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막힐 때 마다 오래된 글을 찾아읽는 편이다. 그러던 중, 이우성 선생의 유명한 "한국중세사회연구(1991, 일조각)"의 수록논문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의 각주 1번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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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단행본에 실린 각주 내용인즉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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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뒤에 야간의 수정을 가하여 그 요약을 동아대학교신문(1959년 8월 15일)에 실었다"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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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당 책에도 실려있는 사실이지만,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논문은, 61년 "역사학보" 14집에 '여대백성고'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해당 논문을 찾아서 열어보니, 똑같은 각주에 다른 정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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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 원례발표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동국대학교에서), 뒤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제목으로 동아대학교논문집에 싣기로 했으나, 이 논문집의 발간이 지연되어 결국 금일까지 활자화되지 못하고 있다"
('여대백성고-고려시대 촌락구조의 일단면', "역사학보" 14, 196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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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추측할 수 있는 바, 이 내용은, 64년 "역사학보" 23호에 수록된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의 초고 쯤 되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박사논문의 한 꼭지를 이 언저리의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까닭에, 관심을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런종류의 글을 참고하는 요령이 다 그렇듯이, 단행본으로 재출간 된 내용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수정-보완의 여지를 존중하여 단행본 쪽을 보는 것이 옳기도 하지만, 그래도 '초기 단계의 문제의식' 같은 것을 알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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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신문(=동아대학보)은 학교에서 보기가 어려워서 무려 축쇄인쇄본을 상호대차를 해서 읽어야 했는데, 의외의 정보를 몇 가지 더 얻을 수 있었다.
ⓐ 1959년 8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확실히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원고가 실려있고, 특별한 편수 표시없이 글이 완결되어있다.
ⓑ 다만 1959년 10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그와 별도로 '고려후기의 신흥관료'(하)원고가 실려있는데, 전편의 내용을 이어 보충해 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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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학술적 가치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지금와서는 비판된 설명들도 많지만, 종래 논문-단행본에서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은 러프한 아이디어 같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나름 구하기 힘든 글이기도 하니, 이 참에 도움이 되실 분들을 위해 공유해둔다.
(어지간하면 원문 그대로를 한글로만 입력하였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 싶은 표현이나 구절들은 일부 다듬거나 문단을 내는 등 작은 수정을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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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_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6호 1959/8/15)
- 연구 발표 레쥬메-
우리나라 역사상 관인지배계급은 고려중엽에 이르러 계보적으로 커다란 단절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고려전반기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중심세력은 「귀신망족貴臣望族」, 즉 문벌귀족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그들은 대개 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던 경주의 구족으로서 최씨, 김씨, 이씨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신라이래의 귀족적 지배계급이 고려후반기에 이르러 홀연히 역사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한편 고려후반기로부터 새로 형성하기 시작한 관인층은 여러차례의 혼란과 번복을 거쳐, 여말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사회적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이씨왕조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이씨조선의 종말까지 우리나라의 지배계급을 보통 사대부계급이라고 한다면 이 사대부의 기원은 실로 고려후반기에 소급되는 것이다.
귀족과 사대부-이 두 지배계급의 성격적차이는 어떠한가, 전자가 호족적 토지소유-공전적체제 위에서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주적 토지소유-농장적토대위에 성립된 것이며, 전자가 혈통의 권위에서 살고 있음에 대하여 후자는 신흥발랄한 지식인인 것이다. 전자의 활동이 강대한 족적결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식상의 능력으로 과거에 합격된 우세한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후 지배계급의 교체가 어떠한 역사적 계기에서 된 것일까? 우리는 고려중엽에 일어난 일대정변-정중부란을 이것의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문무항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낡은 귀족의 숙청에 있는것이다. 그것은 귀족을 정치적으로 몰락시켰을뿐 아니라 종족적으로 일망타진한 것이었다. 향락과 소비로써 부패해진 비생산적인 귀족들을 숙청한 것은 심잠한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시킨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임에 틀림없으나 이 역사적 임무의수행자가 당시의 건강한 민중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귀족과 동차원의 세계에서 생활해오던 아류귀족 즉 무신들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처참한 유혈이 강행되면서도 본질적 의미의 형명은 되지못하였다 『문신을 죽이자』라는 단순한 구호는 귀족지배에 불만이 높은 병졸 및 일부 도성인에게 일시적 동조를 얻었으나 그것은 본능적 반발심에 그쳤을 뿐 아무런 신 이상의 뒷받침이 없었다. 그러하여 문신의 질서를 일단 붕괴시키고도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낼 힘이 없었다. 도리어 무신들의 야만적인 살육의 자행과 포학무도한 징세와 행정능력의 결여 등은 사회전체를 후퇴시키고 문화의 소침을 여지 없게 하였다.
