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의뢰받아 썼던 교육용 원고.

이런저런 곳에 알바 겸 청탁 겸으로 썼던 '잡글'중에서는 나름 애정이 있는 녀석이라, 따로 갈무리해 둔다. (연재처에 업로드된 글에서 일부 어색한 문장이나 표현을 좀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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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강행실도』란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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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는 세종대 편찬된 백성들을 교육하기 위한 윤리·도덕적 사례를 담고 있는 교화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윤리교육을 위한 다양한 교화서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삼강행실도』계통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널리 간행되고 읽힌 책 중에 하나였다. 유교적 윤리를 기반으로 사회 혼란을 방지하고자 했던 조선에서는 제도화된 지식이나 관습, 당시 사회의 지배 규범 등을 피지배층에게 전파시키고자 했다.

그 중 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교화서의 편찬·보급은 그 정확한 사례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이었다. 『삼강행실도』에는 오랜 중국·한국의 역사 속 효자·충신·열녀들이 수록되었는데, 그 수록과정을 통해 세종 시기의 조선의 정치·문화적 환경이나, 문제의식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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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는 종래 고려말까지 읽히던 『효행록』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교화서였다. 『효행록』은 고려 충목왕 2년 권부·권준·이제현에 의해 저술된 책이었다. 『효행록』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62건의 사례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불교적인 설화나, 효행 관련이 아닌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하는 설화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효행록』은 조선 건국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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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간행이 『효행록』과의 차별화를 목표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초부터 『삼강행실도』가 『효행록』을 새로 펴내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계기는 세종 10년(1428) 10월 3일,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김화의 사건에 대해 충격을 받은 세종은 『효행록』을 편찬하되, 그에 더해서 삼국·고려시대 사람의 이야기를 더해서 책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효행록』을 보완하던 유학자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는 많은 부분들을 더하고 고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책인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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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의 고민들 : 어떤 인물을 수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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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이전의 『효행록』 보다 더욱 민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교화서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전까지 있었던 『효행록』의 좋은 점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여러 부분들을 고쳐나갔다. 우선은 더욱 백성들이 공감할 수 있고 배우기 쉽게끔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서 세종이 『효행록』 개찬을 명할 때 언급한 것처럼 자국의 사례를 추가하여 백성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자 했고, 그림을 첨부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 말 『효행록』과 조선 초 『삼강행실도』의 가장 큰 차이는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심 가치가 ‘효’에서 ‘삼강’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효행록』은 기본적으로 효자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일부 가족윤리를 함께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삼강행실도』는 삼강(三綱), 다시말해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실천하는 효자·효녀, 군위신강(君爲臣綱)을 실천하는 충신,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실천하는 열녀들이 등장하였다. 효자만이 강조되던 것에서 나아가 충신·열녀가 추가된 것은 절의(節義)가 강조된 조선 초기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두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는 유명한 말 처럼, 충과 열은 혈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대상 간의 윤리규범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한 절의는, 특히 남송대 주희 이래로 개인 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보편적인 자연 법칙으로서 중시되었다. 주희의 사상을 주된 정치이념으로 삼아 건국되었던 조선에서도 그러한 절의가 자연스럽게 강조되었다. 조선 초기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는 과정은 이러한 사상적인 변화를 수용하였던 결과였다. 이에 따라 『삼강행실도』는 중국·한반도의 효자 110명, 충신 112명, 열녀 94명을 수록한 사례집으로 만들어졌고, 그 중 한반도의 인물들은 각각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수록되었다.

『삼강행실도』를 만들면서 중국의 인물들 또한 새롭게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참고한 것은 당시 명나라에서 새롭게 들어온 교화서인 ‘칙찬권계서’ 들이었다. 그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많은 양의 새로운 교화서들이 만들어졌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황제가 직접 편찬을 주도했다고 해서 ‘칙찬권계서’라고 부른다. 명나라의 황제는 새롭게 만들어진 칙찬권계서를 주변국에 나누어 주었는데, 특히 명과의 관계가 돈독하였던 조선에는 많은 양의 칙찬권계서가 전달되었다. 칙찬권계서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신 교화서였기 때문에, 새로운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의 중국 부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 형식이나 내용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였다.

