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누군가 '유교구신론' 풀어쓴 본이 없느냐고 물어봐서 찾아보다가 못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냥 한가한 소일삼아 중간에 자세한 이야기 빼고는 (상당히 형편없이) 의역...도 아니고 그냥 국한문 혼용인 걸 풀어다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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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및 줄 바꿈은 내가 임의로 한 것)

유교 구신론

겸곡생(박은식)

무릇 우리 동양 수천년 교화계에 중정 순수하고 광대·정미해 여러 성인이 전수하고 군현이 밝음을 강하던 유교가 끝내 인도의 불교와 서양의 기독교와 같이 세계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근세에 이르러 은미함에 빠져 떨쳐내지 못함이 극도에 달해 거듭 오는 희망이 위태롭게 없는 것은 또한 어째서인가.

나는 대한 유교계의 한 분자이다. 나의 조선과 내 평생이 공자의 은사를 받음이 막대한데, 오늘날 공자의 교가 하루하루 나아감이 암담하고 하루하루 위태로운 두려움을 얻어가는 경황을 맞닥뜨려 올바르고 늠름하지 못할까 그게 두렵다. 실로 두려워 진땀이 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거슬러 생각하여 마지막 종류를 추측해 보니 유교계에 삼대 문제가 있었다. 그 삼대 문제에 나아가 개량하여 새로운 것을 구함을 하지 않으면 위 유교는 흥기함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끝에 달하여 멸절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유교를 없애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해 개량하여 새로운 것을 구할 호걸 지사가 나타날 것이겠지만, 우리 재한 세계에 있어서 유림의 현황을 관찰한다면 이 개량하고 새로운 것을 구할 식견과 정신력을 지닌 자를 잠시 보지를 못했다. 오호라, 아픔이 사방에 심하고 미친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스스로의 힘을 마땅히 일으켜야 하는 것이라 차라리 그 여러 선배에게 죄를 얻어 유림파의 분노를 얻을 지언정 우리 공자의 도가 끝이 나 땅에 떨어지는 것은 볼 수가 없을 따름이다. 이에 따라 감히 오류를 무릅쓰고 삼대 문제를 들어 개량하고 새로운 것을 구하는 의견을 나타내고자 한다.

소위 3대문제란 무엇인가.

하나는 유교파의 정신이 모조리 제왕측에 있어,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함이고, 

또 하나는 여러 나라를 돌면서 천하를 바꿀 것을 염두에 둔 주의를 익히지는 않고서 ‘내가 몽매한 자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매한 자가 나에게 구하는 것이다’(주역 蒙卦第四 중) 하는 주의를 지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한반도의 유가에서 간략하고 쉽고 바르고 적절한 법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지루하고 끝도 없는 공부를 오로지 숭상한 것이다.

....

(중략.. 저 3대문제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들..)
.. 

그런즉 오늘날의 유학자가 각종 과학 외에 본령학문을 구하고자 한다면 양명학에 종사하는 것이 실로 간단한 법문일 것이다. 대개 치양지의 학문은 정확히 본심을 지목하여 모든 것을 초월해 성인에 들어가는 문로이고, 지행합일은 心術의 은미함에 성찰하는 방법이 긴요하게 떨어지고, 사물 응용에 과단성이 활발하니 이는 양명학파의 기질과 사업상 특별한 저술을 지은 공로가 실로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아! 후배의 천한 식견으로 어찌 주자학 양명학에 대해 굳이 말해서 학계상 일대 문제를 일으키겠냐마는 장래 후진 학계를 관찰하건대 간단하고 곧바르게 떨어지는 법문이 없고나서는 공맹의 학문에 종사할 자가 아마도 드물어지게 된다면 대저 공맹 문도의 하나인 주자학 양명학을 어떻게 버리고 택하기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공맹의 도로 하여금 그 전승을 잃지 않고자 한다면 부득이 간단하고 곧바로 떨어지는 법문으로 후진을 가르킴이 올바른 것이다.

아아! 이상 3대문제에 대해 다소 어리석은 식견을 감히 내놓은 것이 실로 새로운 의견도 아니고, 다 경전 안에 있는 빛나는 보석인 것이다. 다른이가 구해주기를 기다릴 것 없이, 다만 그 종장의 잃어버린 바를 구원하여 본면목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니 오늘날의 군자들은 부디 성내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었으면 한다. 

대개 과거 19세기와 오늘날 20세기는 서양문명이 대발달한 시기고, 장래 21세기는 동양문명이 대발달할 시기니(글쎄...;;;;) 우리 공자의 도가 어찌 땅에 떨어져 끝나겠는가. 장차 전세계에 그 광휘를 크게 빛낼 때가 있을 것이니 아아, 우리 한반도 유림이여 밝은 안목으로 관찰하고 몸을 떨쳐서 책임을 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 서양 교계로 보아도 로마 구교 시대는 유럽의 어두운 천지였다. 만일 마르틴 루터의 대담함과 열혈로 개량하고 새로움을 구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해와 달이 지금까지 어두운 중에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운에서 종교까지 그 관계가 과연 무엇과 같겠는가. 

