달하지 못한 정신적 경지를 이해하게 하는 데 기여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정년퇴임과 더불어 인생 제3막을 시작한 나의 첫 번째 저서이다. 박사논문이자 첫 저서인 "열하일기 연구" 이후 꼭 30년만에 간행하는 책이기도 하다. 학문적 출발점인 조선 후기 연행록 연구로 되돌아온 셈이다. 당시 수준에 비해 과연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겸허하게 자문해 본다.

 

이제 내게는 북경 여행 이후 항주 세 선비를 위시한 청나라 문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중심으로 홍대용의 후반기 생애와 사상적 모색을 해명하는 일이 후속 과제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북학파의 탄생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후속작으로 나의 홍대용 연구는 완결될 것이다. 앞으로 또 몇 년의 세월이 소요될지 두렵고 주저되지만, 아마도 가야 할 그 길로 가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DB,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DB등을 널리 활용했다. 이와 같은 디지털 자료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절약되었다. 천안박물관의 홍대용 관련 자료 발굴과 공개,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홍대용 자료 영인 사업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혜택을 누린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관계 기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분의 힘을 빌렸다. 국내외의 자료를 구해 주며 연구를 도와준 신로사 박사와 쉬팡(許放)교수, 양쉬에(楊雪)님, 그리고 채송화 님을 비롯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 제자들에게 각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이 책에 수록할 귀한 사진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해 준 지원구 선생과 정민 교수께도 감사드린다. 전작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에 이어, 이번에도 돌베게 한철희 사장님은 간행을 흔쾌히 맡아 주셨고 이경아 인문고전팀장은 전문가의 혜안과 정성으로 책을 다듬어 주었다. 정말 고맙고 정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집필하던 막바지에 코로나19의 전세계적 유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았다. 심각한 기후 위기와 팬데믹으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문명의 대전환을 고민해야 할 이 비상시국에 너무나 한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원고를 마무리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2020년 10월

김명호

"참고한 번역서에 대한 각주표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장황하지만 부연은 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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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결론은 2 가지다.

- 1차문헌은 사정이 복잡하다.(이상과 현실이 상부되지 않음을 감안할 수 있다.)

- 2차문헌은 무조건 표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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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접전공 기준, 1차문헌은 사정이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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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으로는, 어느쪽이든 '참고한 것'에 대해서는 표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다만, 때로는 분야와 문헌에 따라 '번역서 말고, 원서를 봐야만 하는'것이 요구되는 테마가 있고, 그 경우 결과론적으로 '번역서를 참고했다고 말하기 어려운-혹은 이상적으로는 참고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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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접 전공 기준으로는 '1차자료-2차자료'구분을 통해 이 문제가 가시화된다. 간단히 말해, 1차자료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참고하는 것은 연구자의 수준 미달이라는 입장이 (실제 번역서를 한번쯤 참고하느냐 마느냐와 별개로) 확실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때도, 원론적으로 새 연구를 구성할 때는, 기존 번역 자체에 대한 비평을 일일이 시도하면서, 새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일일이 번역비평을 넣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정말 사소한 남의 번역실수를 지적하는 것은 점잖지 않다는 분위기도 있거니와 논문의 주제 밖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그냥 (사실 번역본을 1차로 훑긴 했지만) '내가 새로 번역해서' 쓰는 경우가 선택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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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경우, 결국 '그 원전의 번역능력이 논문 저자의 역량과 직결되는 경우'에는 번역서를 각주에 넣기 쉽지 않게 된다.(분명히 말하건대, 이 과정 속에서 '번역서의 학술적 저평가를 부르는' 폐단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구조가 이런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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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인접전공 기준, '2차 자료'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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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여말선초 전공자인 내 논문이, 중국 후한대에 대한 영어권 연구를 원서로 읽지 않았다고 해서 논문의 신뢰도를 의심받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후한대에 대한 영어권 연구가 '논증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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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를 다루는 논문에 500년이나 차이나는 후한대 역사상을 굳이 참고한다면, 대개는 '내 연구대상의 도식에서 참고한 선례', 혹은 '이 부분의 내 논증을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한 참고사항'정도의 의미에서 활용될 뿐 논증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참고사항'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참고사항'의 '字句'에 대한 정치한 이해 자체가 논문에서 중요하지 않기에, '원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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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여말선초 지성계에 미친 후한대 유교사상의 영향'같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닌, 조금은 느슨한 구도의) 연구를 진행한다고 하면, 당연히, 후한대 문헌 자체에 대한 이해가 논증에서 무척 중요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2차자료로부터 참고한다 해도, 번역본만으로 자족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형태론적 참고'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번역능력'에 의존하는 중요도가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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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2차문헌을-이론적 참고로만 활용한 논문에서, 번역서를 굳이 안 쓴다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으로 보기 힘들다. 정말 우연의 계기로 번역서의 존재를 몰랐거나, 정말 그 원전쪽의 원어로 된 자구 하나하나가 내 논문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 좋은 의도로 읽히기가 어렵다.

