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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진학의 갈림기에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한 역사라는 학문은 버거운 상대였다. 동숭동 문리대시절의 방황과 탐색 끝에 졸업 후 일찌감치 평범한 가정주부의 길을 택한 것도 그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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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새며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가정 꾸리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겨우 잔주접을 면한 두 아이를 떼어 놓고 30대 중반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만학도가 되었을 때의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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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지각생이라는 자격지심에서 10여년의 공백기를 메워야겠다는 갈증같은 조바심 속에, 학문의 길이 진정 무엇이지도 모르는 채, 오직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매진해 온 지난 15년의 세월이 차곡차곡 오늘의 나를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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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무슨 역사냐 싶은 따가운 눈총에도 이 길 이외에 더 나은 선택은 없다는 일념으로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을 계속해왔다. 때때로 엄습하는 회의와 절망, 바닷가 모래밭에서 금모래 줍기같은 자료찾기의 고된 작업도 이 길만이 유일한 귀의처라는 다짐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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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의 사교생활도 외면한 채 학교와 집 사이를 동동걸음 치면서 학자이기 전에 주부이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것도 흡족한 것이 못 되었다. 다 이루려는 자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는 진부한말이, 얻은 것이 있으면 잃기 마련이고 잃어으면 얻으리라는 당연한 이치가 새삼스러운 진리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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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남녀공학의 대학에 진학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좋은 동기생들을 만나 그분들의 남녀를 초월한 우정과 성원에 힘입은 바 컸고 고달픈 숙생의 좋은 벗이 되어 주고 있음은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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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엄마의 눈길과 보살핌에 주렸을 다 큰 두 아이들, 석사논문 쓸 때 겨우 돐을 넘기고 무릎에서 안 떨어지려 해서 애를 먹이던 막내딸 동세, 아이와 괴팍한 아내를 포용하여 늘 외조를 아끼지 않은 평생의 반려자에게 송구함을 이 책으로 대신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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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자, 1990,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일조각.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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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박사논문 재 편집본'을 읽을때면 그 '서문'을 주목하곤 하는데, 그 안에서는 보통 그 사람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결의 등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의미심장한 정옥자 선생의 그것을, 큰 맘 먹고 '조선후기 문화운동사'를 (이미 읽기야 읽었지만) 사 놓은 기념으로 옮겨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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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 학우들은 물론이거니와, 공부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단순히 '현실적인 여건 문제로' 공부의 때를 놓쳤다고 생각하거나, 회의감에 사무치거나, 여하간 여러가지 '현실적인' 회의감에 봉착 하는 이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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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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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정옥자 선생은 여러 지면을 통해서 일종의 '에세이' 형식의 글을 남겨왔다. 

가령 "역사 에세이"(문이당, 1996)부터 시작해서,  "오늘이 역사다"(현암사, 2004)에서 쓰여져있는 산문들이라든지, "공부의 즐거움"(위즈덤하우스, 2006)에 일부 인터뷰 등, 비교적 여러 '수필'들을 누차 출간해오신 바 있다.

 

2)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옥자 선생은 정리된 형식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에 준하는 밀도있는 자서전을 만나고 싶은 분이다. 특히 최근 수년전부터 강하게 가져 왔던 생각이다. (사실 그 만큼 "역사가의 시간"이 한국인 역사가의 자서전 중에서는 모범이라고 할 만큼 좋았던 탓이기도...)

그분 특유의 "민족주의적" 역사관 이상으로, 그가 가진 여러 '최초'라는 타이틀만큼이나 간단치는 않았을 '여성 연구자로서의 삶'의 기록들이, 2019년 많은 후배연구자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데 솔직히 안 내실거 같긴 하다)

 

2019. 1. 31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건국의 이념적 근거로 내세운 유교정치사상은 명분론과 민본사상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양자는 현실정치에서 서로 충돌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에서는 명분을 바로 잡는 것이 곧 민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였고, 민을 위한 정치를 행하는 한 통치의 명분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명분론과 민본사상이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공자와 주자의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논어 자로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송사 열전 주희전 天下之務 莫大於恤民 而恤民之本 在人君正心術以立紀綱 " 


이석규, 2000, '조선초기의 구언', "한국사상사학" 15.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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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일견 당연하지만. 유교정치 사회사상에 대한 감각에 익숙치 않은 이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

현대 평등감각에 비추어 볼 때 '민본정치'의 측면과, 신분제적 명분론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말하자면 '왜 백성이 근본이라면서, 신분제적 질서로 백성을 얽메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대표하듯, 민본과 신분제가 모순된다고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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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서 가장 '쉽게' 내릴 수 있는 정답은 '당초 그 민본은 권력쟁취의 구실일 뿐, 진짜로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민본사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대답은 쉽고 간편하지만 그야말로 너무 쉽고 간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회역학으로 민본의 레토릭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 '왜 굳이' 구실로서 민본을 택했는지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해서라는 '구실'은 분명 공허한 것이거나 혹은 그 자체로 신분제와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중요한것은 그 타당/부당을 전제로 역사적 진퇴를 논하는 문제보다도 유교사회사상이 어떤 맥락으로 활용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구실의 측면을 전제하더라도, 유교사회사상에서 신분제적 질서를 전제로 한 명분론은 배부른 양반님네들이 자기들만 문식을 독차지하면서 그 입으로 '민본'을 논하는 상황은 분명 탈시대적 맥락에서 보자면 극도의 기만이지만, 적어도 그네들 나름의 가치체계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방법론적 허위/기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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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평등'이 잣대로 단순화되어선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명분론의 강화와 민본론의 연관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명분론이 엄격하게 구성되지 않은 고려-조선초기의 정치가들이 마치 조선의 유자들보다 진전된 평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도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흐름을 볼 때 '사회적 평등성'을 놓고 단순화시켜선 확실한 혼란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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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만 1~3에서 제시한 '당시의 가치관에 대한 존중'도 사정이 단순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성리학적 사회이론 내에 존재하는 '명분론'의 맥락과 '민본'간의 정합성을, 일반적으로 공감해 온 당대적 맥락과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 소수파가 항상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소위 조선 사회에서 꾸준히 전개되어, 특히 후기에 들어 본격화된 신분제개혁론은 그런 '반대파'의 사상으로서 새길 만 하다.

동시에 이러한 명분론에 반대하는 의미의 평등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고, 더 나아가 정치가들이 (구실이나마) '민본'을 채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준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그 요인으로 많이 꼽혀온 민의 의식 성장, 더 나아가 그것을 거시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 장기적인 생산력 발전의 양상 등도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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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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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혹은 전근대인 '자신의 입장-진정성'에 공감을 어디까지 형성해야 하는가 문제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해결되지않은) 꽤 오래고-깊은 고민거리였다. 제대로 말하자면 '전공 밖에 존재한 광범위한 유교 혐오'에 대한, '전공 내에 존재한 광범위한 유교에 대한 낭만'.. 둘 다에 한창 나는 꽤나 오래도록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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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적으로 최근 유명해진(?) 김영민 교수의 2년전 논어 칼럼 "생각은 죽는다, ‘논어’도 죽었을까"를 접한 순간이 엉켜있는 팽팽한 긴장에 대한 작은 위로?의 계기였음을 기억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1267.html)- 개인적으로 그 긍정/부정론에 대해 이 글만큼 '섬세하고-적당히 회의적이게' 잘 쓴 글은, (저자 자신의 다른 칼럼까지 포함해서) 많이 보지 못했다.-

어느쪽이든, 좀 길게 쳐서 3년정도 이어졌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납득'의 세계로 안정화되었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죽은 것을 죽었노라 인정한다면, 그것이 낭만의 대상이냐 증오의 대상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무의미-무력한' 문제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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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8

