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세미나 쉬는시간 쯤인가 나눈 잡담이었는데, 겸사겸사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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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역사학자의 작업에 대해, 역사학자 자신들도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 생각에, 역사학자는 '사실' 자체를 판정짓는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자료 내에서 사실에 최대한 가까운 설득력있는 설명을 이어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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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무엇이 사실일지'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남겨진 기록을 뛰어넘는 증거의 발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현존하는 증거를 활용한 가장 무리 없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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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당연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역사학에서의 '실증-논증'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담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자세하게 말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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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가 하는 일은 '자료를 통해 도출된 여러 설명 간의 설득력있는 연결'일 뿐, 그것이 사실 그 자체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아주 신중히 해야 할 말이지만, 오만가지 위서 등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학문적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서들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움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기에, 현 시점으로서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판정'하고 그에 맞는 설명or서사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좀 심하게 말해, 김부식도 이유립도(!!!)도 고대의 공간에서 살아본 당사자 아니라는 점은 다르지 않으며, 기록물이 가진 착각-위조-개변의 여지 또한 모두에게 열려있는 상태다. 다만 왜 김부식은 되고 이유립은 안 되는가. 결국 다른 증거들과의 크로스체킹을 비롯한 다양한 검증의 결과, 지금으로선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음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건 농담인데, 상상컨대 중국 어드매서 '고대 한국의 대륙경략'을 입증하는 당대의 문자 물질 자료가, 종래 '한반도 사료'들과 모순된 부분까지 해결할 획기적인 서사까지 제공할만큼의 퀄리티로, 한반도 사료를 압살할 양으로 나온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두 연대상 진품이 확실하다면, 하루아침에 고대의 대륙경략이 모두 믿어질지도 모른다. 지금 추세론 과거에도/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인게 그저 문제일 뿐...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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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에도, 역사학에서 말하는 '다양한 해석가능성'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마구 열어놓는다는 뜻이 아니다.
'주어진 자료 내에서 사실에 최대한 가까운 설득력있는 설명'을 만든다는 말에서 <최대한 가까운>이란 단서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어쨌거나 다양한 반증가능성을 열어두는게 학문의 기본이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을 대충 던져보는게 의미있는 학문적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위에서 쓴 '농담'같이, 중국 어드매의 압도적인 출토자료가 나와버린다든지, 혹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들이 모조리 다 조작된 것일 수 있다든지. 등등의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열려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가능성들'이 그 자체로 학문적 논의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이는 그 논의를 제기하는 저자가 '이럴 수도 있는 가능성' 정도의 느슨한 이야기를 한번 던져보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이는 역사학 분야에서 최근 널리 받아들여지는 '다양한 해석가능성' 마저도, 최소한 연구자 자신으로서는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을 최대한 설득력있게 배제시켜낸 결과물로서의 연구를 성립시킨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확언하긴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차원에서 쓰여지는(쓰여져야 할) 개념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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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증거로는 이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니란 증거 있냐'라고 매듭짓는 논문/발표를 접할 때,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도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인 셈이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6일 병자 1번째기사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남곤이 말했다.

민간에서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힘써 행하게 된 것은 다 저들[기묘사림]이 주도한 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저들이 귀양간 뒤로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이들이 죄를 얻은 것은 "소학"의 가르침을 행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 듣기에 심히 편치가 않습니다.
조광조 등이 죄를 얻은 것이 "소학"의 가르침을 행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소학을 읽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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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란 말이 유행하면서, 그 역사적 어원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이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는 움직임마저도, (최소한 주변에서는)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도 한다. 어느쪽의 이야기도 유의미하지만, 개인적으로 '꼰대'를, '옛 것에 대한 숭배'로, 전통/호고/복벽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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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세대인 자신에게 익숙한 편안함/관성'과 '전통 그 자체'(내지 전통의 원형성에 대한 지향)는 그 영역이 겹치기는 쉬우나 분명 다른 것이며, 나름 '옛 것' 많이 밝히는(?) 조선시기라고 해서 딱히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전통을 기성세대 이상으로 강경하게 자기 정당화의 무기로 삼는다면, 그 직전까지 전통과 관성을 강조해 온 기성세대가 하루아침에 전통의 파괴자로 돌변하는 것도, 과거의 경험을 통해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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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졌지만 의외로 모르는 사람도 많은) "소학"이 16세기 중후반에 잠시나마 지배층 사회에서 명시적으로 배격되기 시작한 아이러니컬한 상황도 그 비슷한 사례다. "소학"은 이미 원대부터 주희 학단의 교재로 중시되었고, 고려 말부터 지식인 사회에서 꾸준히 보급되었던 만큼, 비록 조선 초 지식인 사회의 시큰둥한 반응이 문제시되었을지언정, 남곤이라고 그 중요성을 명시적으로 부정했을 리 없다.(이 자료를 두고 좀 예전에는 '16세기 이전까지는 소학이 덜 중요했다는 증거'로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나름의 의미가 있는 설명이지만 액면 그대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를 '신세대' 조광조가 적극적으로 운동의 아이콘으로 활용했던만큼, 이들의 실각 후, "소학"자체를 (별 이유도 없이) 문제시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남곤 정도니까, 그 이유라도 말하는 것이고, 그 아랫세대 쯤에서는 그냥 이유도 없이 꺼리는 분위기가 생기게 된다 - 물론 얼마되지 않아 기묘사림의 복권과 함께 "소학"의 권위도 되돌아오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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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뜬금없는 예시지만, '손님,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보다 '손님,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쪽이 손님을 높여주는 표현이라고 종업원이 설득하려 해도, 나아가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꼰대 손님'이 '나오셨습니다'를 쓰지 않은 종업원이 '예의가 없다'는 입장을 끝내 양보하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다. 사실 '예의' 내지는 '존대의 관습적 규범'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자체는 당초부터 '꼰대 손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권위를 장악하기 위한 정당화 수단이 '존대어-예의-규범'이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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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생각하면, 딱히 중시하는 메시지의 연원이 얼마나 오래냐/새로우냐 여부는, 세대의 신/구 문제와 상관이 없는 사안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결국 그 메시지가 누구를 향한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로써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정도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갑자기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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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23

