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연구서 서문 중,(주장의 찬반 여부와 별도로) 연구자로서의 연구 대상을 보는 태도 전반에서 눈에 띄게 큰 감동을 준 글이기에, 혹여 나와 비슷한 감동을 받을 분이 계실지 몰라 오며가며 짬을 내어 옮겨 적어보았다.
---
책을 펴내며
필생의 과제로 삼은 '연암 박지원 평전'을 한창 집필하던 중 '홍대용'이라는 큰 산을 만났다. 연암이 삼십대 중반에 담헌 홍대용과 처음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으로 북학사상을 품게 되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붓이 멈춰 버린 것이다. 애초 생각으로는 홍대용에 대한 학계의 선행 연구가 적지 않으니 그에 힘입어 순조롭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존의 연구 성과에 의거해서는 지금껏 집필해 온 연암 평전의 수준을 유지하며 그 대목을 써 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연암에 대해서만큼 홍대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지 못하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2015년부터 집필에 전력한 끝에 5년 만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 3부작인 "연기" "간정필단" "을병연행록"을 새롭게 읽음으로써, 1765~1766년의 연행을 계기로 그의 사상에 일어난 중대한 발전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홍대용과 북학파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이를 통해 심화되기를 기대하였다.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로 책 제목을 정한 이유는 당시 북경에서 항주 출신의 비범한 선비 엄성,반정균,육비를 만난 것이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부 21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핵심부인 3. 4. 5부에 속하는 도합 12개의 장이 전적으로 항주 세 선비와 관련한 논의에 바쳐져 있다. 홍대용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다룬 1부와, 연행의 경위와 북경 체류 당시의 활동을 살펴본 2부는 이러한 핵심부의 논의를 뒷바딤하기 위한 서설로 쓰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학술서로서 높은 수준을 견지하면서도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평전의 글쓰기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홍대용의 삶과 사람됨, 항주 세 선비와의 진솔한 우정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사상에 공감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학술적인 논의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전문 용어나 한자어를 가급적 줄이고 현대 일상어로 평이하게 서술하려고 애썼다. 주석은 미주로 돌리고 본문만 읽어도 충분히 내용이 이해되게끔 배려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1,300여 개의 주석이 달려 있어, 본문 500여 쪽에다 미주가 250여 쪽에 달한다. 이처럼 공들여 주석을 달았으므로, 본문에서 제시한 학술적 견해의 근거를 알고자 하는 전문가들은 미주를 눈여겨보아 주시기 바란다.
최근의 우리 학계를 돌아보면 소박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구태의연한 실학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탈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실학을 폄하하고 그 역사적 실체마저 의심하는 경향이 드세지고 있다. 홍대용 연구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실정이다. 실학이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만큼, 실학 연구는 더더욱 철저하게 실사구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대용의 생애에 관한 정확한 규명이나 그가 남긴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검토 등 실증적인 기초 연구가 여전히 부실한 상태에서 독단적이고 허풍스러운 담론이 횡횡하는 현상을 목도한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연암과 담헌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주장이다. '북학'을 주창한 사상적 동지로서 서로 존경하며 지극한 우정을 나누었던 이 두 분의 사이를 억지로 가르고, 한쪽을 터무니없이 추켜세우면서 다른 한쪽을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또는 홍대용을 탐관오리나 이중인격자로 속단하고 위선적인 인물로 혹평하기도 한다. 이 같은 억설들은 결국 북학파를 격하하거나 '해체'하려는 것으로, 조선 시대 선비로서 홍대용이 지녔던 드높은 도덕성과 우정의 윤리를 몰이해한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에서 항주 세 선비나 청나라 황족과의 우정을 논한 이 책의 4부는 홍대용과 북학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도달하지 못한 정신적 경지를 이해하게 하는 데 기여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정년퇴임과 더불어 인생 제3막을 시작한 나의 첫 번째 저서이다. 박사논문이자 첫 저서인 "열하일기 연구" 이후 꼭 30년만에 간행하는 책이기도 하다. 학문적 출발점인 조선 후기 연행록 연구로 되돌아온 셈이다. 당시 수준에 비해 과연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겸허하게 자문해 본다.
이제 내게는 북경 여행 이후 항주 세 선비를 위시한 청나라 문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중심으로 홍대용의 후반기 생애와 사상적 모색을 해명하는 일이 후속 과제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북학파의 탄생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후속작으로 나의 홍대용 연구는 완결될 것이다. 앞으로 또 몇 년의 세월이 소요될지 두렵고 주저되지만, 아마도 가야 할 그 길로 가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DB,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DB등을 널리 활용했다. 이와 같은 디지털 자료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절약되었다. 천안박물관의 홍대용 관련 자료 발굴과 공개,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홍대용 자료 영인 사업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혜택을 누린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관계 기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분의 힘을 빌렸다. 국내외의 자료를 구해 주며 연구를 도와준 신로사 박사와 쉬팡(許放)교수, 양쉬에(楊雪)님, 그리고 채송화 님을 비롯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 제자들에게 각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이 책에 수록할 귀한 사진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해 준 지원구 선생과 정민 교수께도 감사드린다. 전작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에 이어, 이번에도 돌베게 한철희 사장님은 간행을 흔쾌히 맡아 주셨고 이경아 인문고전팀장은 전문가의 혜안과 정성으로 책을 다듬어 주었다. 정말 고맙고 정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집필하던 막바지에 코로나19의 전세계적 유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았다. 심각한 기후 위기와 팬데믹으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문명의 대전환을 고민해야 할 이 비상시국에 너무나 한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원고를 마무리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2020년 10월
김명호
'신변잡기 및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학의 쓸모'라는 질문, 그 자체의 문제 (0) | 2022.11.14 |
---|---|
푸념이거나 체념이거나, 어쩌면 다짐 (0) | 2021.03.20 |
번역서 각주처리의 여러 사정들 (0) | 2020.04.03 |
"가버나움"을 보고 (0) | 2019.02.10 |
생약 연구와 한국학의 '쓰임새'에 관하여 (0) | 2019.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