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의뢰받아 썼던 교육용 원고.

이런저런 곳에 알바 겸 청탁 겸으로 썼던 '잡글'중에서는 나름 애정이 있는 녀석이라, 따로 갈무리해 둔다. (연재처에 업로드된 글에서 일부 어색한 문장이나 표현을 좀 다듬었다)
.
---
1. 『삼강행실도』란 어떤 책인가
.
『삼강행실도』는 세종대 편찬된 백성들을 교육하기 위한 윤리·도덕적 사례를 담고 있는 교화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윤리교육을 위한 다양한 교화서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삼강행실도』계통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널리 간행되고 읽힌 책 중에 하나였다. 유교적 윤리를 기반으로 사회 혼란을 방지하고자 했던 조선에서는 제도화된 지식이나 관습, 당시 사회의 지배 규범 등을 피지배층에게 전파시키고자 했다.

그 중 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교화서의 편찬·보급은 그 정확한 사례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이었다. 『삼강행실도』에는 오랜 중국·한국의 역사 속 효자·충신·열녀들이 수록되었는데, 그 수록과정을 통해 세종 시기의 조선의 정치·문화적 환경이나, 문제의식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
『삼강행실도』는 종래 고려말까지 읽히던 『효행록』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교화서였다. 『효행록』은 고려 충목왕 2년 권부·권준·이제현에 의해 저술된 책이었다. 『효행록』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62건의 사례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는 불교적인 설화나, 효행 관련이 아닌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하는 설화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효행록』은 조선 건국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
『삼강행실도』 간행이 『효행록』과의 차별화를 목표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초부터 『삼강행실도』가 『효행록』을 새로 펴내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계기는 세종 10년(1428) 10월 3일,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김화의 사건에 대해 충격을 받은 세종은 『효행록』을 편찬하되, 그에 더해서 삼국·고려시대 사람의 이야기를 더해서 책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효행록』을 보완하던 유학자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는 많은 부분들을 더하고 고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책인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
.
2. 『삼강행실도』의 편찬 과정의 고민들 : 어떤 인물을 수록할 것인가
.
세종은 이전의 『효행록』 보다 더욱 민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교화서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전까지 있었던 『효행록』의 좋은 점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여러 부분들을 고쳐나갔다. 우선은 더욱 백성들이 공감할 수 있고 배우기 쉽게끔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서 세종이 『효행록』 개찬을 명할 때 언급한 것처럼 자국의 사례를 추가하여 백성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자 했고, 그림을 첨부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 말 『효행록』과 조선 초 『삼강행실도』의 가장 큰 차이는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심 가치가 ‘효’에서 ‘삼강’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효행록』은 기본적으로 효자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일부 가족윤리를 함께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삼강행실도』는 삼강(三綱), 다시말해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실천하는 효자·효녀, 군위신강(君爲臣綱)을 실천하는 충신,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실천하는 열녀들이 등장하였다. 효자만이 강조되던 것에서 나아가 충신·열녀가 추가된 것은 절의(節義)가 강조된 조선 초기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두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는 유명한 말 처럼, 충과 열은 혈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대상 간의 윤리규범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한 절의는, 특히 남송대 주희 이래로 개인 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보편적인 자연 법칙으로서 중시되었다. 주희의 사상을 주된 정치이념으로 삼아 건국되었던 조선에서도 그러한 절의가 자연스럽게 강조되었다. 조선 초기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는 과정은 이러한 사상적인 변화를 수용하였던 결과였다. 이에 따라 『삼강행실도』는 중국·한반도의 효자 110명, 충신 112명, 열녀 94명을 수록한 사례집으로 만들어졌고, 그 중 한반도의 인물들은 각각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수록되었다.

『삼강행실도』를 만들면서 중국의 인물들 또한 새롭게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참고한 것은 당시 명나라에서 새롭게 들어온 교화서인 ‘칙찬권계서’ 들이었다. 그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많은 양의 새로운 교화서들이 만들어졌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황제가 직접 편찬을 주도했다고 해서 ‘칙찬권계서’라고 부른다. 명나라의 황제는 새롭게 만들어진 칙찬권계서를 주변국에 나누어 주었는데, 특히 명과의 관계가 돈독하였던 조선에는 많은 양의 칙찬권계서가 전달되었다. 칙찬권계서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신 교화서였기 때문에, 새로운 교화서인 『삼강행실도』의 중국 부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 형식이나 내용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였다.

『삼강행실도』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고려된 또 다른 부분은 『효행록』에 포함된 고려시대적인 특징들을 당시의 사상적 문제의식에 맞게 고치는 것이었다. 당시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것과, 국가의 권력을 지방까지 침투시키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삼강행실도』에서는 『효행록』에 실린 불교나 민간신앙과 관련된 사례들을 제외하고, 그 대신 칙찬권계서에 수록된, 지방관이 효자 등에게 상을 내리는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이처럼 『삼강행실도』 편찬은 당시 조선의 관심사를 담아, 그 시기의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이 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규장각본 『삼강행실도』(古貴172.1-Se63s-v.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
3. 『삼강행실도』 편찬 이후의 고민들 : 보급에서 언해까지
.
세종은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진 이후, 이를 서울과 지방 곳곳에 보급하여 이를 교육하고자 하였다.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당시 각 지방에서 늘어나고 있던 지식인층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부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늘어났던 이들은 각 지방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거나, 학교를 만드는데 협력하는 등 여러 교육활동을 했다. 세종은 각 지방의 수령들이 이들 지방 지식인들을 모집해서 한문을 잘 모르는 백성들에게 『삼강행실도』를 가르치게끔 했다. 각 지방에 사는 지식인들이, 민들을 모아 『삼강행실도』를 가지고 그림을 보여주고, 그 내용도 풀이해주면, 한문을 모르는 민들도 『삼강행실도』의 내용을 모두 잘 이해해서 효자·충신·열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강행실도』의 교육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삼강행실도』를 전국에 보급하고 나서도 꾸준히 범죄는 이어졌고 그 중에서는 세종 18년의 노비 정용(鄭龍) 사건과 같이 어머니를 때려서 죽게 한 경우나, 세종 25년 귀철(貴哲) 사건과 같이 아버지를 때려서 다치게 한 경우마저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세종은 『삼강행실도』 교육의 어려움이, 그 책이 한문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지방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는 방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책이 한문으로 되어있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삼강행실도』를 ‘언해(諺解)’, 즉 한글로 풀이해서 다시금 보급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샀다. 정4품 응교(應敎)였던 정창손은 『삼강행실도』가 보급되고 나서도 효자·충신·열녀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자질 여하에 달린 것이지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세종은 크게 노하여 정창손을 파직하였지만, 그럼에도 『삼강행실도』의 언해사업의 진행은 지연되어 수십년 뒤, 성종대가 되어서야 나오게 되었다.
언해된 『삼강행실도』에 대한 기록은 성종 12년(1481)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성종은 당시 여성들의 행실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안으로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도』의 열녀편을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언해로 된 삼강행실도는 시골의 부녀자들까지도 모두 익힐 수 있어서 풍속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종 20년(1489)에는 『삼강행실도』의 분량이 축소되기도 했다. 기존 330인이 수록되어 3책의 분량이었던 『삼강행실도』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는 지적에 따라, 성종은 이를 1책으로 축소하였다. 그 결과 성종대 이후부터는 1권으로 축소된 『삼강행실도언해』가 발간되게 된다.

