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57권, 중종 21년 7월 25일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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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관찰사 윤은보(尹殷輔)가 치계하였다....["함종현(咸從縣)의] 유학(幼學) 유인석(劉仁碩)은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습니다. 장가들어 살림을 나 살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와서 뵈었고, 아비 유계선(劉繼先)이 광질(狂疾)에 걸려 날로 점점 심해져서 거의 죽게 되어서는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했습니다.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끊어 효험을 보았다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얘기를 보고, 몰래 도끼를 가져다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불에 태운 다음 이를 빻아 물에 타서 드리니, 그 병이 드디어 치유되었습니다. 그 뒤 아비가 죽자 삼년상을 치르면서 양념 친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미를 자기 집으로 모셔놓고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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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 "삼강행실도"의 효능은 <'불효자를 효자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효자가 되려는 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에 썼던 적이 있다.

https://lazyreader.tistory.com/m/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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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오래된 생각을 담은 글이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효능"이라는 말로 참 교묘하게 논점을 피해간 표현이었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보다도 부모 살해 레벨의 '충격 불효 사건'이 나타날 때마다 그 교화정책을 재검토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이 '예비 효자들 대상 모델 제공' 수준에 만족하였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좀 더 가혹한 현실을 직면해보자. 조선왕조실록 통틀어서 '패륜 사건'은 (아주 잦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타나는 수준이고, 이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바랐던 그림이었을 '부도덕했던 이가 삼강행실도를 읽고 개과천선한(혹은 그렇게 개과천선에 성공했다고 자신-주변인 중 하나가 증언한)' 경우는,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알려진 바/보고된 바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부도덕/패륜/비행'으로 판단될 레벨의 인물이, 다른 것도 아니고 "(광의적인 의미의)학습을 통한 재사회화"에 도달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도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이며, 기법과 인프라 모든 것이 모자란 전근대 사회 기준 부도덕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세종 자신의 이상이 패륜적 범죄자에 대해, 가중 처벌보다, 가르치는 일을 우선시하기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실 "패륜적 (예비)범죄자"가 감화된 케이스가 제대로 보고가 안 된다는 점은 참 민망하기까지 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실패'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들 스스로가 밝힌 "삼강행실도"의 편찬 취지에 백성들이 '관감(觀感)', 그러니까 [모범이 되는 대상을] 보고, 느끼게끔 하고자 한다는 점을 명시한 만큼, 최소한 '모델 제시'가 목적 자체에서 아주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 '관감'은 여말선초부터 부각된, 교화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이며, 박사논문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지한(=그렇기에 부도덕한)'민들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킨다는 목표에 '미치지 못할' 수는 있어도, 그래도 대충 그렇게 '모범으로 부각된 행동'을 모방하는 이들, 다시말해 '효자'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로도 어찌보면 '타협적인 만족'에 도달할 만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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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사료를 읽는다면, 인용한 중종대 유학 유인석의 사례를 만날 때 좀 난감해진다. 중종 유학 유인석의 사례는 "삼강행실도의 전파 성과"로 이따금 인용되는 사료인데, 잘 보면 꼭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유인석의 사례를 전달한 평안 관찰사 윤은보의 보고대로라면, 함종 유학 유인석이 '효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아버지의 병환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부친 사망 후 삼년상을 치루고, 이후 모친 봉양에도 힘썼다지 않던가. (결혼 후 부모와 동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16세기 초의 혼인풍습의 일면을 읽어낼 수 있지만, 그건 별도로 치자)
문제는 "삼강행실도"가 유인석에게 사용된 용법에 있다. 보고에 따르면 유인석이 "삼강행실도"를 통해 참조한 것은 그 '효행'에 대한 감명이 아니라 아버지가 얻게 된 '광질[狂疾]'의 치료법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유인석이 효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록에 인용된 기록이 어찌되었든 유인석 본인→평안 관찰사 윤은보를 거쳐 온 텍스트라는 점을 감안하고, 나아가 윤은보, 어쩌면 유인석 자신에 이르기까지 '국가에게 그 효행을 공인받기 위해 쓰여진' 보고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사료를 예사롭게 읽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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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인석의 일이 관원에게 보고된 시점이 언제일지는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관찰사에게 그 정보가 넘어간 시점이 부친 삼년상 후 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를 염두에 두며 유인석의 입장으로 들어가보자.
경위야 어찌되었건 손가락을 잘라서 먹여드린 처방은 성공하였다. 이제 그 경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관에 보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관의 입장에서도 굳이 항간의 소문에 의존할 이유가 없이, 본인에게 사정을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여기서 유인석이 바로 그 시점에, 관원 내지 그 지방자치의 말단 담당자에게 "삼강행실도를 보고 그 효험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며 스스로 보고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삼강행실도"를 보고 그 처방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은 유인석 자신의 증언이 없이는 알 수 없는 정보다. "삼강행실도"를 '처방전'으로 써먹었다는 점이.. '포상'을 목표로 하든 '모범적 사례'로서의 윤색을 목표로 하든 그 목표를 극대화해주는 좋은 포인트라고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연산군대에는 '너무 위급한 사례만이 강조된다'며, 삼강행실도 방식에 치중된 포상을 개선하자는 지적마저 나와버린 터였다. 오히려 "삼강행실도를 열심히 읽고 감화되었다"라고만 증언했다면(이조차 거짓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했더라면, 유인석에게서든-윤은보에게서든 더욱더 효과적인(?)사례가 될 수 있었을 것임은 어렵지않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시기적 기준이 아니라, 중종대 당대적인 분위기를 감안해봐도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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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의미에서 유인석의 사례는. 역설적으로 사실에 가깝겠거니 싶은 느낌과, 보고받은 관리들이 '애매한 기분'이었겠거니 싶은 느낌을 동시에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사료로 보이게 된다.
사실 국왕 및 조정 대신 입장에서, 유인석을 포상하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은 아니다(이미 그 사례가 없이도 충분히 효자니까). 하지만, 유인석의 경우로 "삼강행실도"의 성공을 운운하기에는 중종대 위정자로서도, 현재의 연구자로서도 아무래도 곤란하다. 결국, 어느 쪽으로서든 '애매하게 타협'할 수 밖에 없다. 중종대 위정자로서는 효자라는 거시적 명분 하에 버무려서 포상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구자로서도 '삼강행실도가 어찌되었든 보급이 널리 되긴 했다'는 사례로서 들먹일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삼강행실도 편찬 보급", 나아가 국가 주도 풍속안정책 그 자체가, 목표 그대로가 성취되는 것을 성공이라 협의적으로 정의한다면 그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사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실패' 하나로 그 사업 전체의 향방을 평가하는 것이 정확한 설명인 것 또한 아니다. 그렇기에, 불만족스럽더라도, 그 사업에 따른 예기치 못한 귀결, 그리고 그 귀결에 대한 타협적인 만족까지도 결국 그 사업의 성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22.10.17