우리 한반도 유자의 맺어진 습관이 개량이라고 한다면 뭔가 크게 바뀌는 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천하 만물이 대소를 막론하고 오래면 반드시 낡고, 낡으면 마땅히 고쳐야 하는 것이니 만약 낡아도 고치지 않으면 끝내 사라지고 말 따름인 것이다. 가히 막연히 새로움을 구한다고 하면 특이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新자 한자는 우리의 고유한 광명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오랜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안다’(溫故而知新) 이라고 했고, 장자가 말하길 ‘지나간 옛 생각을 씻어내어 새 뜻이 찾아든다’(濯去舊見 以來新意)고 하였으니 도덕은 나날이 새로워져 빛이 빛나고, 나라의 운명은 오로지 새로워져 거듭 길어지는 것이니 새로움을 구하는 뜻이 외래에서 온 것이 아닌 것이다. 

아, 우리 유림 제군들이여...

(서북학회월보 제 10호, 1909년 3월 1일)

201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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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매양 창[戈]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引接)하여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하였다.
더욱이 진덕수(眞德秀) 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중. (귀찮아서 원문대조 및 번역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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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새 정도전 방영분에서 대학연의 관련 운운이 나오는 건 이 기사 때문이다. (고려사에서는 이성계와 대학연의와의 관계가 언급되지 않는다.) 

명색이 왕조실록 총서에서 나온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태조 이성계의 이후 행적이나, 실제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진강시킨 여러 사례들을 미루어 볼 때 그 본인이 대학연의에 대한 흥미를 유지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것은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는 대목인데, 이 부분이 건국을 성취한 뒤에 편하게 재생산한 내용(즉 '우리 태조는 처음부터 남달랐다능!!'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낸 말)인건지, 아니면 실제로 대학연의 읽으면서 딴 생각을 먹었다는 말인지가 혼란이라는 것이다.

물론 후자에 따른다고 해도 드라마식대로 '범인이 읽어선 안 될 제왕학의 교과서'인양 그것을 읽었다는 이유로 조정의 일약 스캔들이 벌어지고 어쩌고 하는 건 약간 무리수나 오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사실 그 자체'로는 아주 없는 말 만든 것은 아니다. 

여하간 정도전 드라마가 이럭저럭 좀 무리수를 두면서도 꽤 참신하게 뭘 짜내고 있다는 방증은 되는 듯.



201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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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壁水光陰記少年
벽수(성균관) 시절이던 소년기를 기억하니

八齋環列誦聲連
팔재에 둘러 앉아 성독 소리가 이어졌다네

升堂㝡怕抽籤講
당에 올라선 제비 뽑아 강독하기가 가장 두려웠으니

爲是音訛意莫傳
말이 와전되어 뜻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當時諸子摠眞儒
당시의 제자들은 참 유자가 모였으니

說到精微肯囁嚅
정미한 곳 설파하는데 어찌 머뭇거리겠냐만

獨有牧翁長閉口
홀로 목은 늙은이만 입을 길게 닫고서

中堂兀坐似枯株。
중당에 마른나무 등걸처럼 앉아 있었다네.

..(후략)

목은시고, 19권 有懷成均館('성균관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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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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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나라 사람 이덕무의 아내 배숙영은 안읍공 배구(裵矩)의 딸.

2) 남편 이덕무와 결혼한지 1년 만에 이덕무 귀양.

3) 귀양가려 하자 친정아버지 배구, 이혼을 요청함. 남편 이덕무는 수긍.

4) 하지만 배숙영, 친정아버지-남편의 이혼 요청에 불응하고 귀를 잘라 정절을 맹세하겠노라 엄포.(...) 주변인의 제지로 미수에 그침.

5) 남편 귀양중 (전한 유향의) '열녀전'을 읽고 내린 배씨의 평.
"두번 시집을 안 가는 건 부인으로서 떳떳한 일인데, 무엇이 특이하길래 책에 싣고 그래".. (....)

6) 10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배구, 한사코 시집을 보내려 함. 딸 숙영, 머리칼을 자르고 단식투쟁에 돌입. 결국 2차 개가시도 실패.

7) 한편 귀양간 이덕무는 귀양지에서 새 장가를 듦.(?!),. 그렇게 살다가 사면되어 오는 길에 중간에 배씨를 만났는데, 배씨가 재가를 안한 것을 보고는 후처를 내보내고(...) 처음처럼 재결합.

8)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쿵짝쿵짝
"
.
(출처 "구당서", "신당서" 열녀전; "삼강행실열녀도" 재수록)
.
.
아... 대단한 미담이다..


감상포인트

a) 한사코, 정말 한사코 재가를 안하겠다고 버티는 배숙영.

b) 그 와중에, 재가하라고 했으니 책임 덜었다고 생각했는지(..) 귀양지에서 재혼한 이덕무

c) 재가 안한 배숙영에게 감동먹은 이덕무한테 뜬금없이 버림받은 후처.



