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02157175&code=96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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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쭉 보면서 생각이 맴돈,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옛날 이야기를 조금만 풀어 보도록 하자. 기사와는 (내 생각에는) 굉장히 상관있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딴길'로 흘렀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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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선 인용문 하나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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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지만,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지는 것이다...(중략)..그러나 저 불씨는 사람의 옳고 그름은 논하지도 않고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 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歸依)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道)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요, 공도(公道)가 아니니 징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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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불교가 일어난 후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에 부처를 독실하게 섬긴 양무제나 당헌종 같은 이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한유가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할수록 연대(年代)는 더욱 단축되었다.” 고 말한 것이 꽤나 간절하고 뚜렷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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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불씨잡변, '불씨 화복의 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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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성리학이 종교인지 아닌지, 혹은 종교란 과연 무엇인지를 명료히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여말 성리학이 가진 종교사적인 작용을 이야기한다면, 고려시기까지 국가의 지원을 입던 '국가종교'였던 불교의 위치를 무너뜨리려 시도하였던 것이었다는 말 정도는 말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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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자연-인간의 근원에 관한 초합리적인 원리", 내지는 "사회윤리의 기능" 등에 대해 기존 불교가 행해왔던 설명 방법을 주희 나름의 방법으로 완전히 대체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불교가 가진 '종교적 역할'을 성리학으로 대체하고자 한 작용이라는 설명 또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리학의 종교성에 대한 정의나 성리학의 '본질' 논의와 상관없이, 적어도 불교가 가졌던 '종교적 기능'을 전면적으로 성리학의 논리로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은 분명한 것이고, 이에 따라 적어도 조선 사회는 (설령 종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리학을 일종의 '국교에 준하는 신념체계'로 모신 사회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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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빙빙 돌아갔다. 쉽게 말해 유불교체의 현상은 그 대체제인 성리학이 종교든 아니든 간에, 엄연한 '종교문제'인 측면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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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의 자연-윤리-인간관을 통할하는 이른바 종교 문제에 있어 '불교적 설명'과 '성리학적 설명'을 일일이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장황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 차이 중 우리가 흔히 이해할 만한 가장 도드라지는 성질은 다름아닌 성리학이 기복(祈福)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종교의 근본 매커니즘인 '신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과 내세를 구원해준다'는 레토릭을 성리학에서는 허황되고 그릇된 것으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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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안으로서 여말 성리학자(콕 집어 정도전)가 내밀고 싶었던 것은 다름아닌 기복의 결과물이 아닌, 일종의, 천도(天道)로 대표되는 어떤 우주적 원리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이신(理神)적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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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실제 설득력이 있는 것이지 유무와 상관없이, 적어도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여말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천도(天道)에 대한 믿음이 불교의 인과응보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것이라 믿었다. 요컨대 그들에게 있어 (기복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일소되어야 할 구습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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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많은 부분 종교에 있어 '도덕'은 신앙행위 그 자체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 현대 종교에서부터 '부도덕한' 교리를 믿는 종교는 소위 '사이비' 취급을 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말 성리학자에게 있어 '도덕'은 '자연'과 맞들어지는 것일지언정, 적어도 (초자연적 인격체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신앙'과는 분리되어야 할 가치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미 '신성'의 영역, '신앙'의 영역을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성리학은 이전에 등장한 종교와 비교해도, 나아가 이후의 종교와 비교해도 '비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성리학 그 자체의 사상적 시스템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보편적 종교의 특성'에 미루어보자면 한 걸음 동떨어진 것이 사실이었고, 그 대목에서 여말선초 척불론은 '종교 몰락론'의 측면또한 가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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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에 따라 전술한 천도(天道)의 자연관은 바로 그들에게 있어 앞서 말한 '신'을 대체할 자연관-윤리규범이었다. 천도 중심의 윤리관은 (적어도 그들이 생각한) 불교와 가장 많이 다른 핵심은 바로 성선설, 그리고 성선설로부터 출발한 어떤 동기를 중심으로 한 윤리론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적인 그것과는 근본적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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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들은 인간이 착한 본성을 타고난다고 믿은 맹자의 계율, 그리고 그것을 극히 부각시켜 자연의 범주로 격상시킨 주희의 역점에 따라 인간과 자연을 파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 '천도'란 현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올바름이자, 세계 그 자체가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질서 그 자체였다. 