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이 말하였다. 경은 언문을 이해하는가?
(경연 특진관)원경하가 말했다. 신이 어릴 적 경서를 읽을 때, 조금 언해를 보았지만, 환히 알지는 못합니다.
”上曰, 卿解諺文乎? 景夏曰, 臣少讀經書時, 僅看諺解, 而未能通曉矣“
(승정원일기 987책, 영조 21년 6월 16일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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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妹書雖慰, 而盡送內行, 獨守空衙, 傍無替讀倩寫者, 奈何. 吾之平生, 不識一箇諺字, 五十年偕老, 竟無一字相寄, 至今爲遺恨耳. 此事想有聞知, 爲之傳及如何?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答族孫 弘壽 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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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님에게 돈 두 냥을 찾아 보내는데 언서(諺書)를 쓸 줄 모르니 네 누이동생에게 쓰게 해서 보내는 게 좋겠다.
姊主料錢, 貳兩覓送, 而不能作諺書, 令汝妹倩艸書送, 可也.
(又書-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_연암 박지원이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박지원 저 박희병 역),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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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사족들은 언문(이하 한글)을 얼마나 널리 알고 있었는가' 문제는 입증하기가 꽤 쉽지 않은 문제다. 정인지 말마따나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라는 말을 믿어볼래면 또 믿어볼 수도 있고, 또 그만큼 보급도 빠르게-널리 이루어진 듯 한 흔적이 (최소한 남아있는 자료 하에서는) 드문드문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굳이 폼을 좀 잡아보자면, '존재의 입증보다 부재의 입증이 곱절은 힘든 법'이라고 했던가, 좀 더 즐기는 경구로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라고도 했던가. 아무튼, '한글을 아는 사족-남성이 한글을 썼던 증거'야 어찌저찌 잘 찾으면 또 찾아봄직 하겠지만, '한글을 모르는 사족-남성이 한글을 쓰지 못한 증거'는, 최소한 존재하는 자료 내에서 확인하기가 참 쉽지가 않은 것이다.
방법론상으로만 까탈스럽게 따지면, 이 문제는 '한문'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도 한문을 익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주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라는 '인상'을 감각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설득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당대 사료로 꼭 좁혀봐도 '제 뜻을 잘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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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의 승정원일기 기록과, 2/3의 박지원 서간들은 그 여건 속에서, '사족 남성의 한글 문식'과 관련된 재미난 사례다. 1에 나오는 경연 특진관 원경하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언해는 '어릴 적 경서를 읽을 때 조금 본' 수준이고, 한국 나이 48세인 영조 21년 시점에 와서는, 최소한 경연 같이 공신력있는(?)자리에서 드러낼 수준은 되지 못한다.(장황해질 우려가 있어 길게 말하지 않겠지만, 당시 분위기가 언문을 안다고 말해서 크게 문제시될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오히려 굳이 따진다면, 원경하는 '모른다고 하는 바람에 핀잔을 듣는' 쪽에 가깝다..)
2/3에 나오는 박지원 이야기는 1보다는 잘 알려진 편인데, 이 또한 박지원 말 대로라면, 박지원은 '평생 언문을 쓰지 못해 해로한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고'(다시말해 아내는 한문을 몰랐다는 뜻이다). 동시에, 누님에게도 편지를 바로 보내지 못해, 큰아들→딸로 부탁을 거쳐거쳐 언문편지를 쓰게 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3의 서간 수신자인 아들 박종의도 언문을 쓸 줄 모르는 것인가? 짐작되기도 하지만, 일단 확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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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1~3의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조선시대 사족 남성들은 한글을 쓸 줄 몰랐다'는 주장까지를 입증할 수는 없다. 더 솔직히 말해, "예외"라는 필승카드를 내밀면서 "박지원/원경하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사족 남성들은 널리 한글을 쓸 수 있었다"라고 누군가 밀어붙이기 시작한다면 딱히 이를 설복시킬 수단도 없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한풀 기세를 낮춰서, 보수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이쯤에서 도출가능한 설명은 "최소한, 18세기 후반 쯤에는, 사족 남성이 한글을 못 쓴다는게 딱히 공적인 흠결이 되지는 않았다(=사회생활의 필수요건은 아니었다)"정도 쯤일 것이다. 밍숭맹숭하지만 딱 그저도 수준까지가 한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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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시대 한글과 관련된 연구는 국문학-언어학계에서 이루어진 것만 셀 수 없이 많지만, 생각보다 한국사 분야에 집중하면 수가 많다고 보긴 어렵다. 세종~세조시기 즈음을 설명할 때 '말하고 지나가는' 영역에 가깝다는게 정확한 위상일지도 모른다. 좀 심하게 말해, 그냥 '예외'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관행도 생각보다 만연해있다.(실제로 '눈밭에 핀 한 송이 꽃'-아름다워 보이지만 대세를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로-같은거 아니냐는 말을 실제로 공적인 채널로 들은 적이 있다)
어찌보면 전근대 민간사회/민간문화에 대한 설명들을 이끌어내는 게 거진 다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있었는데 없어졌고, 무엇이 없었는데 생겨났다는 것을 말해야 어떤 '이야깃거리'를 짜낼 수 있는데, '있긴 했음'을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 확산 정도를 말할 방법도, 더 나아가 '없었음'을 말할 방법도 없으니. 일단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 정도 수준은 되긴 했던 거 같다' 같은 맹탕같은 설명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맹탕같은 설명이라도 꾸준히 쌓다가 보면 은근히 뭐라도 떠오르는게 있을런지..;;;(아니면 별 수 없는 것이고).
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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