 

보충1
사실 "조선은 유교국가/사회이다or아니다"라는 표현이, 일반 교양 차원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까지 꽤 경직된 의미로 활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4에서 언급한 '성패'를 단정하고자 하는 어떤 이분법적 전제를 체감하게 되기도 한다.
다만, 그런 식으로 엄격한 '성패'를 따지자면, '성공'한 일이라는 게 세상에 몇이나 있겠으며, 반대로 '성공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없는 셈 쳐도 되는 일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겠는가. 늘 생각해보곤 한다.


보충2
인육 섭취를 통한 치병. 에 대해 보충하면.
1. 실제로 "삼강행실도"의 여말선초 사례에서는 '(정신병 내지 발작 증세 전반에 대해) 사람의 뼈를 먹이면 효과가 있다고 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먹여드린 사례가 자국 사례에 한정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유독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대강 이맘때 한반도에 유행하던 민간비방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비슷한 신체훼손 사례 중에서도, 유독 한국의 자료에서만 '손가락을 자른' 사례가 빈출하는데, 역시나 시작은 민간 비방에서, "삼강행실도"를 경유해 유행한 처방(?)은 아니었을까. 상상.
2. 중국 사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할고(割股)'그러니까 허벅지를 잘라 먹이는 케이스이다. 물론 딱히 한국 사례라고 해서 할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할고가 광증과 연관되어 처방된 케이스는 중국 당(唐)대 문헌에도 있어서, 조선은 물론 조선 사례를 전해들은 명대 사신들까지도 양자의 차이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3. 단지든 할고든, 인육 섭취를 통한 치병은 과연 어디에서 연원하였는가. 그것도 나름 여러 설명들이 있었는데, 당나라 때 "본초습유(本草拾遺)"의 처방을 기원으로 한다는 설명과, 불교의 본생담을 연원으로 한다는 설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대만의 이오李敖 선생의 1986년 논문 "중국여인할고고中國女人割股考"에서 소개된 이래, 구중린邱仲麟 선생 등 이후의 대만 학자들에게서 지지되는 것 같고, 후자는 Keith N Knapp 선생의 논문에서 본 적이 있다.)
한국사 분야에서는 왕쓰샹 선생의 12년 논문에서, 조선 곽산의 효녀 사월의 단지(斷脂)사례가 중국 사신에게 전해지는 문제에 대해 다루며 이 두 설의 대비에 대해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는 선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4. 사실 3의 사안에 대해, '연원'을 밝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례에 한정한다면, 최소한 조선 건국에 아주 가까운 시기의 어떤 연원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원 자체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최소한 오래된 전승같은건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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