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21345141&code=910100
요사이 김진태의 황희 발언으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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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정치사 분야에 빠삭한 것은 아니다. 특히 누가누가 무슨 말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고.. 류의 디테일에 꽤 취약한 편이다. (물론 자랑 아님) 그 까닭에 그리 자신있는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세종시대를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소략하게나마 정리를 해 볼만도 한 것 같아서 번잡한 부기를 붙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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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입장만 요약하면
김진태 이르기를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간통도 하고 무슨 참 온갖 부정청탁에 뇌물에 이런 일이 많았다는 건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이분을 다 감싸고 해서 명재상을 만들었다” 하였고,
대종회 이르기를
“황희 정승에 대한 갖가지 의혹이 실록에 나와 있긴 하지만 그 기록 자체의 신뢰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다 한문 번역상의 문제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실제 황희 정승과 관련된 부분이 편찬되던 당시에도 다른 사관들 사이에서 ‘금시초문인 주장이 포함됐다’는 비판이 있었을 정도”라 하였다.
(대종회의 입장은 http://www.nocutnews.co.kr/news/4403589 에 꽤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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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관계부터 확실히 해 두자. 황희가 공직자로서 부패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뇌물 수수 문제부터나, 친지 사면에 대한 부정 청탁, 등 비리 사건에 연루된 문제에 관한 사안은 실록 기록에 이미 등장해 있고, 실제로 그 문제로 파면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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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종회의 주장 대로)그에 따른 실록 기록의 신뢰성 문제도 짚을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황희의 부패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쓰여진 기록 (세종/10/6/25) 에서는 황희의 별명이 "황금대사헌"이라는 것, 박포의 아내와 간통 하였다는 것, 매관매직으로 축부를 하였다는 것, 등의 황희에 대한 추문 기록이 다른 실록 기록과도 눈에 띄게 대조될만큼 좀 과하게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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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단종 즉위년 세종실록 편찬당시(단종/즉위년/7/4)에도 사초의 신뢰도 문제가 불거져, 그 진위 여부에 대한 회의론이 부각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정인지, 정창손, 황보인, 김종서 등이 모두가 황희의 추문을 '전혀 모르던 일'이었노라 증언하고 있으며, 오히려 해당 사초를 작성한 사관 이호문의 사적인 행실을 탓하고 있는 현상또한 보이고 있다. 결국 사관의 기록을 수정할 수 없다는 근본 원칙에 의거하여 실록에 실린 경황일 뿐, 그 추문 전체의 정확한 진위 여부는 당대인들도 신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황희의 추문 기록 또한 어느정도의 과장이라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은 (대종회 입장처럼 '조작'까지 운운하기엔 성급하지만) 일단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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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단 그 풍문 그 자체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설령 간통-승려와의 결탁-등이 모두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앞서 말한 친지 사면 청탁과 뇌물 수수 여부는 분명히 존재하던 것이고 이는 실록 여부와 무관히 황희가 가진 공직자로서의 결점이 되고 있었던 것은 그와 별도의 사실이다. 황희가 사망한 뒤 쓰여진 졸기(문종/2/2/8)에,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 비난을 샀다"고 한 바는 일단 나름의 공론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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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김진태의 말은 어느정도는 타당하다. 여기서 타당하다는 말은 "황희가 부패 재상이다"는 명제 뿐만이 아니라, 세종이 그를 명 재상으로 만들었다는 대목까지 포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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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김진태의 발언을 '(당시 조정의 파면 분위기를 읽지 못한) 반쪽짜리 역사지식'이라고 평한 것(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은 디테일한 부분들로 그 결점을 메우고 있음에도 그 골간 자체로는 찬성하기 힘들다. 황희와 관련한 사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실제로 황희가 부패 재상으로서 파면을 당했냐 안 했냐의 그 파면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초 그 사건이 터질 때부터 스스로 사직하겠다고 자처한 황희가 그렇게 파면된 이후 머잖아 복직해 (이미 꽤 알려진 바와 같이), 수없는 사직 요청에도 조정에 남아 정승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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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와 같은 세종의 황희에 대한 중용은 '조정 분위기'에 반한 세종의 권력 농단인가. 이 또한 그리 간단히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황희의 정치가-행정가로서의 관록은 이후 황희의 부정에 대해 충분히 참작한 문종대 사관들에게도 모두 공통된 동의를 얻을 만큼 발군으로 평가받았으며, 굳이 '조정 분위기'라는 것을 꼭 집어내야 한다면 황희의 능력에 대한 인정 또한 (앞서 말한 뇌물 수수건과는 별도의) 또 다른 한 '분위기'로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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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황희의 복직이 세종의 황희에 대한 특별 대우 때문이든, 그만한 행정능력-정치력을 갖춘 인재가 절실했던 세종의 판단이든 간에, 황희의 부패 여부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세종이 중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하다. 