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6일 병자 1번째기사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남곤이 말했다.

민간에서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힘써 행하게 된 것은 다 저들[기묘사림]이 주도한 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저들이 귀양간 뒤로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이들이 죄를 얻은 것은 "소학"의 가르침을 행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 듣기에 심히 편치가 않습니다.
조광조 등이 죄를 얻은 것이 "소학"의 가르침을 행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소학을 읽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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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란 말이 유행하면서, 그 역사적 어원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이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는 움직임마저도, (최소한 주변에서는)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도 한다. 어느쪽의 이야기도 유의미하지만, 개인적으로 '꼰대'를, '옛 것에 대한 숭배'로, 전통/호고/복벽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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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세대인 자신에게 익숙한 편안함/관성'과 '전통 그 자체'(내지 전통의 원형성에 대한 지향)는 그 영역이 겹치기는 쉬우나 분명 다른 것이며, 나름 '옛 것' 많이 밝히는(?) 조선시기라고 해서 딱히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전통을 기성세대 이상으로 강경하게 자기 정당화의 무기로 삼는다면, 그 직전까지 전통과 관성을 강조해 온 기성세대가 하루아침에 전통의 파괴자로 돌변하는 것도, 과거의 경험을 통해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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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졌지만 의외로 모르는 사람도 많은) "소학"이 16세기 중후반에 잠시나마 지배층 사회에서 명시적으로 배격되기 시작한 아이러니컬한 상황도 그 비슷한 사례다. "소학"은 이미 원대부터 주희 학단의 교재로 중시되었고, 고려 말부터 지식인 사회에서 꾸준히 보급되었던 만큼, 비록 조선 초 지식인 사회의 시큰둥한 반응이 문제시되었을지언정, 남곤이라고 그 중요성을 명시적으로 부정했을 리 없다.(이 자료를 두고 좀 예전에는 '16세기 이전까지는 소학이 덜 중요했다는 증거'로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나름의 의미가 있는 설명이지만 액면 그대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를 '신세대' 조광조가 적극적으로 운동의 아이콘으로 활용했던만큼, 이들의 실각 후, "소학"자체를 (별 이유도 없이) 문제시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남곤 정도니까, 그 이유라도 말하는 것이고, 그 아랫세대 쯤에서는 그냥 이유도 없이 꺼리는 분위기가 생기게 된다 - 물론 얼마되지 않아 기묘사림의 복권과 함께 "소학"의 권위도 되돌아오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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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뜬금없는 예시지만, '손님,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보다 '손님,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쪽이 손님을 높여주는 표현이라고 종업원이 설득하려 해도, 나아가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꼰대 손님'이 '나오셨습니다'를 쓰지 않은 종업원이 '예의가 없다'는 입장을 끝내 양보하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다. 사실 '예의' 내지는 '존대의 관습적 규범'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자체는 당초부터 '꼰대 손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권위를 장악하기 위한 정당화 수단이 '존대어-예의-규범'이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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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생각하면, 딱히 중시하는 메시지의 연원이 얼마나 오래냐/새로우냐 여부는, 세대의 신/구 문제와 상관이 없는 사안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결국 그 메시지가 누구를 향한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로써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정도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갑자기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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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23

'역사의 교훈' 같은 걸 운운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런걸 찾는 일이 유익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짧은 역사 공부를 통해 믿게 된 한가지 '개똥 역사철학'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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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현재적 처신이나 노력은 당사자가 열망한 미래 목표의 도달(혹은 그 목표의 좌절)과는 대체로 무관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말해 스스로의 삶에 충실한 것은 그 자신의 내적인 구원을 위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귀중한 삶의 자세이지만, 최소한 그 노력이 '목표달성'과 명확한 인과관계를 갖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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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맥락에서, '미래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란 말은 몇 가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는 현 시점 누군가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거야'라고 '가스라이팅'하는 바에 그리 심하게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그 미래의 시점에 내가 원하는 성취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섣부르게 스스로의 어떤 잘못이란걸 찾으려 들 필요도 없다는 뜻이며, 설혹 내가 기대 이상의 성취를 얻었다고, 내 자신의 어떤 대단한 미덕을 찾으려 우쭐댈 일도 아니게 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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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를 통해 만나 온,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데 실패한 과거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그랬듯, 현재의 내 행동/처신들이 내 미래에 얼마나 유의미할지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삶은 무엇보다 현재를 위해 유가치한 일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개똥 역사 철학을 가지고 있다.(정확히는 이를 상기하려고 자주 노력하고 있다.)

작업하면서 김용섭 선생의 논문을 좀 살펴보다, 갑자기 '필'이 받아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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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이 농민 전체를 위한 것이면서도, 그 중 대지주 중심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15세기에 대한 일견 오락가락한 설명이,  어쩌면 15세기 초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내지는 앞으로 제대로 더 설명해야 하는 핵심 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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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 '이중성'을 '이중적-다원적-복합적이다'라고 말하고 '때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시기를 한정하더라도) 일관되게 설명할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게 또 내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다. (물론 이걸 일관적으로 제시하게 되면, 시대의 복합성을 단순화했다든가/단선화시켰다는 비판이 반사적으로 등장하게 되겠지만, 최소한 '복합적이다'하고 말아버리는 상황보단 그게 낫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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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암튼 요새 한창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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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의 농서로서의 성격은 그것이 어떠한 농민층을 생산의 주체 또는 ‘표준농민’으로 삼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농사직설』은 국가의 권농정책, 국왕의 지시에 따라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건국 초기의 국가기반 확립. 세원 확대를 위한 농업생산의 증진을 위하여 편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농사직설』이 농업생산을 담당하는 전 농민층에게 그 지침서로서 이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 따라서 『농사직설』 에서의 생산의 주체는 국가재정을 위하여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전 농업생산자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봉건적인 지주경영과 자경하는 대농경영 소농경영을 함께 그 경제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농정책으로서 편찬되는 『농사직설』이 어떤 특정 계층만을 위주로 하여 편찬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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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농사직설』의 농업생산의 주체나 표준농민에 대한 관심은 특정 계층 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물론 『농사직설』이 그 기술 내용으로 보아 집약적인 소규모 경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 이는 농업생산자에게 경영확대의 길을 열어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전 농업생산을 운영해 나가려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생산자는 병작하는 양반지주. 농장경영자, 가작·자작으로 대농경영을 하는 자, 소농 상층의 부유한 대농층이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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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농사직설』이 여러 대목에서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하게 된다. 신전 개발은 이 시기 권농정책에서의 중요한 국면이었으며, 이 사업을 통한 농지 확대는 누구에게나 장려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업을 지원하고, 강제하고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이미 부유한 양반 지배층(대·중·소지주)이거나 최소한 소농 상층의 경제적 능력이 있는, 대농층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간을 통해서 농지를 확대하고 대토지 소유자가 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농지개발 정책은 주로 이들에게 의존했다. 농업정책의 기본이 그러하였으므로 『농사직설』은 그들의 경영규모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기술적 재정적 측면에서 그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터이다
...국가가 농업생산의 표본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농업생산을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것은 당시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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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농학사연구"(김용섭, 2009, 지식산업사, 100~101쪽)

