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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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한국의 단일성과 동질성이 강력한 제도의 형성이나 촌락과 군주 사이의 자발적인 제휴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성곽도시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사회, 봉건영주와 대저택, 반독립적인 상인 사회, 도시국가, 길드, 그리고 독립적인 지위와 정치행동의 중심지로서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응집력 있는 계급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단계적으로 대략 점점이 흩어져 있는 촌락, 작은 저자가 있는 소도시, 벌족이나 지역 소유의 서원이나 향교 내지 사찰로 구성되어왔으며, 이들은 주로 국가권력과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상호 간 교류를 해 왔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전형적으로 원자화된 개체로 구성되어 있고 개체 상호 간의 관계는 주로 국가권력에 대한 관계로 규정되며, 엘리트와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집단의 힘이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직접 대결하게 되고, 여러 사회관계가 비정형화되고 고립되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대중사회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앙집권과 독재정치를 지향한다.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들과 구분되고 있는데, 그것은 종류에서가 아니라 진행된 추세에서 보인 극단적인 수단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한국은 좁은 국토에다 인종도 종교도 정치도 언어도 혹은 다른 어떤 기본적인 원천도 적대적인 요소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이런 보편적인 가치 구조가 각 그룹으로 나뉘는 데 깊이나 계속성 혹은 선명도가 거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기득권, 종교적 반목, 기본적 정책의 차이 및 이데올로기적 분열은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장기간에 걸쳐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정치형태 안에서 그런 것들이 적당한 지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집단을 만드는 것은 주로 구성원들을 권력에 접근시키기 위한 기회주의적 수단이었으며, 서로 간 별 상위점이 없기 때문에 각 집단은 구성원의 개성과 그 당시 권력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집단을 만드는 것은 파당을 만드는 것이며 파당으로부터 실질적인 정당을 벼려내는 토론과 관심은 한국과 같이 동질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극도로 구심적인 역학 패턴이 나타나게 되는데, 영토가 협소하기 때문에 그것의 격렬성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좀 더 광대한 대중사회에서나 감내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역학 법칙은 사회의 여러 능동적 요소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빨아올리는 하나의 강력한 소용돌이 형태를 띠게 되었다. 

 

유럽이나 일본식 봉건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취약한 하부구조를 가진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에서는 수직적으로 강력하게 내리누르는 힘이 이런 상승기류 속에서 서로 간 보완관계를 갖게 된다. 말하자면 수평적 구조의 취약성이 강력한 수직적 압력을 크게 증가시킨 것이다.중앙에서 내려누르는 수직적 압력을 그것을 억제할 만한 지방 세력이나 혹은 독립적인 집단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형성된 소용돌이를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작용이 걸리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간집단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현기증 나는 상승기류는 모든 구성원들이 더 낮은 수준에서 응집되기 전에 권력의 정점을 향해 원자화된 형태로 그들을 몰아대기 위해 서로의 구성요소들을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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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헨더슨(박행웅 이종삼 역),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아카데미, 45~46쪽. (문단구성은 가독성을 위해 일부 조정)_원문은 '그 결과 극도로 구심적인..'을 기점으로 한 2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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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더슨의 주장을 간명하게 요약하면 대충 이런 구조인 것 같다.

(a).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열쇠는 동질성과 중앙 집중에 있다.

- 일찍부터 인종 문화 언어적 동질성이 있고, 안정적 지리적 경계를 유지하면서 농업국가로서 중앙집권화된 과두제를 수립. 그 결과 지방권력이 말살된 비경쟁적 중앙관료 통치를 유지했다.

(b). 엘리트와 대중 간에 매개 그룹이 없는 사회관계로 인해 한국 정치의 역학은 사회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을 태풍의 눈인 중앙권력을 향해 치닫게 한다.

- 한국의 이런 통일성 동질성은 촌락과 중앙권력 사이에 강력한 제도적 기구나 자발적 결사체 같은 중간 매개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는 대중사회를 만드는 작용을 했다.(즉 계급적 응집성이 없고, 무정형-고립성이 특징적인 '원자화 사회'를 낳았다는 것)

- 사회 전반에서 전문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대체 불가능성(개인별 차이보다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권력 그 자체')를 지향함.

(c). 이러한 중앙 집중적 환경 속에서 한국 정치는 당파성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한다

- 중앙 집중적 환경의 정점에 있는 평의회에 들어가기 위한 한국의 지위 쟁탈전은, 계층-종교-이데올로기적 차이가 아니라 자파 구성원에게 권력을 나눠주기 위해 일어났고 이들 대립의 결과로 4색 당파가 형성됨.

- 이와 같은 지위 쟁탈 자체에 목적이 집중된 한국의 당파 투쟁은 한국 정치의 핵심 내용을 '이슈'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에 두게 했고, 타협과 양보보다는 투쟁이 특징을 이루게 했다.

(d) '소용돌이치는' 환경의 문제는, 다원성만이 해답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정말 그런가.." 싶은 느낌)

 

 

2) 예전에 한국 역사학의 레토릭을 낯설게 보지 못하던 시절에는 비판만 미리 수용하느라 덮어놓고 백안시했던 이야기들이, 나중에 들어 좀 스스로의 판단을 정제하다 보니 비판할 부분들과 별도로 그 진가가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나에게는 그 분야의 최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근 들어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에서"에서 그리는 한국의 지역-친족 사회의 폐쇄성 담론이라든지, 한국에서 발표된 일련의 향촌사회사 연구들의 논쟁들을 따라가면서 갸웃한 부분들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해보니, 과연 헨더슨의 통찰이 옳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3) 물론 헨더슨의 주장은 '한국사 전체'에 적용시키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 책이 68년에 초판이 나왔고, 88년 6월에 개정판을 냈다고 했다) 소위 '80년대 이후의 변화'에 상당히 둔감하게 처리된 경향이 있다.