201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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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21345141&code=910100

요사이 김진태의 황희 발언으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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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정치사 분야에 빠삭한 것은 아니다. 특히 누가누가 무슨 말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고.. 류의 디테일에 꽤 취약한 편이다. (물론 자랑 아님) 그 까닭에 그리 자신있는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세종시대를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소략하게나마 정리를 해 볼만도 한 것 같아서 번잡한 부기를 붙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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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입장만 요약하면

김진태 이르기를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간통도 하고 무슨 참 온갖 부정청탁에 뇌물에 이런 일이 많았다는 건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이분을 다 감싸고 해서 명재상을 만들었다” 하였고,

대종회 이르기를

“황희 정승에 대한 갖가지 의혹이 실록에 나와 있긴 하지만 그 기록 자체의 신뢰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다 한문 번역상의 문제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실제 황희 정승과 관련된 부분이 편찬되던 당시에도 다른 사관들 사이에서 ‘금시초문인 주장이 포함됐다’는 비판이 있었을 정도”라 하였다.
(대종회의 입장은 http://www.nocutnews.co.kr/news/4403589 에 꽤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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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관계부터 확실히 해 두자. 황희가 공직자로서 부패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뇌물 수수 문제부터나, 친지 사면에 대한 부정 청탁, 등 비리 사건에 연루된 문제에 관한 사안은 실록 기록에 이미 등장해 있고, 실제로 그 문제로 파면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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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종회의 주장 대로)그에 따른 실록 기록의 신뢰성 문제도 짚을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황희의 부패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쓰여진 기록 (세종/10/6/25) 에서는 황희의 별명이 "황금대사헌"이라는 것, 박포의 아내와 간통 하였다는 것, 매관매직으로 축부를 하였다는 것, 등의 황희에 대한 추문 기록이 다른 실록 기록과도 눈에 띄게 대조될만큼 좀 과하게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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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단종 즉위년 세종실록 편찬당시(단종/즉위년/7/4)에도 사초의 신뢰도 문제가 불거져, 그 진위 여부에 대한 회의론이 부각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정인지, 정창손, 황보인, 김종서 등이 모두가 황희의 추문을 '전혀 모르던 일'이었노라 증언하고 있으며, 오히려 해당 사초를 작성한 사관 이호문의 사적인 행실을 탓하고 있는 현상또한 보이고 있다. 결국 사관의 기록을 수정할 수 없다는 근본 원칙에 의거하여 실록에 실린 경황일 뿐, 그 추문 전체의 정확한 진위 여부는 당대인들도 신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황희의 추문 기록 또한 어느정도의 과장이라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은 (대종회 입장처럼 '조작'까지 운운하기엔 성급하지만) 일단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다만, 일단 그 풍문 그 자체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설령 간통-승려와의 결탁-등이 모두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앞서 말한 친지 사면 청탁과 뇌물 수수 여부는 분명히 존재하던 것이고 이는 실록 여부와 무관히 황희가 가진 공직자로서의 결점이 되고 있었던 것은 그와 별도의 사실이다. 황희가 사망한 뒤 쓰여진 졸기(문종/2/2/8)에,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 비난을 샀다"고 한 바는 일단 나름의 공론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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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김진태의 말은 어느정도는 타당하다. 여기서 타당하다는 말은 "황희가 부패 재상이다"는 명제 뿐만이 아니라, 세종이 그를 명 재상으로 만들었다는 대목까지 포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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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김진태의 발언을 '(당시 조정의 파면 분위기를 읽지 못한) 반쪽짜리 역사지식'이라고 평한 것(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은 디테일한 부분들로 그 결점을 메우고 있음에도 그 골간 자체로는 찬성하기 힘들다. 황희와 관련한 사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실제로 황희가 부패 재상으로서 파면을 당했냐 안 했냐의 그 파면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초 그 사건이 터질 때부터 스스로 사직하겠다고 자처한 황희가 그렇게 파면된 이후 머잖아 복직해 (이미 꽤 알려진 바와 같이), 수없는 사직 요청에도 조정에 남아 정승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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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와 같은 세종의 황희에 대한 중용은 '조정 분위기'에 반한 세종의 권력 농단인가. 이 또한 그리 간단히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황희의 정치가-행정가로서의 관록은 이후 황희의 부정에 대해 충분히 참작한 문종대 사관들에게도 모두 공통된 동의를 얻을 만큼 발군으로 평가받았으며, 굳이 '조정 분위기'라는 것을 꼭 집어내야 한다면 황희의 능력에 대한 인정 또한 (앞서 말한 뇌물 수수건과는 별도의) 또 다른 한 '분위기'로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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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황희의 복직이 세종의 황희에 대한 특별 대우 때문이든, 그만한 행정능력-정치력을 갖춘 인재가 절실했던 세종의 판단이든 간에, 황희의 부패 여부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세종이 중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하다. 황희에게 '명재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바를 동의한다고 한다면 그 '명재상'의 역할 수행에는 황희를 관직에 남긴 세종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그 의미에서는 김진태의 말은 '타당한 해석'인 것은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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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오히려 이 사안에서 문제를 삼을 대목은, 김진태의 황희에 대한 파악이나, 그 파악된 황희에 대한 상이 기록상 얼마나 타당한지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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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황희에 대한 '역사 수용으로서의 상 도출'의 문제다. 김진태의 문제는 황희의 공직 생활을 포함한 일생 전반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리고 그 황희를 중용한 세종의 정치 운영론을 비추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역사적 평가가 고작 황희=부패 재상, 세종=부패 재상의 옹호자로 그쳐도 괜찮은가 하는 해석론의 문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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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하였듯, 황희가 부패하였던 것은 황희의 정치인생 평가에 있어 한 축을 이루고 사실임이 분명하지만, 황희의 부패 자체가 황희의 명재상으로서의 활동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황희는 부패 재상임에도 유능한 측면이 있던 것이지, 부패 재상이기 때문에 유능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세종의 황희 감싸기 또한 부패에 대한 옹호론을 위한 감싸기라고 말한 적 없다, 세종은 황희를 '부패했음에도 중용'한 것. 그 이상 아무것도 기록은 말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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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 부분'에 대해 김진태든, 여타 이 사안을 이해하는 누구든,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로 해석을 내리고 그에 따라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세종대를 '타당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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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예를 든다면 '황희의 부패에 대한 견제와 능력에 대한 용인을 별도로 했다'라고 세종의 입장을 명확히 하든지, '업적과는 별도로, 사적인 문제에 연연한 세종과 황희'라고 반면교사를 삼는 방향을 삼든지, 체제정립기 혼란통에 '다른 누구도 아닌 황희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의 시급함을 설명하든지, 아니면 김진태처럼 '부패도 덮어주고, 명재상으로 만든 세종 대왕'을 그려내든지. 어느쪽이든 '타당성'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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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에서 김진태가 세종대왕의 '다 감싸고 감'이 마치 황희의 부패에 대한 적당한 용인을 행한 것인양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황희-세종에 대한 실상 복원의 타당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김진태가 '읽고 싶었던 기준',즉 역사 해석 주체로서의 김진태가 가진 '정치적 윤리관'에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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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실제 황희가 어떤 사람이었고, 세종이 어떤 사람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부패정치인-중용이라는 단편적 서사를 '부패에 대한 용인'과 '사소한 과오에 대한 덮어줌'으로 읽어낸, 김진태의 정치적 부패에 대한 기본 심상이 관건이라는 뜻이다. 해당 사안을 소화하는 방법에서, 그 문제를 의미부여하는 방향성에서 김진태의 윤리관이 개입되었던 것이 포인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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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란 어떤거다. 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할 깜냥은 안 되지만, 하면 할 수록 느끼는 것 몇몇 중에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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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은 시절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대한 감상적 서사나, 혹은 결벽의 뒷면에 담겨진 추악한 일면이라는 꽤 자극적인 서사는 굉장히 낭만적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어떤 시점이든 큰 틀에서는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결국 사람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추악한 모순은 안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래도 꽤 돌아가는 그럴듯함을 안고 있는, 낭만의 대상이 아닌 '삶'의 범주에서는 무심할만큼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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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을 증명해 내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말하기 쉽지만, 저널리즘의 격언 처럼, '사건'의 디테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흐름'에서 정돈해 내는가, 그 흐름을 이끌어낼 관점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주목할 관건은, 과연 그 상황을 움직인 중심원리가 무엇이며, 나아가 그 과거 사건들을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소화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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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에서 '청백리 황희'나, '명군 세종'의 상의 가부가 갑론을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실증적 과정으로는 타당할 지 모르나, (좀 더 솔직히, 세종대가 한번 더 언급된다는 면에서는 퍽 반가운 일일지도 모르나), '역사학적'으로는 더 바람직한 방향이 모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세종대를 생각해 볼 의미'는, 위대한 임금 세종-청백리 황희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숭배와, 황희의 부패와 세종의 문제점이라는 '숨겨진 사실'에 대한 자극적인 소비를 위한 디테일 보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읽기 위해, 세종대의 어떤 부분을 곱씹어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단초'로서 기능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역사학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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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 권근(1352∼1409)은 여러모로 굉장한 사람인데.. 고려말 정도전 반대편에 붙은 주제에 적당히 잘 잠수타다가 조선으로 홀랑 잘 환승했던 이야기야 유명하지만, 
그거 말고도 건국 후 태조 이성계한테 자기가 자기 입으로 (대놓고 직접적으로!) 자기 공신시켜달라고, 남들이 시키지도 않은 자기 일대기를 (무려 스스로!) 정리해 장편의 진정서를 좔좔 써다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
그러다 태종 즉위하고 나서는, 자기가 공신이니까 (살아있는) 자기 부모한테까지 공신 봉작 달라고, 자기가 공신인데 자기 부모가 아무것도 아니라서 넘나 송구하다며, 연세가 여든이나 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받을 만 하지 않느냐며.. 또다시 진정서를 올리는 대단한 철판의 소유자... 정말이지 놀라운 사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잘 배운놈의 뻔뻔함!"