 

2023. 2. 6

문득 책장을 보다가 학부때 읽었던 책을 무의식적으로 펼쳤는데, 요새 한창 생각하고 있는 주제와 비슷한 문장이 딱 나왔다. 암요, 월선생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요 엉엉 ㅠㅠ

최근들어 '국가or국왕'의 권위와 지배력 등을 강조하는 방식의 연구들이 주변에 많이 늘었는데(각 연구들에서는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어떤 방식이든 간에, 그 가치판단을 위한 비교군 설정을 신중히 해야한다는 생각..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전대와 비교해 강해졌다'는 한정적인 단서 하에서 의미를 부여하는건 몰라도, 그 이상의 결론으로 앞질러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 관행화된 것에 비해) 동의하기 힘든 시각이라고 생각해왔다.
(최소한 권력의 '종류'를 세분화하기 전까지는 특히나 그렇다)

 

근데 나름 학부때는(아마도 2010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는지는 아예 모르고 있었음. 심지어 밑줄까지 쳐 져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과거의 낯설음'에 대한 체감을..(근데 어쨌거나, 아래 구절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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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에 이 새로운 군주제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절대'군주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마치 그들이 무한한 힘을 지녔음을 선포하는 것처럼 여겨졌으나, 실상 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무한한 힘은 물론이고 그 힘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절대군주는 단지 무한한 권력을 가질 권리만 요구했을 뿐이다. ‘절대적 ’(absolute) 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absolutus 에서 기원하였는데, 이 용어는 군주가 무한한 권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군주가 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곧 법 앞에서는 언제나 무죄 absolved from the laws라는 것), 따라서 통치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실행하는것은 법적으로 그 어떤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권력에 임의성을 부여하였지만, 그렇다고 군주가 실제적인 권력을 지녔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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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더러 우리가 생각하는 실제적인 권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실질적 권력의 결여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결과, 근대 세계체제의 초기부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적어도 1970년대까지) 존재해 왔던 장기적 추세 가운데 하나인 실질적인 국가권력의 느리고 완만한 성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1661-1715년에 재위한) 프랑스 루이 14세의 실질적인 권력을, 예컨대 2000년의 스웨덴 수상의 권력과 비교해 본다면, 실질적 권력의 측면에서는 2000년의 스웨덴 수상이 171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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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이매뉴얼 월러스틴 이광근 역, 2005, 당대), 104~105쪽

* 과거인의 언어를 향한 '적당한 거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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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고, 책을 읽다보면 '도무지 동의하지 못하였으나, 여러번 읽다 보니, (비록 그 생각의 방향에 완벽히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설복되지 않을 수 없는 글' 이라는 것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서는 고 김준석 선생이 쓰신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에 대한 서평(이라기엔 논문에 가까운) 일부인, 아래의 단락이 그 정확한 예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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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사 속의 행위자들 스스로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 주장을 음미하는 것은, 그에 동조하느냐 여부와 별도로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 까닭에 관료-사족을 '지배층'으로 통합하고, 그 아래에서 다분히 후자를 문제시할 목적으로 公權/私權을 나누어 파악하는 인용문의 접근법에 모두 동의하기란 (사실은 지금조차도) 어렵다. 더군다나 그들 나름의 입장들을 정교화-체계화하는 과정이 이 분야의 발전을 지금껏 이끌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舊說'이 '新說'보다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당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설의 유지'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신설이 아닌 구설을 유지해야만 보이는 저변'에 대한 설득이 불가피 한 것에 비해, 안타깝게도 (인용문을 포함한) '구설 지지층'에서도 충분히 그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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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꼭 인용문과 같은 방향이 아닐지라도, 과거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시선의 필요성만큼은 수없이 상기해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이는 우선적으로 21세기의 학문은 설령 과거인의 목소리를 매개할지언정, 결국 21세기 독자와의 호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과거인의 목소리에 대한 복원 그 자체만으로 학문의 목적이 아니기에, 과거인에 대한 거리는 상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한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과거인의 언어를 충실히 복원한다"는 당위가, "언어를 남긴 과거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믿는다"는 편협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경계심을 놓치지 않기 위한 거리감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결국 지배층들의 자기변명이지"식의 냉소가, 굳이 논의의 중핵에서 매사 작동될 필요까진 없겠지만, 논의의 '입구'와 '출구'쯤에서는 곱씹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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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 대한 여러 생각에도 불구, 일단 '어느정도는 설복되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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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위해 일부 문단 구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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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은 (중앙)정부․지배층․집권세력․중앙관료, 혹은 국왕 등으로 구분해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경우에도 구태여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방지배’에서 양반 사족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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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선왕조는) 그 중기에 이르러 불가피하게 사족들을 지방지배의 매개로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사족지배체제라는 조선시기 특징적인 지방 지배형태를 나타나게 했다“(184쪽)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이 중앙 정치권력과 재지사족을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서 파악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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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다. 우선 여기에는 조선시기의 국가는 양반이 양반을 위해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국가라는 사실, 이는 국가와 사족=양반의 입장에서 지방과 농민을 지배하는 체제이며 사족=양반이 농민과 양립하는 구도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자의 생각에, 국가의 의미에는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는 중앙과 지방을 일체로 통합해서 장악한다는 것, 그래서 실제로는 국가가 지방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중앙정부․지배층(사족)이 지방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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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족=양반을 국가=조선왕조와 대립하는 존재라는 측면만 부각시키다 보면 예컨대 왕조의 몰락이 국권의 상실과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 책임은 막연히 ‘국가’에 떠넘겨지는 것이 되고 만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이었던 양반 사족이 국권의 상실 과정에서 어떻게 책임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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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서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문제 설정, 접근 방법대로 한다면 단순히 양반의 역할을 중시하고 긍정하는데(평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그칠 뿐만 아니라 양반의 분열 대립과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고 그 반대 입장에 섰던 양심적인 양반이나 농민들의 반봉건적인 의식과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위치 설정하는 일은 그 만큼 부자연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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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동연구자들은 15세기 관주도 향촌지배의 한계․문제점을 부각시킴으로써 16세기 재지 사족 주도의 향촌질서가 출현하는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제1부 제1장 논문). 또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강대했고 따라서 사족의 향촌자치, 사족지배가 이에 대항하는 견제력이었다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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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세 집권국가의 관주도형 향촌지배는 기본적으로 한계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것은 조선전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관주도의 한계’가 사족이 향촌주도에 나서게 되는 한 배경일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것이거나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의 주장은 역시 사족의 사적 지배를 적극 긍정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의 이론을 도입한 사족층과 그들의 자치활동이 수령권(=국가 공권)에 대한 私的 지배력, 私權의 저항․신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점에서 그들이 15세기 재지 품관층과 그토록 확연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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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상도 일각의 ‘유향소 복립운동’이 설령 연구자의 주장대로 ‘관권의 일방성’을 견제하거나, 중앙 집권세력의 사적 특권의 확대에 반발하는 지방 양반세력의 결집이었다 하더라도 이 때의 중앙 집권세력을 국가 공권력과 동일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점에서는 역시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앙의 집권세력보다는 재지 사족층이 더 양심적이고 바람직한 지배세력이었다는 선입견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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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지 사족의 유향소 복립운동이나, 수령권 견제 활동은 그들 자신의 권익 신장, 기득권 옹호를 목적으로 한 집단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중앙 집권세력의 속성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들 사이에는 재지 사족인가 중앙의 집권세력인가의 차이, 즉 현실적․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함께 농민지배의 방식, 국가 공권에 대한 태도의 여부가 더 중요한 구분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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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석 2000 서평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역사학보 168, 384~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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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꼭 해두고 싶은데, 이 서평 및 그 대상이 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던 00년에는, (인용문 저자의 표현을 빌면) '사족에 의한 향촌주도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주류였는데, 대충 10년대쯤 접어들면, 그 흐름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전제로 너나할 것 없이 '국가 제도의 주도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거짓말처럼 유행이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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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흐름을 굳이 멀리서 파악한다면, 결국 '주도권이 누구냐'만 거짓말처럼 바뀐 것 뿐, 선행연구에 대한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 특정 주도층의 자기정당화를 사실 그 자체로서 믿고, 그 저력을 묘사하고 있다는 면에서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반복컨대, 김준석 선생 방식의 '지배층 환원론'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방법에 내포된 미덕에 대해서는 꾸준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최근 동향을 파악할수록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2023. 1. 3.

