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가 항상 말하였다, "너희 비구들아, 내 설법이 뗏목과 같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불법또한 응당 버려야 하거늘, 불법이 아닌 건 어떻겠는가."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중략).. 소위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금강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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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동아사아 대승 불교의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금강경이지만, 산스크리트어 경전 원문이 실전하는만큼 2세기 인도에서부터 만들어진 경전이라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다만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상황에 맞게 대승불교적인 가치관이 강조된 결과 대승적인 가치관을 담은 금강경 자체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한 그에 맞게 커져갔던 것이다.
(이는 대학-중용 텍스트가 분명 선진유학 "예기"의 텍스트였음에도 시대에 따라 그 의미 독해법이 신유학 시기를 거쳐가면서 역변하는 과정과 유사할 것이다.)

2. 이러한 금강경의 중요 메시지는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 중 하나는 역시나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라고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앞 구절에 나오는 뗏목 비유는 그에 대한 꽤나 재미난 비유인데, 말인 즉슨 그렇다.

"강을 건너서 너머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뗏목을 타야하고, 잘 만든 뗏목은 장을 안전하게 잘 건너게 할 수 있지만, 강을 건넌 이후에도 뗏목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건너 땅으로 갈 수가 없다"

3. 말하자면 불법이라는 것은 더 나은 경지를 위한 중요한 길일지는 몰라도, 그 불법이라는 형상 자체에 몰두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뜻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했던 중국 당唐대 임제臨濟의 말과도 뜻이 통할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는 불교적 진리 습득이 내적인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적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비단 불법의 종교 차원에서 그치는 일이겠는가..

학문 연구나 생에 있어서 '경험'(혹은 이로써 비롯된 선행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더 나은 단계의 결론 도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는 역사학으로 비유한다면 해당 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나, 사료에 나온 정보들로부터 본인이 추출할 수 있는 역사상 등일 것이다.

응당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도 없이 순전히 생각나는대로 정리하기만 한다면 연구가 아니라 단순한 나만의 판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므로, 응당 이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극한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이 더 때로는 우리네 삶에 '편견'이라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경계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역사적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료적 기록이 시대상을 읽는 기초적인 방편이 된다는 것은 기본이겠으나,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의 나도 이 사료에서 정말 어떠한 정보를 추출하는가.. 이러한 추출의 방법에 있어서 그 시대에 대한 내 통념과 편견이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역사학계에서 활용되는 "사료비판"이라는 장치가 있다. 그러나 실로 개인적으로는 그 의미가 기실 "내가 생각하는 역사상과 배치되는 사료를 지엽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몰아가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는 의혹을 접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우리의 경험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판단, 지성의 근원이기도 하면서도 필연적으로 편견의 의미 또한 담고 있기에, 비록 마치 손가락이 없이는 달을 볼찾을 수도 없지만, 손가락이 달은 아니듯, 우리는 '언젠가는' 이를 완전히 극복하고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설법은 뗏목과 같기에 불법또한 응당 버려야 하고, 그런고로 (언어로서의)불법또한 불법이 아니다"는 말은 그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닐까...

난잡하게나마 생각해 본다..



덧1. 사실 유 불 (크리스트교)의 경서가 다들 그렇겠지만, 일이관지한 논지속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수있는 부분이 많기에 딱히 어떤 부분을 '핵심' 이라고 짚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두어번 정도 짬을 내어 통독한 가운데에서는 본 구절이 가장 가슴에 남기에 기록해 둔다.


덧2. 불교한번 더럽게 어렵다. 솔직히 '경험적 편견-언어적 메시지 자체에 매달리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며 구구절절 하긴 했지만, 당장 강을 건널 뗏목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어떻게든 허접한 뗏목을 짜 맞춰서 거기 매달리는 수밖엔 없다는 것을 항상 느끼곤 한다...

덧3. 강은 언제 건널 수 있을까... 언제쯤 대체 난 이 '뗏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 메시지에서 '강을 건너야 똇목을 버릴 수 있다'에 극도로 몰두하는, 전형적인 선지후행(先知後行)적인 사고는 그거대로 또 성리학마냥 문제가 있겠다 싶긴 하지만..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201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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