1) "부처를 존숭하고 절을 세우면,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감응되지 않는 것이 없어, 널리 인간 세계를 복되게 하여 부요해지고 유익하게 하기를 한이 없이 한다는 부처의 말이, 어찌 신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
2) "사람들이 부처에 현혹됨이 생사에 관한 말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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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글의 텀이 1년도 안 되는 것이 또 우리 양촌선생의 대단하심!!!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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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암 송시열이랑, 백호 윤휴에 꽂혀서, 관련 사료(연보나 행장같은걸 중심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인데, 그 안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 둘의 '인간적인 성격 차이'가 꽤나 흥미로운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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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시열은 보통 '굽힐 줄을 모르는 꽉막힘의 대명사'로 흔히들 불리고 있고, 그 본인의 학문,정치적 스탠스부터도 실제로 그러했지만, 적어도 '대인 관계적인 차원'에 한정하자면 (설령 비정치적인 영역이라 할지라도) 꽤나 체면치레, 즉 마음에도 없는 예의상 하는 소리를 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애당초 자기 학문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던 그였음에도, 백호를 처음 만난 3일 이후에 '그와 함께 학문을 3일간 논해보니 지금껏 30년 독서한 게 가소로운 것이었다' 며 유난을 떤 것은 그런 태도를 대표하는 말이었다..