http://aladin.kr/p/UQIuy

 

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군주 평전 시리즈 4권. 이 평전은 ‘이도’라는 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다. 사후의 칭송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행적을 고찰

www.aladin.co.kr

 

 

 

* 세종 평전과 '균형잡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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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서술에서 특정 인물 등을 '미화와 폄훼 없이 중립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범위에서도 90년대 이후 아주 일상화된 슬로건이지만, 사실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특히 공들여 잘 쓰여진 서술일수록, 저자의 '관점'이 개입되기 마련이며, 그 '관점'에는 (저자 자신의 주장이 어찌되었든) 가치판단이 안 들어갈 수 없다. 
종래 이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되곤 한 것이 '공과론-양면성'서술이다. 다시말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보여주자는 방식의 접근법을 시도한 경우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엔 '공칠과삼'류의 분량-역점 배분의 문제 속에서 결국 한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어, 중립성을 확보하는데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다.(더군다나 세종은, 현대 한국의 조선시대 소비의 중심에 있는 특성상, 특히나 그에 성공하기 힘든 소재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중립적 서술을 그나마 성공시킬 수 있는 한 가지 고전적인 방법은, 서술 대상이 놓인 '역사적 조건-과제'에 역점을 두고 인물의 행적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결과적으로 해당 인물의 개성 내지 선택의 범주를 축소시키고, 해당 인물을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장본인'으로 나타내게 되기 마련이지만, 균형있는 서술을 이루어내기에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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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 판단컨대 '세종 평전'을 두고 저자가 시도한 '균형잡기'의 전략 또한 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론에서 명시하지는 않은 터라 아주 자신하긴 어렵지만), 저자의 '균형잡기'는 종래 '중립적 서술'의 장에서 자주 차용하던 '공과론-빛과 그림자'전략과는 분명 색채가 다르다. 저자에게 세종은 그 자체로 유능/무능, 선/악의 판단의 대상이기에 앞서,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시대적 과제에 '성실히'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은 예시지만, 저자가 세종의 통치 원칙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기점을 '1436년 가뭄-다시말해 세종의 의지 밖의 천재지변'으로 설정한 것은 아주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결국 최근의 '성군 논쟁'에 이은 여러차례 평전 작업들보다 나은 '균형'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도 그 선택을 통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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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에서 중요한 축으로 설정한 '권력과 이념의 대립'이라는 틀 또한, 언뜻 보면, ⓐ 이념이라는 조건 하의 권력 추구라는 선택.. 내지는, ⓑ 권력이라는 조건 하의 이념추구의 지향.. 등의 질적 층위구분을 연상시키지만, 저자는 둘을 굳이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어느쪽이 세종의 '본심/진면목'인지 굳이 밝히려들지 않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자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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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 세종의 인물평 또한, '성실성'으로 축약될 것인데, 사실 '성실성' 또한 (적어도 역사 서술의 영역에서) '개성'내지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한 인물의 특성으로서 잘 다루어지는 키워드는 아니다. ("성실한 사람이 불성실한 사람과 어떻게 차별화된 정치적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과문하지만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의미에서 저자의 작업을 정말 굳이 비판적으로 말해야만 한다면, 세종의 '개성'이 (종래의 여러차례 긍정-부정적으로 재현된 세종 상에 비해) 오히려 선명하지 않게 표현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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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러한 흐릿한 지점들을 모두 감내하였기에, 이 책이 그렇게나 오랜 시간동안, (심지어 최근 몇년 내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세종 평전' 작업 중, 단연 돋보이는 '균형'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종래의 세종 평전 작업과 명확히 다른 길을 간 작업인지라 '우열'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종래의 세종 평전과 '차별화된' 작업이라는 점 만큼은 아낌없이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일독을 권한다.

* 아래 포스팅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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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선생의 50년대 신문연재 글을 대충 다 살펴봤다고 생각하고 반납 준비를 하려니까, 해당 글이 실려있던 날의 신문기사가 끝내 눈이 밟혔다. 기왕 반납하는김에 이것도 같이 갈무리해두자 생각에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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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사의 의의가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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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이우성선생 자신이 밝힌 아래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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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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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대로라면 1959년 5월에 역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내용이 8월에 동아대학보에 실려있다는 것인데, 당시 기사를 참고하면, 실제로는 1959년 7월 18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나 싶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나온 동아일보 기사상으로도, 1959년 7월 18일로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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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의의가 하나 더 있는데, 해당 논문이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리하자면,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는 ⓐ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1959년 2월에 한번 발표된 것을 ⓑ 서울의 동국대에서 열린 7월 월례발표회에서 재발표하고, ⓒ 그것을 8월에 요약정리해서 동아대학보에 싣고, ⓓ그 요약과정에서 누락된 부분을 10월에 보충하여 동아대학보에 후속편을 기고하고, ⓔ 그걸 다시 수정한 버전을 64년 역사학보에 싣게 된 원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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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 막히면 그것만 빼곤 뭐든 극성스럽게 된다고 하던가.. 그래도 어쨌든 재미있는 발견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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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보 제46호> 1959년 8월 15일, 1면

"향리의 변천은 사대부 형성" 이우성 조교수 역사학회에서 연구발표.

