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서 얘기했듯 세계 각국의 천연물 의약품 개발 시도는 이미 정립된 안전성·유효성 평가 방법론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근대적인 전통의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14년간 1조 원대의 연구개발 예산까지 지원했던 천연물신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일련의 ‘한국형’ 사업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셈이죠.
그럼에도 천연물 의약품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의약품은 주목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관리가 힘든 만성질환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도 있고, 개발할만한 것은 이미 다 나왔다는 한탄이 나오는 합성 의약 분야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 단일 성분의 효능 규명 방식으로는 밝히기 힘들던 약효가 최근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여러 성분들의 복합적인 작용을 검토하는 방식으로는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천연물 의약품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그지없는 장내 미생물(gut microbiome)에게 작용하여 2차적 생리 반응을 유도하는 현상이 규명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역시도 누적된 전통의약적 지식에 기반 두고 돌파구를 열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재와 같은 전근대적 의약품에 대한 용인이 상존하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아직도 약초로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절박한 환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최신 연구결과를 통해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질 리가 없지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고려할 때 적극적 논의가 힘들겠지요. 지금보다 조금 더 개선된 치료법을 얘기하려다가 ‘안아키’ 방식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오해가 퍼진다면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그냥 얘기를 안 꺼내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추후 세대교체와 더불어 인식개선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논의도 탄력을 받아 현대 의학의 대전제 위에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미래 먹거리라던 천연문 신약은 왜 사라졌을까" 2017. 6. 28(https://brunch.co.kr/@coldtongue/8)
1) 나는 이 글이 역설적으로 한국학(어쩌면 동양학?) 연구의 현주소와 존재가능성에 대해서 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와 미진했던 점을 냉정하게 계량화하고, 그 틀 위에서 현재적 시점에서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는 까닭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2) 서구화에 주류를 빼앗겼다.는 (분명 사실에 기반한) 역사적 흐름이 낳은 폐해는, 비단 '패배주의'만은 아닐거라고 늘 생각한다. 어쩌면 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우리식의 대안"내지 "동양적 가능성"같은 규격 외 담론을 던져놓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경향은, '무턱대고 던져진 패배주의' 이상으로 진지한 논의를 방해하는 유해한 흐름이다.
3) 실제로 우리가 아는 '과학적 원리'의 상당수는, 이미 서구사회 그 자신의 '신비적-몰이성적' 케이스 수집을 통해서 느슨하게 도출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 과학적 원리의 '상당수'는 큰 틀이 규명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등장하는 복합적 양상들을 모두 해명할만큼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우선 주어진 현상들의 진단이나-해명의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례'의 설명들에 취약하다.
나아가 때로는 이미 조사된 집단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오류가 생기기 쉽다.
4) 어느쪽이든 '연구'라는 것은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검토로 이루어진다. 그 까닭에 기존 연구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방법(중 하나)은, 지금까지 투입된 사례들과는 다른 사례들을 충실히 검토하는 것이며, 그 의미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중심부 논의'에 맞닿을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글에 소개된 것이 사실이라면) 당초 서구 세계의 '과학' 발전의 기반부터가 생약연구에서 녹아있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그 약학연구의 테크닉 발전에 유의미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동양적' 생약 연구는 (마이너인 차원에서) 유의미한 사례 전달을 제공할 수 있다.
만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케이스-모델들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합리적' 통찰이 인문-사회과학의 목표라고 한다면, 당연히 동양적 사례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같은 '한정적인 유의미성'에 대한 논의마저도, 그 '마이너한 한계선'을 지킬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연구대상에 대한 애정과, '들뜸'을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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