인간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선설'의 레토릭 그대로, 사람은 날때부터 '차마 어쩔 수 없는' 선함을 타고난다고 믿었고, 모든 선함은 그 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마무리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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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기복'의 종교행위를 설령 도덕과 연결되어 있든 없든 간에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착한일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 뿐, 그 반대로 복을 받기 위해 착한일을 하는 식의 윤리는 '결과를 위한 윤리'로서 사(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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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그들은 이러한 사적인 '결과'는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본성, '천도'라는 어떤 '마땅히 인간이라면-마땅히 하늘의 도리대로 가는 것이 맞다'는 식의 법칙적 당위성에 비하면 극히 지엽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올바른 일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에 결과, '보상'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무언가 오염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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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비종교적'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비종교적인' 측면 하에서 성리학의 자연관은 (이미 불교에서 선보인 바 있는) 인간 모두를 다루는 보편성은 물론이거니와, (적어도 고려말 불교에서는 그 만큼은 꼼꼼히 다루어지지 못한) 사회윤리의 문제까지를 통합하게 된 하나의 종합적인 가치체계를 완성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윤리/자연관/인간관을 모두 포함한) '종교'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적 기능'을 완전히 대체할 인간-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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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여말-나아가 선초 성리학자들의 편리한 기획만큼 모든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성리학자들의 기획은 '인간의 본성'을 믿은 만큼이나 '인간의 나약함'을 지나치게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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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복적인 경향은 그렇게 '본성-천도'에 호소한다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기복행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손쉽게 교육-훈도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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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통해 주희의 해석에 따른 꼼꼼하고 집요한 선언을 던진 것은 당대 그 이후의 학자들에게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 내어, 대규모의 불교 교단에 대한 탄압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불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성리학의 '척불' 기획이 녹록치 않았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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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공적 영역에서 불교에 대한 숭신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사라졌지만, 사생활의 영역에서 불교의 명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왕실의 후원을 등에 입은 결과였지만, 나아가 실제 왕조의 구성원들 개개인에게까지 불교의 역할이 사그러들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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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에서 '척불' 그 자체가 원리적으로 부정된 적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500년의 세월동안 '척불' 그 자체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500년 조선사가 숭유억불의 역사라면, 조선사 500년은 척불 실패의 500년"이라는 아이러니가 가히 사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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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의 기복적인 종교영역을 일소하고자 한 성리학의 기획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기실 성리학의 '원리'나 '지향'과는 별개로, 성리학 자체가 사회적으로 그 논리를 전파시키는 과정에서조차 (앞서 말한 매커니즘의 의미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성리학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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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전술한 바와 같이 '천도'로서 결과를 동떨어뜨린, 본성에 호소하는 자연-윤리관은 여말선초 성리학자들이 기대한 만큼 그리 모두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로는 믿는데 실제로는 다르게 말하는'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불교마저도 실제 철학적인 영역을 깊게 파고들면,'기복신앙'과는 엄연한 거리가 있다. 동아시아의 사상사를 조망할 때 가장 큰 역설은, 그 사상의 메시지와 전파가 때로는 반대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실제 전파과정에서는 불교 또한 불교적이지 못했고, 후술하겠지만 성리학 또한 성리학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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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천의 동떨어짐'을 설명하는 의외로 적당한 사례는 역설적이게도 '정표(旌表)'로 대표되는 그 사회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정표정책은 효자-열부 등을 기리고, 이들을 모델 삼아 모두를 성리학적 윤리관을 체득한 인간으로 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는 그 모델을 서적으로 남겨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것까지 포함하여 성리학적 윤리를 사회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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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표정책, 즉 '올바른 일을 행한 이에게 상을 내리는' 권면 방식은 이미 그 자체로 '성리학적인 권면방식'과 일정 부문 동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과에 빠져 목적이 좌우되는 것'을 부정하였던 성리학자 그 자신이, 결과로서 민을 계도하는 시점에서 논리적 모순을 부르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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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시행 당초에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성리학이 '사회윤리'로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론의 정착'이라는 형태론이 우선될 뿐, 그 윤리의 동기성이나 결과성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는 그리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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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초 동기의 문제는 '부차로 미룬' 문제였지만 성리학이라는 체계 내에서 이러한 체계가 전면 부정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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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균열은 굉장히 단순한 곳에서 생겨났다. 