역사학회 월례 연구 발표회가 지난 7월 18일 동국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 대학교 문리대 이우성 선생님의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그 관인으로 진출"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지난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한 바 있었는데, 우리나라 봉건사회를 설명하는 커다란 문제를 제시하여 준 것이다. 따라서 이번 역사학회 본부에서의 이 연구 발표는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연구 논문의 요지는 고려 중역 "무인 쿠데타" 이후에 나타나는 독서인의 진출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향리들로서 후에 사대부를 형성하여 고려후기 역사의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고 밝히며 이들의 문벌과 신분 관계를 '무인쿠데타' 이전의 지배질서와 구분하여 이들의 사회적 진출의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조건을 해명하여 고려후기의 역사를 명확히 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선생님은 정중부난 이후를 봉건사회 형성기로 보고 이조시대부터를 봉건사회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지방의 교수들로서 역사학회 본부에 출장하여 연구발표회를 하기는 이번의 이선생님이 처음이며, 이것은 지난 제2회 전국 역사학대회에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 교수님들의 연구를 상호교환으로 발표하자는 결정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

생각이 막힐 때 마다 오래된 글을 찾아읽는 편이다. 그러던 중, 이우성 선생의 유명한 "한국중세사회연구(1991, 일조각)"의 수록논문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의 각주 1번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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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단행본에 실린 각주 내용인즉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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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뒤에 야간의 수정을 가하여 그 요약을 동아대학교신문(1959년 8월 15일)에 실었다"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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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당 책에도 실려있는 사실이지만,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논문은, 61년 "역사학보" 14집에 '여대백성고'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해당 논문을 찾아서 열어보니, 똑같은 각주에 다른 정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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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 원례발표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동국대학교에서), 뒤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제목으로 동아대학교논문집에 싣기로 했으나, 이 논문집의 발간이 지연되어 결국  금일까지 활자화되지 못하고 있다"

('여대백성고-고려시대 촌락구조의 일단면', "역사학보" 14, 196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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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추측할 수 있는 바, 이 내용은, 64년 "역사학보" 23호에 수록된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의 초고 쯤 되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박사논문의 한 꼭지를 이 언저리의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까닭에, 관심을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런종류의 글을 참고하는 요령이 다 그렇듯이, 단행본으로 재출간 된 내용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수정-보완의 여지를 존중하여 단행본 쪽을 보는 것이 옳기도 하지만, 그래도 '초기 단계의 문제의식' 같은 것을 알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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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신문(=동아대학보)은 학교에서 보기가 어려워서 무려 축쇄인쇄본을 상호대차를 해서 읽어야 했는데, 의외의 정보를 몇 가지 더 얻을 수 있었다.

ⓐ  1959년 8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확실히 '고려후기의 신흥관료'라는 원고가 실려있고, 특별한 편수 표시없이 글이 완결되어있다.

ⓑ 다만 1959년 10월 15일 동아대학보에는 그와 별도로 '고려후기의 신흥관료'(하)원고가 실려있는데, 전편의 내용을 이어 보충해 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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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학술적 가치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지금와서는 비판된 설명들도 많지만, 종래 논문-단행본에서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은 러프한 아이디어 같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나름 구하기 힘든 글이기도 하니, 이 참에 도움이 되실 분들을 위해 공유해둔다.

(어지간하면 원문 그대로를 한글로만 입력하였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 싶은 표현이나 구절들은 일부 다듬거나 문단을 내는 등 작은 수정을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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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_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6호 1959/8/15)
- 연구 발표 레쥬메-

우리나라 역사상 관인지배계급은 고려중엽에 이르러 계보적으로 커다란 단절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고려전반기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중심세력은 「귀신망족貴臣望族」, 즉 문벌귀족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그들은 대개 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던 경주의 구족으로서 최씨, 김씨, 이씨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신라이래의 귀족적 지배계급이 고려후반기에 이르러 홀연히 역사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한편 고려후반기로부터 새로 형성하기 시작한 관인층은 여러차례의 혼란과 번복을 거쳐, 여말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사회적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이씨왕조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이씨조선의 종말까지 우리나라의 지배계급을 보통 사대부계급이라고 한다면 이 사대부의 기원은 실로 고려후반기에 소급되는 것이다.
귀족과 사대부-이 두 지배계급의 성격적차이는 어떠한가, 전자가 호족적 토지소유-공전적체제 위에서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주적 토지소유-농장적토대위에 성립된 것이며, 전자가 혈통의 권위에서 살고 있음에 대하여 후자는 신흥발랄한 지식인인 것이다. 전자의 활동이 강대한 족적결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식상의 능력으로 과거에 합격된 우세한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후 지배계급의 교체가 어떠한 역사적 계기에서 된 것일까? 우리는 고려중엽에 일어난 일대정변-정중부란을 이것의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문무항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낡은 귀족의 숙청에 있는것이다. 그것은 귀족을 정치적으로 몰락시켰을뿐 아니라 종족적으로 일망타진한 것이었다. 향락과 소비로써 부패해진 비생산적인 귀족들을 숙청한 것은 심잠한 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시킨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임에 틀림없으나 이 역사적 임무의수행자가 당시의 건강한 민중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귀족과 동차원의 세계에서 생활해오던 아류귀족 즉 무신들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처참한 유혈이 강행되면서도 본질적 의미의 형명은 되지못하였다 『문신을 죽이자』라는 단순한 구호는 귀족지배에 불만이 높은 병졸 및 일부 도성인에게 일시적 동조를 얻었으나 그것은 본능적 반발심에 그쳤을 뿐 아무런 신 이상의 뒷받침이 없었다. 그러하여 문신의 질서를 일단 붕괴시키고도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낼 힘이 없었다.  도리어 무신들의 야만적인 살육의 자행과 포학무도한 징세와 행정능력의 결여 등은 사회전체를 후퇴시키고 문화의 소침을 여지 없게 하였다.

당시 귀족의 교육은 중앙국학의 외에 사학 즉 최충의 구재 같이 달관현유에 의하여 설립된 사학이 개성에 연이어 등장해 귀족의 자제를 지도했던것이 무인정변후에 국학도 사학도 파괴되어 중앙의 귀족문화는 모두 폐허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씨정권하에서 문치가 약간 회복 되었다고는 하나 귀족문화가 폐허가 된 속에서 다시 소생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의 문화는 도성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지방에서 불승에게 학업을 전수받은 『사자士子』들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이 『사자』들은 소위 독서인 즉 신흥지식인을 가르키는 말이며 앞서 말한 바 고려 후반기의 신흥관인층이란 이 『사자』 독서인을 주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대부라는 것이다.

이들 사자 독서인은 무신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역시 문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형태적으로 전대의 귀족에 크게 다를 뿐 아니라, 계보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 신흥관인층의 출신을 어디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당시의 지방토착세력-향리층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향리는 관리의 노복
- 사무능력에 따라 상급관리로 진출- 