* 과거인의 언어를 향한 '적당한 거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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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고, 책을 읽다보면 '도무지 동의하지 못하였으나, 여러번 읽다 보니, (비록 그 생각의 방향에 완벽히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설복되지 않을 수 없는 글' 이라는 것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서는 고 김준석 선생이 쓰신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에 대한 서평(이라기엔 논문에 가까운) 일부인, 아래의 단락이 그 정확한 예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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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사 속의 행위자들 스스로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 주장을 음미하는 것은, 그에 동조하느냐 여부와 별도로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 까닭에 관료-사족을 '지배층'으로 통합하고, 그 아래에서 다분히 후자를 문제시할 목적으로 公權/私權을 나누어 파악하는 인용문의 접근법에 모두 동의하기란 (사실은 지금조차도) 어렵다. 더군다나 그들 나름의 입장들을 정교화-체계화하는 과정이 이 분야의 발전을 지금껏 이끌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舊說'이 '新說'보다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당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설의 유지'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신설이 아닌 구설을 유지해야만 보이는 저변'에 대한 설득이 불가피 한 것에 비해, 안타깝게도 (인용문을 포함한) '구설 지지층'에서도 충분히 그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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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꼭 인용문과 같은 방향이 아닐지라도, 과거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시선의 필요성만큼은 수없이 상기해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이는 우선적으로 21세기의 학문은 설령 과거인의 목소리를 매개할지언정, 결국 21세기 독자와의 호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과거인의 목소리에 대한 복원 그 자체만으로 학문의 목적이 아니기에, 과거인에 대한 거리는 상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한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과거인의 언어를 충실히 복원한다"는 당위가, "언어를 남긴 과거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믿는다"는 편협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경계심을 놓치지 않기 위한 거리감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결국 지배층들의 자기변명이지"식의 냉소가, 굳이 논의의 중핵에서 매사 작동될 필요까진 없겠지만, 논의의 '입구'와 '출구'쯤에서는 곱씹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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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 대한 여러 생각에도 불구, 일단 '어느정도는 설복되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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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위해 일부 문단 구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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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은 (중앙)정부․지배층․집권세력․중앙관료, 혹은 국왕 등으로 구분해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경우에도 구태여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방지배’에서 양반 사족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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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선왕조는) 그 중기에 이르러 불가피하게 사족들을 지방지배의 매개로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사족지배체제라는 조선시기 특징적인 지방 지배형태를 나타나게 했다“(184쪽)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이 중앙 정치권력과 재지사족을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서 파악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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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다. 우선 여기에는 조선시기의 국가는 양반이 양반을 위해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국가라는 사실, 이는 국가와 사족=양반의 입장에서 지방과 농민을 지배하는 체제이며 사족=양반이 농민과 양립하는 구도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자의 생각에, 국가의 의미에는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는 중앙과 지방을 일체로 통합해서 장악한다는 것, 그래서 실제로는 국가가 지방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중앙정부․지배층(사족)이 지방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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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족=양반을 국가=조선왕조와 대립하는 존재라는 측면만 부각시키다 보면 예컨대 왕조의 몰락이 국권의 상실과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 책임은 막연히 ‘국가’에 떠넘겨지는 것이 되고 만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이었던 양반 사족이 국권의 상실 과정에서 어떻게 책임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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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서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문제 설정, 접근 방법대로 한다면 단순히 양반의 역할을 중시하고 긍정하는데(평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그칠 뿐만 아니라 양반의 분열 대립과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고 그 반대 입장에 섰던 양심적인 양반이나 농민들의 반봉건적인 의식과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위치 설정하는 일은 그 만큼 부자연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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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동연구자들은 15세기 관주도 향촌지배의 한계․문제점을 부각시킴으로써 16세기 재지 사족 주도의 향촌질서가 출현하는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제1부 제1장 논문). 또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강대했고 따라서 사족의 향촌자치, 사족지배가 이에 대항하는 견제력이었다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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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세 집권국가의 관주도형 향촌지배는 기본적으로 한계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것은 조선전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관주도의 한계’가 사족이 향촌주도에 나서게 되는 한 배경일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것이거나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의 주장은 역시 사족의 사적 지배를 적극 긍정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의 이론을 도입한 사족층과 그들의 자치활동이 수령권(=국가 공권)에 대한 私的 지배력, 私權의 저항․신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점에서 그들이 15세기 재지 품관층과 그토록 확연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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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상도 일각의 ‘유향소 복립운동’이 설령 연구자의 주장대로 ‘관권의 일방성’을 견제하거나, 중앙 집권세력의 사적 특권의 확대에 반발하는 지방 양반세력의 결집이었다 하더라도 이 때의 중앙 집권세력을 국가 공권력과 동일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점에서는 역시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앙의 집권세력보다는 재지 사족층이 더 양심적이고 바람직한 지배세력이었다는 선입견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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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지 사족의 유향소 복립운동이나, 수령권 견제 활동은 그들 자신의 권익 신장, 기득권 옹호를 목적으로 한 집단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중앙 집권세력의 속성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들 사이에는 재지 사족인가 중앙의 집권세력인가의 차이, 즉 현실적․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함께 농민지배의 방식, 국가 공권에 대한 태도의 여부가 더 중요한 구분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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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석 2000 서평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역사학보 168, 384~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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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꼭 해두고 싶은데, 이 서평 및 그 대상이 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던 00년에는, (인용문 저자의 표현을 빌면) '사족에 의한 향촌주도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주류였는데, 대충 10년대쯤 접어들면, 그 흐름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전제로 너나할 것 없이 '국가 제도의 주도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거짓말처럼 유행이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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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흐름을 굳이 멀리서 파악한다면, 결국 '주도권이 누구냐'만 거짓말처럼 바뀐 것 뿐, 선행연구에 대한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 특정 주도층의 자기정당화를 사실 그 자체로서 믿고, 그 저력을 묘사하고 있다는 면에서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반복컨대, 김준석 선생 방식의 '지배층 환원론'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방법에 내포된 미덕에 대해서는 꾸준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최근 동향을 파악할수록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2023. 1. 3.

* 아래 포스팅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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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선생의 50년대 신문연재 글을 대충 다 살펴봤다고 생각하고 반납 준비를 하려니까, 해당 글이 실려있던 날의 신문기사가 끝내 눈이 밟혔다. 기왕 반납하는김에 이것도 같이 갈무리해두자 생각에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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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사의 의의가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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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이우성선생 자신이 밝힌 아래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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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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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대로라면 1959년 5월에 역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내용이 8월에 동아대학보에 실려있다는 것인데, 당시 기사를 참고하면, 실제로는 1959년 7월 18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나 싶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나온 동아일보 기사상으로도, 1959년 7월 18일로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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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의의가 하나 더 있는데, 해당 논문이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리하자면,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는 ⓐ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1959년 2월에 한번 발표된 것을 ⓑ 서울의 동국대에서 열린 7월 월례발표회에서 재발표하고, ⓒ 그것을 8월에 요약정리해서 동아대학보에 싣고, ⓓ그 요약과정에서 누락된 부분을 10월에 보충하여 동아대학보에 후속편을 기고하고, ⓔ 그걸 다시 수정한 버전을 64년 역사학보에 싣게 된 원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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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 막히면 그것만 빼곤 뭐든 극성스럽게 된다고 하던가.. 그래도 어쨌든 재미있는 발견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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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보 제46호> 1959년 8월 15일, 1면

"향리의 변천은 사대부 형성" 이우성 조교수 역사학회에서 연구발표.

역사학회 월례 연구 발표회가 지난 7월 18일 동국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 대학교 문리대 이우성 선생님의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그 관인으로 진출"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지난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한 바 있었는데, 우리나라 봉건사회를 설명하는 커다란 문제를 제시하여 준 것이다. 따라서 이번 역사학회 본부에서의 이 연구 발표는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연구 논문의 요지는 고려 중역 "무인 쿠데타" 이후에 나타나는 독서인의 진출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향리들로서 후에 사대부를 형성하여 고려후기 역사의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고 밝히며 이들의 문벌과 신분 관계를 '무인쿠데타' 이전의 지배질서와 구분하여 이들의 사회적 진출의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조건을 해명하여 고려후기의 역사를 명확히 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선생님은 정중부난 이후를 봉건사회 형성기로 보고 이조시대부터를 봉건사회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지방의 교수들로서 역사학회 본부에 출장하여 연구발표회를 하기는 이번의 이선생님이 처음이며, 이것은 지난 제2회 전국 역사학대회에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 교수님들의 연구를 상호교환으로 발표하자는 결정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

생각이 막힐 때 마다 오래된 글을 찾아읽는 편이다. 그러던 중, 이우성 선생의 유명한 "한국중세사회연구(1991, 일조각)"의 수록논문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의 각주 1번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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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단행본에 실린 각주 내용인즉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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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뒤에 야간의 수정을 가하여 그 요약을 동아대학교신문(1959년 8월 15일)에 실었다"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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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당 책에도 실려있는 사실이지만,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논문은, 61년 "역사학보" 14집에 '여대백성고'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해당 논문을 찾아서 열어보니, 똑같은 각주에 다른 정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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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 원례발표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동국대학교에서), 뒤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제목으로 동아대학교논문집에 싣기로 했으나, 이 논문집의 발간이 지연되어 결국  금일까지 활자화되지 못하고 있다"

('여대백성고-고려시대 촌락구조의 일단면', "역사학보" 14, 196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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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추측할 수 있는 바, 이 내용은, 64년 "역사학보" 23호에 수록된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의 초고 쯤 되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박사논문의 한 꼭지를 이 언저리의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까닭에, 관심을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런종류의 글을 참고하는 요령이 다 그렇듯이, 단행본으로 재출간 된 내용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수정-보완의 여지를 존중하여 단행본 쪽을 보는 것이 옳기도 하지만, 그래도 '초기 단계의 문제의식' 같은 것을 알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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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신문(=동아대학보)은 학교에서 보기가 어려워서 무려 축쇄인쇄본을 상호대차를 해서 읽어야 했는데, 의외의 정보를 몇 가지 더 얻을 수 있었다.

