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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吏曹)에서 아뢰었다. 일전 각 도에서 천거한 효자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자'를 몰라서[不解文字] 맡은 일을 감당하지 못할 자가 많으니, 효행(孝行)만을 취하고 재주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서 모두 동반의 벼슬을 내리면, 반드시 관직을 버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 빈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여러 해 동안 채용하지 못한다면, 권장하는 뜻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이들을 서울로 보내게 하고 몸가짐과 말하는 것을 동반·서반에서 관찰하게 하여 그 재주와 기량[才器]에 따라 채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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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45권, 성종 5년 7월 23일 병자 5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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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유학의 유행 이후, 유학자-관료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관념을 "(선한)본성으로부터 지식과 능력 등이 연역될 수 있다" 쯤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개인 차원의 도덕을, 직무에 필요한 능력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 태도"가 강화된 것이 그 이후 나타난 현상이라 설명하는 것은 그리 낯선 설명방식이 아니다.
한국사를 기준으로 할 때, 고려 말부터 '경전에 밝고 덕행을 닦은 선비[經明行修之士]'가 정치가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그와 연결된 설명이다. 다시말해 품행이 충분히 '유학자답다'는 것을 해당 시기의 가이드라인에 맞게 납득시킬수만 있다면, 실무 능력은 차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대강 여말선초를 거쳐 발생했다는 것이다.
[* 단서 : 이와 같은 설명은, 신유학 도입 이전의 고려 인사제도가 실용적-능력주의를 중심으로 한 '공정한' 시스템이었으리라는 기대를 종종 야기하곤 하고.. 이따금은 그 분야 종사자들조차도 그 기대를 방조하게 되는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사료가 야기한 착시'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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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인용된 성종 5년 이조의 계문(啓文)에서 잘 보여주듯, 그러한 '믿음이 나타나기 시작한'것과, '정말로 그런 믿음만으로도 일이 돌아갔다'는 것은 완벽히 다른 문제다. 아무리 전근대 국가의 운영이라는게 매사가 주먹구구 식이라고 해도, 그리고 온갖 난해한 행정이 서리-향리 등에게 떠맡겨진 상태였다고 해도, 정말로 '능력'그 자체를 도외시한 채 돌아갈만큼 관료의 일이라는게 만만한 것일 리가 없다.
해당 자료를 통해 파악컨대, 지방에서 효자라는 이름만으로 뽑혀나온 이들에게 빈발했던 문제는 '문자'를 몰랐다는[不解文字]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자文字'란, 비슷한 시기 용례상 ⓐ'한문' 내지 ⓑ'한문으로 쓰여진 공문서' 쯤을 뜻하는데, 맥락상 후자에 가까워보이긴 하지만 단정짓기는 어렵다. 어쨌든간에, 관료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의 인물을 효행 하나만 보고 뽑았다가 난감한 일이 생겨난 경우가 많긴 하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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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제도를 운영해야하는 효율성의 강제력은 생각보다 강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식으로 주는 벼슬이래도 결국엔 시작은 참봉 역할에 그친다. 어찌보면 '효자로서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전문성의 효용을 추구해야 한다는 마땅한 강제력과, 덕행이 있는 이를 뽑아야 한다는 입장 간의 긴장은, 성종대 여러 차례에 걸쳐 발견된다. 사천 출신의 효자 최소하는 참봉 생활 하다가 경연관에 천거되는 사안으로 잡음이 있었고(성종 6/2/15),
청주 출신 효자 경연(慶延) 같은 경우엔 효행으로 알려져 참봉으로 생활하다가 그 참봉 생활마저 모친상을 이유로 사직한 것으로 유명해져, 성종이 친히 만나서 면접(?)을 통해 벼슬을 내리기도 한다.(성종 7/6/12. 이 때의 그 '면접'에서 경연이 준비한 멘트가, 너무 '준비된 대답'이라서 보다보면 좀 황당하게 보일 정도다.) 경연은 결국 이산 현감까지 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케이스는 많을래야 많아지기가 힘들다. 앞서 사천 출신 최소하 건에 대한 동부승지 이경동이, "효행은 잘 모르겠지만, 일처리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孝行則未可知也, 治事固無異於人者]"(성종 9/4/16)고 시큰둥하게 대꾸한 상황은 당연히 발생한다. 그 이후로, 경연, 최소하 같은 사례는 두고두고 '효자를 천거한 선례'로 몇 번 거론되고, 이후로 16세기에도 여러 차례 다시 '효자 천거'를 활성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지만, (적어도 내가 살펴본 바로는) 그 이후로는 '효자라는 이유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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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말 시니컬한 결론에 빠지는게 능사인 것인가. 펑퍼짐하게 본다면, 어쨌거나, 효자를 천거하라는 명령은 고려 초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고, 그조차 15세기 즈음에 좀 하다가 말아버리는 일이니, 모든게 다 거기서 거기인 듯도 싶다. 미시적인 역학에 집중하다보면, 결국 (사상/제도 따위로 설명되는) '거시적 추세'라는건 단순한 수식어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운영 차원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앞의 형세적인 역학-타산이며, 그 외에는 모두가 다 일종의 기만 쯤으로 보기가 쉽다는 뜻이다.
.'도덕적인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채용의 기준'으로 작동되기에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부도덕한 인간이 자리를 부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치 못한 귀결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쟁/탄핵의 논리로 사용되는 것'이 고려 말~조선시기 신유학자들의 목표였을까? 아마 아닐 확률이 클 것이다. 다만 성공/실패, 진보/퇴보에 대한 경직된 판단을 좀 미뤄두고 생각하면, 거시적 변화는 '예기치 못한 귀결'의 형태로 설명될 때 더 의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기도 한다. 세상사라는게, 진퇴로 단순화되기엔 복잡한 것이지만, 무작정 말초적/미시적인 복잡성으로 빠져드는 것이 꼭 해답인 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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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력'내지 '효율'을 정의내리는 건 생각보다는 복잡한 문제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사실 우리가 '신유학적'이라고 말하는 도덕주의 등 원칙도, 당시 신유학자들의 판단에서는 현실 정치에 도움이 되는 '효율적 정책'으로 파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어디까지나 편의상 직무 수행 능력과 직결되는 부분을 효율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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