"유교의 존재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한대 이후의 유가가 본인이 생각하는 유교의 본질과 다르다고 하여 한대 이후의 유가가 유교를 이해했던 형태를 '몰이해'라고 비난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요컨대, 가지 노부유키처럼 현대의 시각에 기초한 일원론을 가지고는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유교의 존재형태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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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교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다양한 요소를 지닌 유교는 역사적인 변천을 보인다. 그런데도 중국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유교상을 파악하려는 방법론을 취한다면, 그것은 '유교'와 '유학'을 다룬 여러 학설에 대한 검토에서 분명해졌듯이 정합적인 해석을 도출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잠시 제쳐두고, 각각의 시대에 유교가 존재했던 방식을 해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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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요시히로(김용천 역), 2011, "후한 유교국가의 성립".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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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 사서 살펴보고 있는 중. 뒷부분의 분석도 훌륭하지만, 정확히 이 부분에서 드러난 탁견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번이고 거듭 끌어안고 있는 생각이지만, 어떤 사상이든 그 사상의 "진정한 모습"을 상정해두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비교하는 해석법은 해당 시기의 사유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방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굳이 이 책에서 주력하고 있는 변화축인 선진-전한-후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신유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 사상사를 논할 때에도 '주자의 본래 생각', 즉 '정통 주자학'의 실체를 미리 규정해두고 그에 대한 비교를 행하는 접근법이 일반화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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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만 (누차 반복하듯이) 사상에서 '정통 지향'은 존재할 수 있어도 '정통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시대에 '정통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는 그들 나름의 시대적-지적 지향성'이 있을 뿐, 그 자체가 '정통 그 자체'와 지향-성격을 같이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까닭에 전술한 '사상사의 탈역사성'을 탈피하기 위해 사상사의 의미 자체를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으로 대치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만 이는 그 타당성과는 별도의 또 다른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정리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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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하간 적어도 그 의미에서 본서는 다른 부분들도 뛰어나지만, 해당 부분을 포함한 "서론"만으로도 감동을 주기 충분한 책이다. '유교는 이런 것이다'라는 실체를 전제하지 않고 '유교가 시대에 어떻게 녹아들어가고,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규명하는 과정이야말로 '그들의 유교'를 설명하고, 나아가 이러한 각 시대에 퍼져있는 '그들'의 입장들을 모아 '유교'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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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약간의 궁금한 점은 남는다. 굉장히 러프한 궁금증인데, "그렇다면 과연 '해당 시대 속에서, 다른 사유방법과 구분된 유교만의 특성'이란 무엇일까?"
통 우리가 '유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a) 공맹이 중시한 경전에 대한 숭배 (b) 인간 공자-맹자(문하)에 대한 존중-계승의식, (c) 공자-맹자의 메시지에 대한 내재화. 세 가지 의미를 담아 이루곤 한다. 여기서 a,b는 제법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가 공자를(혹은 그 경전을) 존중한다' 혹은 '내가 유학자다'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기반으로 한다. 
a와 b는 선명하지만 c가 항상 문제다. '공자의 본뜻'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적으로 의미를 달리하는 역사적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한 (예컨대 법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니고 황로도 아닌)'유교국가'의 맥락은 과연 어떤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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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자는 나름대로의 '유교국가(=유교의 국교화)'의 기준을 4가지로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만족하는 것은 (전한이 아니라) 후한대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a) 사상내용으로서의 체제유교의 성립

(b) 제도적인 유교 일존체제의 확립

(c) 유교의 중앙 지방 관료층으로의 침투와 수용

(d) 유교적 지배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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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허나, '유교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달리하는 것'이라면, 소위 '유교국가'의 기준을 설정할 때의 '유교' 마저도 희미해지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동시에, 저 4)의 기준선을 넘어선 국가들을 '유교국가'의 선에서 긍정한다면, 조선왕조로의 전환이든, 중국사로 치면 후한 이후의 수많은 학문적-정책적-사회적 변천들은 모두다 '유교국가'의 틀 속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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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고민은 남지만, 적어도 이 1~3 수준의 메시지까라도 깊이있게 다룰 수 있다면 그거대로 중요한 작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201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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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강 이 때 했던 고민이 얼마 뒤 학위논문에까지 연결되었고, 나름대로 발버둥쳤던 인연(?)이 있던 독서였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관심의 끈을 쥐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고. 이 책도 이후로도 몇번이고 더 읽을 기회가 있었다.


2) 2018년에 봄에 세미나에서 Michael Loewe의 "Dong Zhongshu, a Confucian Heritage and the Chunqiu Fanlu"를 읽었었는데, 와타나베가 다룬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해당 문제('유교국가'의 기준은 후한이라는 점)을 다루고 있었다.

와타나베 선생의 책은 상대적으로 후한대 예제나, 경전주석의 전통, 백호관회의로 대표되는 후한 의례논쟁 등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로이 선생의 책은 (아무래도 '동중서' 연구니까) 전한대 동중서 '신화'에 대한 비판적 독해에 초점을 맞춘 점이 다르다. 하지만 결국 '유교국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점은 유사한 입각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세미나 초입자 신분(?)이라 긴장하느라 말을 못했었는데,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이야기를 해 볼걸 싶었기도 했다.


3) 이와 별도로 이 문제('한대 유교'의 대전환?)을 흥미진진하게 다루는 책으로, 아사노 유이치의 "공자 신화"를 작년 하반기쯤 읽었었는데.. 이 책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2019. 1. 24

"크리에이션" 2013 고어 비달(권오숙 역), 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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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은, 거의 최근 10년 이래 읽은 가장 장편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뭐라고 정리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떠오르는대로나마 드문드문 중구난방으로 이런저런 느낀점을 메모해 두고자 한다.



1) 역사소설이자, 철학적 가상 대화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소설. 비슷한 느낌으로 (작가 자신의 전작인) "벤허"의 정서도 조금 느껴졌는데, 어쩐지 나로서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히스토리에" 생각도 조금 했다. 



2) 작품을 관통하는 두 축은, 페르시아 국내문제를 다루는 정치극의 한 축, "창조와 선악"의 문제를 다루는 주인공의 철학적 여정의 다른 한 축. 둘 다 빠짐없이 좋았다.



3)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조로아스터의 손자로 설정된 주인공 키루스 스피타마에게, 작가는 개신교적 세계관을 내심 이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조로아스터 중에서도 (기성 사제집단으로서의) "마기"에 대한 거리감.. 사소한 부분이지만  당초 조로아스터교적 세계관이 크리스트교 세계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대의 유대교(대충 구약으로 치면 '느헤미야기/에스라기'정도의 시즌.) 분파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등등 의심을 파고들려면 꽤 '징후'가 많다고 생각했다.



4)그렇지만, 어느쪽이든, 작중에서는 주인공을 통해 "개신교"자체의 우위를 드러내지 않고, 단지 "개신교적 창조-선악관"을 "주인공"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도의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느꼈다.

일례로, 약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에필로그지만, 결국 "창조-선악"에 대한 주인공의 입장은, 그 자체로 승패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더욱이 주인공 사후 (다분히 '자연과학적' 색채를 대변하는) 데모크리토스로 저절로 '발전적 계승'이 되기 때문.



5) 주인공의 각종 문명권 여행에서 나타난 각 문명권 세계관에 대한 스캡티컬-시니컬한 비평도 좋았음. (블랙 유머의 진수 같은게 느껴지는 훌륭한 문장이었다.)

가령, 허풍과 과장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그리스적 문화라든지, 숫자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인도적 문화라든지, '시제'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중국적 문화라든지 등등.



6) '창조와 선악'에 한하자면 작가의 해명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까나.. 싶었다.

"네가 그 길을 충실히 따랐다면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처 = 질문에 대한 무관심으로 하늘에 반항

"창조와 선악을 뛰어넘는 '도=자연'을 무위로서 따라야 한다"는 노자 = 초월적 교의로서 변별을 무효화시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 공자 = 현세적/공리적/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축소시킴.



7) 어쨌든 작중을 관통하는 스캡티컬함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정서다. 크게 화내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 크게 감동받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모든 것에 서로 다른 이유로 회의적일 수 있는. 아울러 그 회의적인 성향 속에서 나름의 본질을 통찰하고자 정서... 등은 굉장히 '학자적'으로 지향하는 인간형이기도 하다.



8) 그나저나 대관절, 그 주인공의 스캡티컬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조로아스터에 대한 '스탠더드의 확고함'이 다른 것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낳는 것인가. 혹은 '세상에 잡신이 너무 많다'는 일종의 피로감 탓인 것일까.