ⓐ  1959년 8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확실히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원고가 실려있고, 특별한 편수 표시없이 글이 완결되어있다.

ⓑ 다만 1959년 10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그와 별도로 '고려후기의 신흥관료'(하)원고가 실려있는데, 전편의 내용을 이어 보충해 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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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학술적 가치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지금와서는 비판된 설명들도 많지만, 종래 논문-단행본에서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은 러프한 아이디어 같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나름 구하기 힘든 글이기도 하니, 이 참에 도움이 되실 분들을 위해 공유해둔다.

(어지간하면 원문 그대로를 한글로만 입력하였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 싶은 표현이나 구절들은 일부 다듬거나 문단을 내는 등 작은 수정을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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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_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6호 1959/8/15)
- 연구 발표 레쥬메-

우리나라 역사상 관인지배계급은 고려중엽에 이르러 계보적으로 커다란 단절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고려전반기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중심세력은 「귀신망족貴臣望族」, 즉 문벌귀족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그들은 대개 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던 경주의 구족으로서 최씨, 김씨, 이씨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신라이래의 귀족적 지배계급이 고려후반기에 이르러 홀연히 역사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한편 고려후반기로부터 새로 형성하기 시작한 관인층은 여러차례의 혼란과 번복을 거쳐, 여말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사회적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이씨왕조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이씨조선의 종말까지 우리나라의 지배계급을 보통 사대부계급이라고 한다면 이 사대부의 기원은 실로 고려후반기에 소급되는 것이다.
귀족과 사대부-이 두 지배계급의 성격적차이는 어떠한가, 전자가 호족적 토지소유-공전적체제 위에서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주적 토지소유-농장적토대위에 성립된 것이며, 전자가 혈통의 권위에서 살고 있음에 대하여 후자는 신흥발랄한 지식인인 것이다. 전자의 활동이 강대한 족적결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식상의 능력으로 과거에 합격된 우세한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후 지배계급의 교체가 어떠한 역사적 계기에서 된 것일까? 우리는 고려중엽에 일어난 일대정변-정중부란을 이것의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문무항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낡은 귀족의 숙청에 있는것이다. 그것은 귀족을 정치적으로 몰락시켰을뿐 아니라 종족적으로 일망타진한 것이었다. 향락과 소비로써 부패해진 비생산적인 귀족들을 숙청한 것은 심잠한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시킨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임에 틀림없으나 이 역사적 임무의수행자가 당시의 건강한 민중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귀족과 동차원의 세계에서 생활해오던 아류귀족 즉 무신들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처참한 유혈이 강행되면서도 본질적 의미의 형명은 되지못하였다 『문신을 죽이자』라는 단순한 구호는 귀족지배에 불만이 높은 병졸 및 일부 도성인에게 일시적 동조를 얻었으나 그것은 본능적 반발심에 그쳤을 뿐 아무런 신 이상의 뒷받침이 없었다. 그러하여 문신의 질서를 일단 붕괴시키고도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낼 힘이 없었다.  도리어 무신들의 야만적인 살육의 자행과 포학무도한 징세와 행정능력의 결여 등은 사회전체를 후퇴시키고 문화의 소침을 여지 없게 하였다.

당시 귀족의 교육은 중앙국학의 외에 사학 즉 최충의 구재 같이 달관현유에 의하여 설립된 사학이 개성에 연이어 등장해 귀족의 자제를 지도했던것이 무인정변후에 국학도 사학도 파괴되어 중앙의 귀족문화는 모두 폐허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씨정권하에서 문치가 약간 회복 되었다고는 하나 귀족문화가 폐허가 된 속에서 다시 소생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의 문화는 도성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에서 불승에게 학업을 전수받은 『사자士子』들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이 『사자』들은 소위 독서인 즉 신흥지식인을 가르키는 말이며 앞서 말한 바 고려 후반기의 신흥관인층이란 이 『사자』 독서인을 주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대부라는 것이다.

이들 사자 독서인은 무신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역시 문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형태적으로 전대의 귀족에 크게 다를 뿐 아니라, 계보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 신흥관인층의 출신을 어디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당시의 지방토착세력-향리층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향리는 관리의 노복
- 사무능력에 따라 상급관리로 진출- 

고려시대의 향리가 이씨 조선에서처럼 신분적으로 고정된 천한 지위가 아니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지방토착력의 대표자이며 멀리 신라시대의 촌주 특히 상득 촌주(군상촌주)의 계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초에는 지방행정이 완전히 그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으며 귀족의 지배체제가 일관적으로 확립된 성종이후에도 국가권력 말단을 장악하여 국가의 중요한 직무를 직접 집행하였다. 그들은 농민에 대하여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있엇다. 그러나 이 권력은 그들 자신이 소유한 권력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수족으로 이용하는 국가권력 그 자신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향리는 관인이 아니라 관인의 노복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귀족지배 하에서나 무신집권 하에서나 원칙적으로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향리의 출신들이 신흥관인으로의 신분적 상승을 보이게 된 것은 귀족지배의 말기로부터 시작하여 무신집권 하에 굴곳 계속되고 무신세력의 퇴조와 함께 뚜렷한 역사현상으로 신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향리를 말하기 전에 향리를 포함한 『리』 전반에 관하여 일고하고 고려조의 관료조직 속에 『리』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함으로써 향리의 관인으로의 진출에 대한 이해가 용이하게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곡의 글(『동문선』 권85, 賀崔寺丞登第詩序)에 의하면
『인재 선발의 법이 원래 문무의 차이가 없었는데, 뒤에 문에서 무가 분리되어 독립한 한 과가 되고, 한편에서 문과 무과를 경유하지 않고 입사하는 자가 있어 그것을 『리』라고 했는데, 『리』는 대개 옛날의 『刀筆之任』을 말하는 것으로써 벼슬길은 문 무 리의 세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관인들이 비록 최고위에 이르러도 진사 즉 문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좋게 여기지 않았었고, 이러한 영향은 송대에 들어 더욱 가중해졌었다. 고려는 당제를 바탕으로 송제를 채택하여 대대로 문사를 숭상하여 승선·대간 및 선거전주의 청요직을 문사들이 오로지 하게 되고, 문과 리는 감히 그것을 바라지 못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조 특히 전반기의 관인 질서가 문무리 3자의 계층적 구조로써 조직되어있던 것을 것이려니와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고려 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된 것에 착안하고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되는 것이다. 문무에 관하여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리』는 도필지임, 즉 사무를 집행하는 말단 서기류-중앙각사의 서리 및 지방의 향리들로써 과거를 경유하지않고 오직 사무능력에 의하여 공적이 쌓아졌을 때 상급관원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문과 무를 동반 서반이라고 했거니와 『리』는 고려사에 빈번히 나타나는 남반 그것에 해당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남반이 동반서반에 비하여 얼마나 저급의 것인가는 『남반잡류』라 하여 잡류와 병칭되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될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숭상하고 정사에 유리된 귀족의 지배하에 있어서 또는 횡포무식하고 정치에 세련되지 못한 무신의 집권하에 있어서 그래도 관인기구가 운영되고 있는데는 이들 『리』의 존재가 힘입은 바 지극히 크다고 생각된다. 벌써 전반기의 관료조직 속에 『리』가 상당한 비중을 가졌던 것은 어사대의 감찰어사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문 리 각5인』이라하여 문신과 동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와같이 『리』의 진출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현저하여 드디어 『리』 그것에서 탈피하고 훌륭한 관인으로 성장하는 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대단히 주목할 것은 중앙각사의 서리보다 지방 향리의 출신들이 더욱 그러한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종조 이주헌(상원인) 조지린(백천인) 숙종조 곽향(충청인) 강극(영강인) 인종조 양원준9충청인) 김향(안동인) 허재(양천인) 목종조 김거공(원주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향리출신으로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부지런하다고 재간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頗稱勤幹』 『관리로서 재능이 있다有吏幹』, 『공적을 쌓았다積勞』 『학식은 없었으나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다無學識, 淸愼能幹事』 『성품이 첨령 부지런하다性廉謹』 『말쏨씨가 좋았다善辭令』 등으로 일컬어지며 그들의 특장점인 사무능력을 유일의 밑천으로 명경대관에까지 자기를 성장시켰던 것이다.