 

(a)일단 헨더슨 본인부터가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인들은 오히려 빨리 소용돌이 행위를 포기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경제성장이나 수도 이외의 자원 개발, 전문직종 증가 등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88년 서문'에 쓰고 있다(51~2쪽) 그 부분이 아니라도, "1987년 현재 전문가 인구가 대폭 늘어났으며 이들을 채용한 산업과 비지니스관계 회사도 크게 늘어나 20년전의 문제는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371쪽)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b) 핸더슨 자신의 생각과 별개인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국의 정치 필드에서 '영호남 갈등'이 주력 문제로 부상한 것이 그 서문을 쓰던 87년 이후의 일이라는 것도 주목의 가치가 있다. 헨더슨이 그리도 없다고 말했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지역주의'로 표출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c) 동시에, 87년 이후의 보통선거제 정착으로 대표되는 많은 변화가 '생각보다' 한국 사회의 정치참여도나 시민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동시에 '국제화'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다..

소위 '현재의 한국'을 만든 여러 요인들의 변화가 헨더슨이 제시한 패턴대로만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4) 다만, 이런 생각도 동시에 한다. 3)에서 말한 '87년 이후의 긍정적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외환위기와 각종 경제불황을 포함한 2019년까지의 추세까지를 포함한다면 어디까지 "소용돌이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지역주의의 성격은 최근들어 상당히 완화되는 대신, 도농갈등은 조금도 극복되지 않았고 점차 더 심해지고 있음을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회 레벨에서 공무원 시험 열기가 고도로 과열되고, 지방대가 줄줄이 폐쇄 위기에 놓인 국면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심화되기만 할 뿐이다.

 

정치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이슈'보다는,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환경에서 얼마나 우리는 벗어나 있을까? 그 의미에서 오히려 (20년 전보다도) 지금 들어서 새삼스레 읽히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2019.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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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진학의 갈림기에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한 역사라는 학문은 버거운 상대였다. 동숭동 문리대시절의 방황과 탐색 끝에 졸업 후 일찌감치 평범한 가정주부의 길을 택한 것도 그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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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새며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가정 꾸리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겨우 잔주접을 면한 두 아이를 떼어 놓고 30대 중반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만학도가 되었을 때의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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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지각생이라는 자격지심에서 10여년의 공백기를 메워야겠다는 갈증같은 조바심 속에, 학문의 길이 진정 무엇이지도 모르는 채, 오직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매진해 온 지난 15년의 세월이 차곡차곡 오늘의 나를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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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무슨 역사냐 싶은 따가운 눈총에도 이 길 이외에 더 나은 선택은 없다는 일념으로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을 계속해왔다. 때때로 엄습하는 회의와 절망, 바닷가 모래밭에서 금모래 줍기같은 자료찾기의 고된 작업도 이 길만이 유일한 귀의처라는 다짐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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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의 사교생활도 외면한 채 학교와 집 사이를 동동걸음 치면서 학자이기 전에 주부이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것도 흡족한 것이 못 되었다. 다 이루려는 자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는 진부한말이, 얻은 것이 있으면 잃기 마련이고 잃어으면 얻으리라는 당연한 이치가 새삼스러운 진리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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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남녀공학의 대학에 진학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좋은 동기생들을 만나 그분들의 남녀를 초월한 우정과 성원에 힘입은 바 컸고 고달픈 숙생의 좋은 벗이 되어 주고 있음은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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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엄마의 눈길과 보살핌에 주렸을 다 큰 두 아이들, 석사논문 쓸 때 겨우 돐을 넘기고 무릎에서 안 떨어지려 해서 애를 먹이던 막내딸 동세, 아이와 괴팍한 아내를 포용하여 늘 외조를 아끼지 않은 평생의 반려자에게 송구함을 이 책으로 대신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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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자, 1990,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일조각.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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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박사논문 재 편집본'을 읽을때면 그 '서문'을 주목하곤 하는데, 그 안에서는 보통 그 사람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결의 등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의미심장한 정옥자 선생의 그것을, 큰 맘 먹고 '조선후기 문화운동사'를 (이미 읽기야 읽었지만) 사 놓은 기념으로 옮겨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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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 학우들은 물론이거니와, 공부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단순히 '현실적인 여건 문제로' 공부의 때를 놓쳤다고 생각하거나, 회의감에 사무치거나, 여하간 여러가지 '현실적인' 회의감에 봉착 하는 이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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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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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정옥자 선생은 여러 지면을 통해서 일종의 '에세이' 형식의 글을 남겨왔다. 

가령 "역사 에세이"(문이당, 1996)부터 시작해서,  "오늘이 역사다"(현암사, 2004)에서 쓰여져있는 산문들이라든지, "공부의 즐거움"(위즈덤하우스, 2006)에 일부 인터뷰 등, 비교적 여러 '수필'들을 누차 출간해오신 바 있다.

 

2)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옥자 선생은 정리된 형식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에 준하는 밀도있는 자서전을 만나고 싶은 분이다. 특히 최근 수년전부터 강하게 가져 왔던 생각이다. (사실 그 만큼 "역사가의 시간"이 한국인 역사가의 자서전 중에서는 모범이라고 할 만큼 좋았던 탓이기도...)