당시 귀족의 교육은 중앙국학의 외에 사학 즉 최충의 구재 같이 달관현유에 의하여 설립된 사학이 개성에 연이어 등장해 귀족의 자제를 지도했던것이 무인정변후에 국학도 사학도 파괴되어 중앙의 귀족문화는 모두 폐허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씨정권하에서 문치가 약간 회복 되었다고는 하나 귀족문화가 폐허가 된 속에서 다시 소생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의 문화는 도성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에서 불승에게 학업을 전수받은 『사자士子』들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이 『사자』들은 소위 독서인 즉 신흥지식인을 가르키는 말이며 앞서 말한 바 고려 후반기의 신흥관인층이란 이 『사자』 독서인을 주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대부라는 것이다.
이들 사자 독서인은 무신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역시 문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형태적으로 전대의 귀족에 크게 다를 뿐 아니라, 계보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 신흥관인층의 출신을 어디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당시의 지방토착세력-향리층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향리는 관리의 노복
- 사무능력에 따라 상급관리로 진출-
고려시대의 향리가 이씨 조선에서처럼 신분적으로 고정된 천한 지위가 아니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지방토착력의 대표자이며 멀리 신라시대의 촌주 특히 상득 촌주(군상촌주)의 계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초에는 지방행정이 완전히 그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으며 귀족의 지배체제가 일관적으로 확립된 성종이후에도 국가권력 말단을 장악하여 국가의 중요한 직무를 직접 집행하였다. 그들은 농민에 대하여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있엇다. 그러나 이 권력은 그들 자신이 소유한 권력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수족으로 이용하는 국가권력 그 자신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향리는 관인이 아니라 관인의 노복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귀족지배 하에서나 무신집권 하에서나 원칙적으로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향리의 출신들이 신흥관인으로의 신분적 상승을 보이게 된 것은 귀족지배의 말기로부터 시작하여 무신집권 하에 굴곳 계속되고 무신세력의 퇴조와 함께 뚜렷한 역사현상으로 신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향리를 말하기 전에 향리를 포함한 『리』 전반에 관하여 일고하고 고려조의 관료조직 속에 『리』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함으로써 향리의 관인으로의 진출에 대한 이해가 용이하게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곡의 글(『동문선』 권85, 賀崔寺丞登第詩序)에 의하면
『인재 선발의 법이 원래 문무의 차이가 없었는데, 뒤에 문에서 무가 분리되어 독립한 한 과가 되고, 한편에서 문과 무과를 경유하지 않고 입사하는 자가 있어 그것을 『리』라고 했는데, 『리』는 대개 옛날의 『刀筆之任』을 말하는 것으로써 벼슬길은 문 무 리의 세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관인들이 비록 최고위에 이르러도 진사 즉 문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좋게 여기지 않았었고, 이러한 영향은 송대에 들어 더욱 가중해졌었다. 고려는 당제를 바탕으로 송제를 채택하여 대대로 문사를 숭상하여 승선·대간 및 선거전주의 청요직을 문사들이 오로지 하게 되고, 문과 리는 감히 그것을 바라지 못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조 특히 전반기의 관인 질서가 문무리 3자의 계층적 구조로써 조직되어있던 것을 것이려니와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고려 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된 것에 착안하고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되는 것이다. 문무에 관하여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리』는 도필지임, 즉 사무를 집행하는 말단 서기류-중앙각사의 서리 및 지방의 향리들로써 과거를 경유하지않고 오직 사무능력에 의하여 공적이 쌓아졌을 때 상급관원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문과 무를 동반 서반이라고 했거니와 『리』는 고려사에 빈번히 나타나는 남반 그것에 해당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남반이 동반서반에 비하여 얼마나 저급의 것인가는 『남반잡류』라 하여 잡류와 병칭되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될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숭상하고 정사에 유리된 귀족의 지배하에 있어서 또는 횡포무식하고 정치에 세련되지 못한 무신의 집권하에 있어서 그래도 관인기구가 운영되고 있는데는 이들 『리』의 존재가 힘입은 바 지극히 크다고 생각된다. 