귀족지배의 말기에 이르자 이들 향리의 중에는 벌써 과거에 올라 처음부터 당당한 관인으로 등용되는 예가 종종 보이게된다. 이와 같이 리의 계통에서 과에서 과거로 발신하게된다는 것은 문과 리의 거리를 상당히 근접시키는 동시에 문 리를 동일대상으로 병칭될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사실상 문신 귀족이 다 없어진 뒤이고 보매 이 뒤부터는 문 리라는 말의 개념도 아주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이가 조사의 등급을 매기기를 능문능리(문학에 능하고 또 이무에 능한 자)를 제1로 文而不能吏를 그 다음으로, 吏而不能文을 그 다음으로, 文吏俱不能을 하루 정하여 인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신분질서가 급격히 파괴된 후에 출신성분으로 규정되던 종래의 문 리의 차이는 역사상의 개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오직 자기의 보유능력 여하로써 문 리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향리 및 향리자제들을 이 능력적으로 진출한 것은 이러한 시기에서였던 것이다.

조문발 정가신전 등을 위시하여 문학, 경학 이재吏才 장략將略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써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는것만을 추려보아도 그 수의 방대함에 놀라게되고, 기타 족보 야승 문집 따위에 기재되어있는것과 그 중에 가계가 분명치않으나 대략 이족으로 추정되는 지방출신자들까지 수에 넣으면 고려후기의 역사적 인물들의 출자가 대개 이로 속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향리출신자들이 역사무대에 뚜렷이 움직이고 있는 사회적 추세 속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학술적 정신적 정통연원을 이루고있는 『전조의 유현」들이 이제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향 우탁을 필두로 이곡 이색 이숭인 이집 등 전형적인 사대부들이 모두 향리의 계보를 가지고 등장한 사람들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네들에 의하여 성리학(주자학) 즉 사대부의 생활이념을 이론화한 중국의 신철학이 도입되고 발전된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리학은 이조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써 오백년간 강력한 정치적 사회적 작용을 했거니와 이것이 고려후반기의 향리출신의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도하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문화사적 견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본교 문리대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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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 (하) 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7호 1959/10/15)

앞서 고려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되었다는 것을 말하였거니와 같은 이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관료의 구성자가 중앙각사의 서리에서가 아니라 지방향리출신에 의하여 이룩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중앙의 권력구조가 고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 커다란 변화가 지방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역사의 태동이 중앙도성에서가 아니라 지방농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새로운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고려중기에 일어난 역사의 대전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이해해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역역을 중심으로 한 수취체계를 그 기간으로 삼았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수취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방식이 규정되는데 하나는 개개의 인신에 대한 직접적 수취방식이오 다른 하나는 토지를 통하여 인정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 양자는 중국의 역대국가들이 반복하던 방식이거니와 고려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동하는 인정을 직접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정한 토지면적을 단위로 인정을 부과했던 것이다. 국가는 토지 그 자체에 직접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파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토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체계하에서는 토지를 떠나서 인정은 그 자신을 기능시킬 수 없으며 또한 인정을 사상해버린 토지의 개념이란 지극히 무의미한 것이다. 인정을 부과시키는 토지, 그것이 「丁田」이며 일정한 인정을 내어놓는 토지면적의 단위가 곧 「田丁」인 것이다. 이 「전정」의 분석이야말로 고려사회의 본질을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되거니와 향리의 위치도 이와의 관계에서만 정확히 이해될줄로 믿어진다. 향리는 곧 전정을 통하여 농민을 수취하는 국가권력의 대행자였다. 그러나 농민이 전정에 얽매여 역에 복무하듯이 향리 자신도 역에 의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여기 향리의 특수한 신분이 있는 것이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격적 신분구조는 어떤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부딧칠 때 진작 자기를 변질시킬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고려후반기의 신흥관료의 출신을 향리층에서 구해야 된다고 했거니와 그러한 향리출신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한 경로는 어떠했는가?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 전정의 파괴를 지적하고자 한다. 고정된 토지를 대상으로 한 전정의 법제가 토지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의 변동이란 무엇인가. 즉 고려초기 이래 각처 지방민에 의한 토지의 개발이 중기에 들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달아 무신집권에 의한 토지의 사점-장원의 확대가 그것이다. 농촌에 있어서 생산력의 발전과 생활의 향상은 농지 개간을 증가시키고 각지방에 부민층을 형성시켰거니와 이 발전된 생산력의 소유자는 대체로 종래의 지방유력자 즉 향리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환언하면 향리층으로부터 차차 지방적 성격의 소유자가 나오게되는 것이다.

이 지주적토지소유의 성장은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의 해체과정과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에 의한 역역의 수취는 모순이 심할수록 발악적으로 정도를 더하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유망」으로 표현되어 소위「토지[田]에 역주(役主)가 없어 망정(亡丁)이 많습니다. 민(民)으로서 항심(恒心)이 없어서 도망간 호(戶)가 많습니다田無役主, 亡丁多矣. 民無恒心 逃戶衆矣」라는 결과를 이루었다. 전정은 방역을 위하여 마련되었고 또한 역역에 의하여 스스로 파괴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주적 토지소유는 자기를 성장시키면 무엇보다 직접생산자인 농민(전호)의 노동력을 국가의 수취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신흥지주(향리)들은 은 전민을 가지고 「권호權豪」의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권호」라는 것은 무신집권이후 주마등처럼 전변하는 중앙권력층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들의 장원이란 「계이산천」 「편어주현」할 정도의 확대한 것이지만 이 장원의 성격은 토지에 뿌리를 내린 견고한 지반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중앙권력을 이용하여 「사패」라는 형식으로 문서상의 점유를 한 것 뿐이다. 내용으로 보면 여러 독립된 신흥지주들의 집합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신흥지주들은 장원을 자기들의 지붕국가로부터의 수취를 막는 비호물로 삼고있다가 현 장원주가 정치적으로 실각하면 다시 다른 집권자의 세력 아래로 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호權豪의 광대한 장원들이 그 성장이 매우 빠른 것 처럼 일단 실각하면 그 붕괴도 대단히 용이하였던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해되지않을까. 이 이합집산이 무궁한 장원에 비하여 그 하부기구인 신흥지주들은 자기의 재지세력을 보일보 전진시키고 나아가 자기 및 자기의 자제들을 중앙관료로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혹은 군공 혹은 현권력자아의 결탁으로 관료의 계열에 들어갔거니와 무엇보다 단단한 방도는 과거이었다. 원래 향리층에 대하여 과거는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중에도 명경 제술과 같은 정과는 호정 이상의 손자 이내 부호정 이상의 아들 이내에 한하여 응시를 허락하였고, 또 응시자가 실력이 아주 부족할 때에는 추천자인 주현관이 문책을 받게 될 정도로 까다로웠다. 제술계통의 과업은 그 제한이 많이 누그럽기는 하나 그 출세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오면 모든 신분질서의 혼란과 함께 과거의 여러가지 규제도 사실상 철폐된 셈이었다. 이미 이전 절에서 말한 바 수많은 등과자가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향리출신으로 관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鄕園의 士」니, 「寒門窮巷의 士」니 하며 출세에 있어서의 불리한 지위를 자인하며 또 자위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 「사군자」 「사족」으로 불리워지는 이들 향리층의 자제들은 刀筆文吏를 세업으로 삼고 있으니만치 과거에 응시할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일반민중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들이 곧 전절에서 말한 사자 독서인 신흥지식인 그것으로 귀족문신을 대신하여 관료학자가 될 사람들이다. 이들 향리층의 출신들이 이제 자기를 관료화시켜 중앙정계로 진출하였을 때 이 신진사대부들은 자연히 기성중앙권력층 세신거실과 신구세력의 비호물로 삼아왔던 장원이 이제 자기의 관료화에 따라 하나의 혜택적인 유물로 화해버린 것이다. 