- 나는 어쩐지 후자라고 믿고 싶다. 그 까닭에 단지 스탠더드의 확고함 탓이라면, '견문'의 존재나 '질문'의 존재 자체가 사실은 불필요하다. 키루스 스피타마는 딱히 '포교'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결국 '진실'은 확인과 탐구의 대상이며, 그 탐구의 과정은 단순히 진리/진리가 아닌 것으로 나뉘지 않는, '진실이 아닐 수 있는'것들과의 꾸준한 대조 끝에 나오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과정은 피로에 젖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9) 아울러, 그 '스캡티컬'이 비단 세상사에 대한 비웃음과, 현자들과의 만남 정도의 '지적 향유'에만 그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주인공이 갈망한 '진실'의 길은, 단순한 유희의 수준을 넘는, 통쾌하지도 득이 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수 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한 구도求道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구도의 길 끝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본인이 '닿은 만큼의' 진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라도-작중에선 데미크리토스에게) '알려야' 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주님'이 내린 어떤 소명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반복된 '스캡티컬'의 과정이, 나름의 유머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벼워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201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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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적인 정신과 한국적인 사상이 무엇인지 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인 판타지 세계의 모습과 그 세계의 규칙, 특징, 기술 수준, 제도, 신분 계층 같은 것을 차근차근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작가들이 그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꾸밀 것이라 했다. 누구는 열심히 연구하고 토론해 세계를 만들고, 누구는 그렇게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열심히 소설을 쓴다. 그러다 보면 그게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소수파에 속했다. 그렇게 사상과 원리에 따라 세계를 구민 뒤 그 세계 속에 이야기를 집어넣는 방식은 너무나 원대한 꿈이고 품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힘든 일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다들 이것이 정말 한국적이라 공감하는 세계를 합의 끝에 만들어낸다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그런 일은 아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사상, 규칙, 세계를 만들어주면 아래에서는 거기에 따라 이야기를 만든다는 발상은 얼핏 체계적이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반대로 답답하고 지겨운 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시절부터 나는 그런 식으로 한국형 판타지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국 전설 속의 괴물이나 신기한 보물 같은 것을 목록으로 정리해두고, 그런 자료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같이 돌려 보는 것 정도가 실용적인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렇게 여러 작가가 저마다 자기 생각 자기 이야기 속에서 이리저리 활용하다 보면 저연히 그 중에 진정한 한국형 판타지 같아 보이는 것도 점차 나타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늘어놓고 아래에서부터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자연히 그에 따라 사상, 규칙, 세계 등 이야기 위에 있는 것도 생긴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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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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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조사 자료나 학술 논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괴물 전설을 밝히는 학술 논문들은 주로 구비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극히 "한국구비문학대계"나 그와 비슷한 현대에 채록된 이야기 자료를 근거로 괴물의 특징이나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는 논문들을 나는 주로 접했다.


그런데 "한국구비문학대계"만 해도 1970년대에 말이 되어서야 조사가 시작된 자료다. 1970년 말이면 이미 한국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되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서도 여러 전설이 각색되어 소개된 뒤였다. 그렇다면 이런 시점에 어떤 지역의 노인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조사한다 해도 그 이야기는 현대의 작가들이 가공하고 꾸민 영화, 소설 TV, 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내용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흉측한 귀신의 모습을 조사할 때 무심코 며칠 전에 본 영화 속 귀신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조사하면서 정확히 어느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원전을 정확히 밝히면서 한국 괴물 이야기를 모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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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2018 "한국 괴물 백과" 워크룸, 1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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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사회-문화의 가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 결국 해당 분야 종사자의 업이라는 것은 고민거리도 못 되지만, 그에 반해 적어도 그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오랜시간 나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되어 왔다.

그걸 늘 의식해 온 까닭에, 내 스스로는 그 방법에 대한 굉장히 오래된 철학-역사학(그리고 그 중간쯤? 혹은 둘 다가 아닌 애매한 곳에 넓게 자리잡은 문학) 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제법 경청해 온 편이다. 



2) 그 긴장을 요약한다면 둘 정도 인 것 같다.

역사학이 오래 견지해 온 '개별 자료의 수집이 특정 전통의, 타 전통과 구별되는 '특징'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낸다'는 입장. 그리고, ('한국학' 필드를 전제로 한) 철학/사회과학 분야에서 견지해 온, 해당 전통의 특성론을 일단 가설값으로 꾸준히 제시하되, 그 가설값을 뒷받침-수정하는 논거로서 개별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말이다.

(그 가치의 우열과 별도로, 사실 철학/사회과학에서 제기될 연역적 입장은, 언제고 스스로 세워둔 그 로직이 '한국적 특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늘 함유하고 있다. 한국학 같은 '지역성'을 장르의 기본 전제로 한 링에서는 그 '센터'자리를 자주 역사학 혹 문학-중에서 1차 텍스트 다루는 필드가 가져가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3) 역사학, 그 안에서도 자국사 다루는 필드에 몸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귀납적 케이스 수집에 '익숙한' 성향을 띨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케이스의 가치/그에 집중력을 어디까지 소모시켜야 하는가. 문제는 굉장히 오랜시간 스스로를 갈등케 만든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메시지'가 추출되지 않은 순수한 과거의 흔적 자체에는, 동료들 중에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당장 눈앞에 가시화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수백년 전의 어떤 부분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것 자체에는 사실 큰 감동이 없다. 그 까닭에 '사실관계' 그 자체에 감탄할 수 있고, 그 사실관계 파편을 목적없이 모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건대 사실은 지금까지도 거부감과 질투심이 섞인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지금쯤 오니 우회적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에도 그 의미를 잘 도출할 수 있게"된 편이지만, 실은 그 '의미 도출癖'마저도 그 사실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조차도 상당한 훈련을 거쳐 최근에야 틀을 갖추는 중인 테크닉이기도 하다)



4) 오히려 최근 들어서 그 갈등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역시 내가 밥먹고 살아야 하는 판이 그런 귀납의 판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탓도 컸고, 수년 전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국 핵심 없는 언어유희'라는 자조 속에서 크게 좌절한 탓도 컸고.. 어쨌든 그 푸닥거리 속에서 정말 간신히 '논리'와 '사실나열'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안정시킨 참이다.

- 충격적이게도. 박사 이후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답사를 사랑하는 호고주의자에, 개별 과거 사실을 나열하는 게 당초 익숙하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 진짜 역덕후를 안 만나봤구나 생각/ 내 나름의 실천이 빛을 발한 것인가? 생각이 겹침과 동시에. 사람은 상대적-가변적-다면적이기 마련이라는 내 인간관을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5) 대충 정리된 바는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는, '둘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그 차이를 굳이 드러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싸움에 비유한다면, 스스로의 DB를 잘 갖추는 것은 튼튼한 무기이며", "스스로의 방법론이 있는 것은 그 무기를 다루는 테크닉이다" 정도의 양립성일까. 정말 고도로 단련된 테크닉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맨손으로도 중무장한 사람을 이길 수 있고, 무기가 정말 좋으면 초심자 조차도 달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물론 역사학 필드의 오랜 전통은 그 "물리적 무기"를 모으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평가할 때에도 그 무기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를 1차로 보는 걸 "더 가치있는 일"로 여기겠지만(그 때문에, 본의아니게 타전공 종사자를 만나면 그 입장을 대변하게 되지만), 어쨌든 원시인에게 총과 총알을 따로 쥐어줘봤자 쇠몽둥이 쇠조각에 불과한것처럼, 테크닉의 연마도 필요한 것이다.



6) 사설이 무척 길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특정 문화적 전통을 밝히는 1차적 행위로서의 사실관계 나열/DB구축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까진 해본 적 없지만) '회의'와 '긍정'사이에서 꽤 오랜시간 갈등해왔다. 그 까닭에, 그 결론인 "생각보다는 훨씬 중요한 한 축이다"는 입장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자 한다. 해당 '백과'의 존재가 참으로 반갑고도 기쁜 이유이다.



2019. 1. 20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그런 것이냐'는 아내의 질타는 정도전에게 뼈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정도전의 질문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고 싶었던 정직한 질문이었다.


정도전 또한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깨끗하게 처신했단' 아버지 정운경에게 늘 속으로 묻고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기록한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 따르면 정운경은 청도교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 자신의 입신양명의 꿈에는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충동은 남이 눈치 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청백리 아버지를 역할 모델로 해서 살아왔고, 또한 신유학의 정체성 형성에 맞는 생활 양식을 추구해야 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아는 금지된 충동이 표출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반동형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반대적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제인 반동형성에 따른다면, 정도전 자신의 무의식 가운데 입신양명해서 가문에 영광을 가져오리라는 내적 충동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혹시 아내가 눈치 챌까 두려워 정도전 스스로 억압해왔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출세와는 정반대의 행동이 의식적 차원에서 표현되어왔고 그 결과,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망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철영, 2004,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세원, 170~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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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위 '심성사' 연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정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일기. 시문 등에 등장하는)개인의 사적인 기록물을 토대로, 해당 개인의 정신세계나 나아가 해당 시대의 담론을 도출해내는 경향'이라고 한다면, 여말선초 한정으로는 00년대 초반 쯤부터 시작해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가, 최근들어서 부쩍 그 성과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나름의 '최신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엔 이색에 대해서라면 이익주 선생님의 "목은 이색의 삶과 생각"이, 이규보에 대해서라면 김용선 선생님의 "생활인 이규보"가, 정도전에 대해서라면, 본문의 내용이 "인간 정도전"으로 보완-정리되어 출간된 바 있다)


2) 당연하지만, 개인 기록에 대해 묘사하는 것인 만큼, 입론의 디테일이나 정밀성이 성글고, 다소 앞질러나간 해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소 파격적일만큼 내러티브가 실험적이고 섬세한 것은 상당히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다만, 이를 토대로 어떤 방법으로 '거대 서사'를 수정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미 몇 차례, "개인적 기록이, 결과적으로 기존의 연구담론을 재차 강화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 혹은 "해당 기록물 연구가, 문학연구와 어떤 차별점(혹은 비교우위)을 둘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지적사항이 제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켜봐야 할 문제.