아울러 백호와 한번 등을 지게 되었던 이후에도 인사결정권자로서 추천받은 백호의 관직 임용을 딱히 막지도 않았다. 그는 추천받은 백호를 단 한번, '단번에 너무높은 자리를 제수받는 것은 이르다'면서 말렸을 뿐, 그 이후에는 (이단설이란 이유로 사단이 날 수 있다며 주변인들이 꽤나 말렸지만) 오히려 육상산을 추천한 주자의 예를 들먹이며 그 추천을 독려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20대부터 정통주자학적 저술에서 멀어진 백호가 한-참 아니꼬왔고 그걸 걸고 넘여졌던 적도 있었던 그의 전력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주류'로서의 자신감, 학자적인 당당함 같은 것을 오히려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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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휴는 하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딱딱하고 일견 거칠만큼 꾸밈없었고, 자신이 가진 신념에 어쩌면 우암 이상으로 충실했지만, 오히려 세상물정 모르는 거 아닌가 싶을만큼 주위를 살필 줄 모르는 (일견 경솔한) 성격이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키는 타입이었다. 우암 일파가 남긴 조작의 혐의를 감안한다고 해도 (물론 농담 반이었겠지만) 언젠가 '내가 학문에 대해 세운 공은 우암 못지 않다'는 말을 하다가 우암 일파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후 두고두고 그 말로 꼬투리가 잡혔던 것은 그 태도를 대표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윤휴 인생의 굴곡의 원인은 송시열 때문이 맞는 것이겠지만 , 실은 적어도 우리가 아는 '그정도의 고생'까지하게 된 것은 사실 그의 순진한 태도가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인생에서 꾸준히 소위 '폭풍의 핵'이 되었던 유학관련 저술들도 일단 그 의도만 놓고 본다면 '젊은시절 의심나는 것들을 메모해놓은 독서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교우들과 나누겠답시고'.. 심지어 그 송시열마저도 포함한 이들과 그 의도에 대해 충분한 설득 없이 초장부터 공유해 버림으로서 급작스레 갈등양상부터 만들어버렸고 문제를 키워버렸다. 숫제 학자로 제대로 데뷔하자마자 공격부터 당하는 꼴을 겪어야 했고, 당시 중요한 문인들한테 말마따나 '초장부터 찍히게'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윤휴 본인은 적어도 예송논쟁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러한 우암 계통의 충격적인 대응이 '설득'으로 해결될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윤휴는 우암의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학문에 대한 의문없는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오히려 학문 이해를 저해한다'며 정말로 '순수한 학문관'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는 당시 백호의 학문에 대한 우암의 '이단론'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증오의 색이 짙은지, 그리고 그러한 증오에 (정치적인 이유까지 포함해서) 동조하고 때로는 더 불태운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고려하지 못한 순진한 표현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가 봐도 맞는 말이듯) '올바른 생각'이라는 자신감, 아울러 당시 미수 허목, 미촌 윤선거 등의 '소수 동조자'들의 동조에 힘입어 이 문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킬지 (적어도 저술 및 초기 토론기까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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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러한 '각자의 성향'은 그 둘의 성향과 행동을 드러내주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다만 이들의 개성만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오묘한 균형(혹은 불균형)적인 관계는, 이후 완전히 앞뒤 안가린 증오관계로 무너져버린다. 이른바 국가 정체성규모의 정치 갈등, '예송 논쟁'으로 비화되면서 더 이상 "적당한 불편함" 정도로 그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201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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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신이 승지로 있을 때에 폐비에 대한 사건을 언문으로 써서 내렸기에, 신이 아뢰기를, ‘만약 언문만으로 된 것으로는 만세 뒤에 누가 이러한 큰 일 때문에 폐비된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후세에 작은 일을 가지고도 함부로 폐비하는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번역하여 쓰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이 내관 안중경(安仲敬)과 함께 번역하여 아뢰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성종실록 13년 8월 11일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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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안 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이 언문(諺文) 사간을 올렸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번역하여 아뢰었다

성종실록 16년 5월 29일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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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양 대비전의 언문 한 장을 내려서 승지로 하여금 번역(飜譯)하여 이를 보이게 하고는, 이로 논의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23년 11월 21일 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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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 언문편지를 중심으로 한 폐비사건이 터진 그 전후로, 유독 '언문의 한문번역' 이야기가 꽤 흔해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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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여기서는 몇 가지 생각들이 동시에 겹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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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문 쓰기가 더 편한 집단들이 출현했다. 사대부 및 왕실 개개인 모두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쉽게쉽게 언문으로 글을 먼저 쓰는 사람들은 분명히 등장한 것은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따지고보면 세종 사후 40년, 20년을 한 세대로 치면 2세대만의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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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문으로 쓰여진 것은 최소한 성종대에는 대체로 공석에서 그대로 읽히지 못했다. (가)사료로 인해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이때 그것이 정해졌는지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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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시에 조정 레벨의 사대부 국왕 (여하간 남자) 중에 언문맹 즉 한문은 아는데 한글은 모르는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을 해 보긴 했다. 근데 이건 자신있게 할 소리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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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르긴 몰라도 (가) 에서 정말 중요한 건, 당시 조선사람들은 언문을 천년만년 보전될 글자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문자의 양대 성질인 메시지 전달과 보존의 양대 성질 중 후자의 의미를 외면했거나 굉장히 가볍게 봤다는 뜻이다.