지금껏 장원은 국가의 역역수취로부터 농민의 생산력을 보호하여 신흥지주를 성장시켜 왔던 것인데, 이 지주들의 경제적 성장도가 이제 정권을 장악하여 완전한 자기관철을 요구하는 궁극적 처지에 이르렀을 때 장원은 도리어 족쇄가 되었고, 장원영유자들은 무의미한 기생적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흥지주-사대부들과 장원영유자-세신거실들의 이해대립을 반영하는 고려정부내의 신구세력의 충돌은 처음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으로 나타났다가 필경 최영과 이태조의 대결로 첨예화 되었으며 역사는 후자의 승리로 귀착된 것이다. 

고려의 전제개혁이란 무엇을 의미함일까, 사전철폐를 대강령으로 내세운 이태조일파가 과전법을 통하여 도리어 사전소유를 법제화시킨 일견 모순된 사실은 그것이 신진사대부-신흥지주들에 의한 구세력-장원의 해체라고 생각할 때 의혹이 풀려지지 않을까 한다. 장원의 해체는 지금까지 「三兩其主,」로 어수선하던 토지관계가 「一田一主」로 정리된 셈이다 「일전일주」야 말로 지주적 토지소유의 승리이며 완성인 것이다. 이리하여 지주적 토지소유 즉 새로운 경제관계를 발판으로 하고 신시대의 주도자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이씨왕조의 건설자이며 이씨왕조의 성격은 바로 사대부 즉 지주의 성격인 것이다. 

우리는 이씨왕조의 성격에 있어서
첫째 지주와 역역이 분리되어있다는 것
둘째 역역에 있어서 반드시 몸으로 하지 않는 대신 「납포고정納布雇丁」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토지사유를 법제화시키고 지주로부터 세를 받는다는 것
...등을 들어서 고려와의 차이를 명백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말해둘 것은 고려후기의 향리층의 지주적 성장과 거기 따라 관인으로 진출한 것이 물론 향리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향리중에서도 여러 등차가 있었다. 귀족지배하에 있을 때 벌써 「호강정직자」 「누세유가풍자」인 향리들은 별스런 대우를 받았거니와 대체로 이네들이 고려후기의 지주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지방 사정의 변화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생산력의 소유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영영 새로운 역사적 계기를 얻지못하였고 관인의 신분을 획득한 자 이외의 대부분의 향리들은 종래의 신분과 신분에 따른 역의 의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향리층의 출신으로 형성된 사대부들은 자기 세력의 안정을 위하여 앞으로의 향리층의 계속적 진출을 봉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말에 이미 향리진출에 대한 방지책이 여러 모로 논의되었고 이조에 들어와서 그것이 철저히 시행디었다. 이리하여 신진사대부의 태반인 향리층은 다시 그들의 분열아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신분적으로 고정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조의 향리인 것이다

<글쓴이 본교인문대조교수>

중종실록 57권, 중종 21년 7월 25일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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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관찰사 윤은보(尹殷輔)가 치계하였다....["함종현(咸從縣)의] 유학(幼學) 유인석(劉仁碩)은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습니다. 장가들어 살림을 나 살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와서 뵈었고, 아비 유계선(劉繼先)이 광질(狂疾)에 걸려 날로 점점 심해져서 거의 죽게 되어서는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했습니다.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끊어 효험을 보았다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얘기를 보고, 몰래 도끼를 가져다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불에 태운 다음 이를 빻아 물에 타서 드리니, 그 병이 드디어 치유되었습니다. 그 뒤 아비가 죽자 삼년상을 치르면서 양념 친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미를 자기 집으로 모셔놓고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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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 "삼강행실도"의 효능은 <'불효자를 효자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효자가 되려는 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에 썼던 적이 있다.

https://lazyreader.tistory.com/m/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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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오래된 생각을 담은 글이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효능"이라는 말로 참 교묘하게 논점을 피해간 표현이었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보다도 부모 살해 레벨의 '충격 불효 사건'이 나타날 때마다 그 교화정책을 재검토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이 '예비 효자들 대상 모델 제공' 수준에 만족하였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좀 더 가혹한 현실을 직면해보자. 조선왕조실록 통틀어서 '패륜 사건'은 (아주 잦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타나는 수준이고, 이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바랐던 그림이었을 '부도덕했던 이가 삼강행실도를 읽고 개과천선한(혹은 그렇게 개과천선에 성공했다고 자신-주변인 중 하나가 증언한)' 경우는,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알려진 바/보고된 바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부도덕/패륜/비행'으로 판단될 레벨의 인물이, 다른 것도 아니고 "(광의적인 의미의)학습을 통한 재사회화"에 도달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도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이며, 기법과 인프라 모든 것이 모자란 전근대 사회 기준 부도덕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세종 자신의 이상이 패륜적 범죄자에 대해, 가중 처벌보다, 가르치는 일을 우선시하기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실 "패륜적 (예비)범죄자"가 감화된 케이스가 제대로 보고가 안 된다는 점은 참 민망하기까지 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실패'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들 스스로가 밝힌 "삼강행실도"의 편찬 취지에 백성들이 '관감(觀感)', 그러니까 [모범이 되는 대상을] 보고, 느끼게끔 하고자 한다는 점을 명시한 만큼, 최소한 '모델 제시'가 목적 자체에서 아주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 '관감'은 여말선초부터 부각된, 교화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이며, 박사논문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지한(=그렇기에 부도덕한)'민들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킨다는 목표에 '미치지 못할' 수는 있어도, 그래도 대충 그렇게 '모범으로 부각된 행동'을 모방하는 이들, 다시말해 '효자'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로도 어찌보면 '타협적인 만족'에 도달할 만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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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사료를 읽는다면, 인용한 중종대 유학 유인석의 사례를 만날 때 좀 난감해진다. 중종 유학 유인석의 사례는 "삼강행실도의 전파 성과"로 이따금 인용되는 사료인데, 잘 보면 꼭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유인석의 사례를 전달한 평안 관찰사 윤은보의 보고대로라면, 함종 유학 유인석이 '효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아버지의 병환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부친 사망 후 삼년상을 치루고, 이후 모친 봉양에도 힘썼다지 않던가. (결혼 후 부모와 동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16세기 초의 혼인풍습의 일면을 읽어낼 수 있지만, 그건 별도로 치자)
문제는 "삼강행실도"가 유인석에게 사용된 용법에 있다. 보고에 따르면 유인석이 "삼강행실도"를 통해 참조한 것은 그 '효행'에 대한 감명이 아니라 아버지가 얻게 된 '광질[狂疾]'의 치료법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유인석이 효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록에 인용된 기록이 어찌되었든 유인석 본인→평안 관찰사 윤은보를 거쳐 온 텍스트라는 점을 감안하고, 나아가 윤은보, 어쩌면 유인석 자신에 이르기까지 '국가에게 그 효행을 공인받기 위해 쓰여진' 보고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사료를 예사롭게 읽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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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인석의 일이 관원에게 보고된 시점이 언제일지는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관찰사에게 그 정보가 넘어간 시점이 부친 삼년상 후 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를 염두에 두며 유인석의 입장으로 들어가보자.
경위야 어찌되었건 손가락을 잘라서 먹여드린 처방은 성공하였다. 이제 그 경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관에 보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관의 입장에서도 굳이 항간의 소문에 의존할 이유가 없이, 본인에게 사정을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여기서 유인석이 바로 그 시점에, 관원 내지 그 지방자치의 말단 담당자에게 "삼강행실도를 보고 그 효험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며 스스로 보고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삼강행실도"를 보고 그 처방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은 유인석 자신의 증언이 없이는 알 수 없는 정보다. "삼강행실도"를 '처방전'으로 써먹었다는 점이.. '포상'을 목표로 하든 '모범적 사례'로서의 윤색을 목표로 하든 그 목표를 극대화해주는 좋은 포인트라고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연산군대에는 '너무 위급한 사례만이 강조된다'며, 삼강행실도 방식에 치중된 포상을 개선하자는 지적마저 나와버린 터였다. 오히려 "삼강행실도를 열심히 읽고 감화되었다"라고만 증언했다면(이조차 거짓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했더라면, 유인석에게서든-윤은보에게서든 더욱더 효과적인(?)사례가 될 수 있었을 것임은 어렵지않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시기적 기준이 아니라, 중종대 당대적인 분위기를 감안해봐도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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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의미에서 유인석의 사례는. 역설적으로 사실에 가깝겠거니 싶은 느낌과, 보고받은 관리들이 '애매한 기분'이었겠거니 싶은 느낌을 동시에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사료로 보이게 된다.
사실 국왕 및 조정 대신 입장에서, 유인석을 포상하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은 아니다(이미 그 사례가 없이도 충분히 효자니까). 하지만, 유인석의 경우로 "삼강행실도"의 성공을 운운하기에는 중종대 위정자로서도, 현재의 연구자로서도 아무래도 곤란하다. 결국, 어느 쪽으로서든 '애매하게 타협'할 수 밖에 없다. 중종대 위정자로서는 효자라는 거시적 명분 하에 버무려서 포상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구자로서도 '삼강행실도가 어찌되었든 보급이 널리 되긴 했다'는 사례로서 들먹일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삼강행실도 편찬 보급", 나아가 국가 주도 풍속안정책 그 자체가, 목표 그대로가 성취되는 것을 성공이라 협의적으로 정의한다면 그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사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실패' 하나로 그 사업 전체의 향방을 평가하는 것이 정확한 설명인 것 또한 아니다. 그렇기에, 불만족스럽더라도, 그 사업에 따른 예기치 못한 귀결, 그리고 그 귀결에 대한 타협적인 만족까지도 결국 그 사업의 성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22.10.17