201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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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성사' 연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게 된다. 그 이후로 몇년 새에 이에 대해 잘 쓰여진 사례라고 소개받은, 뚜웨이밍의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나,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를 읽어보기도 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성사가 기존의 거대서사에서 커버하지 못한 '미싱 링크'를 찾아낸다는 면에서 유의미할 것이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여전히 '큰 흐름'을 달리 서술하기에는, 여전히 '기존 견해의 재확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지금까지도 크게 극복되지 않았다. '디테일'을 첨가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연이 아니며 결국 서사를 정돈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선학들의 경구가 옳다고 한다면, 적어도 2019년인 아직까지도 '심성사' 연구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단계를 넘어서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어느쪽이든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볼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많은 '인문학적 신식 방법론'이 저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또한 지금 와선 조금은 아이러니다)


* 덧 : 고려든 조선이든, '심성사'에 관심이 있다는 또래-이하의 사람들을 '해양사' 다음으로 많이 봐서, "대관절 그 많은 사람들이 애정해 마지않는 해양사-심성사는 어디서 어디까지 정의-범주가 제각각일까"에 대해서 한번 마음을 먹고 계통을 정리해보고 싶은 심경마저 들곤 한다. 



2019. 1. 19

"(전략).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철학사상(philosophical ideas)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이러한 부인은 나름 정당하다. 역사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진행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심했는데, 이러한 의심 역시 나름 정당하다.

나는 이 양자의 중간에 처해 있다. 인간은 본성상 모두 신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유학의 철학은 유아론적 헛소리(solipsistic drivel)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나는 놓여있다.....(후략)"


피터 k 볼(김영민 역), 2010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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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당연하고 어쩌면 또 상식적인 말이지만, 과거의 텍스트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분야(국문/철학/정치학/사회학/역사학 등등..) 중에 유독 중국사상(정확히는 중/한 사상) 연구분야에서만 특별히 좀 미진해지는 경향이 있는 바를 정확히 짚어 준 대목이다.


2) 본문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 중, 전자의 경향대로 경전이나 문집 자체를 잠언화하여 해당 텍스트를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보편적 메시지로 정돈하는 경우 (철학과 등에서 숱하게 나오는, 예컨대 '누구누구 사상가의 무슨무슨 사상-대개 교육/수양 등의 비교적 현대적인 개념의 사상-에 대하여' 류의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그 '사상' 자체가 가지는 시대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서, 그 텍스트가 가진 적확한 의미를 뭉뜽그려 버리게 된다.

-이런 경향성이 유/불/선 중 어디가 가장 심한가는 도무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나마 '현실'에 가장 맞닿아 있고, 그 자체로 정치성을 가장 강하게 띤 유학이 그 경향을 그나마 덜 띠고있다고 개인적으로는 믿고 싶지만, 그 어마어마한 '현대유학자'들의 연구 분량은 그 판단에 자신을 잃게 만들어 준다..


3) 한편 후자의 경향대로 철학적 이데올로기들이 (선생의 표현을 빌어)'유아론적 헛소리'라고 전제하고, 해당 텍스트 저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위상과 그 지향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정돈하는 경우. (역사학에서 다수 이루어진 개혁사상(국가관, 안재선발론, 토지개혁론) 연구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는 분명 텍스트의 '성격' 분석에는 큰 대강을 제시해줌에 틀림없지만, 그에 따라 각 텍스트들의 의미를 전자와는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계급이나 정치 지향 속에서도 생각에는 다양한 '꼴'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들 간의 의미 차이, 혹은 그러한 '생각의 다양한 꼴'이 발생하게 되는 여러 관념(개념)의 흐름 또한 엄연히 '인간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양자 간의 균형관계가 유독 중/한의 유불선에 한정하여 왕왕 무너지곤 하는 것은 혹자의 평 대로 '동양사상은 아직 자가붕괴하지 않았기 때문' 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 원인과는 별도로 앞서 인용된 '양자의 중간'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사상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양자 모두가 가지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후자의 경향이 더 학문의 본연에 충실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사상사'같은 모호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굳이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분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5) 다만 굳이 후자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사상이라는 분야를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의아니게 때로는 대단히 나쁜 의미로 전자의 지향성을 깊게 가진 연구들에게 상당량을 빚지게 됨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부디 사상 자체에 너무 깊게 빠지지는 말게" 하는 역사학의 선학들이 남긴 전통적인 일침은 그 상황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균형감'에 대한 뜻깊은 충고지 않을까.



읽은 지 좀 된 책이지만, 다시 생각해고 또 생각해도 탁월한 구절인 것 같아 한동안 되뇌이다 공유해 본다.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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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이 책은 이 글을 끼적이던 6년 전에도 "읽은지 좀 된 책"이었는데, 그로부터 또 몇년 뒤인 작년에 또 다시 꼼꼼히 읽어 볼때쯤 들어서는, 이 책에 대한 인상깊은 부분 선별이나 그에 대한 견해 전반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그러고보면 과연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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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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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초 관료층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면서 신흥사대부설에서 말하는 지배층의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정체성이나 안정성과 같은 역사 서술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분권적인 성격인 농후한 고려 전기와 중앙집권체제가 훨씬 강해진 조선 전기의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경제 세력들의 등장을, 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내재적 발전론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전근대 중앙집권관료체제가 사회 분화 등의 여러 여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역사사회학자 Eigenstadt의 연구를 해석의 틀로 빌려, 고려 일대를 통해서 이루어진 지방세력의 약화와 강력한 중앙지배층의 성장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초기 중앙집권체제의 강화가 결국 중앙지배층의 권익을 반영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나마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Eisentadt는 Weber를 따라 문화 체계를 거의 독립적인 변수로 내세웠지만 나의 입장은 문화적 현상을 실질적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말선초의 유학 사상의 여러 갈래를 검토한 결과 개인의 수신과 지방 엘리트 중심의 향약과 같은 반자치적인 조직을 통해서 사회를 재건하려던 남송 이래의 정주성리학 만큼이나 중앙의 통치력을 이용해 사회를 개혁하려던 북송과 같은 고문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조선왕조의 건국을 연구하면서 15세기의 유학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을 알게 된 나는 조선의 유학을 비좁고 탄력성 없는 정주성리학의 정통론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정통론 때문에 조선왕조가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보는 미국 한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에 불만을 느꼈다. 철학적 사유의 전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권양촌이나 이퇴계와 이율곡, 송우암과 같은 몇 명의 사상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사상사(history of idea)의 접근방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중국과 일본의 복잡성을 논하는 UCLA의 동료 교수들의 연구에 힘입어 Annales 학파에서 말하는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즉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다시 검토해보면 통론에서 말하는 일변도의 정주성리학 정통론과는 달리 사회계층과 사회 정치적 위치,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하고 활력 있는 정신적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과거제의 구조나 운영보다 내용에 중점을 두고 중국의 명청 과거제도와 조선의 과거제도를 비교하면...명청 전반기에는 시를 짓는것을 부수적으로 여기전 정주의 입장을 취하지만... 조선의 문과에서는 거의 시종일관하게 중장에서 시나 부를 짓는 시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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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B 던컨, 2003, 서양 사학과 한국 전근대사 "한국사 연구방법의 새로운 모색" 경인문화사
(2002. 6 국제학술회의 발표원고의 재수록) 70~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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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던컨 선생의 대학원 강좌를 몇 학기 정도 수강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때 누차 강조하던 내용이었는데,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든 책에서 좀 더 깔끔히 정리된 것을 보니 새삼 반가운 기분이다.