한문(정확히는 문법체계로서의 고문 한문)이 전근대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는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만세불변의 전통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언문의 위치는 한문 아래 백화, 이두의 가벼움 보다도 더 이하. 즉 '역사'가 되지 못할 '전달용 매체'정도의 의미였던 것이다.

의외로 국문과 국어/국문사 연구에서 한글의 계층성만을 주목하고 이 점(한글의 텍스트상 무게에 대한 문제) 을 별로 주목하지 않던데, 파고들면 재미난 주제일지도.


5) (가)를 언급한 승지 채수蔡壽는 나중에 (가) 시점으로부터 30년 쯤 뒤, 관직에서 물러나 걸출한 판타지소설 "설공찬전"을 짓는데, 그 소설은 비록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채수 생전에 언문으로 번역되어 널리 널리 퍼져 조정의 금서로 올라서 몰수되고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6) 채수의 앞으로의 인생 궤적은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가)시점에서 채수가 한 말은 지금 시점으로서는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의 우리가 당시 한문을 해석하는 것도 뭐 쉬운 일이라 여유부릴 건 아니지만, 중세 순한글을 판독-해석하는 쪽은 그 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 병기 안 해주면 '절대로'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말들 투성이.. 한문 해석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전문성을 요하게 되는 것이다,


201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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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02157175&code=9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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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쭉 보면서 생각이 맴돈,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옛날 이야기를 조금만 풀어 보도록 하자. 기사와는 (내 생각에는) 굉장히 상관있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딴길'로 흘렀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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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선 인용문 하나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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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지만,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지는 것이다...(중략)..그러나 저 불씨는 사람의 옳고 그름은 논하지도 않고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 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歸依)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道)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요, 공도(公道)가 아니니 징계해야 할 것이다.

 .

하물며 불교가 일어난 후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에 부처를 독실하게 섬긴 양무제나 당헌종 같은 이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한유가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할수록 연대(年代)는 더욱 단축되었다.” 고 말한 것이 꽤나 간절하고 뚜렷하지 않은가.

 "