 

보충1
사실 "조선은 유교국가/사회이다or아니다"라는 표현이, 일반 교양 차원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까지 꽤 경직된 의미로 활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4에서 언급한 '성패'를 단정하고자 하는 어떤 이분법적 전제를 체감하게 되기도 한다.
다만, 그런 식으로 엄격한 '성패'를 따지자면, '성공'한 일이라는 게 세상에 몇이나 있겠으며, 반대로 '성공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없는 셈 쳐도 되는 일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겠는가. 늘 생각해보곤 한다.


보충2
인육 섭취를 통한 치병. 에 대해 보충하면.
1. 실제로 "삼강행실도"의 여말선초 사례에서는 '(정신병 내지 발작 증세 전반에 대해) 사람의 뼈를 먹이면 효과가 있다고 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먹여드린 사례가 자국 사례에 한정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유독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대강 이맘때 한반도에 유행하던 민간비방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비슷한 신체훼손 사례 중에서도, 유독 한국의 자료에서만 '손가락을 자른' 사례가 빈출하는데, 역시나 시작은 민간 비방에서, "삼강행실도"를 경유해 유행한 처방(?)은 아니었을까. 상상.
2. 중국 사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할고(割股)'그러니까 허벅지를 잘라 먹이는 케이스이다. 물론 딱히 한국 사례라고 해서 할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할고가 광증과 연관되어 처방된 케이스는 중국 당(唐)대 문헌에도 있어서, 조선은 물론 조선 사례를 전해들은 명대 사신들까지도 양자의 차이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3. 단지든 할고든, 인육 섭취를 통한 치병은 과연 어디에서 연원하였는가. 그것도 나름 여러 설명들이 있었는데, 당나라 때 "본초습유(本草拾遺)"의 처방을 기원으로 한다는 설명과, 불교의 본생담을 연원으로 한다는 설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대만의 이오李敖 선생의 1986년 논문 "중국여인할고고中國女人割股考"에서 소개된 이래, 구중린邱仲麟 선생 등 이후의 대만 학자들에게서 지지되는 것 같고, 후자는 Keith N Knapp 선생의 논문에서 본 적이 있다.)
한국사 분야에서는 왕쓰샹 선생의 12년 논문에서, 조선 곽산의 효녀 사월의 단지(斷脂)사례가 중국 사신에게 전해지는 문제에 대해 다루며 이 두 설의 대비에 대해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는 선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4. 사실 3의 사안에 대해, '연원'을 밝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례에 한정한다면, 최소한 조선 건국에 아주 가까운 시기의 어떤 연원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원 자체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최소한 오래된 전승같은건 아니라는 뜻)