그분 특유의 "민족주의적" 역사관 이상으로, 그가 가진 여러 '최초'라는 타이틀만큼이나 간단치는 않았을 '여성 연구자로서의 삶'의 기록들이, 2019년 많은 후배연구자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데 솔직히 안 내실거 같긴 하다)

 

2019. 1. 31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건국의 이념적 근거로 내세운 유교정치사상은 명분론과 민본사상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양자는 현실정치에서 서로 충돌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에서는 명분을 바로 잡는 것이 곧 민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였고, 민을 위한 정치를 행하는 한 통치의 명분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명분론과 민본사상이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공자와 주자의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논어 자로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송사 열전 주희전 天下之務 莫大於恤民 而恤民之本 在人君正心術以立紀綱 " 


이석규, 2000, '조선초기의 구언', "한국사상사학" 15.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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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일견 당연하지만. 유교정치 사회사상에 대한 감각에 익숙치 않은 이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

현대 평등감각에 비추어 볼 때 '민본정치'의 측면과, 신분제적 명분론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말하자면 '왜 백성이 근본이라면서, 신분제적 질서로 백성을 얽메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대표하듯, 민본과 신분제가 모순된다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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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서 가장 '쉽게' 내릴 수 있는 정답은 '당초 그 민본은 권력쟁취의 구실일 뿐, 진짜로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민본사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대답은 쉽고 간편하지만 그야말로 너무 쉽고 간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회역학으로 민본의 레토릭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 '왜 굳이' 구실로서 민본을 택했는지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해서라는 '구실'은 분명 공허한 것이거나 혹은 그 자체로 신분제와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중요한것은 그 타당/부당을 전제로 역사적 진퇴를 논하는 문제보다도 유교사회사상이 어떤 맥락으로 활용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구실의 측면을 전제하더라도, 유교사회사상에서 신분제적 질서를 전제로 한 명분론은 배부른 양반님네들이 자기들만 문식을 독차지하면서 그 입으로 '민본'을 논하는 상황은 분명 탈시대적 맥락에서 보자면 극도의 기만이지만, 적어도 그네들 나름의 가치체계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방법론적 허위/기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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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평등'이 잣대로 단순화되어선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명분론의 강화와 민본론의 연관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명분론이 엄격하게 구성되지 않은 고려-조선초기의 정치가들이 마치 조선의 유자들보다 진전된 평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도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흐름을 볼 때 '사회적 평등성'을 놓고 단순화시켜선 확실한 혼란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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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만 1~3에서 제시한 '당시의 가치관에 대한 존중'도 사정이 단순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성리학적 사회이론 내에 존재하는 '명분론'의 맥락과 '민본'간의 정합성을, 일반적으로 공감해 온 당대적 맥락과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 소수파가 항상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소위 조선 사회에서 꾸준히 전개되어, 특히 후기에 들어 본격화된 신분제개혁론은 그런 '반대파'의 사상으로서 새길 만 하다.

동시에 이러한 명분론에 반대하는 의미의 평등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고, 더 나아가 정치가들이 (구실이나마) '민본'을 채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준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그 요인으로 많이 꼽혀온 민의 의식 성장, 더 나아가 그것을 거시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 장기적인 생산력 발전의 양상 등도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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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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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혹은 전근대인 '자신의 입장-진정성'에 공감을 어디까지 형성해야 하는가 문제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해결되지않은) 꽤 오래고-깊은 고민거리였다. 제대로 말하자면 '전공 밖에 존재한 광범위한 유교 혐오'에 대한, '전공 내에 존재한 광범위한 유교에 대한 낭만'.. 둘 다에 한창 나는 꽤나 오래도록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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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적으로 최근 유명해진(?) 김영민 교수의 2년전 논어 칼럼 "생각은 죽는다, ‘논어’도 죽었을까"를 접한 순간이 엉켜있는 팽팽한 긴장에 대한 작은 위로?의 계기였음을 기억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1267.html)- 개인적으로 그 긍정/부정론에 대해 이 글만큼 '섬세하고-적당히 회의적이게' 잘 쓴 글은, (저자 자신의 다른 칼럼까지 포함해서) 많이 보지 못했다.-

어느쪽이든, 좀 길게 쳐서 3년정도 이어졌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납득'의 세계로 안정화되었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죽은 것을 죽었노라 인정한다면, 그것이 낭만의 대상이냐 증오의 대상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무의미-무력한' 문제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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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8

"유교의 존재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한대 이후의 유가가 본인이 생각하는 유교의 본질과 다르다고 하여 한대 이후의 유가가 유교를 이해했던 형태를 '몰이해'라고 비난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요컨대, 가지 노부유키처럼 현대의 시각에 기초한 일원론을 가지고는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유교의 존재형태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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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교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다양한 요소를 지닌 유교는 역사적인 변천을 보인다. 그런데도 중국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유교상을 파악하려는 방법론을 취한다면, 그것은 '유교'와 '유학'을 다룬 여러 학설에 대한 검토에서 분명해졌듯이 정합적인 해석을 도출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잠시 제쳐두고, 각각의 시대에 유교가 존재했던 방식을 해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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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요시히로(김용천 역), 2011, "후한 유교국가의 성립".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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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 사서 살펴보고 있는 중. 뒷부분의 분석도 훌륭하지만, 정확히 이 부분에서 드러난 탁견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번이고 거듭 끌어안고 있는 생각이지만, 어떤 사상이든 그 사상의 "진정한 모습"을 상정해두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비교하는 해석법은 해당 시기의 사유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방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굳이 이 책에서 주력하고 있는 변화축인 선진-전한-후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신유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 사상사를 논할 때에도 '주자의 본래 생각', 즉 '정통 주자학'의 실체를 미리 규정해두고 그에 대한 비교를 행하는 접근법이 일반화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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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만 (누차 반복하듯이) 사상에서 '정통 지향'은 존재할 수 있어도 '정통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시대에 '정통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는 그들 나름의 시대적-지적 지향성'이 있을 뿐, 그 자체가 '정통 그 자체'와 지향-성격을 같이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까닭에 전술한 '사상사의 탈역사성'을 탈피하기 위해 사상사의 의미 자체를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으로 대치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만 이는 그 타당성과는 별도의 또 다른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정리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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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하간 적어도 그 의미에서 본서는 다른 부분들도 뛰어나지만, 해당 부분을 포함한 "서론"만으로도 감동을 주기 충분한 책이다. '유교는 이런 것이다'라는 실체를 전제하지 않고 '유교가 시대에 어떻게 녹아들어가고,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규명하는 과정이야말로 '그들의 유교'를 설명하고, 나아가 이러한 각 시대에 퍼져있는 '그들'의 입장들을 모아 '유교'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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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약간의 궁금한 점은 남는다. 굉장히 러프한 궁금증인데, "그렇다면 과연 '해당 시대 속에서, 다른 사유방법과 구분된 유교만의 특성'이란 무엇일까?"
통 우리가 '유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a) 공맹이 중시한 경전에 대한 숭배 (b) 인간 공자-맹자(문하)에 대한 존중-계승의식, (c) 공자-맹자의 메시지에 대한 내재화. 세 가지 의미를 담아 이루곤 한다. 여기서 a,b는 제법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가 공자를(혹은 그 경전을) 존중한다' 혹은 '내가 유학자다'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기반으로 한다. 
a와 b는 선명하지만 c가 항상 문제다. '공자의 본뜻'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적으로 의미를 달리하는 역사적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한 (예컨대 법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니고 황로도 아닌)'유교국가'의 맥락은 과연 어떤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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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자는 나름대로의 '유교국가(=유교의 국교화)'의 기준을 4가지로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만족하는 것은 (전한이 아니라) 후한대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a) 사상내용으로서의 체제유교의 성립