2) 해당 인용문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듯이, 던컨 선생의 핵심논지는 단순히 "왕조교체의 연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국을 일으킨 기반으로서의 지배층 교체'만을 부정할 뿐, 중앙정치제도 및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고하고 있으며, 그 사회 변화를 추동한 정신적 기반으로서의 ('북송 고문학'이 기반이 된) 성리학의 역할을 적어도 흔히 오해받는(혹은 이상한 대목에서 찬양받는) 바 보다는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아이젠슈타트도 검토를 좀 해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던컨이 비판받으면서 함께 비판을 받았던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일독의 가치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3) 이와 별도로 사소한 것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석사생 시절 던컨선생의 수업시간에


"저는 사상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한데, 지식인 개인의 실천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안 가고, 오히려 사회의 여러 변화가 제반 문화현상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지식인의 작업으로 수렴되는데 관심이 있다" 고 하자.


"그러면 평시군의 관심사는 '사상사(history of idea)'가 아니라,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와 '문화사(cultural history)'의 중간 쯤 있는 것이라고 하는게 맞겠네"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던컨 선생의 규정법에서는 문화사는 그렇다치고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에 대한 개념정의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이 글에서도 나오듯이, "철학적 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 등의 폭넓은 자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 정의내리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던컨 선생의 그 답변은 '나의 관심 방법론'같은 것을 좀 자세히 설명할 때 요긴한 방법으로 활용 중이다.



2019. 1. 17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현암사 판)
"마음"(웅진출판사 판)
"그 후"(민음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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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의 감상을 쓰기에 값할만큼 소설에 대해서 자신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받은 느낌과 감상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 본다.

- 해당 세 소설에는 스토리에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유민적 성격'이 중심적으로 부각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고등 유민적 삶이란 무얼까. 고등교육으로 무장되어 스스로의 탐미적 취향을 갈고닦으나, 그 배움의 당위적 목적이나 사회적 실천같은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은둔시키는 존재 정도로 설명하면 거칠게나마 정리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은 여러 의미에서 '죽림칠현' 정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몇 가지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해 이렇게저렇게 상상해봤다.


1)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삶이란 '이상'을 잃은 속류적 은둔 유희일 뿐인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소명' 같은 당위명제로부터 담을 쌓은듯한 그들이지만, 속류적 이기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고등유민의 에고이스트적 삶이란 소명어린 삶 그 이상의 높은 기준을 지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공민-시민적 소명 등과는 무관한, 일종의 '미감적 에고이스트(aesthetic egoist)'로서의 섬세하고 예민한 결벽일지도 모른다.


2) 그렇다면 고등유민의 에고이즘이 지향하는 기준이란 확실한 이상주의일까?
사실 그것도 조금은 불분명하다. 세 소설의 (준)주인공들이 골몰하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스나가는 지오코를 '사랑'했을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사랑'했을까? '선생님-K'는 '사모님'을 '사랑'했을까? 그들이 꿈꾼 "마음의 자연"이 정녕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갈망이었을지는 불분명하다. 외려 분명한 것은 다이스케의 "타들어가는 빨강"으로 가득할 삶이란, K의 죽음을 맛본 '선생님'의, 그 전까지 그리도 갈망하던 '사모님'에 대한 냉담함 만큼이나 위태롭다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의미에서 고등유민들의 에고이즘은 목표가 있는 이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목적지없는 낭만이며, 더 나간다면 '사회적-제도적-소명적'(어쩌면 이 셋을 합쳐낸 의미에서의 '세간 도덕적') 삶 전반에 대한 목적지없는 반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그 '실체가 불분명한' 에고이즘이 '고등유민'인 K와 선생님을 어떻게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일까? 
누구보다도 자신에 천착한 그들의 에고는 역설적이게도 결국 자신의 삶 마저 갉아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목표가 불분명하지만 한없이 높기에, 그들의 삶은 때로 두문불출은 할 수 있지만 안빈낙도에 도달할 만큼 낙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타율이 잘 구분되지 않는 사회로부터의 유리를 낳는 '고등유민'의 에고는, 삶이 이를 원만히 버텨내지 못한 채 고등유민 자신들을 (약간은 뒤르켐 식의 "egoistic suicide"가 연상되는) 죽음으로 이끈다. K의 고독감이든지, 선생님의 죄책감이든지, 어느쪽이든 에고를 감당하지 못한 삶의 후퇴가 죽음으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K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의미에서 선생님의 죽음은 K와 다르지 않다.) 

- 일전 한 대화에서 "폭력남편을 참게 되는 고등 여성 지식인의 심성"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게 되는 타협적 심성"같은게 그 폭력남편에 의한 희생을 부른 것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의 (세상 도덕과 기준으로부터 벽을 쌓고자 하는) '비타협적인 에고이즘'이야말로 그들 자신을 도그마로 만들어진 고통의 세계에 몰아넣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4) 그렇다면 그들의 삶에 구원이란 없는 것일까?
그 마지막 단계에서 "고등유민"이 도달할 만한 마지막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와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마음으로의 소통'일지도 모른다. 혈연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 인간관계를 넘어, 하지만 에고이즘적 '반제도-반도덕'마저도 (상당부문 일치하지만) 넘어서 만들어지는 관계맺음이 결국 "고등유민"이 도달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인간은 홀로의 에고이즘마저도 오롯이 감당해낼 수 없는 흔들리는 존재다. 그 까닭에 그 "마음의 소통"이란, 그 가능성마저도 사실은 2)의 이상-사랑들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일지라도, 혹은 그것이 (불륜으로 실행된)'마음의 자연'에 준할만큼 탐미적 매혹의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결국 어떤식으로든 구원을 위해 다시금 걸어봄직 한 불분명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2019. 1. 16


1) 홍이섭 선생의 문장은 김철준 선생의 것과 더불어 난문으로 악명이 높다. 홍이섭 선생의 경우에는 긴 문장과 '의'의 반복이 유독 두드러지는..

수식관계만 좀 다듬어도 훨씬 가독성이 높아질 듯도 보이지만, 일단 귀찮으니 그대로 옮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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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글 말고도 '한국정치사의 방법과 과제' 라든지 등등 읽고 생각할만한 글들이 꽤 있는데, 그 글들은 나중에 시간나는대로 조금씩 옮겨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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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사 많이하면 그 문투가 옮는다던데, 저 문투가 옮았다간 그거대로 문제긴 문제겠다..(농담)


4) 홍이섭 전집을 2000년대 추가발간된 7~11권까지밖에 안 가지고 있어서 앞부분은 빌려다 보거나 해야한다.. 사실 정인보 전집 사듯 한번 사 볼까도 생각했는데, 초반 1~6권까지만 15만원이나 하는 걸 사기는 너무 허리가 휠 노릇이라 보류해 둔 상태..

다만 개인적으로 과학사, 실학, 사상사 (1,3,4권)해당파트는 짬짬이 모으고 싶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본문도 4권에 실려있지 않을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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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섭, 1968, '한국사회사상사의 방법',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원재, 1962, "한국사상"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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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적인 서구중심주의에서는 한국사상사의 구성자체에 이의를 품기도 할 것이다. 먼저 한국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 사상-정신적인 과제를 표제로 내세운다면 유교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확립시키자 하던 여말선초의 사회적인 움직임과 유교주의와의 연관성의 이해에 있어 종전의 인식태도부터를 비판하여 인식된 유교주의에 대하여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에 있어 유교주의의 이념은 지배의 이념으로 또는 피지배층의 순종의 윤리로써 그 사회적인 확충과 정신적인 확립립은 한국근세에 있어 사상의 사회적 기능을 촉구하였었다. 앞서 사변적인 불교의 사회적 작용도 있었으나, 현실정치의 유교주의와는 달리 종교적이었음에서 이것은 전사적인 한국철학사에서 논구될 것으로 이와 구분될 사회사상사에서는 종교의존적이었던 전일의 사고에서 떨어져 나오는 유교주의의 정치이념으로의 기능을 국가사회적으로 지니게 되는 여선교체의 14세기말은 그 시점을 이룬다. 꼭 사상체의 역사적 인식에서뿐 아니라 어떤 인식을 위한 그 자체의 토론과 연구에 있어 방법의 문제는 흔히 선행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인즉 방법의 문제는 선후관계에 있어서는 순환관계를 지니므로 이러한 과제를 한국사상사에서 따져 본다면 일반사의 연구와 같이 이제까지 이 부문에 과거의 유산이 없는데서 흔히 외래적인 어떤 방법의 수용을 전제로 하게 된다.