1. "상이 말하였다. 경은 언문을 이해하는가?  
(경연 특진관)원경하가 말했다.  신이 어릴 적 경서를 읽을 때, 조금 언해를 보았지만, 환히 알지는 못합니다.
”上曰, 卿解諺文乎? 景夏曰, 臣少讀經書時, 僅看諺解, 而未能通曉矣“
(승정원일기 987책, 영조 21년 6월 16일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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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妹書雖慰, 而盡送內行, 獨守空衙, 傍無替讀倩寫者, 奈何. 吾之平生, 不識一箇諺字, 五十年偕老, 竟無一字相寄, 至今爲遺恨耳. 此事想有聞知, 爲之傳及如何?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答族孫 弘壽 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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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님에게 돈 두 냥을 찾아 보내는데 언서(諺書)를 쓸 줄 모르니 네 누이동생에게 쓰게 해서 보내는 게 좋겠다.
姊主料錢, 貳兩覓送, 而不能作諺書, 令汝妹倩艸書送, 可也.
(又書-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_연암 박지원이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박지원 저 박희병 역),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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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사족들은 언문(이하 한글)을 얼마나 널리 알고 있었는가' 문제는 입증하기가 꽤 쉽지 않은 문제다. 정인지 말마따나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라는 말을 믿어볼래면 또 믿어볼 수도 있고, 또 그만큼 보급도 빠르게-널리 이루어진 듯 한 흔적이 (최소한 남아있는 자료 하에서는)  드문드문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굳이 폼을 좀 잡아보자면, '존재의 입증보다 부재의 입증이 곱절은 힘든 법'이라고 했던가, 좀 더 즐기는 경구로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라고도 했던가. 아무튼, '한글을 아는 사족-남성이 한글을 썼던 증거'야 어찌저찌 잘 찾으면 또 찾아봄직 하겠지만, '한글을 모르는 사족-남성이 한글을 쓰지 못한 증거'는, 최소한 존재하는 자료 내에서 확인하기가 참 쉽지가 않은 것이다.
방법론상으로만 까탈스럽게 따지면, 이 문제는 '한문'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도 한문을 익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주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라는 '인상'을 감각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설득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당대 사료로 꼭 좁혀봐도 '제 뜻을 잘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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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의 승정원일기 기록과, 2/3의 박지원 서간들은 그 여건 속에서, '사족 남성의 한글 문식'과 관련된 재미난 사례다. 1에 나오는 경연 특진관 원경하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언해는 '어릴 적 경서를 읽을 때 조금 본' 수준이고, 한국 나이 48세인 영조 21년 시점에 와서는, 최소한 경연 같이 공신력있는(?)자리에서 드러낼 수준은 되지 못한다.(장황해질 우려가 있어 길게 말하지 않겠지만, 당시 분위기가 언문을 안다고 말해서 크게 문제시될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오히려 굳이 따진다면, 원경하는 '모른다고 하는 바람에 핀잔을 듣는' 쪽에 가깝다..) 
2/3에 나오는 박지원 이야기는 1보다는 잘 알려진 편인데, 이 또한 박지원 말 대로라면, 박지원은 '평생 언문을 쓰지 못해 해로한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고'(다시말해 아내는 한문을 몰랐다는 뜻이다). 동시에, 누님에게도 편지를 바로 보내지 못해, 큰아들→딸로 부탁을 거쳐거쳐 언문편지를 쓰게 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3의 서간 수신자인 아들 박종의도 언문을 쓸 줄 모르는 것인가? 짐작되기도 하지만, 일단 확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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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1~3의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조선시대 사족 남성들은 한글을 쓸 줄 몰랐다'는 주장까지를 입증할 수는 없다. 더 솔직히 말해, "예외"라는 필승카드를 내밀면서 "박지원/원경하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사족 남성들은 널리 한글을 쓸 수 있었다"라고 누군가 밀어붙이기 시작한다면 딱히 이를 설복시킬 수단도 없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한풀 기세를 낮춰서, 보수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이쯤에서 도출가능한 설명은 "최소한, 18세기 후반 쯤에는, 사족 남성이 한글을 못 쓴다는게 딱히 공적인 흠결이 되지는 않았다(=사회생활의 필수요건은 아니었다)"정도 쯤일 것이다. 밍숭맹숭하지만 딱 그저도 수준까지가 한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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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시대 한글과 관련된 연구는 국문학-언어학계에서 이루어진 것만 셀 수 없이 많지만, 생각보다 한국사 분야에 집중하면 수가 많다고 보긴 어렵다. 세종~세조시기 즈음을 설명할 때 '말하고 지나가는' 영역에 가깝다는게 정확한 위상일지도 모른다. 좀 심하게 말해, 그냥 '예외'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관행도 생각보다 만연해있다.(실제로 '눈밭에 핀 한 송이 꽃'-아름다워 보이지만 대세를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로-같은거 아니냐는 말을 실제로 공적인 채널로 들은 적이 있다)
어찌보면 전근대 민간사회/민간문화에 대한 설명들을 이끌어내는 게 거진 다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있었는데 없어졌고, 무엇이 없었는데 생겨났다는 것을 말해야 어떤 '이야깃거리'를 짜낼 수 있는데, '있긴 했음'을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 확산 정도를 말할 방법도, 더 나아가 '없었음'을 말할 방법도 없으니. 일단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 정도 수준은 되긴 했던 거 같다' 같은 맹탕같은 설명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맹탕같은 설명이라도 꾸준히 쌓다가 보면 은근히 뭐라도 떠오르는게 있을런지..;;;(아니면 별 수 없는 것이고).

 

 

22.10.09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6월 28일 경술 2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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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에서 상소하였다
....지금 국가가 편안해도 위태한 것을 잊지 아니하여, 만일 예기치 못한 변고가 있으면 어떻게 이를 막을까 하여 오로지 창고를 충실히 채우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아, 논밭을 재차 측량하여 그 잉여(剩餘)를 구하고, 넓게 둔전(屯田)을 열어서 세액을 늘리고, 연호(煙戶)의 쌀[米]과 양맥(兩麥)의 세까지도 모두 거두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먼 곳을 바라본 것이긴 하나, 모두 눈앞의 해가 되어서 한갓 백성에게 원망을 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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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료는 나름 알려졌다면 잘 알려져있는 자료인데, 재정-환곡과 관련된 직접적인 연구 외에도, '민본사상을 근거로 한 국가 제도/부국강병책 비판'을 설명하는데 자주 인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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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충 파악하기로, 위 자료를 '민본'과 결합해서 설명하는 두 세가지 방식이 있는 것 같다.
ⓐ 조선 초 위정자들이 그야말로 '민심'에 집중하였음을 강조하는 방식.. 여기서도 둘로 나뉘는데
-1 사상적 차원에서, 위정자들이 정말로 민심에 관심이 있었음을 주장하거나.
-2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상, 체제유지를 위해 피치못해 민심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하거나.
ⓑ 연호미법 등의 주도층을 공신 내지 고위 관료로 설정하고, 그 반대자 측을 연호미법 등으로 피해를 입게 될 향촌 기반 중소지주(향호)로 설정하여, 후자에 의한 전자 비판을 강조하는 방식.
(그 연장선에서, '주자의 향촌지배론'을 경유해 국가의 개입주의적 처사(?)에 대한 신유학자의 비판. 정도로도 느슨하게 연결짓는 기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이라는 인상까지는 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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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는 그거 대로 해야 할 말이 많은 문제다. 특히 ⓐ-1의 차원에서, 여말선초 유학자 관료들의 애민/민본적 발언들을 '선의'와 '기만' 중 어느쪽으로도 해석하지 않는 대안을 궁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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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의 차원이다. ⓑ의 설명방식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정치-사상의 문제도 실제로는 본인들의 경제적 이익 문제'라고 단순화 할 수 있는데, 사실 꼭 이 사료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설명법을 큰 틀에서 차용하고 있는 경우들은 특히 오래된 연구들일수록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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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를 차용한 연구들을 아무리 뜯어봐도 그 직접적인 근거란게 없다는 데 있다. 아주 느슨~하게, 상당히 많은 '보이지 않는 전제들'을 깔고 깔고 또 깔아둔 채로 '역시나 그런 거 아니겠나' 식으로 넘어가는 설명들이다. 그래서 그 논증을 인용하면서 써먹으려다가, 그 주장을 원사료 기반으로 재정리할 때 뒤통수(?)맞게 되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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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의 '경제 기반 설명'을 차용한 선학들의 연구가 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학들의 시대에는 필요한 연구들이었음'을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개인적으로, '선학이 살았던 시대적 요구를 이해하자'는 방식의 훈훈한(?) 독해가, 스스로의 '실증적 연구태도'와 대비되는 맥락에서 활용되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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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같은 '선행 연구의 시대적 분위기'라고 하더라도, 상식 내지 공감대라는 말을 더 즐기는 편이다. 여기서 '공감대'란 특정한 정서 문제라기 보다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직관적인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종의 상식적 전제같은 것을 말한다.(요새는 이런걸 '라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익숙치는 않은 단어다.) 
여하간, ⓑ가 유행하던 시절, 이를 지지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야만스럽게 말하자면, '위정자의 발상-제안'은 '해당 개인이 속한 집단이 직접적으로 직면한 경제적 이해관계 그 자체'와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는게 상식 내지 공감대의 영역인지라, 별다른 구구절절한 근거 없이도 '그러려니' 서로서로 납득을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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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그런 공감대에서 벗어나게 된 지금 우리는 사료를, 나아가 과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가 문제다.
좀 솔직히 말하자면 '국고 충당을 민생 안정을 위해 양보하라'는 자료를 통해서 '공신 대지주와 중소지주 관료층의 대립'을 당연한 듯 읽어내는 설명들을 나로서 공감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자료에 나온 것만이 유일한 사실'인양 굴고 싶지도 않다. 경제 문제로부터 내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발상 저변을 경제문제로 환원시키고 싶지도 않다. 더 솔직하게는, '말할 수 없는'것을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맞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그게 결국엔 제 살 파먹기라는 생각을 안 하기도 어렵다. 헷갈린다 헷갈려...;;;

 

 