(b) 제도적인 유교 일존체제의 확립

(c) 유교의 중앙 지방 관료층으로의 침투와 수용

(d) 유교적 지배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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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허나, '유교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달리하는 것'이라면, 소위 '유교국가'의 기준을 설정할 때의 '유교' 마저도 희미해지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동시에, 저 4)의 기준선을 넘어선 국가들을 '유교국가'의 선에서 긍정한다면, 조선왕조로의 전환이든, 중국사로 치면 후한 이후의 수많은 학문적-정책적-사회적 변천들은 모두다 '유교국가'의 틀 속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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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고민은 남지만, 적어도 이 1~3 수준의 메시지까라도 깊이있게 다룰 수 있다면 그거대로 중요한 작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201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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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강 이 때 했던 고민이 얼마 뒤 학위논문에까지 연결되었고, 나름대로 발버둥쳤던 인연(?)이 있던 독서였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관심의 끈을 쥐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고. 이 책도 이후로도 몇번이고 더 읽을 기회가 있었다.


2) 2018년에 봄에 세미나에서 Michael Loewe의 "Dong Zhongshu, a Confucian Heritage and the Chunqiu Fanlu"를 읽었었는데, 와타나베가 다룬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해당 문제('유교국가'의 기준은 후한이라는 점)을 다루고 있었다.

와타나베 선생의 책은 상대적으로 후한대 예제나, 경전주석의 전통, 백호관회의로 대표되는 후한 의례논쟁 등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로이 선생의 책은 (아무래도 '동중서' 연구니까) 전한대 동중서 '신화'에 대한 비판적 독해에 초점을 맞춘 점이 다르다. 하지만 결국 '유교국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점은 유사한 입각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세미나 초입자 신분(?)이라 긴장하느라 말을 못했었는데,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이야기를 해 볼걸 싶었기도 했다.


3) 이와 별도로 이 문제('한대 유교'의 대전환?)을 흥미진진하게 다루는 책으로, 아사노 유이치의 "공자 신화"를 작년 하반기쯤 읽었었는데.. 이 책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2019. 1. 24

"크리에이션" 2013 고어 비달(권오숙 역), 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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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은, 거의 최근 10년 이래 읽은 가장 장편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뭐라고 정리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떠오르는대로나마 드문드문 중구난방으로 이런저런 느낀점을 메모해 두고자 한다.



1) 역사소설이자, 철학적 가상 대화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소설. 비슷한 느낌으로 (작가 자신의 전작인) "벤허"의 정서도 조금 느껴졌는데, 어쩐지 나로서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히스토리에" 생각도 조금 했다. 



2) 작품을 관통하는 두 축은, 페르시아 국내문제를 다루는 정치극의 한 축, "창조와 선악"의 문제를 다루는 주인공의 철학적 여정의 다른 한 축. 둘 다 빠짐없이 좋았다.



3)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조로아스터의 손자로 설정된 주인공 키루스 스피타마에게, 작가는 개신교적 세계관을 내심 이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조로아스터 중에서도 (기성 사제집단으로서의) "마기"에 대한 거리감.. 사소한 부분이지만  당초 조로아스터교적 세계관이 크리스트교 세계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대의 유대교(대충 구약으로 치면 '느헤미야기/에스라기'정도의 시즌.) 분파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등등 의심을 파고들려면 꽤 '징후'가 많다고 생각했다.



4)그렇지만, 어느쪽이든, 작중에서는 주인공을 통해 "개신교"자체의 우위를 드러내지 않고, 단지 "개신교적 창조-선악관"을 "주인공"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도의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느꼈다.

일례로, 약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에필로그지만, 결국 "창조-선악"에 대한 주인공의 입장은, 그 자체로 승패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더욱이 주인공 사후 (다분히 '자연과학적' 색채를 대변하는) 데모크리토스로 저절로 '발전적 계승'이 되기 때문.



5) 주인공의 각종 문명권 여행에서 나타난 각 문명권 세계관에 대한 스캡티컬-시니컬한 비평도 좋았음. (블랙 유머의 진수 같은게 느껴지는 훌륭한 문장이었다.)

가령, 허풍과 과장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그리스적 문화라든지, 숫자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인도적 문화라든지, '시제'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중국적 문화라든지 등등.



6) '창조와 선악'에 한하자면 작가의 해명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까나.. 싶었다.

"네가 그 길을 충실히 따랐다면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처 = 질문에 대한 무관심으로 하늘에 반항

"창조와 선악을 뛰어넘는 '도=자연'을 무위로서 따라야 한다"는 노자 = 초월적 교의로서 변별을 무효화시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 공자 = 현세적/공리적/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축소시킴.