물론 이 외래적인 방법은 어떤 기성된 인식체계인 만큼 거기에다 한국의 표재를 들이맞춘다는 직결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쉬우나 이러한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사상사에서 본다면 이미 이루어진 인식체계를 배태한 그 사회의 사상과의 비교 내지 어떤 차이에서 한국사상의 비교적 위치의 설정에 머무르기 쉽다.


이러한데서 체계화의 시험등에서 얻은 어떠한 유산이 없다는 것을 또한 주시하여야 할 일이다. 즉 여기서 사회사상사의 시험적 구성과 겸행한 방법의 논의가 문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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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원적인 작법을 통한 상호작용의 시론에서 「한국사상의」이해에서의 방법의 추구와 그에서 정화된 방법에서 따져진 사회사상의 사적 추이의 인식에서 비로소 구조적 이해가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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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사상사의 구성


-유학사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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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어 사회사상사라는 용어자체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됨도 엄격히 말하면 해방 이후 교육의 독자적인 향유에서라고 하겠다. 더욱이 ‘한국사상’을 운위하게되는 것도 대학의 강의과목에의 ‘조선사상사’(대체로1950년 동난이후 ’조선‘을 ’한국‘으로)를 계시한 것이 실질적으로 한국사상에의 인식을 촉구한 것이다.

이에 앞서 사상사적 이해의 기반을 한국 이해에 두지 못하고 오히려 일반적인 인문사회과학적인데 두었으니만큼 한국 이해의 학문에 종사함에 있어 원전 해독이나 제도나 문학의 고실  증거(故失 證據)를 위한 실증주의 입장에서는 한국사의 이념적인 이해로 급격한 전환을 감행하지 못하는데서 사상사의 시론적 인식으로 접근키 어려웠고 일반적인 인문사회과학의 이해면에서는 원소재의 탐색을 위한 원전 해독이나 기본적인 문헌 탐구에 난점이 없지 않음에서 이 분리된 양편의 점은 접근한지 못한 채 그대로 양극을 이루었었다. 대학교육의 일면에서 한국사상사 해석의 기점을 설정한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 진전의 길을 마련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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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말에서 현재(1960년대)까지의 한국인의 정신적인 동향을 사회사상사의 일환으로 잡아 보는데 시간적으로의 단속과 사회적으로의 단층이 있겠으나 역사인식을 위한 일관된 추상화의 작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준비와 함께 이미 있었던 유산의 비판적 검토가 이 방면의 어떠한 일보다 앞서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자의적인 구성으로써만 안일히 처리하지 못할 작업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고 간주해 온 이제까지의 「한국사상」에 대한 자세부터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물론 통사적인 사회사상사로의 구성은 없었으며 이러한 방향에의 인도에서 보다 한국사상의 주체로의 「유교」의 한국적 계보를 우선 따지려고 하였음은 오늘에 와서는 그대로 한국근세에 있어 사회사상의 계보적인 탐색에 손잡이는 되고 잇다.

일찍이 장지연의 「한국유학연원」(1911)은 한국유학의 체계적 인식의 전초적인 문헌으로 그 역사적인 중요성을 더 한층 재인하게 된다. 해방 후에 있어 현상윤박사의 「조선유학사」(1949 후에 한국유학사로 개제)와 이병도박사의 「자료한국유학사초고」(1959년 유인)등은 서술과 체계에 있어 인식방법이 「조선유교연원」에서보다 사상사적 정리의 방향을 취했다고는 하기 어렵고 후일의 양자가 「조선유연원」을 도외시한데 있을 수 있는 학사적인 체계를 있는 그대로에서 이끌어 내었다 하더라도 학사적으로는 선구적인 장지연의 저작으로 돌아가 시점을 따지게 될 것이다.

삼자가 골격적인 구조로써 사승관계와 학사적으로 따져야할 저작의 소개와 학설의 1,2의 요점을 적출하고 종전의 왕정적 정치사의 기능에 결부시키고 있는데서 유학사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철학사로서나 보다 정치사상사 또는 더 포연(布筵)시킨 사회사상사로의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상거(相距)가 있다. 우리들은 기왕의 삼저작을 그것이 지니는 성도적인 방임에서만 주시할 것이지 사상사로써는 자세를 달리하여야 할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되면 유가적인 또는 실증주의사가로서 보다 사상사가로써의 정신적인 준비가 무엇보다 요청된다.


「조선유학」의 개별적인 이해자체가 사상적으로나, 철학적인 인식 검토가 없는데서 곧 그 총체적인 체계로의 전사를 논위(論謂)하기는 어려웁지만, 먼저 조선유학의 역사적 검색을 거친 사상사적 구성은 오늘의 현실로는 앞서 말한대로 이원적인 작업을 보행하는 것이 보다 긴한 일로 되어 있다.


19세기말 이후의 한국의 근대화과정이 경제적으로 한국사회자체의 자본주의화-근대사회로의 개진이 못되고 식민지로써의 전락과정이었음에서 현재까지 추이해 오는 동안에 사상적으로의 근대화에서 한 시기의 전락과정이 있으므로 주시하게 된다.


그 전변과정에 있어 지니고 있던 주체적인 조선유학의 봉건교학으로의 정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며 어떠한 방향에서 사회적인 작용을 하였는지는 자본주의화과정을 그저 근대화과정이라고만 호칭하는 통념적인데서 한 걸음 벗어나 과도기의 한 사상의 전변에의 인식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추이에서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 이념이 근대화과정에 있어 역시 통념적이며 일률적인 규정에 따라서 유교주의적인데서 몰락할 수 있었다는 필연론의 추출에 추종함을 비판하고 탈피하는 동시에 필연적인 쇠퇴과정의 사상으로 유교주의봉건교학 속에서 움트고 있었던 봉건교학에의 도전적 자가비판은 이조봉건제사회 자체내에 그 온상이 마련되었으니, 이것은 한국의 소산이었음을 논증하는데서 한국사상의 보다 바른 인식의 길을 열 수 있다.

조선유학의 사상적 이해는 한국사회사상의 기반이 되며, 이 확증적 구명은 한국사상 이해의 불발이 된다. 유교주의의 지배적이었던 시기와 이 유교주의의 조류가 잠재화하며, 또 그것이 간접 직접으로 수용되는 서구적인 사상체에 반발을 일으키며 또는 동질적인데서 동조적인 단승의 지반을 마련하는 이십세기 전반기(극한은 1945년 해방이라는 사회적인 전환점에 두게 되지만)에 있어 식민지시대의 사상적 두 조류도 반발이든 동조이든 간에 잠재적으로는 유교주의가 그 저류를 이루고 있엇다. 일견 병폐적인 고질인데서 유교주의 정신의 비판적인 과제는 같이 유교주의사상을 봉건교학으로써 수용한 일본사회와도 다르며, 본향인 중국과도 다른 데에 조선유학의 획일적인 절대성을 달리 인식하여야 하게한다.


그러므로 먼저 한국사회사상사의 구성에서는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확립과 추이를 잡아 보아야 한다. 즉 이 시기가 여말선초에 걸쳐 주자학의 수용과 그것의 정치권력에 의한 학립 상층적으로는 정치이념으로 사회하부에 있어서는 국가윤리로서(특히 군신관계의 규정을 위주한 봉건적인 권위주의) 보다 사회적인 기반에서 가족윤리로써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송학에서도 종결적인 체계화를 기도한 주자학적 이념의 이식은 조선유학을 봉건교학으로 절대화하는 자연주의적 사상의 시점을 이루고 있다.


이 절대적인 교학의 이념을 계보적으로 보는데서 간취(看取)되듯, 유학자체의 아카데미즘을 지녀온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인 송학-특히 주자학의 이해과정에있어 정치적 이념의 「조선현실」에의 적용이라든지 「정치적 현실」의 비판에 있어 후일에 말하는 공리적(空理的)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흔히 공리적이라 한 것은 정치현실의 비판과 달리 윤리적이었던 예론과 철학적인 이기론과의 불분리에서 온 사상이해의 혼효(混淆)에서이었다. 이것은관료적인 유교주의학자들의 학문체계와 정치현실의 무비판적인 직결에서 오는 오인의 결과이었다. 주자학적 이념의 종합적 또는 유취적(類聚的)인 이해 즉 이기론-철학적, 체론-윤리적,정치이념-유교주의의기본사상의 체계적인 이해 또는 이것의 유취적 이해는 어떠한 방향에선 사상사적 타결을 갖게할 것이다.