이 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언해』 이후로, 『삼강행실도』 계통의 교화서는 여러 차례 그림의 형태나 언해의 방식, 사례의 선별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언해를 전제로 만들어진다는 큰 틀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시기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언해』의 형태는 규장각본 『삼강행실도』(一簑古170.951-Se63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
4. 『삼강행실도』의 효능 : 효·충·열의 ‘모델’을 제공하다.
.
조선시기 지식인들은 『삼강행실도』를 읽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에 효자·충신·열녀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시기 정창손의 지적과 같이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변화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보급이 얼마나 조선의 지배층·피지배층 개개인을 ‘효자·충신·열녀’로 만들어 주었을지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삼강행실도』의 보급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이루어져도, 부모에 대한 불효(不孝), 임금에 대한 불충(不忠), 남편에 대한 실절(失節)과 관련된 사건들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꾸준히 보고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삼강행실도』와 같은 교화서의 편찬·보급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삼강행실도』의 진정한 효능은 다른 곳으로부터 나타난다. 『삼강행실도』의 효능은 그 편찬자들이 표방한 것처럼 비윤리적인 개인을 개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자 하는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삼강행실도』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능이란 개개인을 ‘얼마나’ 효자·충신·열녀로 만드는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개인이 효자·충신·열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모델’을 제시해주는 부분이었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개인이 윤리적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는 다양했다. 가문의 혈연공동체나 지역사회로부터 윤리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 윤리적 개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행했던 국가의 포상을 바랐을 수도 있다. 물론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대가가 아닌, 개인적 신념이나, 수양, 자아실현 등을 목표로 윤리적 삶을 추구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들이 그 중 무엇을 목표로 했든지 간에,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정확히 '무엇이' 가장 윤리적인 실천인지에 대한 명확한 ‘모델’이 요구된다. 그러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삼강행실도』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삼강행실도』보급은, 조선시대를 살아간 개인이 그 동기와 무관히 효자·충신·열녀가 되고 싶을 때, 모방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모델을 제공하였다. 『삼강행실도』가 유통되는 과정 속에서, 그에 수록된, 오랜 전통 속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중국 고사 속 인물들과, 이후로 지속적으로 추가된 조선의 인물들의 행동들로 윤리적인 삶의 구체적 기준이 정착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의 내용이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보완되었던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역사 속 존재했던 효자들 중 『삼강행실도』에 어떤 효자가 포함되느냐의 문제는 불효자를 효자로 만드는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효자가 되고 싶었던 이가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효자됨을 구현하는지의 방향만큼은 좌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윤리적 모델이 교화서 보급을 통해 사회에 유행하면, 그 윤리적 행동에 수반되는 보상이 마련되는 대로 그 모델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 때문에, 『삼강행실도』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이 조선시대 내내 등장한 것과 별개로, 『삼강행실도』의 인물과 유사한 효자·충신·열녀들 또한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보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지식인들은 그 모델들을 ‘유교 전통’의 언어로서 정당화하였는데, 이는 수없는 반례에도 불구하고 고려말 이후의 사회변화를 ‘유교(사회)화’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각 시기 엘리트들이 매 차례 윤리적 인간이 되고 싶은 개인의 선행을 제시하고, 그러한 행동을 '유교에 부합한 것'이라고 매 차례 규정짓는 과정 속에서, 조선 사회의 윤리적 규범은 점차 ‘유교’의 언어·전통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갔다. 『삼강행실도』가 조선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
참고문헌
.
김항수, 1998, 「삼강행실도 편찬의 추이」, 『진단학보』 85
김훈식, 1991, 「고려후기의 효행록 보급」, 『한국사연구』 73
김훈식, 1998, 「삼강행실도 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진단학보』 85
주영하 외, 2008,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이상민, 2017, 「조선 초 ‘칙찬권계서(勅撰勸戒書)’의 수용과 『삼강행실도』 편찬」, 『한국사상사학』 56
이상민, 2020, 「15세기 지방 지식인층의 활용과 평민(平民) 교화」, 『역사와 현실』 118
Young Kyun Oh, 2013, Engraving Virtue: The Printing History of a Premodern Korean Moral Primer. Leiden·Boston: Brill

트윗 박제용.

 

(한국 기준으로) 전근대사와 현재가 비교대상으로만 의미있을 뿐 '인과관계상 무관'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버리면, 실질적으로 역사학은 그 장르적 정당성의 상당수를 문학연구에게 내어주게 될 것이라고(동시에 현재 진행형이라고),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좀 편한 자리에서 "고려/조선시대는 현재적 관점으로 보면 안 되고, 그 시대 나름의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맞닥뜨리면, 그 때마다"그런 식이면 한국에서 연구지원금을 고려시대 말고, 그냥 셰익스피어 연구에다 좀 더 투자하는 건 어떨까요?" 라고 (우스개를 섞어) 이죽거리곤 한다.

 

본질적으로, 장기적으로 연속되는 '일관적 인과관계'같은 것은 허구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전근대사의 국면들과 현재 한국의 연관성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허구'에 속할지도 모른다.(더 보수적으로 말하면, '설득력있는 언어가 덜 개발된 허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지금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져 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비교' 이외의 접근법으로, 한국-전근대(특히 사상/문화)사 연구의 존재의의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된다. ('미래적 대안'으로서 선비정신 운운하는 경우는 아예 논외로 하고)

 

결국 어쩌면

1 ('비교'의 방법론을 유지한다는 전제로) 종래의 '한국사학'의 분과장르적 정체성-즉 문학연구와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거나.

