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당문학 권중화가 서연(書筵)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다가 위징(魏徵)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하는 감정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다 같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능히 감정을 조절하여 정도에 알맞게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감정대로 행동하여 실수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니 폐하께서도 항상 능히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여 시종이 여일하다면 후손 만대까지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신우가 말하기를
“아름답다! 이 말이여! 그대는 위징을 본받아 나를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였다. 권중화는 대답하기를
“다만 전하께서 저의 말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어찌 감히 마음과 힘을 다 바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우 열전, 신우 정사 3년.)
2) 왕(우왕)이 정관정요의 내용을 알고 싶어 정몽주를 시켜 강의하게 하자, 윤소종이 나아가 말했다. “전하의 중흥에 마땅히 이제삼왕으로 법을 삼아야 하지, 당태종은 취하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대학연의를 강의하시고, 이로서 제왕의 정치를 선포하소서"
왕이 그러하라 하였다. (고려사 윤소종 열전 중.)
王欲覽貞觀政要, 命鄭夢周講之, 紹宗進曰, “殿下中興, 當以二帝三王爲法, 唐太宗不足取也. 請講大學衍義, 以闡帝王之治.” 王然之.
3) 왕이 경연(經筵)에 나갔다. 강독관(講讀官) 성석연(成石珚)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은 바른 말을 듣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말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이 이것을 잘 알고 언제나 얼굴에 화기를 띠고 말을 받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왜 나를 위하여 말하여 주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옛날의 착한 임금들은 천하의 지혜를 자기의 지혜로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소 먹이는 아이들의 말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도 견문(見聞)을 넓히어서 참작하여 쓰기를 바랍니다 (고려사 세가 공양왕 경오 2년 )
4) 예조 의랑(禮曹議郞) 정혼(鄭渾)과 교서 소감(校書少監) 장지도(張志道)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서 올리게 하였다. (태조 4년 9월 4일(을미). )
5) 임금이 경연(經筵)에 앉아서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태조 7년 10월 5일(정미). 번역본 참조)
6) “내가 일찍이 상왕(上王)의 명을 받고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주(註)를 붙인 바 있다.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진서(晉書)》를 찬술(撰述)하였는데, 이를 평론하는 자가 이르기를, ‘서사(書史)를 찬술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힘쓸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제 내가 《정관정요》에 주(註)를 붙이는 것은 당나라 태종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러 사무가 번다하여 겨를이 없으니, 너희들이 그 주를 다 붙여서 올리도록 하라.” (세조 1권, 윤6월 19일(계해).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7) (양성지 상서문 중) 오늘부터 계속하여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통감(通鑑)》을 강(講)하는 것을 마치고, 다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자경편(自警編)》·《정관정요(貞觀政要)》·《송원절요(宋元節要)》·《대명군감(大明君鑑)》·《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국조보감(國朝寶鑑)》, 또 사서(四書) 가운데 《논어(論語)》, 오경(五經) 가운데 《상서(尙書)》를 강하여 항상 관람하시면 심히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예종 1년 6월 29일(신사) .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8) 광종이 처음 즉위하였는데 하늘의 꾸짖음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왕은 화복이 오기를 바랐는데 이에 정관정요로서 우선함은 어째서였을까. 왕의 마음은 당종의 다스림이 되어, 순·탕보다 넉넉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요의 설은 전책(典冊)을 넘어섰으나 개탄하고 원모하여 쫓아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 왕의 미혹함이 많이 보인다. 당태종[唐宗]은 이름날리길 좋아한 군주로서 정요에 실린 바가 비록 하나둘 정도 가히 칭할 만하나, 그것들은 거짓된 인의요 공리를 구제한 것이니 참람된 덕이 또한 많았다. 한고조와 비해서도 광종은 일찍이 또한 미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감히 순·탕에 비하겠는가. (최부 동국통감론 중. 직접 번역. 내용이해상 차이 있을 시 오역교정바람)
光宗初卽位。天之譴告切至。王欲祈禳。而乃以貞觀政要爲先。何哉。王之心以爲唐宗之治。優於舜湯。政要之說。過於典冊。慨然遠慕而欲追之乎。多見其王之惑也。唐宗。好名之主。政要所載。雖有一二之可稱。假仁義。濟功利。慙德亦多。比漢高 光。尙且不及。況敢擬於舜湯乎
-2) 광종 원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므로 왕이 이런 재앙을 물리치는 방도를 물으니 사천관(司天官)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이 제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왕이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당나라 태종 정관 년간에 만든 정치 서적)》를 읽었다.(고려사 오행지 3, 토.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9.) 그 외 성종 3년에 2회, 10년에 1회 각각 정관정요를 강 했다는 사료가 있음. 내용 자체로는 정관정요 인식의 추출은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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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a)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에 따르면, 2)에 근거하여 고려시대의 정치사상이 "정관정요"로 수렴되고, 여말선초에 들어 "대학연의"로 단절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앞서 제시한 자료상으로 보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당 태종관 관련해서 서술한다면 더 복잡해질 진다. 그에 관해서는 부정적 기록과 긍정적 기록이 마구 겹치기 때문이다.)
(b) 본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 2)의 우왕시기 윤소종의 언급, 그리고 8)의 동국통감론에 나온 성종시기 최부의 언급이 실질적으로 주목되는 정관정요에 대한 직접적 부정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첫째 앞서 괄호로 부연한 바, 몇차례 드러나는 당 태종 부정론 둘째 본문에서 소개한 자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대학연의에 관련한 기록들 그 양자를 토대로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문제를 설명되고 있다.
다만 이미 2) 8)을 제외한 사료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별 문제 없이 정관정요가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현상이 여전히 이 문제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점을 가로막기도 한다.
(c) 그리고 2)를 보면 태조대 정관정요가 경연되고 있고, 이 까닭에 윤소종 류의 건국세력 사대부의 입장이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8)의 경우 당 태종, 더 나아가 광종 자체에 대한 부정론이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점을 8-2)에 대한 고려사 찬술자와는 사뭇 다른 인식을 통해 일부 엿볼 수 있다..) 등은 위 문제의 추가적인 혼란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정리 수준에서 잠시 묵혀 둔 채 나중에 천착할 기회를 도모하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 변화라는 것이 그리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e) 물론 그렇다고 대학연의-정관정요의 세대교체가 '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설령 정관정요가 그 이후까지 의미있었고, 대학연의가 이를 대체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들, 대학연의는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관철되었든) 고려 말부터 16세기까지 중요도가 '부상'한 서적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대의 것을 완전히 대체해야만 의미있는 변화인 것은 아니다. 보편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얕고 사소한 첨가만으로도 경우에따라 유의미한 '변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변화를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우선적으로 감안되어야 할 리얼리티는 그 '사소함'일지도 모른다.
2013.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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