고려시대의 향리가 이씨 조선에서처럼 신분적으로 고정된 천한 지위가 아니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지방토착력의 대표자이며 멀리 신라시대의 촌주 특히 상득 촌주(군상촌주)의 계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초에는 지방행정이 완전히 그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으며 귀족의 지배체제가 일관적으로 확립된 성종이후에도 국가권력 말단을 장악하여 국가의 중요한 직무를 직접 집행하였다. 그들은 농민에 대하여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있엇다. 그러나 이 권력은 그들 자신이 소유한 권력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수족으로 이용하는 국가권력 그 자신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향리는 관인이 아니라 관인의 노복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귀족지배 하에서나 무신집권 하에서나 원칙적으로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향리의 출신들이 신흥관인으로의 신분적 상승을 보이게 된 것은 귀족지배의 말기로부터 시작하여 무신집권 하에 굴곳 계속되고 무신세력의 퇴조와 함께 뚜렷한 역사현상으로 신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향리를 말하기 전에 향리를 포함한 『리』 전반에 관하여 일고하고 고려조의 관료조직 속에 『리』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함으로써 향리의 관인으로의 진출에 대한 이해가 용이하게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곡의 글(『동문선』 권85, 賀崔寺丞登第詩序)에 의하면
『인재 선발의 법이 원래 문무의 차이가 없었는데, 뒤에 문에서 무가 분리되어 독립한 한 과가 되고, 한편에서 문과 무과를 경유하지 않고 입사하는 자가 있어 그것을 『리』라고 했는데, 『리』는 대개 옛날의 『刀筆之任』을 말하는 것으로써 벼슬길은 문 무 리의 세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관인들이 비록 최고위에 이르러도 진사 즉 문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좋게 여기지 않았었고, 이러한 영향은 송대에 들어 더욱 가중해졌었다. 고려는 당제를 바탕으로 송제를 채택하여 대대로 문사를 숭상하여 승선·대간 및 선거전주의 청요직을 문사들이 오로지 하게 되고, 문과 리는 감히 그것을 바라지 못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조 특히 전반기의 관인 질서가 문무리 3자의 계층적 구조로써 조직되어있던 것을 것이려니와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고려 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된 것에 착안하고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되는 것이다. 문무에 관하여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리』는 도필지임, 즉 사무를 집행하는 말단 서기류-중앙각사의 서리 및 지방의 향리들로써 과거를 경유하지않고 오직 사무능력에 의하여 공적이 쌓아졌을 때 상급관원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문과 무를 동반 서반이라고 했거니와 『리』는 고려사에 빈번히 나타나는 남반 그것에 해당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남반이 동반서반에 비하여 얼마나 저급의 것인가는 『남반잡류』라 하여 잡류와 병칭되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될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숭상하고 정사에 유리된 귀족의 지배하에 있어서 또는 횡포무식하고 정치에 세련되지 못한 무신의 집권하에 있어서 그래도 관인기구가 운영되고 있는데는 이들 『리』의 존재가 힘입은 바 지극히 크다고 생각된다. 벌써 전반기의 관료조직 속에 『리』가 상당한 비중을 가졌던 것은 어사대의 감찰어사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문 리 각5인』이라하여 문신과 동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와같이 『리』의 진출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현저하여 드디어 『리』 그것에서 탈피하고 훌륭한 관인으로 성장하는 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대단히 주목할 것은 중앙각사의 서리보다 지방 향리의 출신들이 더욱 그러한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종조 이주헌(상원인) 조지린(백천인) 숙종조 곽향(충청인) 강극(영강인) 인종조 양원준9충청인) 김향(안동인) 허재(양천인) 목종조 김거공(원주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향리출신으로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부지런하다고 재간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頗稱勤幹』 『관리로서 재능이 있다有吏幹』, 『공적을 쌓았다積勞』 『학식은 없었으나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다無學識, 淸愼能幹事』 『성품이 첨령 부지런하다性廉謹』 『말쏨씨가 좋았다善辭令』 등으로 일컬어지며 그들의 특장점인 사무능력을 유일의 밑천으로 명경대관에까지 자기를 성장시켰던 것이다.

귀족지배의 말기에 이르자 이들 향리의 중에는 벌써 과거에 올라 처음부터 당당한 관인으로 등용되는 예가 종종 보이게된다. 이와 같이 리의 계통에서 과에서 과거로 발신하게된다는 것은 문과 리의 거리를 상당히 근접시키는 동시에 문 리를 동일대상으로 병칭될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사실상 문신 귀족이 다 없어진 뒤이고 보매 이 뒤부터는 문 리라는 말의 개념도 아주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이가 조사의 등급을 매기기를 능문능리(문학에 능하고 또 이무에 능한 자)를 제1로 文而不能吏를 그 다음으로, 吏而不能文을 그 다음으로, 文吏俱不能을 하루 정하여 인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신분질서가 급격히 파괴된 후에 출신성분으로 규정되던 종래의 문 리의 차이는 역사상의 개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오직 자기의 보유능력 여하로써 문 리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향리 및 향리자제들을 이 능력적으로 진출한 것은 이러한 시기에서였던 것이다.

조문발 정가신전 등을 위시하여 문학, 경학 이재吏才 장략將略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써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는것만을 추려보아도 그 수의 방대함에 놀라게되고, 기타 족보 야승 문집 따위에 기재되어있는것과 그 중에 가계가 분명치않으나 대략 이족으로 추정되는 지방출신자들까지 수에 넣으면 고려후기의 역사적 인물들의 출자가 대개 이로 속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향리출신자들이 역사무대에 뚜렷이 움직이고 있는 사회적 추세 속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학술적 정신적 정통연원을 이루고있는 『전조의 유현」들이 이제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향 우탁을 필두로 이곡 이색 이숭인 이집 등 전형적인 사대부들이 모두 향리의 계보를 가지고 등장한 사람들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네들에 의하여 성리학(주자학) 즉 사대부의 생활이념을 이론화한 중국의 신철학이 도입되고 발전된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리학은 이조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써 오백년간 강력한 정치적 사회적 작용을 했거니와 이것이 고려후반기의 향리출신의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도하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문화사적 견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본교 문리대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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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의 신흥관료 (하) 이우성
(동아대학보 제47호 1959/10/15)

앞서 고려일대의 권력이 문·무·리 3자에 의하여 순차로 교대되었다는 것을 말하였거니와 같은 이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관료의 구성자가 중앙각사의 서리에서가 아니라 지방향리출신에 의하여 이룩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중앙의 권력구조가 고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 커다란 변화가 지방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역사의 태동이 중앙도성에서가 아니라 지방농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새로운 변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내지 않고서는 고려중기에 일어난 역사의 대전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이해해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국가성격을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역역을 중심으로 한 수취체계를 그 기간으로 삼았던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수취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방식이 규정되는데 하나는 개개의 인신에 대한 직접적 수취방식이오 다른 하나는 토지를 통하여 인정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 양자는 중국의 역대국가들이 반복하던 방식이거니와 고려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동하는 인정을 직접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정한 토지면적을 단위로 인정을 부과했던 것이다. 국가는 토지 그 자체에 직접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파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토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체계하에서는 토지를 떠나서 인정은 그 자신을 기능시킬 수 없으며 또한 인정을 사상해버린 토지의 개념이란 지극히 무의미한 것이다. 인정을 부과시키는 토지, 그것이 「丁田」이며 일정한 인정을 내어놓는 토지면적의 단위가 곧 「田丁」인 것이다. 이 「전정」의 분석이야말로 고려사회의 본질을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되거니와 향리의 위치도 이와의 관계에서만 정확히 이해될줄로 믿어진다. 향리는 곧 전정을 통하여 농민을 수취하는 국가권력의 대행자였다. 그러나 농민이 전정에 얽매여 역에 복무하듯이 향리 자신도 역에 의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여기 향리의 특수한 신분이 있는 것이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격적 신분구조는 어떤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부딧칠 때 진작 자기를 변질시킬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고려후반기의 신흥관료의 출신을 향리층에서 구해야 된다고 했거니와 그러한 향리출신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한 경로는 어떠했는가?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 전정의 파괴를 지적하고자 한다. 고정된 토지를 대상으로 한 전정의 법제가 토지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의 변동이란 무엇인가. 즉 고려초기 이래 각처 지방민에 의한 토지의 개발이 중기에 들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달아 무신집권에 의한 토지의 사점-장원의 확대가 그것이다. 농촌에 있어서 생산력의 발전과 생활의 향상은 농지 개간을 증가시키고 각지방에 부민층을 형성시켰거니와 이 발전된 생산력의 소유자는 대체로 종래의 지방유력자 즉 향리층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환언하면 향리층으로부터 차차 지방적 성격의 소유자가 나오게되는 것이다.