2 '거대한 구조'와는 무관함을 인정하면서, 정말 실낱같은 연속성이라도 복원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혹시 그게 아니면)

3 지정학적 접근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부활하거나.

4 (수치 데이터 없는거 다 알지만. 그래도) 수량경제사에 마지막 신앙심을 불태울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부분은 (상술한 것 이상으로) 상상의 영역으로 두자.

 

생각의 얼개는 대강 이와 같지만, 이 중 3, 4에 대해서만 약간 부연하자면, 어쩌면 근래 학계 일각에서 (서로 무관한 맥락에서) '역사지리' 연구와 '재정사'연구가 (좀 의외일만큼) 각광받고 있는 것 또한, 어쩌면 그 '과거와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찾으려는, 3,4번의 욕망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된다. (어디까지나 상상.)

 

2019. 7. 1

사람됨은 사람됨이고, 책 읽기는 책 읽기이다. 무릇 만약 사람이 열번 읽어서 깨치지를 못한다면 20번을 읽고, 또 깨치지 못한다면 30번에서 50번까지 읽는다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는 데가 있을 것이다. 50번을 읽어도 어두워서 깨닫지가 못해야 기질이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열번도 읽지도 않으면서 도를 깨우칠 수 없다고 말한다.

"주자어류" 학4 '독서법'上 57조목 중.

爲人自是爲人, 讀書自是讀書. 凡人若讀十遍不會, 則讀二十遍; 又不會, 則讀三十遍至五十遍, 必有見到處. 五十遍暝然不曉, 便是氣質不好. 今人未嘗讀得十遍, 便道不可曉.

------

과제 겸해서 예전에 살펴본 주자어류 중..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전습록의 왕수인은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독실한, 일견 종교 지도자 쯤에 가까운 사람이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딱딱하고 면도날 하나 안 들어갈 수도승 같은 이미지로 생각한 주희가 생각보다 꽤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는데에는 꽤 놀랐다. 

오히려 과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선생님 내지 학자분들이라면, 그 꽤나 엄격한 듯 하면서도 그 만큼 공부에 골몰하는 그 점이 당연할만큼 오히려 주희 스타일이라는 느낌..


2013. 6. 3


----


2013년 시점으로부터도 더 예전인 학부 시절의 명청사 수업에서 레퍼런스가 포함된 "사상가들의 대화록"을 만들어 오랬던가? 하는 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양명학에 사로잡힌 당시의 나는 당연히 주희-육구연의 대화 속에 왕수인이 끼어드는 포맷?을 골랐었던 기억.

어제 완독한 '크리에이션'을 읽으면서, 그 시절 과제가 생각이 났다. 


2019. 1. 22

1) 정당문학 권중화가 서연(書筵)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다가 위징(魏徵)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하는 감정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다 같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능히 감정을 조절하여 정도에 알맞게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감정대로 행동하여 실수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니 폐하께서도 항상 능히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여 시종이 여일하다면 후손 만대까지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신우가 말하기를
“아름답다! 이 말이여! 그대는 위징을 본받아 나를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였다. 권중화는 대답하기를
“다만 전하께서 저의 말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어찌 감히 마음과 힘을 다 바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우 열전, 신우 정사 3년.)

 

2) 왕(우왕)이 정관정요의 내용을 알고 싶어 정몽주를 시켜 강의하게 하자, 윤소종이 나아가 말했다. “전하의 중흥에 마땅히 이제삼왕으로 법을 삼아야 하지, 당태종은 취하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대학연의를 강의하시고, 이로서 제왕의 정치를 선포하소서" 
왕이 그러하라 하였다. (고려사 윤소종 열전 중.)
王欲覽貞觀政要, 命鄭夢周講之, 紹宗進曰, “殿下中興, 當以二帝三王爲法, 唐太宗不足取也. 請講大學衍義, 以闡帝王之治.” 王然之.

 

3) 왕이 경연(經筵)에 나갔다. 강독관(講讀官) 성석연(成石珚)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은 바른 말을 듣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말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이 이것을 잘 알고 언제나 얼굴에 화기를 띠고 말을 받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왜 나를 위하여 말하여 주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옛날의 착한 임금들은 천하의 지혜를 자기의 지혜로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소 먹이는 아이들의 말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도 견문(見聞)을 넓히어서 참작하여 쓰기를 바랍니다 (고려사 세가 공양왕 경오 2년 )

 

4) 예조 의랑(禮曹議郞) 정혼(鄭渾)과 교서 소감(校書少監) 장지도(張志道)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서 올리게 하였다. (태조 4년 9월 4일(을미). )

 

5) 임금이 경연(經筵)에 앉아서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태조 7년 10월 5일(정미). 번역본 참조)

 

6) “내가 일찍이 상왕(上王)의 명을 받고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주(註)를 붙인 바 있다.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진서(晉書)》를 찬술(撰述)하였는데, 이를 평론하는 자가 이르기를, ‘서사(書史)를 찬술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힘쓸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제 내가 《정관정요》에 주(註)를 붙이는 것은 당나라 태종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러 사무가 번다하여 겨를이 없으니, 너희들이 그 주를 다 붙여서 올리도록 하라.” (세조 1권, 윤6월 19일(계해).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7) (양성지 상서문 중) 오늘부터 계속하여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통감(通鑑)》을 강(講)하는 것을 마치고, 다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자경편(自警編)》·《정관정요(貞觀政要)》·《송원절요(宋元節要)》·《대명군감(大明君鑑)》·《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국조보감(國朝寶鑑)》, 또 사서(四書) 가운데 《논어(論語)》, 오경(五經) 가운데 《상서(尙書)》를 강하여 항상 관람하시면 심히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예종 1년 6월 29일(신사) .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8) 광종이 처음 즉위하였는데 하늘의 꾸짖음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왕은 화복이 오기를 바랐는데 이에 정관정요로서 우선함은 어째서였을까. 왕의 마음은 당종의 다스림이 되어, 순·탕보다 넉넉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요의 설은 전책(典冊)을 넘어섰으나 개탄하고 원모하여 쫓아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 왕의 미혹함이 많이 보인다. 당태종[唐宗]은 이름날리길 좋아한 군주로서 정요에 실린 바가 비록 하나둘 정도 가히 칭할 만하나, 그것들은 거짓된 인의요 공리를 구제한 것이니 참람된 덕이 또한 많았다. 한고조와 비해서도 광종은 일찍이 또한 미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감히 순·탕에 비하겠는가. (최부 동국통감론 중. 직접 번역. 내용이해상 차이 있을 시 오역교정바람) 