(좀 더 솔직하게, '외국어 논문도 읽을 만큼 영어 실력이 되는 티'+'공부를 열심히 한 티'를 내기 위한 의도가 읽힌다는 점을 구태여 부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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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이 길어져서 블로그까지 활용했지만. 그냥 좀 개인과 학문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 얕은 꾀를 가급적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남의 탓이 아니라,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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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3

'가버나움'을 봤다.


1) 처음에는 '가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보고 나니 '결국에는, 국가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2) 가족과 국가는 서로의 보완재이면서도 경우에 따라 대체제가 되기도 한다.
'태어남'그 자체로부터 나타나는 원초적 공동체인 가족은 그 자체로는 국가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거명령'으로 대변되는 공권력의 외면 속에서는, 모두가 더욱 일차원적인 '가족'을 갈구하기도 한다. 다들 각자의 비틀린 혹은 관성적인 이유로 결혼이든 출산이든 입양이든 '가족'을 원하고, 심지어 '혈연적 가족'이 제 기능을 못할 때에는 (요나스로 대표되는) '진정한 가족'에 이입하기도 한다. 어느쪽이든 '국가'의 빈 자리에서 가족의 색채는 어느 때보다 진한 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3) 하지만 '가족'으로서의 삶이 유지되지 못한다면, 아니, 더 나아가 급기야 '태어나게 만든 죄'를 묻게 만들 정도로 가족 자체가 개인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가버리게 된다면, 한동안 존재감을 잃었던 '국가'에 손을 뻗는 순간이 온다. 
(안타깝게도 당초 주인공 자인의 가족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고통 속의 자인은 망명을 신청하게 할 '출생신고서'의 존재를 갈구하고, 자신을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에 대한 '고소'를 가능케 한 자국의 사법 제도에 손을 내밀고, 급기야 더 먼 곳에 있는 '스웨덴'을 갈망하게 된다. 결국 (그것이 '진짜 구원'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영화의 엔딩이 '신분증 사진 촬영을 하며, 처음으로 웃는'자인의 모습으로 마무리된 것은 상징적이다.

- 다만 강조해서 말하건대, '가족과 국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내 설명은 해당 영화가 '국가제도가 개인을 구원하는 목적론적 구원서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확히는, '사는게 좆같아진' 주인공의 고됨이 일차적으로는 가족의 부재 속에서 일어나는 비극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부재 속에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의미이다.


4) 물론 개인이 국가와, '적당한 매개' 없이 맞닿기가 쉬운 일인것은 아니다. '국가'에 접근하려던 편법적(동시에 '가까운') 시도들을 상징하는 신분증 위조-밀항이 실패하고, 미디어-국제구호단체와 같은 '비일상적 매개'의 도움을 받은 주인공만이 구원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에는, 인간이란 그 '매개'의 힘을 빌어서라도, 누군가는 결국 가족과 국가, 때로는 양자 택일적으로 가족 혹은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필요로하게 되는 것만은 여전할 것이다.
(그 '국가-가족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거듭된 주인공의 고통을 전시하는 이 영화가 단순한 '제3세계 빈곤 포르노'가 아닌 증거라고 생각한다.)


5) 이런저런 여담. 