철학사 또는 도덕사상사와 구분될 사회사상사에 있어 유교주의의 차지한 성격은 자명해질 것이다. 혼효적 유학사의 자세에서는 사상사 특히 사회사상사에서의 인식은 자체 불가능하며, 이미 얘기하고 있는 학술사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종합적인 사상사의 관점에서 말하는 intellectural history에서 본다면 적어도 삼분해볼 유교주의이념의 상호작용과 유교주의치하에서 생성되어 온 사회문화의 제현상과의 관점작용-반작용에서 문학-미술-음악-연극의 유교주의적 봉건제사회와의 상호작용을 따져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유교주의의 확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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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주의의 정치적 확립 주자학의 기본이념에서 소학과 통감강목을 통하여 유교의 논리적인 이해의 사회적 보편화와 역사적인 인식의 틀을 마련하는데서 유교윤리의 체제로의 삼강오륜은 곧 한국의 역사적 실제를 따지게 한다. 이러한 실천면에 비하여 철학적인 면의 이해는 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었음은 근세한국인의 사색의 과정을 명시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해에의 시간의 소요와 다시송학에서의 전개에는 사색을 통한 한 층의 노력이 필요했었다. 한국근세철학의 형성과 발전에서의 소산을 중국의 것과 우열을 논하는 소박한 견해는 한국사상을 서구적인 것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결정지우려는 방법 이전의 초보적 단정이며 우열과 차이점의 견해만으로서는 중국의 유교사상이나 서구사상의 껍질을 벗기는 일로서 외래적인 요소의 제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국극에 가서는 원시적 종교신앙 그 조변의 사유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이해된 유교주의의 사회적 기능을 포착하며 그 영상에서 당해사회(當該社會)의 동향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유교주의의 이해와 실천여정에 있어서 삼분될 각 분야는 그대로 각 시기의 시대적인 조건을 지니고 있으니 이기설이 조선의 학적 수준을 규제하면서 사회적인 기반을 지니는 이황과 이이 두선생의 양립의시대에서부터 여타의 조건(정치적인 분파가 표면상의 (主潮)이엇으나, 후일에 와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게 학설자체에서 즉 學理에서 발발한다)에서 분파되는 것은 實踐禮論이 보다 정쟁에서의 분파와 밀착하는 것이요, 정쟁자체가 예론에서도 상론과 상호생성의 과정을 밟은데서 이미 순리론의 현실적인 이해를 촉구하는 연유가 된다.


제3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실천론은 여말선초에서 이이에 이르기까지 보다 1552년의 일본의 침략전쟁(임진란)이후 복고적 의식에서 한국현실의 비판적 인식에서 사회개혁-국가제도의 개편을 중국의 주체적 자연으로 돌리고자 하는 생각은 일종의 자연주의사상으로써 외양 중국적인 데의 의존, 사회제도면에서는 곧 복고적이었으나 이러한 생각은 시대와 함께 급진적인 사상(개혁)으로 전개되며 부분적으로는 혁명적인 요소도 있었다.


당시의 조선학자들은 조선현실에서 출발하였으나 시대의 추이와 함께 대륙국가의 사상적 다양성에서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이 외계에서의 정신적 자극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곧 명말청초의 복고적 복벽사상은 그대로 현실정치의 극렬적인 비판에 이르렀으며 이 복고의식에서 현실 부정에 가까운 생각을 발로하게 이르렀던 일부의 급진적인 사상은 서구의 계몽적인 사상과는 다른 생성기반에서 전개되었고 이것은 곧 개혁적인 조선학자에 수용되었으며, 다시 조선의 현실은 그러한 사상체를 여과시키었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의 여과는 곧 조선사회가 지니는 어떤 제약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여과된 사상은 그대로 조선현실의 비판과 인식의 새로운 태반의 작용을 하였다. 우리들이 실학사상이라고 호칭하는 일련의 사상적 계보는 이에 의존 생성되었던 것이다. 이 생성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움과 이 사상의 사회적 포연을 어떻게 한정지을 것인가는 유학사의 일부로서 지칭할 정치, 경제정책의 사상사적 논구에서만 결정지을 수 있다. 이 사상의 계열을 실학-실사구시학파라 호칭하던 1930년대의 좌익적인 한 논자에서는 현실학파라고도 지칭하였으나, 통용되는 실학파라는데서 그 학파의 사상적 핵심에 접근된 명칭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문제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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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학파-현실학파의 기본사상은 주자학적인 근간에 양명적인 지행합일의 정신이 농축되었으나 주자학지상주의의 이씨조의 사회풍조에서는 양명의 색채는 의식적으로 잔재시켰으므로 이 어느 것에의 편향성은 벗어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고경학-원시유학에의 회귀의 정신도 내보였음을 착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한편 명청의 대륙사회를 경유한 한역된 서구적인 정신으로의 중세 「스콜라」철학 내지 「가톨릭」사상의 수용-이해-찬양<신봉>은 이 자체가 종교적인데로 흘렀으나 이것과 동시에 서구의 「르네상스」기의 자연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실학파의 학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지식에서 새로운 서구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에 도달치 못한 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주자학적 관념세게를 뛰어넘지 못하였음과 서구적인 그것이 「스콜라」적인 단편적인 것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음에서다. 이런 제3의 외래사상의 작용이 일률적이지 못하였음에서 같은 학파의 학인들에게도 공통된 의식이 못된 것은 양명적인 정신도 같았던 데서 사회인식에 있어 시간적인 선후를 별도로 급진적이기도 하고 온건하기도 하며 비판적인데 편향적이기도 하며 또 체계적인 개혁론의 구축에 이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당시로는 이 현실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 십구세기 중엽에 와서 농민들의 ㅈ대중적인 동향에서 괴리되었음은 근세사상사의 단층이라기보다 어디가지나 유교주의 정치이념에 기반을 둔데서 유교주의자체가 근대화의 성격을 지니지 못한데서 결과될 윤리에서이라고 처리할 수도 있으나 ‘웨버’의 중국사회이론으로의 유교주의의 분절 이해를 차용할 것임에는 역시 시험을 거쳐 걸러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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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위 근대화과정


-자본주의화=식민지화에 있어 민권과 독립의 과제

 

19세기 중엽에 있어 동학적 세계관의 형성은 한국인의 독점적 유교주의 정신세계에의 도전적인 사상의 형성이었으나 후대적인 해석으로의 사상적인 외피에 불과했던 당시의 정치사회가 폐쇄적이었다는데서 서학에 대항하는 동학으로 간주착각에서 인식의 각도가 틀렸던 것이다. 동학은 한국인의 전통적 사상의 종합체로의 동(東國)학(思想)이었던 것이고 배타적인 것보다 포섭적인 종합의 방향을 취하였었다.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농민층에 기반을 둔데서 19세기를 통하여 한국의 전역을 휩쓸던 동민반란과 사회적으로 관련성이 있었다. 19세기 후반기의 즉 소위‘근대화’(자본주의화-식민지화)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동학적 세계관과 거의 1세기간 이 사회를 휩쓸던 방방곡곡에 만연된 민요(농민반란)을 선결적으로 이해할 일이다. 안으로는 즉 사상적으로 유교지상주의 한국사회가 동학적 세계관을 지니는 것은 유학적 사상사에 한 전환점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유교주의의 이념, 전변하는 한국사회에 적응하여 중국중심주의정신을 자기중심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의 계기는 한국사회자체가 경제적으로 근대화할 준비가 성숙되었었다면 전진하려던 사회에 대하여 보수적인 반동의 소재에 멈추었을 것이나, 미숙한 단계에서 외계-외래자본주의에 접촉으로서 붕괴단계에 처하여 있었더니만큼 구미 내지 서구자본주의의 선도적 소임과 자기들의 침략을 기도하던 일본자본주의의 침투를 배제보다 방어코자하던 ‘양왜일체’의 배격론에서의 양화배척 ‘척사론’으로 꾸며졌으며 이항로같은 모화주의정신의 소유자의 ‘척사론’은 그 자신에 있어서 또 김평묵 등 그 문하생에 이르러 모화적인데서 국수적인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군벌을 선도로 하는 일본자본주의의 침략에 민족적인 항거로 나타나도록 되었었다. 이 유교주의의 전환은 동학적 세계관의 형성을 선도로 그 추이에 병행되며 유교주의적 주류의 변환에 따라 청,일본을 통하여 인식된 근대적인 발전양상은 일본인의 용어인 ‘개화’로 대표되었었다. 이 ‘개화’란 말의 사용은 곧 ‘개화정신’을 빚어 내었으며 함께 “프로테스탄티슴”이 그 자체에서의 민권의식과 실용적인 서구적 문화의 이식과 함께 민권과 민족의 독립주의의 정신은 외래자본주의의 침략에 抗立的이게 되었다.