光宗初卽位。天之譴告切至。王欲祈禳。而乃以貞觀政要爲先。何哉。王之心以爲唐宗之治。優於舜湯。政要之說。過於典冊。慨然遠慕而欲追之乎。多見其王之惑也。唐宗。好名之主。政要所載。雖有一二之可稱。假仁義。濟功利。慙德亦多。比漢高 光。尙且不及。況敢擬於舜湯乎
-2) 광종 원년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므로 왕이 이런 재앙을 물리치는 방도를 물으니 사천관(司天官)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이 제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왕이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당나라 태종 정관 년간에 만든 정치 서적)》를 읽었다.(고려사 오행지 3, 토. 번역본 참조. 원문 생략)

 

9.) 그 외 성종 3년에 2회, 10년에 1회 각각 정관정요를 강 했다는 사료가 있음. 내용 자체로는 정관정요 인식의 추출은 불가.

------

 

부연

 

(a)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에 따르면, 2)에 근거하여 고려시대의 정치사상이 "정관정요"로 수렴되고, 여말선초에 들어 "대학연의"로 단절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앞서 제시한 자료상으로 보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당 태종관 관련해서 서술한다면 더 복잡해질 진다. 그에 관해서는 부정적 기록과 긍정적 기록이 마구 겹치기 때문이다.)

 

(b) 본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 2)의 우왕시기 윤소종의 언급, 그리고 8)의 동국통감론에 나온 성종시기 최부의 언급이 실질적으로 주목되는 정관정요에 대한 직접적 부정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첫째 앞서 괄호로 부연한 바, 몇차례 드러나는 당 태종 부정론 둘째 본문에서 소개한 자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대학연의에 관련한 기록들 그 양자를 토대로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문제를 설명되고 있다. 
다만 이미 2) 8)을 제외한 사료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별 문제 없이 정관정요가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현상이 여전히 이 문제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점을 가로막기도 한다. 

(c) 그리고 2)를 보면 태조대 정관정요가 경연되고 있고, 이 까닭에 윤소종 류의 건국세력 사대부의 입장이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8)의 경우 당 태종, 더 나아가 광종 자체에 대한 부정론이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점을 8-2)에 대한 고려사 찬술자와는 사뭇 다른 인식을 통해 일부 엿볼 수 있다..) 등은 위 문제의 추가적인 혼란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정관정요-대학연의 교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정리 수준에서 잠시 묵혀 둔 채 나중에 천착할 기회를 도모하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 변화라는 것이 그리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d) 그리고 본문 내용과는 상관없이 중요한 거 하나는, 막상 정관정요 관련 기록 자체가 근본적으로 엄청 적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려사 전체에서 다 쳐도 채 20개가 안 되며, 그 중 원간섭기 이전 자료는 광종, 예종, 덕종대 드러난 3개 사료가 고작이다. 고려사의 기록 부재와 더불어 오히려 교체기에 들어서서야 정관정요가 언급되는 문제 또한 감안되어야 한다.

 

(e) 물론 그렇다고 대학연의-정관정요의 세대교체가 '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설령 정관정요가 그 이후까지 의미있었고, 대학연의가 이를 대체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들, 대학연의는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관철되었든) 고려 말부터 16세기까지 중요도가 '부상'한 서적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대의 것을 완전히 대체해야만 의미있는 변화인 것은 아니다. 보편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얕고 사소한 첨가만으로도 경우에따라 유의미한 '변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변화를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우선적으로 감안되어야 할 리얼리티는 그 '사소함'일지도 모른다.

 

 

 

2013. 11. 15

중종실록 중종 39년 1월 26일(을축)


사간(司諫) 허백기(許伯琦)가 아뢰기를,
“교화의 도구로서 이를테면 《삼강(三綱)》·《이륜(二倫)》 등의 서적은 다 급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학교(學校)는 교화의 근본인데 지금은 또한 쇠퇴하였거니와, 태학(太學)은 교화를 먼저 이끄는 곳이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또한 사람의 큰 윤상(倫常)인데, 접때 관중(館中)에서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한 자가 있었습니다. 태학도 이러하다면 외방(外方)은 논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중략)
지사(知事)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유생이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이고 서로 시비하여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데, 향당(鄕黨)이라면 나이에 따라 벌여 앉는 것이 옳겠으나 국학(國學)은 작은 조정이니, 승보(升補)·입학(入學)을 선후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더구나 학궁(學宮)의 제도는 조정에서 정하였으므로 유생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닌데, 이제 조정의 명이 없는데도 스스로 하니, 이것은 위를 업신여기는 것인 듯합니다
(중략)
허백기는 아뢰기를,“신의 생각으로는 예조에 신보하지 않았더라도 나이에 따라 앉는 것은 유자의 일이므로 무방할 듯합니다.”하고, 성세창은 아뢰기를,“학궁의 일은 조정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략)
하니, 상이 이르기를,“나이에 따라 앉으면 나이 많은 유학이 도리어 생원 위에 있게 되어 생원과 유학의 분별이 없게 될 것이니, 일에 있어서는 어그러지는 듯하다.”----
중종시기 소학의 도입과 더불어 '장유유서'가 새로이 더 중시됨에 따라, 그 안의 절차(여기서는 학교에서 자리 앉는 순서)문제가 과연 입학 년수(요즘말로는 학번) 순으로 하는지, 나이 순으로 하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썩 믿음직한 구분법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전통적 분류법에 따라 '사림'이라고 불려질법한 류들은 나이순, '훈구'라고 평가될만한 부류들은 향당에서는 양보하겠지만 적어도 중앙의 국학에서만큼은 학번순을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러한 '학번VS나이' 논쟁은 선조 6년에 다시 발발했을때까지는 '학번'이 이기는 추세였지만, 이후 숙종 23년에 들어서부터는 결국 '나이순'이 승리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대학가의 '학번VS나이'서열문제의 성패 여부는 '재수생의 비율'에 달린 문제로 많이 귀결이 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재수생이 많지 않은 과의 경우 학번순, 재수생 수가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경우 나이순). 이러한 조선사의 경우 '나이순 서열'자체를 중요시하는 소학강조의 사상사적 흐름과 더불어 성균관 자체의 분위기가 유생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한번 생각할 만한 주제이긴 하겠다..