이 지주적토지소유의 성장은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의 해체과정과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토지소유(전정의 편제)에 의한 역역의 수취는 모순이 심할수록 발악적으로 정도를 더하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유망」으로 표현되어 소위「토지[田]에 역주(役主)가 없어 망정(亡丁)이 많습니다. 민(民)으로서 항심(恒心)이 없어서 도망간 호(戶)가 많습니다田無役主, 亡丁多矣. 民無恒心 逃戶衆矣」라는 결과를 이루었다. 전정은 방역을 위하여 마련되었고 또한 역역에 의하여 스스로 파괴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주적 토지소유는 자기를 성장시키면 무엇보다 직접생산자인 농민(전호)의 노동력을 국가의 수취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신흥지주(향리)들은 은 전민을 가지고 「권호權豪」의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권호」라는 것은 무신집권이후 주마등처럼 전변하는 중앙권력층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들의 장원이란 「계이산천」 「편어주현」할 정도의 확대한 것이지만 이 장원의 성격은 토지에 뿌리를 내린 견고한 지반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중앙권력을 이용하여 「사패」라는 형식으로 문서상의 점유를 한 것 뿐이다. 내용으로 보면 여러 독립된 신흥지주들의 집합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신흥지주들은 장원을 자기들의 지붕국가로부터의 수취를 막는 비호물로 삼고있다가 현 장원주가 정치적으로 실각하면 다시 다른 집권자의 세력 아래로 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호權豪의 광대한 장원들이 그 성장이 매우 빠른 것 처럼 일단 실각하면 그 붕괴도 대단히 용이하였던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해되지않을까. 이 이합집산이 무궁한 장원에 비하여 그 하부기구인 신흥지주들은 자기의 재지세력을 보일보 전진시키고 나아가 자기 및 자기의 자제들을 중앙관료로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혹은 군공 혹은 현권력자아의 결탁으로 관료의 계열에 들어갔거니와 무엇보다 단단한 방도는 과거이었다. 원래 향리층에 대하여 과거는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중에도 명경 제술과 같은 정과는 호정 이상의 손자 이내 부호정 이상의 아들 이내에 한하여 응시를 허락하였고, 또 응시자가 실력이 아주 부족할 때에는 추천자인 주현관이 문책을 받게 될 정도로 까다로웠다. 제술계통의 과업은 그 제한이 많이 누그럽기는 하나 그 출세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오면 모든 신분질서의 혼란과 함께 과거의 여러가지 규제도 사실상 철폐된 셈이었다. 이미 이전 절에서 말한 바 수많은 등과자가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향리출신으로 관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鄕園의 士」니, 「寒門窮巷의 士」니 하며 출세에 있어서의 불리한 지위를 자인하며 또 자위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 「사군자」 「사족」으로 불리워지는 이들 향리층의 자제들은 刀筆文吏를 세업으로 삼고 있으니만치 과거에 응시할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일반민중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들이 곧 전절에서 말한 사자 독서인 신흥지식인 그것으로 귀족문신을 대신하여 관료학자가 될 사람들이다. 이들 향리층의 출신들이 이제 자기를 관료화시켜 중앙정계로 진출하였을 때 이 신진사대부들은 자연히 기성중앙권력층 세신거실과 신구세력의 비호물로 삼아왔던 장원이 이제 자기의 관료화에 따라 하나의 혜택적인 유물로 화해버린 것이다. 

지금껏 장원은 국가의 역역수취로부터 농민의 생산력을 보호하여 신흥지주를 성장시켜 왔던 것인데, 이 지주들의 경제적 성장도가 이제 정권을 장악하여 완전한 자기관철을 요구하는 궁극적 처지에 이르렀을 때 장원은 도리어 족쇄가 되었고, 장원영유자들은 무의미한 기생적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흥지주-사대부들과 장원영유자-세신거실들의 이해대립을 반영하는 고려정부내의 신구세력의 충돌은 처음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으로 나타났다가 필경 최영과 이태조의 대결로 첨예화 되었으며 역사는 후자의 승리로 귀착된 것이다. 

고려의 전제개혁이란 무엇을 의미함일까, 사전철폐를 대강령으로 내세운 이태조일파가 과전법을 통하여 도리어 사전소유를 법제화시킨 일견 모순된 사실은 그것이 신진사대부-신흥지주들에 의한 구세력-장원의 해체라고 생각할 때 의혹이 풀려지지 않을까 한다. 장원의 해체는 지금까지 「三兩其主,」로 어수선하던 토지관계가 「一田一主」로 정리된 셈이다 「일전일주」야 말로 지주적 토지소유의 승리이며 완성인 것이다. 이리하여 지주적 토지소유 즉 새로운 경제관계를 발판으로 하고 신시대의 주도자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이씨왕조의 건설자이며 이씨왕조의 성격은 바로 사대부 즉 지주의 성격인 것이다. 

우리는 이씨왕조의 성격에 있어서
첫째 지주와 역역이 분리되어있다는 것
둘째 역역에 있어서 반드시 몸으로 하지 않는 대신 「납포고정納布雇丁」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토지사유를 법제화시키고 지주로부터 세를 받는다는 것
...등을 들어서 고려와의 차이를 명백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말해둘 것은 고려후기의 향리층의 지주적 성장과 거기 따라 관인으로 진출한 것이 물론 향리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향리중에서도 여러 등차가 있었다. 귀족지배하에 있을 때 벌써 「호강정직자」 「누세유가풍자」인 향리들은 별스런 대우를 받았거니와 대체로 이네들이 고려후기의 지주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지방 사정의 변화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생산력의 소유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영영 새로운 역사적 계기를 얻지못하였고 관인의 신분을 획득한 자 이외의 대부분의 향리들은 종래의 신분과 신분에 따른 역의 의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향리층의 출신으로 형성된 사대부들은 자기 세력의 안정을 위하여 앞으로의 향리층의 계속적 진출을 봉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말에 이미 향리진출에 대한 방지책이 여러 모로 논의되었고 이조에 들어와서 그것이 철저히 시행디었다. 이리하여 신진사대부의 태반인 향리층은 다시 그들의 분열아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신분적으로 고정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조의 향리인 것이다

<글쓴이 본교인문대조교수>

마음이 답답해져서 문득 "극장국가 느가라"의 한 부분을 펼쳐 읽어봤다.
본디 결론부의 비교인류학적(-혹 정치학적) 통찰이 아주 유명한 책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전반부에 쓰여진 '시대적 변동과 지속을 다루는 문제, (그리고 각각의 노선을 택한다는 것의 의미)' 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지적으로 충분히 훈련된 역사학자 중 '장기적 시각'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겠지만, 그 '장기적 시각'의 구현이란 게 (그냥 비슷한 현상의 지속을 말하는 정도를 넘어선) 안정된 모델 설정이 없이는 제대로 성립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요즘들어 부쩍 느끼고 있다.