벌써 전반기의 관료조직 속에 『리』가 상당한 비중을 가졌던 것은 어사대의 감찰어사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문 리 각5인』이라하여 문신과 동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와같이 『리』의 진출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현저하여 드디어 『리』 그것에서 탈피하고 훌륭한 관인으로 성장하는 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대단히 주목할 것은 중앙각사의 서리보다 지방 향리의 출신들이 더욱 그러한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종조 이주헌(상원인) 조지린(백천인) 숙종조 곽향(충청인) 강극(영강인) 인종조 양원준9충청인) 김향(안동인) 허재(양천인) 목종조 김거공(원주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향리출신으로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부지런하다고 재간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頗稱勤幹』 『관리로서 재능이 있다有吏幹』, 『공적을 쌓았다積勞』 『학식은 없었으나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다無學識, 淸愼能幹事』 『성품이 첨령 부지런하다性廉謹』 『말쏨씨가 좋았다善辭令』 등으로 일컬어지며 그들의 특장점인 사무능력을 유일의 밑천으로 명경대관에까지 자기를 성장시켰던 것이다.
귀족지배의 말기에 이르자 이들 향리의 중에는 벌써 과거에 올라 처음부터 당당한 관인으로 등용되는 예가 종종 보이게된다. 이와 같이 리의 계통에서 과에서 과거로 발신하게된다는 것은 문과 리의 거리를 상당히 근접시키는 동시에 문 리를 동일대상으로 병칭될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사실상 문신 귀족이 다 없어진 뒤이고 보매 이 뒤부터는 문 리라는 말의 개념도 아주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이가 조사의 등급을 매기기를 능문능리(문학에 능하고 또 이무에 능한 자)를 제1로 文而不能吏를 그 다음으로, 吏而不能文을 그 다음으로, 文吏俱不能을 하루 정하여 인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신분질서가 급격히 파괴된 후에 출신성분으로 규정되던 종래의 문 리의 차이는 역사상의 개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오직 자기의 보유능력 여하로써 문 리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향리 및 향리자제들을 이 능력적으로 진출한 것은 이러한 시기에서였던 것이다.
조문발 정가신전 등을 위시하여 문학, 경학 이재吏才 장략將略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써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는것만을 추려보아도 그 수의 방대함에 놀라게되고, 기타 족보 야승 문집 따위에 기재되어있는것과 그 중에 가계가 분명치않으나 대략 이족으로 추정되는 지방출신자들까지 수에 넣으면 고려후기의 역사적 인물들의 출자가 대개 이로 속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향리출신자들이 역사무대에 뚜렷이 움직이고 있는 사회적 추세 속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학술적 정신적 정통연원을 이루고있는 『전조의 유현」들이 이제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향 우탁을 필두로 이곡 이색 이숭인 이집 등 전형적인 사대부들이 모두 향리의 계보를 가지고 등장한 사람들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네들에 의하여 성리학(주자학) 즉 사대부의 생활이념을 이론화한 중국의 신철학이 도입되고 발전된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리학은 이조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써 오백년간 강력한 정치적 사회적 작용을 했거니와 이것이 고려후반기의 향리출신의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도하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문화사적 견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본교 문리대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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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 (하) 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7호 1959/10/15)