---


1) 해당 사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로 (연구 자체에서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김성우,2008,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의 제 5장 부분을 참고하였다. 

2) 김성우 선생님도 지적하신 바이긴 한데, 이미 (소위) 학번순/나이순의 대결 구도와 상관없이 이미 중종 말엽애는 소위 '학번순 지지층'이라고 해도 중앙의 성균관을 제외한 향당 향교 등의 사안에서는 나이순 체제를 (억지든 자의든)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본 사료의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질서가 이미 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대세라면 대세였다는 것..

 

 

3) 첫 번째 부연과 연결해서.. 해당 사료의 사평도 재미있다. 결국 '소학'과 '장유유서'를 동일시하여 생각하고 있으며, 장유유서를 우선하지 않는 태도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사관은 평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소학》을 강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별히 권강할 것 없다 하고 장유(長幼)에 차서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앉는 차례를 앞세울 것 없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을 인도하여 도리에 맞게 하는 뜻에 맞겠는가? 

4) 다만 이 논의랑은 별도로, 조직의 구속력 강약과 사회 보편 규범의 강약이 반비례관계를 이룬다는 내용은 상당히 음미할 만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보편 규범'적 기준(소학)이 '조직적 구속'(대학연의 혹은 정관정요)을 고의적으로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슬로건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강했는데, 이 현상 자체는 조직의 구속력 자체의 강약관계에 따라 보편규범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 것의 붕괴'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연구가 이미 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오래된 통설'과는 다르게 숙고가 필요한 설명법인 것이다.



5) 정말로 여담.이 테마에 대해 미묘하게 형용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어쩌다보니 대학 학부를 두 군데를 다녔는데, 한 군데는 

그래뵈도 꽤 엄격한 학번순이 유지되고 있었고, 다른 한 군데는 당연한 듯 나이순이 체계화 되어 있어  그 갭에 사실은 꽤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당연히 서열 구분이 없는게 가장 낫다는 건 자명하지만)양측 학교는 각각 서로 다른 이유의 학내 갈등이 있기도 했다. 학번순 학교는 '자기 동기간에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부르게 (동아리 등 그룹의 룰로서) 허용해 달라(즉 '장유의 호칭 쟁탈 운동'이 제기)'가 꾸준한 갈등요인이었다.

그런데 후자의 학교에서는 '동기든 선후배든 형/오빠/언니/누나 호칭을 하지 말자'(즉 주로 장유의 호칭 멸살 운동이 제기)가 제기되었다. 

이를 지금와서 돌이켜 본다면, 학번제 학교가 동아리와 학과간의 이중적 조직화(?)를 통해서 학내 사회가 꽉 짜여있던 것이 그런 '학번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비결이겠고, 상대적으로 후자의 학교는 규모도 큰 대신 학과의 조직력은 상대적으로 약했고(거기다가 자유주의적 풍토도 훨씬 강했고), 그 까닭에 '학번제' 자체의 운영부터가 이미 느슨했던 것은 아닐까.




2013. 9. 20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희의 저돌성  (0) 2019.01.22
정관정요-대학연의 세대교체 문제(131115)  (0) 2019.01.16
조선시기 유불관계와 '포용적 우월론'  (0) 2019.01.15
다산의 오만함(자신감?)  (0) 2017.07.11
김시습 운운  (0) 2017.07.11

생각보다 유불문제/불교 비판문제에서 그 존재가 거론되었지만 동시에 더 섬세하게 천착될 필요가 있는 테마가 바로 '포용적 우월론'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종교적 정체성과 학문적 정체성의 공존 가능성'을 설명했는데 그것과 별도로 성리학적 정체성을 긍정하면서도 불교 비판의 부분에 한정해서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이러한 요소를 '모모 인물이 상대적으로 성리학에 불철저한 결과'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는 단순히 철저/불철저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당초에 '정체성의 투철함'을 점수로 매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분야에 따라 저술점수, 척불성, 등등으로 항목화시켜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후에 의미있는글을 많이 남겼지만 그 논문이 간학문적 성과/대중교양서가 대부분인 역사학자와, 저술 수는 적지만 순수 아카데믹한 저술밖엔 남기지 않은 역사학자 중에 누가 더 '철저한 역사학자'냐는 것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래 소개된 사례는 그 '포용적 우월론'에 대해 실마리를 주는 율곡 이이의 저술이다.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참조하되 일부 철학적 논의에서 논리적으로 꼬이는 부분 몇몇을 다듬었다.)

-----

내가 풍악산에 구경 갔을 때에,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몇 리쯤 가니 작은 암자 하나가 나왔는데, 늙은 중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 일어나지도 않고 또한 말 한마디 없었다.


암자 안을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을 짓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되어 보였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중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무얼 먹고 굶주림을 면하오?” 하니, 중이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내 양식이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솜씨를 시험하려고 묻기를, “공자(孔子)와 석가(釋迦)는 누가 성인(聖人)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선비는 늙은 중을 속이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오랑캐의 교(敎)이니 중국에서는 시행할 수 없소이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순(舜)은 동이(東夷)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사람이니, 이들도 오랑캐란 말이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불가(佛家)의 묘(妙)한 곳이 우리 유가(儒家)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하필이면 유가를 버리고 불가를 찾아야겠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 같은게 있소.” 하자, 


내가 말하기를, “맹자가 성선(性善)을 얘기할 때에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소. 다만 우리 유가에서 본 것이 실리(實理)를 얻었을 뿐이오.” 하니,


중은 긍정하지 않고 한참 있다 말하기를,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오?” 하자, 


내가 말하기를, “이것도 앞에서 말한 경우라오.” 하니, 

중이 웃었다.