그와 별도로 이 책은 올 하반기 들어서만 최소 10번 이상은 읽은 부분이고 그 만큼. 역사의 '연속성/단절성'을 생각할 때 음미해야 할 중요한 통찰이 담긴 명문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사실은 '상보적으로' '모두를 사용하겠다'는 식의 접근만큼은 내 취향이 아니다... 저자 자신부터가 모델 구성 방법을 전제로-민족지적인 노선을 선택하고 있는게 맞다면, (실제로 또 본문만 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그냥 그 방법을 채택한 이유를 쓰고, 그럼에도 다른 방식의 미덕도 함께 고려하긴 할 것임을 부연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


요새 어쩐지, '할 거면 하나만 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런가. 그래서 요즘따라 유독 이 부분이 좀 꺼끌거리게 읽히게 된다.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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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명의 역사를 주요한 사건들의 연속, 즉 전쟁, 군림, 혁명의 연속으로 묘사해볼 수는 있다. 이런 경우, 사건들이 역사를 형성하든 형성하지 않든 간에 그 사건들이 적어도 역사적 흐름 속에 나타난 주요한 변화들을 표시해주기는 한다.
다른 한편 위대한 문명의 역사를 날짜, 장소, 걸출한 인물들의 연속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발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국면들로 묘사할 수도 있다.
만약 첫 번째 종류의 역사 서술을 강조하면 역사를 잘 구분된 시대들, 즉 그 자체로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과되는 독특한 시간 단위의 연속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종류의 역사 서술에서 제시되는 것들이 바로 사일렌드라의 발홍, 자바 문명의 동부 이전, 마자빠헛의 몰락 등이다.
두번째 접근은 역사적 변화를 상대적으로 연속적인 사회문화적 과정으로 제시하는데, 이 과정 안에는 날카로운 단절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느리지만 유형화된 변화만이 감지될 뿐이다.
물론 이 과정의 전체적인 경로를 조망했을 때 발전의 각 국면들을 식별할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과거 상태가 끝나고 그다음 상태로 변화했는지를 짚어내는 일은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다하더라도 거의 항상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변화 혹은 과정에 대한 이런 관점은 사람들이 이룩했던 일에 대한 연대기적 기술보다는 누적적인 활동에 대한 형식적 혹은 구조적 유형을 더 강조한다.
시대별 접근이 일군의 구체적 사건들을 시간 연속에 따라 배열하고 그 연속체 안의 앞뒤에서 주요한 구분을 시도한다면, 발전주의적 접근은 조직 형태와 문화 유형을 시간 연속에 따라 배열하며, 이 경우 주요한 구분점의 존재는 그 전제조건이자 결과물이 된다. 시간은 두 접근 모두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이다. 첫 번째 접근에서 시간은 구체적인 사건들이 엮여 나오는 일종의 가닥이며, 두 번째 접근에서 시간은 어떤 추상적인 과정들이 관통하여 움직이는 매개체이다,
물론 이 두 종류의 역사 서술 모두가 타당성은 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역사 서술을 모두 해낼 수 있다면,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 된다.
특수한 사건들의 흐름을 매우 상세하게 연대기에 기록한다면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략적 개요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다. 한편 발전적 역사 안에서 구성된 국면들은 그 자체로 역사 인식을 위한 틀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재의 일부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범람하는 와중에, 그런 틀은 상황을 인지할 수 있도록 어떤 형태를 부여해주는 기능을 한다.
인도시대 인도네시아처럼 당시에 일어난 일의 대부분을 현재 복원할 수 없는 경우에는 신화와 비문의 행간을 아무리 열심히 읽으려고 해도, 오래된 유물에서 평행 관계를 아무리 직관적으로 유추해내려고 해도, 특수한 행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잘해봐야 가설적 사실에 대한 끝없는 논쟁으로 귀결되거나 최악의 경우 역사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정구슬로 지난 일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날조해내는 것으로 귀결되기 일쑤다(왜냐하면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후자의 종류에 해당하는 역사를 쓰는 작업은 결정적으로 사회문화적 과정에 대한 적절한 모델 구성이 어느 정도로 가능한가에 달려 있다. 단, 이때 구성할 모델은 개념적으로 정확하고 경험적으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문화적 과정 모델이야말로 고고학적 과거로부터 나 온 필연적으로 산발적이고 애매한 파편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 유형론적 작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델 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모델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더 철저하게 연구되어 있는 다른 지역, 예컨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아메리카나 고대 근동 지역의 발전 단계들과 비교함으로써 도출해내는 방법이 있다.
둘째, 광범위한 역사사회학을 기반으로 관련된 종류의 현상으로부터 핵심적 특징을 분리해내는 방법, 즉 이념형적 패러다임을 공식화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물론 막스 베버에 의해 유명해졌다.
셋째, 연구자가 재구성하려고 하는 과거의 것과 적어도 가족유사성을 지닌다고 믿을 만한 현재(혹은 최근)체계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하고 묘사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가까운 것을 통해 멀리 떨어진 것을 비추어 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한 방법의 강점이 다른 방법의 약점을 교정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이 상보적인 접근 모두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 번째 방법, 즉 민족지적 방법을 내 분석의 중심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을 다루기에는 민족지적 방법이 가장 직접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더욱이 내 자신이 고고학자나 역사 학자라기보다는 사회인류학자이기 때문이다."
<"극장국가 느가라"(클리퍼드 기어츠, 김용진 역, 눌민, 2017), 17~20쪽> (가독성을 고려해 일부 문단 및 줄바꿈을 수정하였다.)

트위터 등에 짤막하게 쓰고 있던 것인데, 타래가 이어지고 복잡해져서, 줄글로 모아보고자 정리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트윗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보니 호흡이 많이 짧을테고,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횡설수설한 썰풀이에 가깝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덧붙인 글이라서 엄청 장황하다. 나중에 좀 더 간명하게 글을 정리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여기에 내용을 더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트렌드(?)에 맞게 핵심주장 정리.
1.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 질문은, 대체로 구체적인 구매 대상자와 그 잠정적 지불 액수 등이, '사회 전체의-폭넓은 지원' 식으로 막연하게 설정되어 있는게 문제다. 그 질문의 막연함을 정정하지 않은 채 답변을 시도하니까 모두가 제대로된 대답을 못하거나 딴 길로 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2. 누구의, 무엇을 위한, 어떤 쓸모냐는 것은, 상황마다 다른 것이니 그 구체적 상황에 맞게 답변을 준비하면 될 문제다. 상황을 막론하고 통용되는+익명의+회의적인+다수 청중을 설득시킬 수 있는 쓰임새 논변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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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문학의 '무쓸모론'