본성과 동기를 중심으로 윤리적 잣대를 가져다놓는 윤리론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위선'에 너무나도 취약하다는 것이다. 계량할 수 없는 동기 그 자체를 가장하기 시작한 순간 그 자체로 그 윤리관의 체제는 너무나 쉽게 흔들려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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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기 위해 행하는 선행'이 실제로 등장하기만 하면 성리학의 윤리관은 그 자체로 내적인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복을 위해서 선행을 행한다는 것은 저 위에 그렇게도 정도전이 목청높여 언급한 "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지만,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진다"는 것과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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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어느정도 고려된 참작의 결과였는지, 아니면 당초 구분되지 않은 것이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초에는 '그리 깊게 논의되지는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대목에서 이 시기의 사상사를 그려내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로 이후 사상사-지성사의 결을 달리 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부분과 별도로 이 문제는 사실상 '정표'라는 시스템이 출발할 때 부터 가진 구조적인 한계였다는 점은 분명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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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표 시스템-교화서 편찬권면을 시행한지 몇 세대가 지난 중종대에 이르면 이러한 모순 자체에 대한 우려가 조정에서가지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이르면 이미 '상을 받기 위해 선행을 행하는' 이들이 차차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영웅적 선행' 그 자체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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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표정책은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여말 성리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올바른 행위'에는 대가가 필요했고, 인간의 삶을 움직이고 바로잡아 주는 데에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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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경향은 윤리의 복합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바, 유교의 제사가 불교적 제례를 대신하였지만, 이는 불교적 제례가 '조상신에 대한 기복'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또한 '실제 유불교체가 정도전 말 만큼은 안 된' 것을 잘 드러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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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이 아니다. 선산에 대한 풍수지리적 믿음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상당히 고도로 기복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이 경향에 대해 후대 유교 연구자들 중에서는 '조상에 대한 정성'의 표현이었다고 그 모순을 돌파하는 설명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간의 상식에서는 그 보다도 '기복'의 측면을 간과하기 어렵다. 결국 '불교가 죽지 않은 건 물론이거니와, 성리학마저도 상당히 많은 부분 기복에 뒤섞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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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리학은 불교의 '종교적 성질'을 전면 부정하여 불교가 행한 '종교적 역할'의 모든 대목을 그 나름의 자연관으로 전면적인 대체를 하려 하였지만, 소위 '전통(기성)종교'였던 불교를 일소시키지도 못했고, 나아가 그 '기성종교'가 수용-활용되던 근본 레토릭마저 대체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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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딴길을 목적으로 한 글이지만, 이쯤에서 '딴길'에서 조금 돌아와 기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나는 현대사회의 (자연과학을 비롯한) 기술문명의 발전이나, 합리주의의 대두가 많은 의미에서 고-중세 사회적인 소위 '기성 종교'의 설득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에 동의한다. 천국-지옥에 대한 유구한 이미지는 문학적-신화적 상상력 만큼이나 사람의 실제 '믿음'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분명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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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복을 비는 행위의 타당성' 또한 젊은 층의 합리주의, 나아가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고 하는 이 사회의 기본 윤리에 비추어 보자면 설득력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네가 잘된 건 네가 잘했고 남들이 도와줘서 그런거지, 무슨 예수를 들먹이고 그러냐"... 신랄한 평이지만 현대 젊은이의 종교관을 이 만큼 잘 대변한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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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이 '종교성' 그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에는 크게 찬성하기 힘들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불교-유교 패러다임 교체의 역사적 현장에서, 성리학이, 기실 불교를 없애지도 못했고, 오히려 '없애고자 한 무지'에 이염되었던 것과 같이, 인간의 '무지에 대한 관성으로서의 믿음' 그 자체는 기성종교의 표면만 뜯어낸 채로, 자본-인본주의-혹은 그에 준하는 여럿 신비적 현상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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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아가 과학의 발전은 인류사적 견지의 찬란한 성과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발전 이전의 무지와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믿는 것'이라는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과학은 전근대 사회에서 종교가 행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대체하여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마치 500여년 전 성리학의 합법칙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그 이전의 종교적 습속이나, 기복에 대한 열망에 기댔던 것 처럼, 과학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기성이든 신흥이든) '종교적'인 것들에 여전히 기댈 것임도 또한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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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의미에서 설령 (기성) '종교'가 사라져간다고 해도, (기능상의) '종교'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가치관'의 지지자가 구래의 가치관의 지지자에 대해 무지함을 근거로 한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합리적일지언정, 내적으로 가치관 전반의 변동은 그리 쉽게는 이루어지 않는다. 적어도 최소한 '당분간은' 쉽게 바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가 본' 역사적 견지에서의 패턴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5.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