황희에게 '명재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바를 동의한다고 한다면 그 '명재상'의 역할 수행에는 황희를 관직에 남긴 세종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그 의미에서는 김진태의 말은 '타당한 해석'인 것은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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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오히려 이 사안에서 문제를 삼을 대목은, 김진태의 황희에 대한 파악이나, 그 파악된 황희에 대한 상이 기록상 얼마나 타당한지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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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황희에 대한 '역사 수용으로서의 상 도출'의 문제다. 김진태의 문제는 황희의 공직 생활을 포함한 일생 전반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리고 그 황희를 중용한 세종의 정치 운영론을 비추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역사적 평가가 고작 황희=부패 재상, 세종=부패 재상의 옹호자로 그쳐도 괜찮은가 하는 해석론의 문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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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하였듯, 황희가 부패하였던 것은 황희의 정치인생 평가에 있어 한 축을 이루고 사실임이 분명하지만, 황희의 부패 자체가 황희의 명재상으로서의 활동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황희는 부패 재상임에도 유능한 측면이 있던 것이지, 부패 재상이기 때문에 유능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세종의 황희 감싸기 또한 부패에 대한 옹호론을 위한 감싸기라고 말한 적 없다, 세종은 황희를 '부패했음에도 중용'한 것. 그 이상 아무것도 기록은 말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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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 부분'에 대해 김진태든, 여타 이 사안을 이해하는 누구든,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로 해석을 내리고 그에 따라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세종대를 '타당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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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예를 든다면 '황희의 부패에 대한 견제와 능력에 대한 용인을 별도로 했다'라고 세종의 입장을 명확히 하든지, '업적과는 별도로, 사적인 문제에 연연한 세종과 황희'라고 반면교사를 삼는 방향을 삼든지, 체제정립기 혼란통에 '다른 누구도 아닌 황희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의 시급함을 설명하든지, 아니면 김진태처럼 '부패도 덮어주고, 명재상으로 만든 세종 대왕'을 그려내든지. 어느쪽이든 '타당성'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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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에서 김진태가 세종대왕의 '다 감싸고 감'이 마치 황희의 부패에 대한 적당한 용인을 행한 것인양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황희-세종에 대한 실상 복원의 타당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김진태가 '읽고 싶었던 기준',즉 역사 해석 주체로서의 김진태가 가진 '정치적 윤리관'에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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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실제 황희가 어떤 사람이었고, 세종이 어떤 사람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부패정치인-중용이라는 단편적 서사를 '부패에 대한 용인'과 '사소한 과오에 대한 덮어줌'으로 읽어낸, 김진태의 정치적 부패에 대한 기본 심상이 관건이라는 뜻이다. 해당 사안을 소화하는 방법에서, 그 문제를 의미부여하는 방향성에서 김진태의 윤리관이 개입되었던 것이 포인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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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란 어떤거다. 라는 거창한 이야기를 할 깜냥은 안 되지만, 하면 할 수록 느끼는 것 몇몇 중에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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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은 시절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대한 감상적 서사나, 혹은 결벽의 뒷면에 담겨진 추악한 일면이라는 꽤 자극적인 서사는 굉장히 낭만적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어떤 시점이든 큰 틀에서는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결국 사람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추악한 모순은 안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래도 꽤 돌아가는 그럴듯함을 안고 있는, 낭만의 대상이 아닌 '삶'의 범주에서는 무심할만큼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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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을 증명해 내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말하기 쉽지만, 저널리즘의 격언 처럼, '사건'의 디테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흐름'에서 정돈해 내는가, 그 흐름을 이끌어낼 관점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주목할 관건은, 과연 그 상황을 움직인 중심원리가 무엇이며, 나아가 그 과거 사건들을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소화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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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에서 '청백리 황희'나, '명군 세종'의 상의 가부가 갑론을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실증적 과정으로는 타당할 지 모르나, (좀 더 솔직히, 세종대가 한번 더 언급된다는 면에서는 퍽 반가운 일일지도 모르나), '역사학적'으로는 더 바람직한 방향이 모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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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세종대를 생각해 볼 의미'는, 위대한 임금 세종-청백리 황희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숭배와, 황희의 부패와 세종의 문제점이라는 '숨겨진 사실'에 대한 자극적인 소비를 위한 디테일 보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읽기 위해, 세종대의 어떤 부분을 곱씹어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단초'로서 기능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역사학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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