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한 번역서에 대한 각주표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장황하지만 부연은 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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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결론은 2 가지다.
- 1차문헌은 사정이 복잡하다.(이상과 현실이 상부되지 않음을 감안할 수 있다.)
- 2차문헌은 무조건 표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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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접전공 기준, 1차문헌은 사정이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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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으로는, 어느쪽이든 '참고한 것'에 대해서는 표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다만, 때로는 분야와 문헌에 따라 '번역서 말고, 원서를 봐야만 하는'것이 요구되는 테마가 있고, 그 경우 결과론적으로 '번역서를 참고했다고 말하기 어려운-혹은 이상적으로는 참고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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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접 전공 기준으로는 '1차자료-2차자료'구분을 통해 이 문제가 가시화된다. 간단히 말해, 1차자료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참고하는 것은 연구자의 수준 미달이라는 입장이 (실제 번역서를 한번쯤 참고하느냐 마느냐와 별개로) 확실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때도, 원론적으로 새 연구를 구성할 때는, 기존 번역 자체에 대한 비평을 일일이 시도하면서, 새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일일이 번역비평을 넣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정말 사소한 남의 번역실수를 지적하는 것은 점잖지 않다는 분위기도 있거니와 논문의 주제 밖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그냥 (사실 번역본을 1차로 훑긴 했지만) '내가 새로 번역해서' 쓰는 경우가 선택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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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경우, 결국 '그 원전의 번역능력이 논문 저자의 역량과 직결되는 경우'에는 번역서를 각주에 넣기 쉽지 않게 된다.(분명히 말하건대, 이 과정 속에서 '번역서의 학술적 저평가를 부르는' 폐단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구조가 이런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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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인접전공 기준, '2차 자료'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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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여말선초 전공자인 내 논문이, 중국 후한대에 대한 영어권 연구를 원서로 읽지 않았다고 해서 논문의 신뢰도를 의심받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후한대에 대한 영어권 연구가 '논증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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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를 다루는 논문에 500년이나 차이나는 후한대 역사상을 굳이 참고한다면, 대개는 '내 연구대상의 도식에서 참고한 선례', 혹은 '이 부분의 내 논증을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한 참고사항'정도의 의미에서 활용될 뿐 논증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참고사항'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참고사항'의 '字句'에 대한 정치한 이해 자체가 논문에서 중요하지 않기에, '원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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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여말선초 지성계에 미친 후한대 유교사상의 영향'같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닌, 조금은 느슨한 구도의) 연구를 진행한다고 하면, 당연히, 후한대 문헌 자체에 대한 이해가 논증에서 무척 중요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2차자료로부터 참고한다 해도, 번역본만으로 자족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형태론적 참고'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번역능력'에 의존하는 중요도가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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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2차문헌을-이론적 참고로만 활용한 논문에서, 번역서를 굳이 안 쓴다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으로 보기 힘들다. 정말 우연의 계기로 번역서의 존재를 몰랐거나, 정말 그 원전쪽의 원어로 된 자구 하나하나가 내 논문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 좋은 의도로 읽히기가 어렵다.
(좀 더 솔직하게, '외국어 논문도 읽을 만큼 영어 실력이 되는 티'+'공부를 열심히 한 티'를 내기 위한 의도가 읽힌다는 점을 구태여 부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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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이 길어져서 블로그까지 활용했지만. 그냥 좀 개인과 학문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 얕은 꾀를 가급적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남의 탓이 아니라,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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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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