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션" 2013 고어 비달(권오숙 역), 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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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은, 거의 최근 10년 이래 읽은 가장 장편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뭐라고 정리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떠오르는대로나마 드문드문 중구난방으로 이런저런 느낀점을 메모해 두고자 한다.



1) 역사소설이자, 철학적 가상 대화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소설. 비슷한 느낌으로 (작가 자신의 전작인) "벤허"의 정서도 조금 느껴졌는데, 어쩐지 나로서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히스토리에" 생각도 조금 했다. 



2) 작품을 관통하는 두 축은, 페르시아 국내문제를 다루는 정치극의 한 축, "창조와 선악"의 문제를 다루는 주인공의 철학적 여정의 다른 한 축. 둘 다 빠짐없이 좋았다.



3)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조로아스터의 손자로 설정된 주인공 키루스 스피타마에게, 작가는 개신교적 세계관을 내심 이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조로아스터 중에서도 (기성 사제집단으로서의) "마기"에 대한 거리감.. 사소한 부분이지만  당초 조로아스터교적 세계관이 크리스트교 세계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대의 유대교(대충 구약으로 치면 '느헤미야기/에스라기'정도의 시즌.) 분파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등등 의심을 파고들려면 꽤 '징후'가 많다고 생각했다.



4)그렇지만, 어느쪽이든, 작중에서는 주인공을 통해 "개신교"자체의 우위를 드러내지 않고, 단지 "개신교적 창조-선악관"을 "주인공"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도의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느꼈다.

일례로, 약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에필로그지만, 결국 "창조-선악"에 대한 주인공의 입장은, 그 자체로 승패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더욱이 주인공 사후 (다분히 '자연과학적' 색채를 대변하는) 데모크리토스로 저절로 '발전적 계승'이 되기 때문.



5) 주인공의 각종 문명권 여행에서 나타난 각 문명권 세계관에 대한 스캡티컬-시니컬한 비평도 좋았음. (블랙 유머의 진수 같은게 느껴지는 훌륭한 문장이었다.)

가령, 허풍과 과장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그리스적 문화라든지, 숫자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인도적 문화라든지, '시제'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중국적 문화라든지 등등.



6) '창조와 선악'에 한하자면 작가의 해명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까나.. 싶었다.

"네가 그 길을 충실히 따랐다면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처 = 질문에 대한 무관심으로 하늘에 반항

"창조와 선악을 뛰어넘는 '도=자연'을 무위로서 따라야 한다"는 노자 = 초월적 교의로서 변별을 무효화시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 공자 = 현세적/공리적/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축소시킴.



7) 어쨌든 작중을 관통하는 스캡티컬함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정서다. 크게 화내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 크게 감동받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모든 것에 서로 다른 이유로 회의적일 수 있는. 아울러 그 회의적인 성향 속에서 나름의 본질을 통찰하고자 정서... 등은 굉장히 '학자적'으로 지향하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8) 그나저나 대관절, 그 주인공의 스캡티컬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조로아스터에 대한 '스탠더드의 확고함'이 다른 것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낳는 것인가. 혹은 '세상에 잡신이 너무 많다'는 일종의 피로감 탓인 것일까.

- 나는 어쩐지 후자라고 믿고 싶다. 그 까닭에 단지 스탠더드의 확고함 탓이라면, '견문'의 존재나 '질문'의 존재 자체가 사실은 불필요하다. 키루스 스피타마는 딱히 '포교'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결국 '진실'은 확인과 탐구의 대상이며, 그 탐구의 과정은 단순히 진리/진리가 아닌 것으로 나뉘지 않는, '진실이 아닐 수 있는'것들과의 꾸준한 대조 끝에 나오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과정은 피로에 젖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9) 아울러, 그 '스캡티컬'이 비단 세상사에 대한 비웃음과, 현자들과의 만남 정도의 '지적 향유'에만 그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주인공이 갈망한 '진실'의 길은, 단순한 유희의 수준을 넘는, 통쾌하지도 득이 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수 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한 구도求道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구도의 길 끝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본인이 '닿은 만큼의' 진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라도-작중에선 데미크리토스에게) '알려야' 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주님'이 내린 어떤 소명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반복된 '스캡티컬'의 과정이, 나름의 유머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201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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