7) 어쨌든 작중을 관통하는 스캡티컬함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정서다. 크게 화내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 크게 감동받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모든 것에 서로 다른 이유로 회의적일 수 있는. 아울러 그 회의적인 성향 속에서 나름의 본질을 통찰하고자 정서... 등은 굉장히 '학자적'으로 지향하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8) 그나저나 대관절, 그 주인공의 스캡티컬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조로아스터에 대한 '스탠더드의 확고함'이 다른 것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낳는 것인가. 혹은 '세상에 잡신이 너무 많다'는 일종의 피로감 탓인 것일까.

- 나는 어쩐지 후자라고 믿고 싶다. 그 까닭에 단지 스탠더드의 확고함 탓이라면, '견문'의 존재나 '질문'의 존재 자체가 사실은 불필요하다. 키루스 스피타마는 딱히 '포교'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결국 '진실'은 확인과 탐구의 대상이며, 그 탐구의 과정은 단순히 진리/진리가 아닌 것으로 나뉘지 않는, '진실이 아닐 수 있는'것들과의 꾸준한 대조 끝에 나오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과정은 피로에 젖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9) 아울러, 그 '스캡티컬'이 비단 세상사에 대한 비웃음과, 현자들과의 만남 정도의 '지적 향유'에만 그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주인공이 갈망한 '진실'의 길은, 단순한 유희의 수준을 넘는, 통쾌하지도 득이 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수 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한 구도求道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구도의 길 끝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본인이 '닿은 만큼의' 진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라도-작중에선 데미크리토스에게) '알려야' 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주님'이 내린 어떤 소명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반복된 '스캡티컬'의 과정이, 나름의 유머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201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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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적인 정신과 한국적인 사상이 무엇인지 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인 판타지 세계의 모습과 그 세계의 규칙, 특징, 기술 수준, 제도, 신분 계층 같은 것을 차근차근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작가들이 그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꾸밀 것이라 했다. 누구는 열심히 연구하고 토론해 세계를 만들고, 누구는 그렇게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열심히 소설을 쓴다. 그러다 보면 그게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소수파에 속했다. 그렇게 사상과 원리에 따라 세계를 구민 뒤 그 세계 속에 이야기를 집어넣는 방식은 너무나 원대한 꿈이고 품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힘든 일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다들 이것이 정말 한국적이라 공감하는 세계를 합의 끝에 만들어낸다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그런 일은 아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사상, 규칙, 세계를 만들어주면 아래에서는 거기에 따라 이야기를 만든다는 발상은 얼핏 체계적이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반대로 답답하고 지겨운 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시절부터 나는 그런 식으로 한국형 판타지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국 전설 속의 괴물이나 신기한 보물 같은 것을 목록으로 정리해두고, 그런 자료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같이 돌려 보는 것 정도가 실용적인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렇게 여러 작가가 저마다 자기 생각 자기 이야기 속에서 이리저리 활용하다 보면 저연히 그 중에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 같아 보이는 것도 점차 나타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늘어놓고 아래에서부터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자연히 그에 따라 사상, 규칙, 세계 등 이야기 위에 있는 것도 생긴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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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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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조사 자료나 학술 논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괴물 전설을 밝히는 학술 논문들은 주로 구비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극히 "한국구비문학대계"나 그와 비슷한 현대에 채록된 이야기 자료를 근거로 괴물의 특징이나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는 논문들을 나는 주로 접했다.


그런데 "한국구비문학대계"만 해도 1970년대에 말이 되어서야 조사가 시작된 자료다. 1970년 말이면 이미 한국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되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서도 여러 전설이 각색되어 소개된 뒤였다. 그렇다면 이런 시점에 어떤 지역의 노인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조사한다 해도 그 이야기는 현대의 작가들이 가공하고 꾸민 영화, 소설 TV, 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내용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흉측한 귀신의 모습을 조사할 때 무심코 며칠 전에 본 영화 속 귀신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조사하면서 정확히 어느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원전을 정확히 밝히면서 한국 괴물 이야기를 모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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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2018 "한국 괴물 백과" 워크룸, 1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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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사회-문화의 가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결국 해당 분야 종사자의 업이라는 것은 고민거리도 못 되지만, 그에 반해 적어도 그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오랜시간 나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되어 왔다.

그걸 늘 의식해 온 까닭에, 내 스스로는 그 방법에 대한 굉장히 오래된 철학-역사학(그리고 그 중간쯤? 혹은 둘 다가 아닌 애매한 곳에 넓게 자리잡은 문학) 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제법 경청해 온 편이다. 



2) 그 긴장을 요약한다면 둘 정도 인 것 같다.

역사학이 오래 견지해 온 '개별 자료의 수집이 특정 전통의, 타 전통과 구별되는 '특징'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낸다'는 입장. 그리고, ('한국학' 필드를 전제로 한) 철학/사회과학 분야에서 견지해 온, 해당 전통의 특성론을 일단 가설값으로 꾸준히 제시하되, 그 가설값을 뒷받침-수정하는 논거로서 개별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말이다.

(그 가치의 우열과 별도로, 사실 철학/사회과학에서 제기될 연역적 입장은, 언제고 스스로 세워둔 그 로직이 '한국적 특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늘 함유하고 있다. 한국학 같은 '지역성'을 장르의 기본 전제로 한 링에서는 그 '센터'자리를 자주 역사학 혹 문학-중에서 1차 텍스트 다루는 필드가 가져가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3) 역사학, 그 안에서도 자국사 다루는 필드에 몸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귀납적 케이스 수집에 '익숙한' 성향을 띨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케이스의 가치/그에 집중력을 어디까지 소모시켜야 하는가. 문제는 굉장히 오랜시간 스스로를 갈등케 만든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메시지'가 추출되지 않은 순수한 과거의 흔적 자체에는, 동료들 중에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당장 눈앞에 가시화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수백년 전의 어떤 부분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것 자체에는 사실 큰 감동이 없다. 그 까닭에 '사실관계' 그 자체에 감탄할 수 있고, 그 사실관계 파편을 목적없이 모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건대 사실은 지금까지도 거부감과 질투심이 섞인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지금쯤 오니 우회적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에도 그 의미를 잘 도출할 수 있게"된 편이지만, 실은 그 '의미 도출癖'마저도 그 사실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조차도 상당한 훈련을 거쳐 최근에야 틀을 갖추는 중인 테크닉이기도 하다)



4) 오히려 최근 들어서 그 갈등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역시 내가 밥먹고 살아야 하는 판이 그런 귀납의 판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탓도 컸고, 수년 전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국 핵심 없는 언어유희'라는 자조 속에서 크게 좌절한 탓도 컸고.. 어쨌든 그 푸닥거리 속에서 정말 간신히 '논리'와 '사실나열'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안정시킨 참이다.