『삼강행실도』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고려된 또 다른 부분은 『효행록』에 포함된 고려시대적인 특징들을 당시의 사상적 문제의식에 맞게 고치는 것이었다. 당시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것과, 국가의 권력을 지방까지 침투시키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삼강행실도』에서는 『효행록』에 실린 불교나 민간신앙과 관련된 사례들을 제외하고, 그 대신 칙찬권계서에 수록된, 지방관이 효자 등에게 상을 내리는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이처럼 『삼강행실도』 편찬은 당시 조선의 관심사를 담아, 그 시기의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이 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규장각본 『삼강행실도』(古貴172.1-Se63s-v.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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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강행실도』 편찬 이후의 고민들 : 보급에서 언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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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진 이후, 이를 서울과 지방 곳곳에 보급하여 이를 교육하고자 하였다.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당시 각 지방에서 늘어나고 있던 지식인층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부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늘어났던 이들은 각 지방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거나, 학교를 만드는데 협력하는 등 여러 교육활동을 했다. 세종은 각 지방의 수령들이 이들 지방 지식인들을 모집해서 한문을 잘 모르는 백성들에게 『삼강행실도』를 가르치게끔 했다. 각 지방에 사는 지식인들이, 민들을 모아 『삼강행실도』를 가지고 그림을 보여주고, 그 내용도 풀이해주면, 한문을 모르는 민들도 『삼강행실도』의 내용을 모두 잘 이해해서 효자·충신·열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강행실도』의 교육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삼강행실도』를 전국에 보급하고 나서도 꾸준히 범죄는 이어졌고 그 중에서는 세종 18년의 노비 정용(鄭龍) 사건과 같이 어머니를 때려서 죽게 한 경우나, 세종 25년 귀철(貴哲) 사건과 같이 아버지를 때려서 다치게 한 경우마저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세종은 『삼강행실도』 교육의 어려움이, 그 책이 한문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지방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는 방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책이 한문으로 되어있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삼강행실도』를 ‘언해(諺解)’, 즉 한글로 풀이해서 다시금 보급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샀다. 정4품 응교(應敎)였던 정창손은 『삼강행실도』가 보급되고 나서도 효자·충신·열녀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자질 여하에 달린 것이지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세종은 크게 노하여 정창손을 파직하였지만, 그럼에도 『삼강행실도』의 언해사업의 진행은 지연되어 수십년 뒤, 성종대가 되어서야 나오게 되었다.
언해된 『삼강행실도』에 대한 기록은 성종 12년(1481)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성종은 당시 여성들의 행실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안으로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도』의 열녀편을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언해로 된 삼강행실도는 시골의 부녀자들까지도 모두 익힐 수 있어서 풍속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종 20년(1489)에는 『삼강행실도』의 분량이 축소되기도 했다. 기존 330인이 수록되어 3책의 분량이었던 『삼강행실도』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는 지적에 따라, 성종은 이를 1책으로 축소하였다. 그 결과 성종대 이후부터는 1권으로 축소된 『삼강행실도언해』가 발간되게 된다.

이 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언해』 이후로, 『삼강행실도』 계통의 교화서는 여러 차례 그림의 형태나 언해의 방식, 사례의 선별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언해를 전제로 만들어진다는 큰 틀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시기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언해』의 형태는 규장각본 『삼강행실도』(一簑古170.951-Se63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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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강행실도』의 효능 : 효·충·열의 ‘모델’을 제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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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기 지식인들은 『삼강행실도』를 읽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에 효자·충신·열녀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시기 정창손의 지적과 같이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변화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보급이 얼마나 조선의 지배층·피지배층 개개인을 ‘효자·충신·열녀’로 만들어 주었을지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삼강행실도』의 보급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이루어져도, 부모에 대한 불효(不孝), 임금에 대한 불충(不忠), 남편에 대한 실절(失節)과 관련된 사건들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꾸준히 보고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삼강행실도』와 같은 교화서의 편찬·보급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삼강행실도』의 진정한 효능은 다른 곳으로부터 나타난다. 『삼강행실도』의 효능은 그 편찬자들이 표방한 것처럼 비윤리적인 개인을 개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자 하는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삼강행실도』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능이란 개개인을 ‘얼마나’ 효자·충신·열녀로 만드는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개인이 효자·충신·열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모델’을 제시해주는 부분이었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개인이 윤리적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는 다양했다. 가문의 혈연공동체나 지역사회로부터 윤리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윤리적 개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행했던 국가의 포상을 바랐을 수도 있다. 물론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대가가 아닌, 개인적 신념이나, 수양, 자아실현 등을 목표로 윤리적 삶을 추구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들이 그 중 무엇을 목표로 했든지 간에,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정확히 '무엇이' 가장 윤리적인 실천인지에 대한 명확한 ‘모델’이 요구된다. 그러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삼강행실도』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삼강행실도』보급은, 조선시대를 살아간 개인이 그 동기와 무관히 효자·충신·열녀가 되고 싶을 때, 모방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모델을 제공하였다. 『삼강행실도』가 유통되는 과정 속에서, 그에 수록된, 오랜 전통 속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중국 고사 속 인물들과, 이후로 지속적으로 추가된 조선의 인물들의 행동들로 윤리적인 삶의 구체적 기준이 정착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의 내용이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보완되었던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역사 속 존재했던 효자들 중 『삼강행실도』에 어떤 효자가 포함되느냐의 문제는 불효자를 효자로 만드는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효자가 되고 싶었던 이가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효자됨을 구현하는지의 방향만큼은 좌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윤리적 모델이 교화서 보급을 통해 사회에 유행하면, 그 윤리적 행동에 수반되는 보상이 마련되는 대로 그 모델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 때문에, 『삼강행실도』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이 조선시대 내내 등장한 것과 별개로, 『삼강행실도』의 인물과 유사한 효자·충신·열녀들 또한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보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지식인들은 그 모델들을 ‘유교 전통’의 언어로서 정당화하였는데, 이는 수없는 반례에도 불구하고 고려말 이후의 사회변화를 ‘유교(사회)화’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각 시기 엘리트들이 매 차례 윤리적 인간이 되고 싶은 개인의 선행을 제시하고, 그러한 행동을 '유교에 부합한 것'이라고 매 차례 규정짓는 과정 속에서, 조선 사회의 윤리적 규범은 점차 ‘유교’의 언어·전통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갔다. 『삼강행실도』가 조선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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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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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식, 1998, 「삼강행실도 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진단학보』 85
주영하 외, 2008,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이상민, 2017, 「조선 초 ‘칙찬권계서(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편찬」, 『한국사상사학』 56
이상민, 2020, 「15세기 지방 지식인층의 활용과 평민(平民) 교화」, 『역사와 현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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