내가 이내 말하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색이오, 공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말은 진여(眞如)의 본체(本體)이니, 어찌 이러한 시(詩)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겠소.” 하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이오, 어찌 이를 본체라 하겠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유가의 묘(妙)한 곳은 말로써 전할 수 없고, 부처의 도(道)는 문자(文字)밖에 있지 않은 것이 되오.” 하니, 


중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당신은 시속 선비가 아니오. 나를 위하여 시(詩)를 지어서,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글귀의 뜻을 해석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니, 중이 보고 난 뒤에 소매 속에 집어 넣고는 벽을 향하여 돌아앉았다. 나도 그 골짜기에서 나왔는데, 얼떨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사흘 만에 다시 가 보니 작은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중은 이미 떠나 버렸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진데 / 魚躍鳶飛上下同

저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로세 / 這般非色亦非空

심상히 한 번 웃고 신세를 돌아보니 / 等閒一笑看身世

지는 해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서 있네 / 獨立斜陽萬木中


율곡전서 1권. 풍악산(楓嶽山)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贈小庵老僧)에게 주다 

(저술시기 1555년 즈음 추정)

----

해설

율곡이 여기서 요순과 부처를 동일시한 점, 동시에 非色非空의 불교적 문자를 유교적 개념과 연결하여 이해한 점 등은 분명 '척불적 성향'이라고 정의내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점일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율곡이 스스로가 유학자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하산 이후의 시기로 추측되는 본 저술에서 유학자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가 어느 부분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불교의 저술을 성리학적으로 흡수해 내려고 하는 시도를 율곡이 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대한 율곡의 명백한 자부심을 방증해주는 것이라는 과감한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그의 성향이 이전의 출가 전력과 맞물려 공박받게 된 점과, 그의 이후에 율곡 문하에서 율곡을 평가할 때 불교적 포용성에 대해서 언급을 피하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성리학 발전의 심화에 따른 사상적 척불의 당위성 강화' 측면보다는 성리학의 학문적 전승 형태의 (양적 심화가 아닌)질적 변화와, 그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한 정치적, 학문적 변화요인들을 검토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


부연

 1)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말은 시경(대아 한록)과 중용 12장에서 활용된 이래 理와 道의 보편성을 설명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구절이다. 사실상 성리학의 정수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구절.(이를 요약한 연비어약鳶飛魚躍론은 퇴계詩의 핵심 키워드로 평가받기도 한다.)

즉 이 구절로 승려를 완전히 설복시켰다는 저 내용은 사실 불교에 대한 포용성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표출시킨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한 이 저술의 의미를 따질 때에는 이 글의 집필시기가 율곡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1559년 이전의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도 있다. 설령 율곡이 그 전에 하산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본인이 아직 관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술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은 돌려 생각해보면 관직에 있던 인물들 또한 '불가능한 저술'로서 쓰지 못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더 개인적인 저술의 영역에서 더 따져볼 문제겠다.


3) 이러한 '개인적 저술'의 영역을 '사적 교유'. 혹은 '개인적 신앙'의 영역에서 한정시키려고 하는 것 또한 기존 연구에서 흔히 이루어져왔던 접근법이다.

다만 이는 설득력있는 주장임에도, 극복할 필요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순수한 인적 교유의 측면이 아니라 율곡의 경우처럼 지적 사유가 분리되지 않은 경우도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적 파편들이 실제로 사유 저변에서 복류하여 이후로 전승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척불론 관련해서 빠져선 안 될 또 다른 함정은, 불교를 '성리학에 대치한 생존의 투쟁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불교는 숱하게 공격당한 것도 맞지만, 그 자체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말해지기에는 또 나름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도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즉 중요한 것은 성리학 사회에서 불교가 배척받았다는 것을 기본으로 두되, 그 와중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의 양상, 과정을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


5) 이건 부연이라기보다는 여담인데, 저 승려는 불교 자체의 견지에거 본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강단을 더 부려도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감이 있기도 하다.

사실 율곡의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운운은 일견 언어철학적인 견지에서 '형식으로서의 언어가 가진 의미'를 역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이를 랑그-시니피앙 운운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선불교적 진리관은 이런 언어적 형식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월론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철스님이 했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본다' 화두 식으로 밀어붙여도 안 될 것도 없었다....저 둘이 좀 더 많은 얘기를 더 했으면 좋았을텐데 저 상황 자체는 아쉽다면 아쉬운 일인 것이다.


2013.12.15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관정요-대학연의 세대교체 문제(131115)  (0) 2019.01.16
조선시대의 나이제와 학번제(130920)  (0) 2019.01.15
다산의 오만함(자신감?)  (0) 2017.07.11
김시습 운운  (0) 2017.07.11
정다산 대학공의  (0) 2017.07.11

건륭 신해(정조 15년. 1791). 내각의 월과(월별로 보는 과거시험)에 친히 (왕께서) 대학에 대해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였다.

"신이 망령되이 이르나이다. 대학의 극치와 대학의 실용은 효.제.자.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대학의 요지를 밝히려한다면 반드시 먼저 효제자 세자를 가지고 깨끗이 닦아 문장을 펼쳐야 대학의 전체.큰 용도를 가히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경문에 말한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곧 명덕을 밝힌다는 일의 귀착이 반드시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는 데에 달려있다는 한 구절입니다. 효도. 공경을 흥하게 하는 법과 고아를 구휼해 배반하지 않는 문화가 과연 명덕을 밝히는 일의 진면목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책문을 거두어가서 (왕께서) 제 1등으로 발탁하기를 명령하였으나, 당시에 채번옹(채제공)이 독권관으로서 "소위 명덕의 뜻을 말한 말이 (주자가 쓴) 장구에 위배된다"고 하여 2등으로 강등하고 김희순을 제 1등으로 만드니.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일이다..

정다산 "대학공의" 중에서

----

효도. 형제애. 자녀사랑(효.제.자)로 대표되는 도덕감정에 근거한 실천윤리론을 대학의 근본. 유교윤리의 근본으로 이해한 다산의 해석은 체제공의 지적 대로 격물치지로 대표된 주지주의적 수양윤리. 학습윤리론을 근본으로 한 주자의 전통적 대학 해석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말 그대로 '전통적인 학설에서 벗어난 소수설'이었다는 소리다.

경서에 대한 "정확한" 해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문경학.금문경학적인 해설을 달 생각은 없다. 다산의 해설이나 전통 학설 중 어느 쪽이 더 연구로서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도 (지금와서 가능하지도 않고)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시점에서 '일반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은' 학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평가절하의 근거가 된다는 저 상황은 당시 학계사정이 '학문적 전통이라는 이름의 권위'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좋은 지표라고 할 만한 것이고 이는 조선후기 다양한 학문 조류가 '등장' 한 것과는 별도로 기성 학문계의 입장이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의 반증이라 할 만할 것이다...