- 영화 전체의 메시지에 비하면 지극히 파편적이지만, '1세계 구호단체에 의한 3세계의 구원' 서사가 아주 조금 찜찜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감독 자신이 연기하기도 한) 변호사 '나딘'을 포함한 자국의 사법제도 전반, 나아가 자국의 미디어 집단 등 '중간 매개'를 충분히 설정해 둔 것을 볼 때, 그렇게까지 단순한 이분법은 아닌 것 같아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1세계의 구호를 받는 현상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 영화는 짤막하게나마 '영웅'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도 하다. 놀이동산에서 만난 '스파이더맨 옷만을 입은-바퀴맨'의 존재가 자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어른들이 아이들을 구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 목적지로서의 가족-국가의 존재와는 별도로) 어쨌든 자인을 구하려 한 것은 라힐이었으며, 요나스와 사하르를 구하려 분투한 것도 자인이었다.  현란한 영웅심이나 당장의 완력-재력보다는, 당장의 개인을 구원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보호본능'같은 매우 1차원적이고 일상적인 행동이라는 것.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는 이 영화의 매우 말단에 속한다)

- 3세계의 경우에는 국가의 큰 울타리 아래에서, (서로의 보완재, 혹은 대체제로서) 가족의 존재가 기능하는 것이라면, '국가-제도'의 역할이 충분히 안정화된 1세계에서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가버나움 인근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1세계 국가'라기 보다는, 1세계 시민단체인 것도 같은 현상이겠지. 

- 아마도 (상상이 잘 안가지만) 저 영화의 배경이 1세계 국가였다면, 그리도 '국가'의 존재가 구원자인양 깊게 작용할 수 있었을까. (전통적인 히어로무비로 대표되는) '자경단 전통'을 강조해 온 헐리웃 영화였다면 분명 주인공을 둘러싼 '개인-사회의 영웅적 행동'에 무게를 더욱 크게 주지 않았을까..(전술한 것 처럼 이미 이 영화도 아주 약간은 영웅에 대해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비중이 더 커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봤다.


대강 그런 생각들을 했다.

2019. 2. 10

1) "앞서 얘기했듯 세계 각국의 천연물 의약품 개발 시도는 이미 정립된 안전성·유효성 평가 방법론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근대적인 전통의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14년간 1조 원대의 연구개발 예산까지 지원했던 천연물신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일련의 ‘한국형’ 사업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셈이죠.


그럼에도 천연물 의약품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의약품은 주목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관리가 힘든 만성질환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도 있고, 개발할만한 것은 이미 다 나왔다는 한탄이 나오는 합성 의약 분야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 단일 성분의 효능 규명 방식으로는 밝히기 힘들던 약효가 최근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여러 성분들의 복합적인 작용을 검토하는 방식으로는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천연물 의약품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그지없는 장내 미생물(gut microbiome)에게 작용하여 2차적 생리 반응을 유도하는 현상이 규명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역시도 누적된 전통의약적 지식에 기반 두고 돌파구를 열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재와 같은 전근대적 의약품에 대한 용인이 상존하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아직도 약초로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절박한 환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최신 연구결과를 통해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질 리가 없지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고려할 때 적극적 논의가 힘들겠지요. 지금보다 조금 더 개선된 치료법을 얘기하려다가 ‘안아키’ 방식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오해가 퍼진다면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그냥 얘기를 안 꺼내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추후 세대교체와 더불어 인식개선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논의도 탄력을 받아 현대 의학의 대전제 위에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미래 먹거리라던 천연문 신약은 왜 사라졌을까" 2017. 6. 28(https://brunch.co.kr/@coldtongue/8)




1) 나는 이 글이 역설적으로 한국학(어쩌면 동양학?) 연구의 현주소와 존재가능성에 대해서 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와 미진했던 점을 냉정하게 계량화하고, 그 틀 위에서 현재적 시점에서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는 까닭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2) 서구화에 주류를 빼앗겼다.는 (분명 사실에 기반한) 역사적 흐름이 낳은 폐해는, 비단 '패배주의'만은 아닐거라고 늘 생각한다. 어쩌면 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우리식의 대안"내지 "동양적 가능성"같은 규격 외 담론을 던져놓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경향은, '무턱대고 던져진 패배주의' 이상으로 진지한 논의를 방해하는 유해한 흐름이다.



3) 실제로 우리가 아는 '과학적 원리'의 상당수는, 이미 서구사회 그 자신의 '신비적-몰이성적' 케이스 수집을 통해서 느슨하게 도출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 과학적 원리의 '상당수'는 큰 틀이 규명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등장하는 복합적 양상들을 모두 해명할만큼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우선 주어진 현상들의 진단이나-해명의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례'의 설명들에 취약하다. 

나아가 때로는 이미 조사된 집단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오류가 생기기 쉽다. 