앞서 고려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되었다는 것을 말하였거니와 같은 이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관료의 구성자가 중앙각사의 서리에서가 아니라 지방향리출신에 의하여 이룩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중앙의 권력구조가 고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 커다란 변화가 지방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역사의 태동이 중앙도성에서가 아니라 지방농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새로운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고려중기에 일어난 역사의 대전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이해해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역역을 중심으로 한 수취체계를 그 기간으로 삼았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수취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방식이 규정되는데 하나는 개개의 인신에 대한 직접적 수취방식이오 다른 하나는 토지를 통하여 인정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 양자는 중국의 역대국가들이 반복하던 방식이거니와 고려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동하는 인정을 직접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정한 토지면적을 단위로 인정을 부과했던 것이다. 국가는 토지 그 자체에 직접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파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토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체계하에서는 토지를 떠나서 인정은 그 자신을 기능시킬 수 없으며 또한 인정을 사상해버린 토지의 개념이란 지극히 무의미한 것이다. 인정을 부과시키는 토지, 그것이 「丁田」이며 일정한 인정을 내어놓는 토지면적의 단위가 곧 「田丁」인 것이다. 이 「전정」의 분석이야말로 고려사회의 본질을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되거니와 향리의 위치도 이와의 관계에서만 정확히 이해될줄로 믿어진다. 향리는 곧 전정을 통하여 농민을 수취하는 국가권력의 대행자였다. 그러나 농민이 전정에 얽매여 역에 복무하듯이 향리 자신도 역에 의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여기 향리의 특수한 신분이 있는 것이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격적 신분구조는 어떤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부딧칠 때 진작 자기를 변질시킬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고려후반기의 신흥관료의 출신을 향리층에서 구해야 된다고 했거니와 그러한 향리출신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한 경로는 어떠했는가?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 전정의 파괴를 지적하고자 한다. 고정된 토지를 대상으로 한 전정의 법제가 토지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의 변동이란 무엇인가. 즉 고려초기 이래 각처 지방민에 의한 토지의 개발이 중기에 들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달아 무신집권에 의한 토지의 사점-장원의 확대가 그것이다. 농촌에 있어서 생산력의 발전과 생활의 향상은 농지 개간을 증가시키고 각지방에 부민층을 형성시켰거니와 이 발전된 생산력의 소유자는 대체로 종래의 지방유력자 즉 향리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환언하면 향리층으로부터 차차 지방적 성격의 소유자가 나오게되는 것이다.
이 지주적토지소유의 성장은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의 해체과정과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에 의한 역역의 수취는 모순이 심할수록 발악적으로 정도를 더하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유망」으로 표현되어 소위「토지[田]에 역주(役主)가 없어 망정(亡丁)이 많습니다. 민(民)으로서 항심(恒心)이 없어서 도망간 호(戶)가 많습니다田無役主, 亡丁多矣. 民無恒心 逃戶衆矣」라는 결과를 이루었다. 전정은 방역을 위하여 마련되었고 또한 역역에 의하여 스스로 파괴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주적 토지소유는 자기를 성장시키면 무엇보다 직접생산자인 농민(전호)의 노동력을 국가의 수취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신흥지주(향리)들은 은 전민을 가지고 「권호權豪」의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권호」라는 것은 무신집권이후 주마등처럼 전변하는 중앙권력층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들의 장원이란 「계이산천」 「편어주현」할 정도의 확대한 것이지만 이 장원의 성격은 토지에 뿌리를 내린 견고한 지반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중앙권력을 이용하여 「사패」라는 형식으로 문서상의 점유를 한 것 뿐이다. 내용으로 보면 여러 독립된 신흥지주들의 집합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신흥지주들은 장원을 자기들의 지붕국가로부터의 수취를 막는 비호물로 삼고있다가 현 장원주가 정치적으로 실각하면 다시 다른 집권자의 세력 아래로 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호權豪의 광대한 장원들이 그 성장이 매우 빠른 것 처럼 일단 실각하면 그 붕괴도 대단히 용이하였던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해되지않을까. 