- 충격적이게도. 박사 이후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답사를 사랑하는 호고주의자에, 개별 과거 사실을 나열하는 게 당초 익숙하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 진짜 역덕후를 안 만나봤구나 생각/ 내 나름의 실천이 빛을 발한 것인가? 생각이 겹침과 동시에. 사람은 상대적-가변적-다면적이기 마련이라는 내 인간관을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5) 대충 정리된 바는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는, '둘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그 차이를 굳이 드러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싸움에 비유한다면, 스스로의 DB를 잘 갖추는 것은 튼튼한 무기이며", "스스로의 방법론이 있는 것은 그 무기를 다루는 테크닉이다" 정도의 양립성일까. 정말 고도로 단련된 테크닉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맨손으로도 중무장한 사람을 이길 수 있고, 무기가 정말 좋으면 초심자 조차도 달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물론 역사학 필드의 오랜 전통은 그 "물리적 무기"를 모으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평가할 때에도 그 무기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를 1차로 보는 걸 "더 가치있는 일"로 여기겠지만(그 때문에, 본의아니게 타전공 종사자를 만나면 그 입장을 대변하게 되지만), 어쨌든 원시인에게 총과 총알을 따로 쥐어줘봤자 쇠몽둥이 쇠조각에 불과한것처럼, 테크닉의 연마도 필요한 것이다.



6) 사설이 무척 길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특정 문화적 전통을 밝히는 1차적 행위로서의 사실관계 나열/DB구축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까진 해본 적 없지만) '회의'와 '긍정'사이에서 꽤 오랜시간 갈등해왔다. 그 까닭에, 그 결론인 "생각보다는 훨씬 중요한 한 축이다"는 입장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자 한다. 해당 '백과'의 존재가 참으로 반갑고도 기쁜 이유이다.



2019. 1. 20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그런 것이냐'는 아내의 질타는 정도전에게 뼈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정도전의 질문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고 싶었던 정직한 질문이었다.


정도전 또한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깨끗하게 처신했단' 아버지 정운경에게 늘 속으로 묻고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기록한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 따르면 정운경은 청도교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 자신의 입신양명의 꿈에는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충동은 남이 눈치 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청백리 아버지를 역할 모델로 해서 살아왔고, 또한 신유학의 정체성 형성에 맞는 생활 양식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아는 금지된 충동이 표출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반동형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반대적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제인 반동형성에 따른다면, 정도전 자신의 무의식 가운데 입신양명해서 가문에 영광을 가져오리라는 내적 충동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혹시 아내가 눈치 챌까 두려워 정도전 스스로 억압해왔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출세와는 정반대의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어왔고 그 결과,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망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철영, 2004,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170~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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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위 '심성사' 연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정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일기. 시문 등에 등장하는)개인의 사적인 기록물을 토대로, 해당 개인의 정신세계나 나아가 해당 시대의 담론을 도출해내는 경향'이라고 한다면, 여말선초 한정으로는 00년대 초반 쯤부터 시작해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가, 최근들어서 부쩍 그 성과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나름의 '최신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엔 이색에 대해서라면 이익주 선생님의 "목은 이색의 삶과 생각"이, 이규보에 대해서라면 김용선 선생님의 "생활인 이규보"가, 정도전에 대해서라면, 본문의 내용이 "인간 정도전"으로 보완-정리되어 출간된 바 있다)


2) 당연하지만, 개인 기록에 대해 묘사하는 것인 만큼, 입론의 디테일이나 정밀성이 성글고, 다소 앞질러나간 해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소 파격적일만큼 내러티브가 실험적이고 섬세한 것은 상당히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다만, 이를 토대로 어떤 방법으로 '거대 서사'를 수정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미 몇 차례, "개인적 기록이, 결과적으로 기존의 연구담론을 재차 강화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 혹은 "해당 기록물 연구가, 문학연구와 어떤 차별점(혹은 비교우위)을 둘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지적사항이 제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켜봐야 할 문제.


201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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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성사' 연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게 된다. 그 이후로 몇년 새에 이에 대해 잘 쓰여진 사례라고 소개받은, 뚜웨이밍의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나,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를 읽어보기도 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성사가 기존의 거대서사에서 커버하지 못한 '미싱 링크'를 찾아낸다는 면에서 유의미할 것이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여전히 '큰 흐름'을 달리 서술하기에는, 여전히 '기존 견해의 재확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지금까지도 크게 극복되지 않았다. '디테일'을 첨가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연이 아니며 결국 서사를 정돈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선학들의 경구가 옳다고 한다면, 적어도 2019년인 아직까지도 '심성사' 연구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단계를 넘어서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어느쪽이든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볼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많은 '인문학적 신식 방법론'이 저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또한 지금 와선 조금은 아이러니다)


* 덧 : 고려든 조선이든, '심성사'에 관심이 있다는 또래-이하의 사람들을 '해양사' 다음으로 많이 봐서, "대관절 그 많은 사람들이 애정해 마지않는 해양사-심성사는 어디서 어디까지 정의-범주가 제각각일까"에 대해서 한번 마음을 먹고 계통을 정리해보고 싶은 심경마저 들곤 한다. 