2013.3.3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의 나이제와 학번제(130920)  (0) 2019.01.15
조선시기 유불관계와 '포용적 우월론'  (0) 2019.01.15
김시습 운운  (0) 2017.07.11
정다산 대학공의  (0) 2017.07.11
금강경 약간 정리  (0) 2017.07.11

1.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관저는 즐거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지는 않는구나..

2. '낙이불음'의 감성보다는 의외로 '애이불상'의 감성이 더 절절해서일까..의외로 역사속에 다양한 애이불상의 모델들이 이미지화 되어있는데 역시 그 안에서도 단연 대표모델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15세에 모친상을 시작으로 식구들을 잇다라 여의고 21세에는 학우를 잃고 시대에 실망하고 세태에 지쳐버린 그에게 남은 거라곤 승가에 입적하는 일 뿐이었겠지만, 문학의 길(?)같은 것이 그로서 끝나지는 않았다.

3. 선학으로부터 많이 연구되어 나온 말마따나 조선시기 억불정책은 당대 지식인과 더 나아가 (이쪽은 거의 실패였지만)대중들의 일상세계에서 불교를 분리시키는 데 그 목적과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매월당이나 율곡. 그 외의 숱한 선비 처사들의 이야기를 미루어본다면 '불교의 세계'라는 건 그것을 무지몽매-미신으로 규정짓는 걸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성리학 지식인들에게 있어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등 뒤를 항상 유혹했던 '탈속의 해방구' 같은 게 아니었을까.


2013.4.24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기 유불관계와 '포용적 우월론'  (0) 2019.01.15
다산의 오만함(자신감?)  (0) 2017.07.11
정다산 대학공의  (0) 2017.07.11
금강경 약간 정리  (0) 2017.07.11
유교구신론 - 박은식 약간 발췌  (0) 2017.07.11

훗날의 유학자들이 경박하게도 무릇 한-송의 다른 해석을, 반드시 송 쪽을 어기고 한 쪽을 따르는데, 비록 의리가(송쪽에) 명백하여 성인이 일어나도 바뀔 수 없음에도, 반드시 깎아내려 하자를 찾아 이로서 왜곡된 말을 이루고자 하니 어찌 공론이라 하겠는가.

後儒輕窕, 凡漢宋之異釋者, 必欲違宋而從漢, 雖義理明白, 聖起不易, 而必欲啄毁求疵, 以成其拗曲之說, 豈公論乎.

정다산 "대학공의" 중에서.. 

---

1. 종종 언급하곤 하는 책인 '대학공의'는 기존 주자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구성된 "대학장구"의 해설이 대학의 본뜻에서 다를 수 있다는 견지에서 기록된 저서이다. 그런고로 본서에서는 구태여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실로 많은 주자 해설 비판이 발견된다.. 따라서 본 구절과 같이 한유(漢儒)를 비판하고 주자가 포함된 송유(宋儒)를 옹호하는 내용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따로 조사해서 남길 부분이지만, 정다산은 본인 증언에 따르면, 조정에서 이루어진, 정조 주관의 시험에서 1등 장원을 하고도 주자 해석과 다르다는 이유로 등수가 떨어진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까지 하다.)

2. 정다산의 학문체계는 '실학'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가치지향과, 정조 연간이라는 독특한 시대 분위기와 연관하여 여러 방면으로 해석된 바 있다.

그에 대해서 많이 나오는 걸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한,당 유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기존 주자학 학문체계의 틀을 비판-극복하였다.
2) 상제천 등의 개념을 도입해 (아마도 천주교의 영향 안에서) 아예 유학체계의 틀 자체를 깨뜨리려고 노력하였다.
3) 주자가 영향을 받은 한대 유학자 정현을 비판함으로서 오히려 더 강력한 주자 비판을 전개해 나아갔다.
4) 아니다. 어쩌면 경전의 원리주의적 해석에 골몰한다는 의미에서는 가장 지독한 보수주의자다.

.. 

정리하자면 1~3번은 비교적 진보적 면모를 보여주는 견지, 4번은 그의 상고주의적 경향을 비판한 견지인 셈이다. 그러나 어느 족이든 간에 '다산은 주자의 설을 한-당의 설을 활용해 비판하였다'는 1)의 학설이 지닌 강력한 틀은 벗어나지 않은 듯 하다.

다만, 본 구절의 내용을 놓고 생각해본다면, 
결국 정다산이 원한 '공론'에는, 사실상의 주자 비판서에 마저도 송유를 오히려 옹호하는 그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정치적인 것이기에 앞선 순수한 학문적인 사실 추구의 영역도 있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저 '사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를 우리는 다 끝난 걸 지켜본 지금의 눈을 가지고, 정치니 의도니 하면서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는것일런지도 모른다..

의도를 운운한다는 건 그 본인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라 실상 학문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도무지 머릿속에서 이 생각만큼은 떠나지가 않는다..



-----------------

.

부연.


(정다산의 입장을 "보수적 유학"으로서 평하자는 입장이 학계 주류가 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사실 이미 정리해 두신 바에 답변이 실려있는데요, 정다산에 대한 해석은 굳이 말하자면 전통주의/수정주의 식으로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해석경향이 갈린다는 설명이이 그나마 가장 중립적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정다산논란의 주된 원인은 그 저술에서 정말 여기저기 누구 할 거 없이 걸고넘어졌기에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1번과 3번은 한당유학과 송대유학의 관계에 대한 기본 전제 수준에서 양립할 수조차 없는 주장들입니다..) 결국 그 걸고넘어진 대상과 추구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가 논점의 핵심이 되는 셈인거지요.

 

그런의미에서 초기 5-60년대 연구부터 지금까지도

 

그 비판 대상 : 성리학-신분제-지주제

목적 : (유학, 정확히는 신유학 이전의 유학체계를 논리기반으로 한) 근대 사회(비슷한 것)의 성립

 

. 1번을 기반으로 한 연구구도가 사실 기성 학계의 가장 일반적인 논의고, 그것과 약간 다른 의미에서의 해석인 천주교 운운, 2번이 그 뒤를 바짝 쫓아 나왔지만 연구가 진척되면서 많이 사그러들었지요.

 

여기서 3,4번은 정다산 연구가 더 진척된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시각들이라 할수있습니다.