대내적으로 보수적인 정체의 취약성과 전근대적이며 부패적인데 비난,공격을 감행하여 개혁을 강요했으나 시정적인 인선이나 농민군벌의 침략적이며 상부에서의 개혁으로 좌절되었다. 이러한 근대사상의 일련의 사실은 이른바 근대화의 여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일은 일본의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식민지화의 여정이었으며 사상사적으로 이 과정은 주류인 유교주의가 송학적 척사론을 국가보호의 자리에서 사=외래자본주의상품(양화)으로 전환시키는데서 다시 위정은 민권-민족의식으로 내밀게 되었다. 이 정신적인 기반에 이식된 서구적 근대사상은 주로 일본의 견문과 서적을 통해 수용되고 일부는 미국에서 유입되었고 청말의 사상적 동향에서 자극되었다. 여기에도 서적을 통하지만 영·미인이 현지 한국에서 절달한 바이었으니 근대사상 수용의 교량이 일본이나 청에 비해 퍽 빈약했고 질량에 있어 근소하였으나 거재필 유길준 장지연 등의 근대적 의식은 유교주의에서 근대적 사상에로의 전환기의 소중한 산물이었다. 민족의식은 지식층에 고아범히 퍼진 공통의식이었고, 이 의식의 표현은 개화운동과 함께 널리 퍼졌으나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론화되지 못하고 후일에 민족사관의 수립에 있어 신채호의 한국사의 이해만이 최후까지 자기 정신을 고수하며 기타는 그러한 의식선상에서 탈락됨은 한국이 자체의 근대사회로의 진전에 반한 식민지로의 전락에서 그 식민지시대의 사회적인 조건에 따른 것이나 민족의식 자체와는 달리 탈락은 탈락되는 인간의 심성과 기질에 따랐던 것이 명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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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식민지시대의 이율적 사상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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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적 변이에서 보다 1919년이전에 있어 민족적 의식의 응고화와 그 국제적 연계성의 확대강화와 함께 민권의식을 근간으로하는 민주주의적 사상보다 일제에의 저항에 있어 일본지역을 통한 ‘아나티즘’Anarchism(무정부주의라고 해석하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반역적인 사상)의 수용 일본에 있어 일본인‘아나키스트’와 동반활동 등에서 사상적 이해 실천운동-투쟁은 곧 민족운동의 한 조류를 이루었다. 중국이역의 망명객이 또한 민족적 의식을 실천화하는데는 강력한 ‘아나키즘’의 노선을 밟았다. 이것이 정치적인 실천운동인데서 사상으로싀 유산은 달리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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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진영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진영에 대립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나키즘의 노선에서였음은 앞으로의 민족독립운동사에 제시된 사상사적 과제이다. 파괴적 아나티즘은 일본제국주의에의 항쟁을 감행하였음에서 저항적인 의식의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한편 1920년대에서 30년대 중엽에 걸친 공산주의운동에서 사상사적으로 맑스에서 레닌에 이르는 공산주의이론을 소용하게 되었다. 즉 공산주의사상 수용의 루트도 주류는 일본을 통한 것이었고 동시기에 있어 일본의 사상적 동향은 식민지-조선에 그대로 파급 작용함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반봉건적 자본주의발전하에서 겪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일본자본주의의 식민지로써의 성격에서 오는 사회적인 동태가 공산주의 이념의 이식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국제공산당을 통한 소비에트의 대립적인 정책에 따라 중국-만주-시베리아 경유로 조선국내에의 작용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합작과 파괴적 분리 항쟁으로 자체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 실제운동의 변이에 따른 이론적 전개와 지식으로서의 기본이론의 이해가 맑스주의 사상의 수용의 역사적인 테두리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대별한 두 주의 진영이 각 자체내에서의 분열이 끊이지 않았던 한국인의 정신구조는 식민지적인 또 전통적인데서의 조건과 아울러 따질 것이었다. 이러한 구조적인데 있어 공통의식으로써 두 주의의 진영을 합치고 분리시키었던 것이 곧 민족적 자립, ‘좌익적인 민족해방’즉 ‘독립’의식이었지만 이 민족적 공통의식은 식민지적인 현실에서 실천적인 노선은 사회인식의 방법적인 차이에서 먼저 분리될 수 있으니 민족주의 진영은 복고적인 민족의식의 선에서 1)망명적인 대종교의 운동으로 2)민족과 문화 국토 인식을 역사적으로 추구하는 민족사의 구성 3) 유교주의적 척사론에 있어서의 명분론적 민족의식의 고수를 통한 일제에의 항거정신으로 모두 민족의식의 고취에 향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보다 민족자체의 실천적 방향을 지시하는 4) 훈계적인 민족론의 제시는 이 진영의 사상적인 것으로는 주시할 바이었고 이러한 정신의 확대로써 ‘경제생활의 향상’을 전체적으로 추진하려던 5) ‘물산장려’운동을 대조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이 민족적인 자립-독립을 지향하는 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항거하는 행동이 요청되었다. 이것만은 끝까지 파괴적 테러리즘에서 기대할 수 있었으니 이 테러리즘의 정신은 민족의식을 최후까지 보장한데서 식민지시대 우리 사상사의 일면의 광휘였다. 여기서 민족진영의 테러리스트의 정신은 우리 사상사에서 역사적인 사실로써 재인식 재평가될 것이다. 물론 자체 사히내의 테러리즘과의 구분은 또한 엄하고 혹독해야 할 것이다.


맑시즘의 수용에 있어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인식은 식민지시대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판정신과 전투적 정신을 부여하였다. 일제 식민정신에 따른 민족경제의 파괴와 농민의 궁핍화 소작인으로 전락 이농(離農) 남북만주와 일본에의 이주 또는 화전민으로의 유랑, 저임금노동자의 점증, 이농자의 도시집중화, 도시무산자의 확대 등에서 오는 일제와의 민족적인 갈등을 계급적인 투쟁으로 전환확대하는데서 농민, 노동운동의 전개를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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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사회적인 기반에 생성된 지식인들은 중국 소비에트를 통하여 수용한 바도 있었지만 동시기의 일본의 교육, 메스콤을 통하여 근대적인 제사상 내지 공산주의 이념을 흡수하여 두 주의의 진영에 참가하였으나 의식적으로는 후자에의 가담을 증대시켰으며 문화적(문학 음악 연극 영화 미술)인 데에서는 보다 동반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역사적인 조건하에서 식민지문화의 정신적인 기틀에서 민족주의적인 것은 정치적으로의 저항의식으로 주제화되었으나 사상적으로 걸러지지 못한 채 민족의식에의 계몽적인데 흐르며 여기에 이르지 못한 것은 전통적 혹은 복고적으로 쇠퇴적인데서 오는 센티멘털리즘으로 흘렀다. 이 민족적 센티는 공산주의 진영의 문화운동에서도 떨쳐내지 못한 시대적으로 공감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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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맑스주의가 파시즘에 휩쓸릴 때 한국에서도 그 기풍 속에 휩쓸렸고 일체 민족적인 것이 부정-말소될 때 정치 또는 문화적인데서의 사상 행동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휩쓸리려 자체의 의식기반에서 탈거하느냐?에 있어 타협적인 정신의 탈락 배반과 함께 이 사회는 사상적으로 질식상태에 놓였었다. 물론 공산주의의 행동면이나 문화적 제운동도 운명을 함께 하였으며 파시즘 치하의 일본의사상적인 모색은 함께 식민지에도 작용하였으나 사회적 성숙조건이 다른데서 감도가 약하였고 또 은폐된 민족해방이란 목적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에서 국부적으로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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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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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이후의 한국사회의 추이에서 볼 때 외래적인 사상이 이식되어 그 자체가 성숙될 기반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동시기의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할 체계적인 수용-이해에 있어 곧 ‘한국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윤리적인 사상체계로 내밀려지나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새로운 사상으로 구조화되지 못하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성격을 분절 포착해야 할 것이 보다 큰 과제로써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방법적으로 일반론의 수용과 함께 여상(如上)의 사상사적 특질에서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의 확립-전개 소위 근대화과정에 있어서 유교주의의 전변과 서구의 근대사상 식민지시대에 있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공통된 의식으로 지녀졌던 민족적 의식 등이 신조적으로 보다 역사적 사실로써 비판되는데에 현재적인 한국사회사상사의 현성과 인식이 가능하지 않은가 한다.


201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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