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신이 승지로 있을 때에 폐비에 대한 사건을 언문으로 써서 내렸기에, 신이 아뢰기를, ‘만약 언문만으로 된 것으로는 만세 뒤에 누가 이러한 큰 일 때문에 폐비된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후세에 작은 일을 가지고도 함부로 폐비하는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번역하여 쓰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이 내관 안중경(安仲敬)과 함께 번역하여 아뢰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성종실록 13년 8월 11일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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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안 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이 언문(諺文) 사간을 올렸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번역하여 아뢰었다

성종실록 16년 5월 29일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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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양 대비전의 언문 한 장을 내려서 승지로 하여금 번역(飜譯)하여 이를 보이게 하고는, 이로 논의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23년 11월 21일 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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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 언문편지를 중심으로 한 폐비사건이 터진 그 전후로, 유독 '언문의 한문번역' 이야기가 꽤 흔해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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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여기서는 몇 가지 생각들이 동시에 겹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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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문 쓰기가 더 편한 집단들이 출현했다. 사대부 및 왕실 개개인 모두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쉽게쉽게 언문으로 글을 먼저 쓰는 사람들은 분명히 등장한 것은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따지고보면 세종 사후 40년, 20년을 한 세대로 치면 2세대만의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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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문으로 쓰여진 것은 최소한 성종대에는 대체로 공석에서 그대로 읽히지 못했다. (가)사료로 인해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이때 그것이 정해졌는지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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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시에 조정 레벨의 사대부 국왕 (여하간 남자) 중에 언문맹 즉 한문은 아는데 한글은 모르는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을 해 보긴 했다. 근데 이건 자신있게 할 소리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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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르긴 몰라도 (가) 에서 정말 중요한 건, 당시 조선사람들은 언문을 천년만년 보전될 글자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문자의 양대 성질인 메시지 전달과 보존의 양대 성질 중 후자의 의미를 외면했거나 굉장히 가볍게 봤다는 뜻이다.

한문(정확히는 문법체계로서의 고문 한문)이 전근대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는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만세불변의 전통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언문의 위치는 한문 아래 백화, 이두의 가벼움 보다도 더 이하. 즉 '역사'가 되지 못할 '전달용 매체'정도의 의미였던 것이다.

의외로 국문과 국어/국문사 연구에서 한글의 계층성만을 주목하고 이 점(한글의 텍스트상 무게에 대한 문제) 을 별로 주목하지 않던데, 파고들면 재미난 주제일지도.


5) (가)를 언급한 승지 채수蔡壽는 나중에 (가) 시점으로부터 30년 쯤 뒤, 관직에서 물러나 걸출한 판타지소설 "설공찬전"을 짓는데, 그 소설은 비록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채수 생전에 언문으로 번역되어 널리 널리 퍼져 조정의 금서로 올라서 몰수되고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6) 채수의 앞으로의 인생 궤적은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가)시점에서 채수가 한 말은 지금 시점으로서는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의 우리가 당시 한문을 해석하는 것도 뭐 쉬운 일이라 여유부릴 건 아니지만, 중세 순한글을 판독-해석하는 쪽은 그 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 병기 안 해주면 '절대로'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말들 투성이.. 한문 해석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전문성을 요하게 되는 것이다,


201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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