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자료 정리하다가 심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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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자 논쟁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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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 창제자'가 누구냐 하는 사안에 대해 거진 80년 치 연구사가 축적되어 있는데, 대충 3가지 갈래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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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이를 직접 창제했다(친제설)
ⓑ집현전 학사, 신미, 정의공주 등에게 세종이 명해 다른 사람에 창제되었다(비친제설)
ⓒ상기한 인물들 중 일부가 세종을 도왔다(협찬창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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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실록 등에 나온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 세종이 '친제'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는 그 외 여러 소수의 외부 기록들, 혹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여러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사실 제일 문제되는 게 ⓒ의 주장이다. 그나마 믿거나 말거나 명확한 입장과 근거를 제시하기라도 하는 ⓐ ⓑ와는 달리, ⓒ는 정말 '상식적으로 국왕이 혼자 하는 일이라는게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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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 근간이 되는 '상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좀 거칠게 말해 전근대 국왕의 하루에서 '혼자서' 있는 시간이 있기나 하겠는가. 붓글씨 한자를 써도 옆에서 먹 갈고 종이 가져다주는 것도 '협조'고, (그 목적이 문자 창제라는 것을 모른 채) 책 한권을 구해다주거나, 심지어 요 앞까지 가져다주는 것도, 모든걸 다 '협조'라고 한다면, 당연히 한글은 '협찬'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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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식으로 내관/궁녀/그 외의 보조인력들의 모든 도움까지도 '협조'의 영역으로 넣어야 한다면, '국왕이 친히 하다'는 개념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혹시 '국왕의 주도하에' 한 일이 친히 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지간한 대소사는 국왕의 재가 하에 이루어지니, 국왕의 정치 중에 '친히' 하지 않은 일은 없다. 반대로 앞서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일만이 '친히 한 일'이라면, 국왕 뿐이겠는가. 그냥 문명사회의 인류는 무언가를 '친히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까닭에, (구체적인 협찬 주체를 밝히지 않은) 협찬창제설은, '말이 되는 것은 맞지만, 논의 대상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주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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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가 이렇게 소모적으로 흘러갈바엔 차라리 관련 논의를 아래와 같이 '같은시기 학자관료집단과의 합의'를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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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글 창제는,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사업에 공감하기는 커녕 그 추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있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혹은
② 한글 창제는, 같은시기 집현전 학사나 조정대신들과의 어느정도 공감대 내지 합의를 형성한 채 이루어진 사업이다. (즉 최만리 등은 극소수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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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쟁점은 '거기에 세종 이외의 사람이 손을 얼마나 조금이라도 거들었냐'에 있는게 아니라, 그 창제 사업이 반포교서를 내리기 전부터 충분한 정보가 공유되어어느정도의 공감대를 얻고 있었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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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최근의 '외교적 배경설'(용어는 내가 지었다)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외교적 배경설이란 '한글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종래 ⓐ 협찬창제설과 마찬가지의) 상식적 반론 하에, 당시의 불안정한 조명관계, 한글 창제 이전부터 세종이 보여온 중국 운서에 대한 관심 등등이 한글 창제의 배경이 된다는 최근의 설명이다(짐작하겠지만 '한글 발음기호설/파스파 문자 기원설'과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글이 한자 발음기호로 쓰기위해 만들어졌느냐 문제, 내지 한글 자형이 파스파 문자에서 연원하는가 문제와 별도로, 한글 창제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은 상식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 창제에 요구되는 언어적 지식을 세종 혼자서, 하루아침에 모두 독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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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배경을 감안했을 때, 과연 '한글 창제를 하겠다는 직접적인 사업'은 조정대신의 합의 하에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언어나 외교에 대한 거시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 자체는 세종의 독단or파행의 산물이었을까.. 그 문제로 접근하는게 사안을 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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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보면, 한글의 명시적인 반대자 최만리에 대한 평가 방법도 좀 더 명쾌해진다. (내가 어느쪽에 찬성하는가, 그리고 역사가 이후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별도임.)
- ①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시기 유학자 관료집단들은 '외국어 교육/언어를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었고, 최만리 또한 당시 유학자/관료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맞게, 평범한 반응을 한 사람이 된다. (물론 이럴 경우 '세종시기 원리주의'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최만리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주장에 따라 15세기는 그런 “꼴통 성리학자”의 시대가 아니라는 종래 설명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다.)
- ②의 변화된 방식으로 보면, 세종대 실무관료-대신들은 대체로 외국어 교육/언어학을 수단으로 한' 외교전략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최만리는 그야말로 유교적 원리주의자로서 그 전반적 동의에 강경하게 반대를 강행한 사람이 된다.(물론 이럴 경우, 그 보편적이던 한글에 대한 공감대가 왜 순식간에 흐지부지되어버렸는지에 대한 설명의 책임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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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식으로 '친제설/협찬창제설'의 의의를 재분류하는 것은, 연구사를 내 입맛대로 조작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식의 정리를 바탕으로 할 때, 친제/협찬창제 논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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