2019. 1. 19

"(전략).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철학사상(philosophical ideas)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이러한 부인은 나름 정당하다. 역사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진행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심했는데, 이러한 의심 역시 나름 정당하다.

나는 이 양자의 중간에 처해 있다. 인간은 본성상 모두 신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유학의 철학은 유아론적 헛소리(solipsistic drivel)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나는 놓여있다.....(후략)"


피터 k 볼(김영민 역), 2010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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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당연하고 어쩌면 또 상식적인 말이지만, 과거의 텍스트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분야(국문/철학/정치학/사회학/역사학 등등..) 중에 유독 중국사상(정확히는 중/한 사상) 연구분야에서만 특별히 좀 미진해지는 경향이 있는 바를 정확히 짚어 준 대목이다.


2) 본문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 중, 전자의 경향대로 경전이나 문집 자체를 잠언화하여 해당 텍스트를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보편적 메시지로 정돈하는 경우 (철학과 등에서 숱하게 나오는, 예컨대 '누구누구 사상가의 무슨무슨 사상-대개 교육/수양 등의 비교적 현대적인 개념의 사상-에 대하여' 류의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그 '사상' 자체가 가지는 시대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서, 그 텍스트가 가진 적확한 의미를 뭉뜽그려 버리게 된다.

-이런 경향성이 유/불/선 중 어디가 가장 심한가는 도무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나마 '현실'에 가장 맞닿아 있고, 그 자체로 정치성을 가장 강하게 띤 유학이 그 경향을 그나마 덜 띠고있다고 개인적으로는 믿고 싶지만, 그 어마어마한 '현대유학자'들의 연구 분량은 그 판단에 자신을 잃게 만들어 준다..


3) 한편 후자의 경향대로 철학적 이데올로기들이 (선생의 표현을 빌어)'유아론적 헛소리'라고 전제하고, 해당 텍스트 저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위상과 그 지향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정돈하는 경우. (역사학에서 다수 이루어진 개혁사상(국가관, 안재선발론, 토지개혁론)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분명 텍스트의 '성격' 분석에는 큰 대강을 제시해줌에 틀림없지만, 그에 따라 각 텍스트들의 의미를 전자와는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계급이나 정치 지향 속에서도 생각에는 다양한 '꼴'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들 간의 의미 차이, 혹은 그러한 '생각의 다양한 꼴'이 발생하게 되는 여러 관념(개념)의 흐름 또한 엄연히 '인간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양자 간의 균형관계가 유독 중/한의 유불선에 한정하여 왕왕 무너지곤 하는 것은 혹자의 평 대로 '동양사상은 아직 자가붕괴하지 않았기 때문' 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 원인과는 별도로 앞서 인용된 '양자의 중간'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사상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양자 모두가 가지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후자의 경향이 더 학문의 본연에 충실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사상사'같은 모호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굳이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분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5) 다만 굳이 후자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사상이라는 분야를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의아니게 때로는 대단히 나쁜 의미로 전자의 지향성을 깊게 가진 연구들에게 상당량을 빚지게 됨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부디 사상 자체에 너무 깊게 빠지지는 말게" 하는 역사학의 선학들이 남긴 전통적인 일침은 그 상황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균형감'에 대한 뜻깊은 충고지 않을까.



읽은 지 좀 된 책이지만, 다시 생각해고 또 생각해도 탁월한 구절인 것 같아 한동안 되뇌이다 공유해 본다.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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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이 책은 이 글을 끼적이던 6년 전에도 "읽은지 좀 된 책"이었는데, 그로부터 또 몇년 뒤인 작년에 또 다시 꼼꼼히 읽어 볼때쯤 들어서는, 이 책에 대한 인상깊은 부분 선별이나 그에 대한 견해 전반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그러고보면 과연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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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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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초 관료층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면서 신흥사대부설에서 말하는 지배층의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정체성이나 안정성과 같은 역사 서술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분권적인 성격인 농후한 고려 전기와 중앙집권체제가 훨씬 강해진 조선 전기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경제 세력들의 등장을, 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내재적 발전론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전근대 중앙집권관료체제가 사회 분화 등의 여러 여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역사사회학자 Eigenstadt의 연구를 해석의 틀로 빌려, 고려 일대를 통해서 이루어진 지방세력의 약화와 강력한 중앙지배층의 성장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초기 중앙집권체제의 강화가 결국 중앙지배층의 권익을 반영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나마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Eisentadt는 Weber를 따라 문화 체계를 거의 독립적인 변수로 내세웠지만 나의 입장은 문화적 현상을 실질적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말선초의 유학 사상의 여러 갈래를 검토한 결과 개인의 수신과 지방 엘리트 중심의 향약과 같은 반자치적인 조직을 통해서 사회를 재건하려던 남송 이래의 정주성리학 만큼이나 중앙의 통치력을 이용해 사회를 개혁하려던 북송과 같은 고문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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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건국을 연구하면서 15세기의 유학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을 알게 된 나는 조선의 유학을 비좁고 탄력성 없는 정주성리학의 정통론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정통론 때문에 조선왕조가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보는 미국 한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에 불만을 느꼈다. 철학적 사유의 전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권양촌이나 이퇴계와 이율곡, 송우암과 같은 몇 명의 사상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사상사(history of idea)의 접근방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중국과 일본의 복잡성을 논하는 UCLA의 동료 교수들의 연구에 힘입어 Annales 학파에서 말하는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즉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다시 검토해보면 통론에서 말하는 일변도의 정주성리학 정통론과는 달리 사회계층과 사회 정치적 위치,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하고 활력 있는 정신적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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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의 구조나 운영보다 내용에 중점을 두고 중국의 명청 과거제도와 조선의 과거제도를 비교하면...명청 전반기에는 시를 짓는것을 부수적으로 여기전 정주의 입장을 취하지만... 조선의 문과에서는 거의 시종일관하게 중장에서 시나 부를 짓는 시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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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B 던컨, 2003, 서양 사학과 한국 전근대사 "한국사 연구방법의 새로운 모색" 경인문화사
(2002. 6 국제학술회의 발표원고의 재수록) 70~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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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던컨 선생의 대학원 강좌를 몇 학기 정도 수강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때 누차 강조하던 내용이었는데,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든 책에서 좀 더 깔끔히 정리된 것을 보니 새삼 반가운 기분이다.