4) 어느쪽이든 '연구'라는 것은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검토로 이루어진다. 그 까닭에 기존 연구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방법(중 하나)은, 지금까지 투입된 사례들과는 다른 사례들을 충실히 검토하는 것이며, 그 의미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중심부 논의'에 맞닿을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글에 소개된 것이 사실이라면) 당초 서구 세계의 '과학' 발전의 기반부터가 생약연구에서 녹아있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그 약학연구의 테크닉 발전에 유의미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동양적' 생약 연구는 (마이너인 차원에서) 유의미한 사례 전달을 제공할 수 있다.

만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케이스-모델들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합리적' 통찰이 인문-사회과학의 목표라고 한다면, 당연히 동양적 사례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같은 '한정적인 유의미성'에 대한 논의마저도, 그 '마이너한 한계선'을 지킬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연구대상에 대한 애정과, '들뜸'을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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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많이 받는 질문 중에 “어떤 빵을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이 있는데, 저는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전 파리바게뜨의 찹쌀 도너츠와 소세지빵, 두 가지를 제일 좋아합니다. (웃음) 몇년 전이죠. 한참 대기업 빵집이 골목 빵집을 다 죽인다는 이슈가 있었어요. 이 주제로 기자들이 저에게 인터뷰 요청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제가 “대답을 하면 그대로 기사화할 수 있는지 약속해달라”고 했어요.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시길래 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파리바게뜨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요.   

  
전 파리바게뜨 빵이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동네 빵집 얘기를 해볼까요. 30년 동안 빵집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옆에 막 결혼한 새댁이 뭘 해야할 지 몰라서 파리바게뜨를 차렸어요. 그랬더니 30년 된 빵집 매출이 반으로 꺾였어요. 이유가 뭘까요. 빵이 맛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게 제 대답입니다. 예전엔 동네 빵집은 어디나 잘 팔렸어요. 빵집이 많이 없었거든요. 돈이 잘 벌리니 굳이 맛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지낸 거에요. 30년 빵집이라고 하지만 주인이 실제로 빵 만든 건 10년 밖에 안돼요. 그 뒤론 사장도 자기 빵을 먹어보지도 않아요.   
  
저는 사명감을 갖고 빵을 만드는 분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정한 품질의 빵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이 있으니 맛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스타벅스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급 커피 시장이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커피 맛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을 만든 거죠. 그래서 전 오히려 파리바게뜨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에요.
...(하략)
"
[출처: 중앙일보] '오월의 종' 빵집사장의 도발 "파리바게뜨 많아져야 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233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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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화'와 '예술성'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나름대로 오랜 시간 붙들고 가는 고민거리 중 하나다.

(노블리티에 대한 찬탄을 모른다며 이따금 매도당하곤 하지만) 나조차도 "좋은 것"은 사실 그 기준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나아가 이를 누군가 알아주거나 설득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서술을 뛰어넘는, 무리지은 합의를 뛰어넘는, 직관의 영역에서 맴도는 '탁월함'이란,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2) 하지만, 동시에 그 '탁월함'의 세계란, 그 자체만으로는 서술이나 설득이 동반되 않기에 재생산될 수도 없고, 그 까닭에 부싯돌의 불꽃처럼 나타났다 흩어져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잘 안다. 그 뿐인가. 그 일시성 비정형성은 그 탁월함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회의적 입장에 제법 취약하기도 하다. 서술-설득이 빠진 탁월함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 아니냐는 비단 타인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제기되는 시니컬한 냉소에 답변하지 못한다. 


- 물론 아까도 말했듯 '탁월함'은 합의의 산물이 아니므로, 달리 설득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세에 발 딛는 존재로서, 인간이란 자족적 에고만으로는 저 자신 하나의 삶조차 감당해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최근 소세키의 "마음"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인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회와 세계에 대한 혁명적-선지자적 야심을 꿈꾸는 게 아닌, '심미적 탁월함'을 꿈꾸는 이에게도 어떤 '표준'의 존재는 여전히 절실한 것이 된다.



3) 동네 빵집이 대기업보다 탁월할 수 있다. 오히려 개성의 독자성, 유연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보다 못한 게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그 까닭에 파리바게뜨 유행이 그 탁월한 개성의 세계를 획일화한다는 지적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그 '탁월함'이 찰나의 우연을 뚫고 스스로의 존재를 현세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수용자의 측면에서든 생산자 자신의 측면에서든 '표준'의 존재가 "생각보다는" 중요하다. 그 까닭에 당위적 측면에서 잘 된 동네 빵집은 '파리바게뜨'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기사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201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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