-정도전, 불씨잡변, '불씨 화복의 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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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성리학이 종교인지 아닌지, 혹은 종교란 과연 무엇인지를 명료히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여말 성리학이 가진 종교사적인 작용을 이야기한다면, 고려시기까지 국가의 지원을 입던 '국가종교'였던 불교의 위치를 무너뜨리려 시도하였던 것이었다는 말 정도는 말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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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자연-인간의 근원에 관한 초합리적인 원리", 내지는 "사회윤리의 기능" 등에 대해 기존 불교가 행해왔던 설명 방법을 주희 나름의 방법으로 완전히 대체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불교가 가진 '종교적 역할'을 성리학으로 대체하고자 한 작용이라는 설명 또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리학의 종교성에 대한 정의나 성리학의 '본질' 논의와 상관없이, 적어도 불교가 가졌던 '종교적 기능'을 전면적으로 성리학의 논리로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은 분명한 것이고, 이에 따라 적어도 조선 사회는 (설령 종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리학을 일종의 '국교에 준하는 신념체계'로 모신 사회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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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빙빙 돌아갔다. 쉽게 말해 유불교체의 현상은 그 대체제인 성리학이 종교든 아니든 간에, 엄연한 '종교문제'인 측면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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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의 자연-윤리-인간관을 통할하는 이른바 종교 문제에 있어 '불교적 설명'과 '성리학적 설명'을 일일이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장황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 차이 중 우리가 흔히 이해할 만한 가장 도드라지는 성질은 다름아닌 성리학이 기복(祈福)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종교의 근본 매커니즘인 '신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과 내세를 구원해준다'는 레토릭을 성리학에서는 허황되고 그릇된 것으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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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안으로서 여말 성리학자(콕 집어 정도전)가 내밀고 싶었던 것은 다름아닌 기복의 결과물이 아닌, 일종의, 천도(天道)로 대표되는 어떤 우주적 원리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이신(理神)적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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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실제 설득력이 있는 것이지 유무와 상관없이, 적어도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여말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천도(天道)에 대한 믿음이 불교의 인과응보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것이라 믿었다. 요컨대 그들에게 있어 (기복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일소되어야 할 구습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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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많은 부분 종교에 있어 '도덕'은 신앙행위 그 자체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 현대 종교에서부터 '부도덕한' 교리를 믿는 종교는 소위 '사이비' 취급을 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말 성리학자에게 있어 '도덕'은 '자연'과 맞들어지는 것일지언정, 적어도 (초자연적 인격체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신앙'과는 분리되어야 할 가치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미 '신성'의 영역, '신앙'의 영역을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성리학은 이전에 등장한 종교와 비교해도, 나아가 이후의 종교와 비교해도 '비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성리학 그 자체의 사상적 시스템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보편적 종교의 특성'에 미루어보자면 한 걸음 동떨어진 것이 사실이었고, 그 대목에서 여말선초 척불론은 '종교 몰락론'의 측면또한 가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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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에 따라 전술한  천도(天道)의 자연관은 바로 그들에게 있어 앞서 말한 '신'을 대체할 자연관-윤리규범이었다. 천도 중심의 윤리관은 (적어도 그들이 생각한) 불교와 가장 많이 다른 핵심은 바로 성선설, 그리고 성선설로부터 출발한 어떤 동기를 중심으로 한 윤리론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적인 그것과는 근본적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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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들은 인간이 착한 본성을 타고난다고 믿은 맹자의 계율, 그리고 그것을 극히 부각시켜 자연의 범주로 격상시킨 주희의 역점에 따라 인간과 자연을 파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 '천도'란 현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올바름이자, 세계 그 자체가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질서 그 자체였다. 인간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선설'의 레토릭 그대로, 사람은 날때부터 '차마 어쩔 수 없는' 선함을 타고난다고 믿었고, 모든 선함은 그 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마무리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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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기복'의 종교행위를 설령 도덕과 연결되어 있든 없든 간에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착한일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 뿐, 그 반대로 복을 받기 위해 착한일을 하는 식의 윤리는 '결과를 위한 윤리'로서 사(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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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그들은 이러한 사적인 '결과'는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본성, '천도'라는 어떤 '마땅히 인간이라면-마땅히 하늘의 도리대로 가는 것이 맞다'는 식의 법칙적 당위성에 비하면 극히 지엽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올바른 일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에 결과, '보상'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무언가 오염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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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비종교적'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비종교적인' 측면 하에서 성리학의 자연관은 (이미 불교에서 선보인 바 있는) 인간 모두를 다루는 보편성은 물론이거니와, (적어도 고려말 불교에서는 그 만큼은 꼼꼼히 다루어지지 못한) 사회윤리의 문제까지를 통합하게 된 하나의 종합적인 가치체계를 완성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윤리/자연관/인간관을 모두 포함한) '종교'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적 기능'을 완전히 대체할 인간-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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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여말-나아가 선초 성리학자들의 편리한 기획만큼 모든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성리학자들의 기획은 '인간의 본성'을 믿은 만큼이나 '인간의 나약함'을 지나치게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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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복적인 경향은 그렇게 '본성-천도'에 호소한다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기복행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손쉽게 교육-훈도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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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통해 주희의 해석에 따른 꼼꼼하고 집요한 선언을 던진 것은 당대 그 이후의 학자들에게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 내어, 대규모의 불교 교단에 대한 탄압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불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성리학의 '척불' 기획이 녹록치 않았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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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공적 영역에서 불교에 대한 숭신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사라졌지만, 사생활의 영역에서 불교의 명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왕실의 후원을 등에 입은 결과였지만, 나아가 실제 왕조의 구성원들 개개인에게까지 불교의 역할이 사그러들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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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에서 '척불' 그 자체가 원리적으로 부정된 적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500년의 세월동안 '척불' 그 자체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500년 조선사가 숭유억불의 역사라면, 조선사 500년은 척불 실패의 500년"이라는 아이러니가 가히 사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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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의 기복적인 종교영역을 일소하고자 한 성리학의 기획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기실 성리학의 '원리'나 '지향'과는 별개로, 성리학 자체가 사회적으로 그 논리를 전파시키는 과정에서조차 (앞서 말한 매커니즘의 의미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성리학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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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전술한 바와 같이 '천도'로서 결과를 동떨어뜨린, 본성에 호소하는 자연-윤리관은 여말선초 성리학자들이 기대한 만큼 그리 모두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로는 믿는데 실제로는 다르게 말하는'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불교마저도 실제 철학적인 영역을 깊게 파고들면,'기복신앙'과는 엄연한 거리가 있다. 