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라는 전통적인 명제는 오랜 시간 힘을 가져온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생전에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비록 정치적으로 실각했지만, 사후에도 그의 생각은 여러 조선 초 혁신을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2. 따라서, 최근 제기된 '(사상가로서의) 정도전의 조선 건국시 역할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주장의 일련의 연구들은 앞서의 통설을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음미할 여지가 있다. 정도전 일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정치적 작용에 대한 문제제기일수 있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최근 발표된 연구들은 종래 사상사 연구의 관성화된 서술들을 문제삼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우선 말해야 하는 것은, 최근 연구들의 주장과 같이 정도전의 활동이 조선 건국 및 이후의 사상적 전개에 미친 '영향'을 직접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정도전 이후, 조선 초 특정한 정책의 입안 과정에서 '정도전의 의견/저술을 참고하였음'을 적시한 바 또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말해, 종래 연구에서 관행적으로 여말선초 정도전의 사상적 역할을 입증하기 위해 활용해왔던 방법인, '정도전의 저술 내용이 조선 초의 생각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정도전 자신이 신원되고, 그 문집이 복간됨을 확인하는 것'...정도로는... <정도전이 왕조의 기틀을 설계했다>는 식의 강도높은 주장이 입증되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문제제기 또한 그 의미에서 충분히 타당하다는 뜻이다.


3.다만, 이로써 정도전 연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법'까지가 재정립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정도전의 저술내용이 조선 개국초 사조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그 역할을 정의내려도 최소한 '고려말부터 존재한 정도전(과 같은+실질적으로 정도전에게서만 구체적 실체가 확인되는) 사상적 언어'가, 조선 건국 전후의 정치적 비전으로 계승되었다는 점 만큼은 충분히 보여준다.

관련 연구자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이야기지만, 정도전의 저술을 경유하지 않고, 조선 초기 체제개편의 지적 토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일차적으로 '주어진 증거가 정도전 저술밖에 없다'는 것의 의미하기에, 정도전 저술의 역할을 입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전 사상의 '역할'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해도 정도전(과 같은) 사상'의 등장이 개국 전후에 등장했음을 보여주는데는 충분하다. 다시말해 정도전 사상에 대한 탐구가 예전에도-지금도-앞으로도 조선 초를 보는 유의미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현재까지의 자료적 환경에서는 필연에 가깝다.


4. '정치적 변동'에 대한 사상의 역할은, 과장되어서도/간과되어서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자주 만나는 지적대로, 학술적 언어가 그 자체로 정치-사회적 힘을 발휘하여, 심지어 '스스로 역사를 움직여나갈' 것이라는 식의 오래된-낭만적-관행적인 전제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정치집단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을 제공하고, 나아가 정치/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상(가)의 역할을, 당장의 정쟁 참여-정책 반영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 여부만으로 평가 절하할수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사상'이 역사 연구에서 '(정치-경제와는 무관한)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공리공담'인양 소비되는 경향을 목격하곤 한다. 비판하는 분들의 언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상사(유사한 분야)의 연구 발표에서도, 자신의 연구내용이 '오롯이 사상사만은 아닌, 무언가 그것보단 알맹이 있는 것'임을 애써 서두에서 변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꽤 오래되었다. '사상=학술'이 '현실'과 무관하거나 별개라는 주장에 대한 찬반과 별개로, 그러한 과격한 주장이, 22년 현재의 한국 사회 내 '한국사 연구'의 존재 가치(라는게 만일 있다면)와 양립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적잖이 우려스럽다.

 

'사상=학술이 대관절 현실 자체와 무관/별개로 운영되는 자폐적인 정신활동'일 뿐이라면, '사상이 현실과 무관함'을 재확인하는 그 연구 자체는 지금의 세상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사상과 현실의 연관관계는,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하는'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최소한 당장의 한 두가지 의심만으로, 그 무관성부터 주장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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