2) 해당 인용문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듯이, 던컨 선생의 핵심논지는 단순히 "왕조교체의 연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국을 일으킨 기반으로서의 지배층 교체'만을 부정할 뿐, 중앙정치제도 및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고하고 있으며, 그 사회 변화를 추동한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북송 고문학'이 기반이 된) 성리학의 역할을 적어도 흔히 오해받는(혹은 이상한 대목에서 찬양받는) 바 보다는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아이젠슈타트도 검토를 좀 해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던컨이 비판받으면서 함께 비판을 받았던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일독의 가치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3) 이와 별도로 사소한 것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석사생 시절 던컨선생의 수업시간에


"저는 사상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한데, 지식인 개인의 실천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안 가고, 오히려 사회의 여러 변화가 제반 문화현상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지식인의 작업으로 수렴되는데 관심이 있다" 고 하자.


"그러면 평시군의 관심사는 '사상사(history of idea)'가 아니라,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와 '문화사(cultural history)'의 중간 쯤 있는 것이라고 하는게 맞겠네"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던컨 선생의 규정법에서는 문화사는 그렇다치고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에 대한 개념정의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이 글에서도 나오듯이,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 정의내리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던컨 선생의 그 답변은 '나의 관심 방법론'같은 것을 좀 자세히 설명할 때 요긴한 방법으로 활용 중이다.



2019. 1. 17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현암사 판)
"마음"(웅진출판사 판)
"그 후"(민음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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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의 감상을 쓰기에 값할만큼 소설에 대해서 자신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받은 느낌과 감상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 본다.

- 해당 세 소설에는 스토리에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유민적 성격'이 중심적으로 부각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고등 유민적 삶이란 무얼까. 고등교육으로 무장되어 스스로의 탐미적 취향을 갈고닦으나, 그 배움의 당위적 목적이나 사회적 실천같은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은둔시키는 존재 정도로 설명하면 거칠게나마 정리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은 여러 의미에서 '죽림칠현' 정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몇 가지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해 이렇게저렇게 상상해봤다.


1)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삶이란 '이상'을 잃은 속류적 은둔 유희일 뿐인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소명' 같은 당위명제로부터 담을 쌓은듯한 그들이지만, 속류적 이기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고등유민의 에고이스트적 삶이란 소명어린 삶 그 이상의 높은 기준을 지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공민-시민적 소명 등과는 무관한, 일종의 '미감적 에고이스트(aesthetic egoist)'로서의 섬세하고 예민한 결벽일지도 모른다.


2)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에고이즘이 지향하는 기준이란 확실한 이상주의일까?
사실 그것도 조금은 불분명하다. 세 소설의 (준)주인공들이 골몰하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스나가는 지오코를 '사랑'했을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사랑'했을까? '선생님-K'는 '사모님'을 '사랑'했을까? 그들이 꿈꾼 "마음의 자연"이 정녕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갈망이었을지는 불분명하다. 외려 분명한 것은 다이스케의 "타들어가는 빨강"으로 가득할 삶이란, K의 죽음을 맛본 '선생님'의, 그 전까지 그리도 갈망하던 '사모님'에 대한 냉담함 만큼이나 위태롭다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의미에서 고등유민들의 에고이즘은 목표가 있는 이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목적지없는 낭만이며, 더 나간다면 '사회적-제도적-소명적'(어쩌면 이 셋을 합쳐낸 의미에서의 '세간 도덕적') 삶 전반에 대한 목적지없는 반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그 '실체가 불분명한' 에고이즘이 '고등유민'인 K와 선생님을 어떻게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일까? 
누구보다도 자신에 천착한 그들의 에고는 역설적이게도 결국 자신의 삶 마저 갉아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목표가 불분명하지만 한없이 높기에, 그들의 삶은 때로 두문불출은 할 수 있지만 안빈낙도에 도달할 만큼 낙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타율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회로부터의 유리를 낳는 '고등유민'의 에고는, 삶이 이를 원만히 버텨내지 못한 채 고등유민 자신들을 (약간은 뒤르켐 식의 "egoistic suicide"가 연상되는) 죽음으로 이끈다. K의 고독감이든지, 선생님의 죄책감이든지, 어느쪽이든 에고를 감당하지 못한 삶의 후퇴가 죽음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K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의미에서 선생님의 죽음은 K와 다르지 않다.) 

- 일전 한 대화에서 "폭력남편을 참게 되는 고등 여성 지식인의 심성"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게 되는 타협적 심성"같은게 그 폭력남편에 의한 희생을 부른 것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의 (세상 도덕과 기준으로부터 벽을 쌓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에고이즘'이야말로 그들 자신을 도그마로 만들어진 고통의 세계에 몰아넣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4) 그렇다면 그들의 삶에 구원이란 없는 것일까?
그 마지막 단계에서 "고등유민"이 도달할 만한 마지막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와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마음으로의 소통'일지도 모른다. 혈연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인간관계를 넘어, 하지만 에고이즘적 '반제도-반도덕'마저도 (상당부문 일치하지만) 넘어서 만들어지는 관계맺음이 결국 "고등유민"이 도달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의 에고이즘마저도 오롯이 감당해낼 수 없는 흔들리는 존재다. 그 까닭에 그 "마음의 소통"이란, 그 가능성마저도 사실은 2)의 이상-사랑들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불륜으로 실행된)'마음의 자연'에 준할만큼 탐미적 매혹의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결국 어떤식으로든 구원을 위해 다시금 걸어봄직 한 불분명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2019.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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