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중종 39년 1월 26일(을축)


사간(司諫) 허백기(許伯琦)가 아뢰기를,
“교화의 도구로서 이를테면 《삼강(三綱)》·《이륜(二倫)》 등의 서적은 다 급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학교(學校)는 교화의 근본인데 지금은 또한 쇠퇴하였거니와, 태학(太學)은 교화를 먼저 이끄는 곳이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또한 사람의 큰 윤상(倫常)인데, 접때 관중(館中)에서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한 자가 있었습니다. 태학도 이러하다면 외방(外方)은 논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중략)
지사(知事)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유생이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이고 서로 시비하여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데, 향당(鄕黨)이라면 나이에 따라 벌여 앉는 것이 옳겠으나 국학(國學)은 작은 조정이니, 승보(升補)·입학(入學)을 선후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더구나 학궁(學宮)의 제도는 조정에서 정하였으므로 유생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닌데, 이제 조정의 명이 없는데도 스스로 하니, 이것은 위를 업신여기는 것인 듯합니다
(중략)
허백기는 아뢰기를,“신의 생각으로는 예조에 신보하지 않았더라도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은 유자의 일이므로 무방할 듯합니다.”하고, 성세창은 아뢰기를,“학궁의 일은 조정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략)
하니, 상이 이르기를,“나이에 따라 앉으면 나이 많은 유학이 도리어 생원 위에 있게 되어 생원과 유학의 분별이 없게 될 것이니, 일에 있어서는 어그러지는 듯하다.”----
중종시기 소학의 도입과 더불어 '장유유서'가 새로이 더 중시됨에 따라, 그 안의 절차(여기서는 학교에서 자리 앉는 순서)문제가 과연 입학 년수(요즘말로는 학번) 순으로 하는지, 나이 순으로 하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썩 믿음직한 구분법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전통적 분류법에 따라 '사림'이라고 불려질법한 류들은 나이순, '훈구'라고 평가될만한 부류들은 향당에서는 양보하겠지만 적어도 중앙의 국학에서만큼은 학번순을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러한 '학번VS나이' 논쟁은 선조 6년에 다시 발발했을때까지는 '학번'이 이기는 추세였지만, 이후 숙종 23년에 들어서부터는 결국 '나이순'이 승리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대학가의 '학번VS나이'서열문제의 성패 여부는 '재수생의 비율'에 달린 문제로 많이 귀결이 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재수생이 많지 않은 과의 경우 학번순, 재수생 수가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경우 나이순). 이러한 조선사의 경우 '나이순 서열'자체를 중요시하는 소학강조의 사상사적 흐름과 더불어 성균관 자체의 분위기가 유생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한번 생각할 만한 주제이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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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사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로 (연구 자체에서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김성우,2008,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의 제 5장 부분을 참고하였다. 

2) 김성우 선생님도 지적하신 바이긴 한데, 이미 (소위) 학번순/나이순의 대결 구도와 상관없이 이미 중종 말엽애는 소위 '학번순 지지층'이라고 해도 중앙의 성균관을 제외한 향당 향교 등의 사안에서는 나이순 체제를 (억지든 자의든)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본 사료의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질서가 이미 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대세라면 대세였다는 것..

 

 

3) 첫 번째 부연과 연결해서.. 해당 사료의 사평도 재미있다. 결국 '소학'과 '장유유서'를 동일시하여 생각하고 있으며, 장유유서를 우선하지 않는 태도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사관은 평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소학》을 강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별히 권강할 것 없다 하고 장유(長幼)에 차서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앉는 차례를 앞세울 것 없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을 인도하여 도리에 맞게 하는 뜻에 맞겠는가? 

4) 다만 이 논의랑은 별도로, 조직의 구속력 강약과 사회 보편 규범의 강약이 반비례관계를 이룬다는 내용은 상당히 음미할 만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보편 규범'적 기준(소학)이 '조직적 구속'(대학연의 혹은 정관정요)을 고의적으로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슬로건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강했는데, 이 현상 자체는 조직의 구속력 자체의 강약관계에 따라 보편규범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 것의 붕괴'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연구가 이미 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오래된 통설'과는 다르게 숙고가 필요한 설명법인 것이다.



5) 정말로 여담.이 테마에 대해 미묘하게 형용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어쩌다보니 대학 학부를 두 군데를 다녔는데, 한 군데는 

그래뵈도 꽤 엄격한 학번순이 유지되고 있었고, 다른 한 군데는 당연한 듯 나이순이 체계화 되어 있어  그 갭에 사실은 꽤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당연히 서열 구분이 없는게 가장 낫다는 건 자명하지만)양측 학교는 각각 서로 다른 이유의 학내 갈등이 있기도 했다. 학번순 학교는 '자기 동기간에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부르게 (동아리 등 그룹의 룰로서) 허용해 달라(즉 '장유의 호칭 쟁탈 운동'이 제기)'가 꾸준한 갈등요인이었다.

그런데 후자의 학교에서는 '동기든 선후배든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하지 말자'(즉 주로 장유의 호칭 멸살 운동이 제기)가 제기되었다. 

이를 지금와서 돌이켜 본다면, 학번제 학교가 동아리와 학과간의 이중적 조직화(?)를 통해서 학내 사회가 꽉 짜여있던 것이 그런 '학번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비결이겠고, 상대적으로 후자의 학교는 규모도 큰 대신 학과의 조직력은 상대적으로 약했고(거기다가 자유주의적 풍토도 훨씬 강했고), 그 까닭에 '학번제' 자체의 운영부터가 이미 느슨했던 것은 아닐까.




201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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