동아시아의 사상사를 조망할 때 가장 큰 역설은, 그 사상의 메시지와 전파가 때로는 반대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실제 전파과정에서는 불교 또한 불교적이지 못했고, 후술하겠지만 성리학 또한 성리학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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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론과 실천의 동떨어짐'을 설명하는 의외로 적당한 사례는 역설적이게도 '정표(旌表)'로 대표되는 그 사회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정표정책은 효자-열부 등을 기리고, 이들을 모델 삼아 모두를 성리학적 윤리관을 체득한 인간으로 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는 그 모델을 서적으로 남겨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것까지 포함하여 성리학적 윤리를 사회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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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표정책, 즉 '올바른 일을 행한 이에게 상을 내리는' 권면 방식은 이미 그 자체로 '성리학적인 권면방식'과 일정 부문 동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과에 빠져 목적이 좌우되는 것'을 부정하였던 성리학자 그 자신이, 결과로서 민을 계도하는 시점에서 논리적 모순을 부르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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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시행 당초에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성리학이 '사회윤리'로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론의 정착'이라는 형태론이 우선될 뿐, 그 윤리의 동기성이나 결과성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는 그리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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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초 동기의 문제는 '부차로 미룬' 문제였지만 성리학이라는 체계 내에서 이러한 체계가 전면 부정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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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균열은 굉장히 단순한 곳에서 생겨났다. 본성과 동기를 중심으로 윤리적 잣대를 가져다놓는 윤리론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위선'에 너무나도 취약하다는 것이다. 계량할 수 없는 동기 그 자체를 가장하기 시작한 순간 그 자체로 그 윤리관의 체제는 너무나 쉽게 흔들려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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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을 받기 위해 행하는 선행'이 실제로 등장하기만 하면 성리학의 윤리관은 그 자체로 내적인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복을 위해서 선행을 행한다는 것은 저 위에 그렇게도 정도전이 목청높여 언급한 "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지만,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진다"는 것과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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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어느정도 고려된 참작의 결과였는지, 아니면 당초 구분되지 않은 것이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초에는 '그리 깊게 논의되지는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대목에서 이 시기의 사상사를 그려내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로 이후 사상사-지성사의 결을 달리 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부분과 별도로 이 문제는 사실상 '정표'라는 시스템이 출발할 때 부터 가진 구조적인 한계였다는 점은 분명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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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표 시스템-교화서 편찬권면을 시행한지 몇 세대가 지난 중종대에 이르면 이러한 모순 자체에 대한 우려가 조정에서가지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이르면 이미 '상을 받기 위해 선행을 행하는' 이들이 차차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영웅적 선행' 그 자체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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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표정책은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여말 성리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올바른 행위'에는 대가가 필요했고, 인간의 삶을 움직이고 바로잡아 주는 데에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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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경향은 윤리의 복합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바, 유교의 제사가 불교적 제례를 대신하였지만, 이는 불교적 제례가 '조상신에 대한 기복'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또한 '실제 유불교체가 정도전 말 만큼은 안 된' 것을 잘 드러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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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이 아니다. 선산에 대한 풍수지리적 믿음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상당히 고도로 기복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이 경향에 대해 후대 유교 연구자들 중에서는 '조상에 대한 정성'의 표현이었다고 그 모순을 돌파하는 설명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간의 상식에서는 그 보다도 '기복'의 측면을 간과하기 어렵다. 결국 '불교가 죽지 않은 건 물론이거니와, 성리학마저도 상당히 많은 부분 기복에 뒤섞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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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리학은 불교의 '종교적 성질'을 전면 부정하여 불교가 행한 '종교적 역할'의 모든 대목을 그 나름의 자연관으로 전면적인 대체를 하려 하였지만, 소위 '전통(기성)종교'였던 불교를 일소시키지도 못했고, 나아가 그 '기성종교'가 수용-활용되던 근본 레토릭마저 대체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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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딴길을 목적으로 한 글이지만, 이쯤에서 '딴길'에서 조금 돌아와 기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나는 현대사회의 (자연과학을 비롯한) 기술문명의 발전이나, 합리주의의 대두가 많은 의미에서 고-중세 사회적인 소위 '기성 종교'의 설득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에 동의한다. 천국-지옥에 대한 유구한 이미지는 문학적-신화적 상상력 만큼이나 사람의 실제 '믿음'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분명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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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복을 비는 행위의 타당성' 또한 젊은 층의 합리주의, 나아가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고 하는 이 사회의 기본 윤리에 비추어 보자면 설득력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네가 잘된 건 네가 잘했고 남들이 도와줘서 그런거지, 무슨 예수를 들먹이고 그러냐"... 신랄한 평이지만 현대 젊은이의 종교관을 이 만큼 잘 대변한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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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이 '종교성' 그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에는 크게 찬성하기 힘들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불교-유교 패러다임 교체의 역사적 현장에서, 성리학이, 기실 불교를 없애지도 못했고, 오히려 '없애고자 한 무지'에 이염되었던 것과 같이, 인간의 '무지에 대한 관성으로서의 믿음' 그 자체는 기성종교의 표면만 뜯어낸 채로, 자본-인본주의-혹은 그에 준하는 여럿 신비적 현상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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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아가 과학의 발전은 인류사적 견지의 찬란한 성과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발전 이전의 무지와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믿는 것'이라는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과학은 전근대 사회에서 종교가 행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대체하여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마치 500여년 전 성리학의 합법칙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그 이전의 종교적 습속이나, 기복에 대한 열망에 기댔던 것 처럼, 과학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기성이든 신흥이든) '종교적'인 것들에 여전히 기댈 것임도 또한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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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의미에서 설령 (기성) '종교'가 사라져간다고 해도, (기능상의) '종교'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가치관'의 지지자가 구래의 가치관의 지지자에 대해 무지함을 근거로 한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합리적일지언정, 내적으로 가치관 전반의 변동은 그리 쉽게는 이루어지 않는다. 적어도 최소한 '당분간은' 쉽게 바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가 본' 역사적 견지에서의 패턴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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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책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게 될 주변국으로서 소위 천조국의 "파행"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어떤의미에서는 매우 모순된 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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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극 "스트롱 맨"을 동경하고, 그 스트롱맨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 "스트롱 맨"은 단순히 위인전에 나오는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어야 할 살아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스트롱 맨의 "천조국으로서의 권위-세력"또한 무시할 수 없는 실체이다. 그 까닭에 그 스트롱 맨에 대한 호의-동경은 필연적으로 그 스트롱 맨의 권위에 대한 굴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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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플진저, 누구보다 스트롱 맨을 사랑하고 그를 닮고 싶지만, 그 "사랑"과 "동경"은 함께갈수 없는 것이니 ㅠ. 결국 그 (닮고싶은) "동경"은 국내용으로 남겨두고, 국외용으로는 "사랑"에서 우러나온 굴종" 만을 가져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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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반전은, 2017년 이야기가 아니고, 1418년 이야기라는 것... 
15세기 조선에 하나 다행인 것은 "스트롱 맨" 영락제를 대놓고 동경하는 저 주체가 조선의 정점 세종이 아니라, 사신 다니면서 외국물 깨나 먹은 김점이라는 것이다.



2017.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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