이 이합집산이 무궁한 장원에 비하여 그 하부기구인 신흥지주들은 자기의 재지세력을 보일보 전진시키고 나아가 자기 및 자기의 자제들을 중앙관료로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혹은 군공 혹은 현권력자아의 결탁으로 관료의 계열에 들어갔거니와 무엇보다 단단한 방도는 과거이었다. 원래 향리층에 대하여 과거는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중에도 명경 제술과 같은 정과는 호정 이상의 손자 이내 부호정 이상의 아들 이내에 한하여 응시를 허락하였고, 또 응시자가 실력이 아주 부족할 때에는 추천자인 주현관이 문책을 받게 될 정도로 까다로웠다. 제술계통의 과업은 그 제한이 많이 누그럽기는 하나 그 출세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오면 모든 신분질서의 혼란과 함께 과거의 여러가지 규제도 사실상 철폐된 셈이었다. 이미 이전 절에서 말한 바 수많은 등과자가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향리출신으로 관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鄕園의 士」니, 「寒門窮巷의 士」니 하며 출세에 있어서의 불리한 지위를 자인하며 또 자위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 「사군자」 「사족」으로 불리워지는 이들 향리층의 자제들은 刀筆文吏를 세업으로 삼고 있으니만치 과거에 응시할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일반민중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들이 곧 전절에서 말한 사자 독서인 신흥지식인 그것으로 귀족문신을 대신하여 관료학자가 될 사람들이다. 이들 향리층의 출신들이 이제 자기를 관료화시켜 중앙정계로 진출하였을 때 이 신진사대부들은 자연히 기성중앙권력층 세신거실과 신구세력의 비호물로 삼아왔던 장원이 이제 자기의 관료화에 따라 하나의 혜택적인 유물로 화해버린 것이다.
지금껏 장원은 국가의 역역수취로부터 농민의 생산력을 보호하여 신흥지주를 성장시켜 왔던 것인데, 이 지주들의 경제적 성장도가 이제 정권을 장악하여 완전한 자기관철을 요구하는 궁극적 처지에 이르렀을 때 장원은 도리어 족쇄가 되었고, 장원영유자들은 무의미한 기생적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흥지주-사대부들과 장원영유자-세신거실들의 이해대립을 반영하는 고려정부내의 신구세력의 충돌은 처음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으로 나타났다가 필경 최영과 이태조의 대결로 첨예화 되었으며 역사는 후자의 승리로 귀착된 것이다.
고려의 전제개혁이란 무엇을 의미함일까, 사전철폐를 대강령으로 내세운 이태조일파가 과전법을 통하여 도리어 사전소유를 법제화시킨 일견 모순된 사실은 그것이 신진사대부-신흥지주들에 의한 구세력-장원의 해체라고 생각할 때 의혹이 풀려지지 않을까 한다. 장원의 해체는 지금까지 「三兩其主,」로 어수선하던 토지관계가 「一田一主」로 정리된 셈이다 「일전일주」야 말로 지주적 토지소유의 승리이며 완성인 것이다. 이리하여 지주적 토지소유 즉 새로운 경제관계를 발판으로 하고 신시대의 주도자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이씨왕조의 건설자이며 이씨왕조의 성격은 바로 사대부 즉 지주의 성격인 것이다.
우리는 이씨왕조의 성격에 있어서
첫째 지주와 역역이 분리되어있다는 것
둘째 역역에 있어서 반드시 몸으로 하지 않는 대신 「납포고정納布雇丁」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토지사유를 법제화시키고 지주로부터 세를 받는다는 것
...등을 들어서 고려와의 차이를 명백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말해둘 것은 고려후기의 향리층의 지주적 성장과 거기 따라 관인으로 진출한 것이 물론 향리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향리중에서도 여러 등차가 있었다. 귀족지배하에 있을 때 벌써 「호강정직자」 「누세유가풍자」인 향리들은 별스런 대우를 받았거니와 대체로 이네들이 고려후기의 지주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지방 사정의 변화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생산력의 소유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영영 새로운 역사적 계기를 얻지못하였고 관인의 신분을 획득한 자 이외의 대부분의 향리들은 종래의 신분과 신분에 따른 역의 의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향리층의 출신으로 형성된 사대부들은 자기 세력의 안정을 위하여 앞으로의 향리층의 계속적 진출을 봉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말에 이미 향리진출에 대한 방지책이 여러 모로 논의되었고 이조에 들어와서 그것이 철저히 시행디었다. 이리하여 신진사대부의 태반인 향리층은 다시 그들의 분열아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신분적으로 고정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조의 향리인 것이다
<글쓴이 본교인문대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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