22.10.06

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5월 21일 기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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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서울에 문려(門閭)에 정표(旌表)를 세우는 일이 무척 많은데, 이것이 어찌 모두 실지가 있어서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외방에서 보건대, 잔인(殘忍)한 기질이 있는 자가 더러 분(憤)을 이기지 못해서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허실(虛實)을 불가불 잘 가려서 표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조정에서 자기를 염속(斂束) 하는 선비를 존중하니, 서울 사람 중 본래 염속하지 않는 자도 겉으로는 모두 염속하는 체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진용(進用)할 때에는 그 허실을 잘 살펴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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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표정책의 전통 이래, 더 직접적으로는 세종대 "삼강행실도" 이래 효자 등을 포상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단으로 거론되었다. 윤리적으로 탁월한 이를 포상하는 것은, 사료 용어로 빌어 말하면 '관감(觀感), 그러니까 훌륭한 행위를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되게끔 전시하여, 이를 토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효자 포상'은 적어도 '본성 함양'이라는 신유학 이후 유행한 윤리-교육론의 논리와도 비교적 부담없이 조화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으니, 그 선한 마음을 적당히 '발흥'시켜 주기만 하면 금방 효자가 나타날 것이다.는 .낙관적 해석으로 매끄럽게 정리되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정상情狀'에 대한 고려가 널리 이루어진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그 선한 본성이 여러 여건상 피어나지 못한 것을 펼쳐주어야 한다>는 논리 하에선, 행동의 가부 이상으로 경황상 드러난 '의도'가 훨씬 중요해지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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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포상'은 그 자체로 '(신)유교 전통'과 결합되기 어려운 약한 고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저런 복잡한 논점이 많지만, 각설하고, '포상을 바란 거짓 행위'를 분별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 주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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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유학 이후 줄기차게 강조해오던 '형벌에 대한 거리낌'과 상충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적어도 고려 말 이후부터, '형벌'을 사용한 대민통치를 내놓고 정당화하는 것에 위정자들이 느끼는 부담을 자료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유교적"이라는 말로 일반화하거나, '성리학'이라는 말로 단순화하기는 주저되지만, 어쨌거나 늦게 쳐도, 정도전 이후부터는 '형벌'은 '피치 못해 사용하게 되는 통치의 보조 도구'일 뿐, 그 자체로 통치의 중심인양 정당화되지 못한다.(고려 말 이전까지도 딱히 '刑治'가 드러내놓고 내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형벌의 불가피성'을 굳이 구구절절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자료의 부족함 탓에 이를 딱 잘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고려 말 이후에 비해서는' 형벌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부담이 덜했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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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을 써선 안 되는 이유는 대체로 논어의 유명한 구절을 빌어 "처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다시말해 민의 '마음'을 형벌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포상이라고 다른 게 아니다, '포상을 바란 선행'의 영역을 내버려두게 되면, '포상을 바라기만 할 뿐, 선한 마음이 일어난 것은 아닌' 상태 또한 저절로 방치되게 된다. 
이는 소위 법가 전통 하에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비자 식의 논리대로라면, 신하의 선한 의도같은 건 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한비자도 (아낌없이 마구 쓰면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포상을 분명히 강조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데, 신유학적 윤리관 내에서는 그 자가당착을 해결할 방법이 달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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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사료대로, 포상을 잘 따져보고 내리자는 제안도 해 보고, 그냥 '특이 행동'에 대해서는 포상하지 말고, '길게 잘한' 사람만 포상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모두 대충 16세기의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적당한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혹시라도 포상을 바라고 한 행동이 적발된다면, 큰 벌을 내리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게 또 대충 16세기의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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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사실 좀 우스워진다. '형벌로 다스리지 말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함양하자'는 이야기가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왔는데, 결국에는 일벌백계만 남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도리는 없다. 여전히 유학자 위정자들이 사는 세계는 '인륜의 붕괴'가 판치는 난세인 것이요, 그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그들 자신의 지식인-정치가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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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유하자면.. 어딘가 고장난 차를 새로 만들지도 못하는 노릇이니, 망가진 부분을 되는만큼 보수하면서, 덜컹덜컹 계속 몰고가야 하듯이... 
운영하다 보면 그 취지를 완벽히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라도, 결국 완전히 다 새로 뒤엎을수도 없는 판국이니, 문제시되는 것이나 조금씩 손보면서 달려나가게 되는 것이 제도사(어쩌면 인간사의?)의 필연인 것일지도.;;


1,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라는 전통적인 명제는 오랜 시간 힘을 가져온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생전에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비록 정치적으로 실각했지만, 사후에도 그의 생각은 여러 조선 초 혁신을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2. 따라서, 최근 제기된 '(사상가로서의) 정도전의 조선 건국시 역할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주장의 일련의 연구들은 앞서의 통설을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음미할 여지가 있다. 정도전 일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정치적 작용에 대한 문제제기일수 있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최근 발표된 연구들은 종래 사상사 연구의 관성화된 서술들을 문제삼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우선 말해야 하는 것은, 최근 연구들의 주장과 같이 정도전의 활동이 조선 건국 및 이후의 사상적 전개에 미친 '영향'을 직접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정도전 이후, 조선 초 특정한 정책의 입안 과정에서 '정도전의 의견/저술을 참고하였음'을 적시한 바 또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말해, 종래 연구에서 관행적으로 여말선초 정도전의 사상적 역할을 입증하기 위해 활용해왔던 방법인, '정도전의 저술 내용이 조선 초의 생각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정도전 자신이 신원되고, 그 문집이 복간됨을 확인하는 것'...정도로는... <정도전이 왕조의 기틀을 설계했다>는 식의 강도높은 주장이 입증되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문제제기 또한 그 의미에서 충분히 타당하다는 뜻이다.


3.다만, 이로써 정도전 연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법'까지가 재정립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정도전의 저술내용이 조선 개국초 사조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그 역할을 정의내려도 최소한 '고려말부터 존재한 정도전(과 같은+실질적으로 정도전에게서만 구체적 실체가 확인되는) 사상적 언어'가, 조선 건국 전후의 정치적 비전으로 계승되었다는 점 만큼은 충분히 보여준다.

관련 연구자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이야기지만, 정도전의 저술을 경유하지 않고, 조선 초기 체제개편의 지적 토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일차적으로 '주어진 증거가 정도전 저술밖에 없다'는 것의 의미하기에, 정도전 저술의 역할을 입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전 사상의 '역할'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해도 정도전(과 같은) 사상'의 등장이 개국 전후에 등장했음을 보여주는데는 충분하다. 다시말해 정도전 사상에 대한 탐구가 예전에도-지금도-앞으로도 조선 초를 보는 유의미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현재까지의 자료적 환경에서는 필연에 가깝다.


4. '정치적 변동'에 대한 사상의 역할은, 과장되어서도/간과되어서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자주 만나는 지적대로, 학술적 언어가 그 자체로 정치-사회적 힘을 발휘하여, 심지어 '스스로 역사를 움직여나갈' 것이라는 식의 오래된-낭만적-관행적인 전제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정치집단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을 제공하고, 나아가 정치/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상(가)의 역할을, 당장의 정쟁 참여-정책 반영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 여부만으로 평가 절하할수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사상'이 역사 연구에서 '(정치-경제와는 무관한)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공리공담'인양 소비되는 경향을 목격하곤 한다. 비판하는 분들의 언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상사(유사한 분야)의 연구 발표에서도, 자신의 연구내용이 '오롯이 사상사만은 아닌, 무언가 그것보단 알맹이 있는 것'임을 애써 서두에서 변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꽤 오래되었다. '사상=학술'이 '현실'과 무관하거나 별개라는 주장에 대한 찬반과 별개로, 그러한 과격한 주장이, 22년 현재의 한국 사회 내 '한국사 연구'의 존재 가치(라는게 만일 있다면)와 양립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적잖이 우려스럽다.

 

'사상=학술이 대관절 현실 자체와 무관/별개로 운영되는 자폐적인 정신활동'일 뿐이라면, '사상이 현실과 무관함'을 재확인하는 그 연구 자체는 지금의 세상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사상과 현실의 연관관계는,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하는'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최소한 당장의 한 두가지 의심만으로, 그 무관성부터 주장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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