 

우선 조선후기의 진보성(혹은 근대화)담론에 대한 회의와 함께 제기된 4번의 경우엔 설명해주신 바와 상당히 일치하는 신진 연구자들의 주된 연구동향입니다. (물론 '실학'의 의미 자체를 주자학의 한 형태로 받아들인 동향도 별도로 있었고, 어쩌면 이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 한 기반이기도 합니다만 요새까지 진지하게 퇴율과 다산을 '같은 것'으로 놓고보는 입장은 거의 없습니다...아주 없는건 아니란게 유감이지만요;;;)

이 경우

비판 대상 : 순수유학 외적인 해석을 일삼는 현대 유학자 및 그들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

목적 : 선진유학적 이상사회의 건설(이념적인 차원에서)

 

3번은 족보가 꽤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각은 겉으로보기엔 1번의 일부고, 논리적으로도 그게 맞지만, 역설적으로 탄생 배경상 주로 예학 전공하시는 분이 4번을 옹호하기 위해서 발견하고 부각시킨 부분이기 때뮨입니다. 아예 이 시각 하에선

 

비판 대상 : 한대 유학을 비롯한 유교경전 해석 일괄

목적 : 경전에만 확실히 충실한 예법 확립(실질적인 차원까지 포함해서)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최근 해석이다 보니 3번이 가장 소수설입니다

수정컨대 1번과 4번이 대립중.. 2-3번은 소수설, (해설은 빼먹었지만)그 중간의 해석도 있음. 으로 말할 수 있겠네요.


 2013. 05. 13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산의 오만함(자신감?)  (0) 2017.07.11
김시습 운운  (0) 2017.07.11
금강경 약간 정리  (0) 2017.07.11
유교구신론 - 박은식 약간 발췌  (0) 2017.07.11
태조 이성계와 유교  (0) 2017.07.11

여래가 항상 말하였다, "너희 비구들아, 내 설법이 뗏목과 같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불법또한 응당 버려야 하거늘, 불법이 아닌 건 어떻겠는가."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중략).. 소위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금강경' 중에서.

---

1. 일반적으로 동아사아 대승 불교의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금강경이지만, 산스크리트어 경전 원문이 실전하는만큼 2세기 인도에서부터 만들어진 경전이라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다만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상황에 맞게 대승불교적인 가치관이 강조된 결과 대승적인 가치관을 담은 금강경 자체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한 그에 맞게 커져갔던 것이다.
(이는 대학-중용 텍스트가 분명 선진유학 "예기"의 텍스트였음에도 시대에 따라 그 의미 독해법이 신유학 시기를 거쳐가면서 역변하는 과정과 유사할 것이다.)

2. 이러한 금강경의 중요 메시지는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 중 하나는 역시나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라고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앞 구절에 나오는 뗏목 비유는 그에 대한 꽤나 재미난 비유인데, 말인 즉슨 그렇다.

"강을 건너서 너머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뗏목을 타야하고, 잘 만든 뗏목은 장을 안전하게 잘 건너게 할 수 있지만, 강을 건넌 이후에도 뗏목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건너 땅으로 갈 수가 없다"

3. 말하자면 불법이라는 것은 더 나은 경지를 위한 중요한 길일지는 몰라도, 그 불법이라는 형상 자체에 몰두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뜻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했던 중국 당唐대 임제臨濟의 말과도 뜻이 통할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는 불교적 진리 습득이 내적인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적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비단 불법의 종교 차원에서 그치는 일이겠는가..

학문 연구나 생에 있어서 '경험'(혹은 이로써 비롯된 선행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더 나은 단계의 결론 도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는 역사학으로 비유한다면 해당 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나, 사료에 나온 정보들로부터 본인이 추출할 수 있는 역사상 등일 것이다.

응당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도 없이 순전히 생각나는대로 정리하기만 한다면 연구가 아니라 단순한 나만의 판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므로, 응당 이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극한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이 더 때로는 우리네 삶에 '편견'이라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경계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역사적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료적 기록이 시대상을 읽는 기초적인 방편이 된다는 것은 기본이겠으나,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의 나도 이 사료에서 정말 어떠한 정보를 추출하는가.. 이러한 추출의 방법에 있어서 그 시대에 대한 내 통념과 편견이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역사학계에서 활용되는 "사료비판"이라는 장치가 있다. 그러나 실로 개인적으로는 그 의미가 기실 "내가 생각하는 역사상과 배치되는 사료를 지엽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몰아가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는 의혹을 접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우리의 경험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판단, 지성의 근원이기도 하면서도 필연적으로 편견의 의미 또한 담고 있기에, 비록 마치 손가락이 없이는 달을 볼찾을 수도 없지만, 손가락이 달은 아니듯, 우리는 '언젠가는' 이를 완전히 극복하고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설법은 뗏목과 같기에 불법또한 응당 버려야 하고, 그런고로 (언어로서의)불법또한 불법이 아니다"는 말은 그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닐까...

난잡하게나마 생각해 본다..



덧1. 사실 유 불 (크리스트교)의 경서가 다들 그렇겠지만, 일이관지한 논지속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수있는 부분이 많기에 딱히 어떤 부분을 '핵심' 이라고 짚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두어번 정도 짬을 내어 통독한 가운데에서는 본 구절이 가장 가슴에 남기에 기록해 둔다.


덧2. 불교한번 더럽게 어렵다. 솔직히 '경험적 편견-언어적 메시지 자체에 매달리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며 구구절절 하긴 했지만, 당장 강을 건널 뗏목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어떻게든 허접한 뗏목을 짜 맞춰서 거기 매달리는 수밖엔 없다는 것을 항상 느끼곤 한다...

덧3. 강은 언제 건널 수 있을까... 언제쯤 대체 난 이 '뗏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 메시지에서 '강을 건너야 똇목을 버릴 수 있다'에 극도로 몰두하는, 전형적인 선지후행(先知後行)적인 사고는 그거대로 또 성리학마냥 문제가 있겠다 싶긴 하지만..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2013.5.17

'역사 관련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시습 운운  (0) 2017.07.11
정다산 대학공의  (0) 2017.07.11
유교구신론 - 박은식 약간 발췌  (0) 2017.07.11
태조 이성계와 유교  (0) 2017.07.11
성균관을 회상하며 - 목은 이색  (0) 2017.07.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