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5월 21일 기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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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서울에 문려(門閭)에 정표(旌表)를 세우는 일이 무척 많은데, 이것이 어찌 모두 실지가 있어서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외방에서 보건대, 잔인(殘忍)한 기질이 있는 자가 더러 분(憤)을 이기지 못해서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허실(虛實)을 불가불 잘 가려서 표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조정에서 자기를 염속(斂束) 하는 선비를 존중하니, 서울 사람 중 본래 염속하지 않는 자도 겉으로는 모두 염속하는 체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진용(進用)할 때에는 그 허실을 잘 살펴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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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표정책의 전통 이래, 더 직접적으로는 세종대 "삼강행실도" 이래 효자 등을 포상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단으로 거론되었다. 윤리적으로 탁월한 이를 포상하는 것은, 사료 용어로 빌어 말하면 '관감(觀感), 그러니까 훌륭한 행위를 다른 이에게 모범이 되게끔 전시하여, 이를 토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효자 포상'은 적어도 '본성 함양'이라는 신유학 이후 유행한 윤리-교육론의 논리와도 비교적 부담없이 조화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으니, 그 선한 마음을 적당히 '발흥'시켜 주기만 하면 금방 효자가 나타날 것이다.는 .낙관적 해석으로 매끄럽게 정리되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정상情狀'에 대한 고려가 널리 이루어진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그 선한 본성이 여러 여건상 피어나지 못한 것을 펼쳐주어야 한다>는 논리 하에선, 행동의 가부 이상으로 경황상 드러난 '의도'가 훨씬 중요해지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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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포상'은 그 자체로 '(신)유교 전통'과 결합되기 어려운 약한 고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저런 복잡한 논점이 많지만, 각설하고, '포상을 바란 거짓 행위'를 분별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 주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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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유학 이후 줄기차게 강조해오던 '형벌에 대한 거리낌'과 상충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적어도 고려 말 이후부터, '형벌'을 사용한 대민통치를 내놓고 정당화하는 것에 위정자들이 느끼는 부담을 자료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유교적"이라는 말로 일반화하거나, '성리학'이라는 말로 단순화하기는 주저되지만, 어쨌거나 늦게 쳐도, 정도전 이후부터는 '형벌'은 '피치 못해 사용하게 되는 통치의 보조 도구'일 뿐, 그 자체로 통치의 중심인양 정당화되지 못한다.(고려 말 이전까지도 딱히 '刑治'가 드러내놓고 내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형벌의 불가피성'을 굳이 구구절절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자료의 부족함 탓에 이를 딱 잘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고려 말 이후에 비해서는' 형벌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부담이 덜했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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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을 써선 안 되는 이유는 대체로 논어의 유명한 구절을 빌어 "처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다시말해 민의 '마음'을 형벌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포상이라고 다른 게 아니다, '포상을 바란 선행'의 영역을 내버려두게 되면, '포상을 바라기만 할 뿐, 선한 마음이 일어난 것은 아닌' 상태 또한 저절로 방치되게 된다.
이는 소위 법가 전통 하에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비자 식의 논리대로라면, 신하의 선한 의도같은 건 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한비자도 (아낌없이 마구 쓰면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포상을 분명히 강조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데, 신유학적 윤리관 내에서는 그 자가당착을 해결할 방법이 달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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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사료대로, 포상을 잘 따져보고 내리자는 제안도 해 보고, 그냥 '특이 행동'에 대해서는 포상하지 말고, '길게 잘한' 사람만 포상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모두 대충 16세기의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적당한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혹시라도 포상을 바라고 한 행동이 적발된다면, 큰 벌을 내리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게 또 대충 16세기의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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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사실 좀 우스워진다. '형벌로 다스리지 말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함양하자'는 이야기가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왔는데, 결국에는 일벌백계만 남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도리는 없다. 여전히 유학자 위정자들이 사는 세계는 '인륜의 붕괴'가 판치는 난세인 것이요, 그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그들 자신의 지식인-정치가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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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유하자면.. 어딘가 고장난 차를 새로 만들지도 못하는 노릇이니, 망가진 부분을 되는만큼 보수하면서, 덜컹덜컹 계속 몰고가야 하듯이...
운영하다 보면 그 취지를 완벽히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라도, 결국 완전히 다 새로 뒤엎을수도 없는 판국이니, 문제시되는 것이나 조금씩 손보면서 달려나가게 되는 것이 제도사(어쩌면 인간사의?)의 필연인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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