사실 '학문의 쓸모'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설득이 된 가운데, 이를 그 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게 관건인 문제일 뿐, '시민 사회 전체에게 직관적으로 그 지불을 납득시킬만한 논리의 창출'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게 가능한 종류의 학문분과가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게 좀 까다로운 분과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게 까다로운, 업계 은어를 빌려 '기초학문' 분야에다가, '일반 시민들이 직관적으로 납득할' 논리를 만들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긴 하죠. (더 정직하게, 그런게 있던 시절이 지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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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하던 논리지만, 국내-한국학 분야가 오랜시간 '민족문화'라는 국가종교를 장악하면서 이를 사회 구성원에게 납득시켜왔기에, 그 세를 크게 키워왔고. 그 경향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단일민족' 메시지가 힘을 많이 잃어, '낯선 과거에 왜 그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는가'의심받곤하는 지금조차도, '국가 간 역사전쟁'같은 살벌한 표현 앞에서는 국가/시민사회의 적극적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솔직히, '동북공정/위안부/독도'이슈에 대한 업계 종사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 전쟁'같은, 좀 살벌한-한시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도, '역사학'의 쓰임새는 지자체의 관광상품, 조금 적극적으로는 개별 정책연구원에서 2차 정책 연구를 위한 레퍼런스 제공 등의 활용양상을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활용가능성과 '학문의 쓸모'는 개념의 무게가 좀 다른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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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개인이, '자기 공부의 향후 쓰임새'에 대해 말하기 힘든 건 거칠게 말해, 두 가지인듯 합니다.

1) '향후의 활용 가능성'같은 어마어마하게 불확실한 미래를 당장 연구자가 '모조리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2) 연구자의 작업은, 일단 자신의 눈 앞의 작업물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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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연구자가 2)의 공예가의 마음만으로 '오로지' 살 수는 없습니다. 가혹하지만, 연구자에게는 어느정도 '사회'를 향한 연구 세일즈의 의무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고, 더 솔직히는, 연구를 평가해야 할 '같은 연구자' 사이에도 타인 연구의 가치는 당장은 알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나아가 두 가지는 중요하게 첨언될 필요가 있습니다.

ⓐ 눈 앞의 연구를 제대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도의 심도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제대로'가 무언지 정의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같은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가치를 설득하지 못하는 연구'가 대체로 '제대로된 연구'일 가능성은 희박할 것입니다.
여기서 '최소한으로도 그 가치를 설득할수 있어야 할 -같은 분야-'는 어디까지인가.. 그것도 어려운 문제인데... 순전히 제 주변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러라고 <(국)사학과>라는 단위를 만들어 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다만 이건 학과마다 사정이 좀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네요)
- 학과 단위에서 학위논문 심사에 앞서 '예비발표'제도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과 다른 전공 교수/대학원생'들도 자리에 동석해, 그 논문의 연구가치-내지 논증 등에 대해 이런저런 토론이나 지적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논문 통과하려면) 거기 동석한 사람에게는 연구가치를 입증하라는 요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결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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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 길었네요, 어쨌거나, 흔히 제기되는 "쓸모를 입증하라"는 요구는 그냥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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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에 대해 일각에서 "시민 교양을 위한 고등교육론"으로서의 인문학의 필요론(그 사례 제시로서의 연구 가치론)이 최근 뜻있는 분들에게서 제기되고 있음을 알고, 그분들의 입장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해당 분과 심화연구"의 필요성까지를 정당화하는지는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예컨대 "지금과 동떨어진 시공간의 사람들이, 그들의 기준에서 내린 지적인 여정을 파악하여, 우리의 사고 훈련을 유도한다"는 방식의 대의명분에 공감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사고 훈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교육/사범계열"의 전문영역인 것이지 "인문-문헌학"분야의 일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필요에 따라 그, 연구 가치를 '보편적으로' 어필해야 할 타이밍이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게 논문이나 저서 서론에다가 일일이 밝혀야 할 만큼) 언제-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어필할 '준비'가 될 필요는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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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연 '쓸모론'은 그 자체로 맞는 질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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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는 대체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학문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쓸모'를 논하려면. 'A컨텐츠가 → B집단으로 잠정된 소비자로 하여금 → C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게 할 → 가치 D' ..라는 의미로, A/B/C가 구체화된 가운데서 D란 무엇인가.로 접근해야 알찬 질문이 되는 것인데, 대부분은 특정하기도 힘든 소비자층이, 한정없는 범용성을 염두에 두고 쓸모를 묻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답변도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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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같지만, 극단적으로 '돈벌이'에만 한정해서 말하면, '취직한 대학의 전임교원'들에게, 당장 강의 등을 해야 할 자기 전공분야만큼 '중요하게 쓸모있는' 지식은 없습니다. 공학이나 반도체 기술같은거 다 필요없고, 자기가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제대로 아는게 제일 '중요한 쓸모'가 있는 일이죠. 이게 말장난 같지만 완전한 말장난은 아닙니다. 예컨대 수험생들이 대입 수험과목을 위해 기꺼이 수천 수억을 가져다바치는 것은, 그 지식-시험 트레이닝이 자기 인생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학원 강사들은 그 '쓸모있는 컨텐츠'를 생산해서 밥벌이를 하니, '대입 지식'은 학원가 수요상 '쓸모있는' 일이 됩니다.
왜 말장난이 아닌지 조금만 더 부연하겠습니다. 아무리 인문학이 그 대상을 '범 시민사회'로 설정하고, 그 지원자금도 '국세'쯤으로 범범하게 설정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특정한 목적을 띤 지불 담당자에게, 특정한 형태로 책정된 예산을 지원받는 일입니다. 설혹 국책사업에 지원을 받는달손 쳐도 '시민사회 전체'를 설득하는 일은 사실 실제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일도, 이루어질 일도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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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만든 지식컨텐츠를, 1차 소비자/투자자 외의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게끔 재가공'하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판매를 위한 적당한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냉정하게 말해, 이 '마케팅 포인트 확대' 조차도, 한번에 '사회 전체'쯤으로 도약하길 기대하는 경우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바보같은 예시지만, 에어컨 개발에서, 마케팅 타겟을 넓히는 요구가 나온다면, 이는 공기청정기 수요층까지를 노리라는 뜻이지, 한번에 인류 사회의 공공복리 증진같은걸 노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지금의 인문학 (무)쓸모론은 그런 황당한 도약 시도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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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말해지는 인문학의 쓸모. 라는 걸 따져보면 둘 중 하나 (혹 그 중간쯤)에서 답변이 이루어질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의 교육정책 담당자가 내 전공의 연구-교육에 예산을 할당해야 하는 이유

ⓑ내 전공에 무지한 일반 대중이, 내 전공에 대한 교양강좌를 듣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의 영역은 '잘 알면 훌륭한' 능력이지만, 그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연구자로 함량 미달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고, ⓑ의 경우, '일반 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전공에 대한 무지'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이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를 흐릿하게 설정한 채 기대치만 한없이 높여놓으니, 대답이란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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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쓸모가 '무엇이냐'와 별도로, 쓸모는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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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정말로 인문학자 자신에게 필요한 '쓸모'는 냉정하게 말해, 두 가지 요건만 만족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단언컨대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 스스로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 이를 잠정적인 독자층(+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쯤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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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교의'를 만들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말입니다. '학문의 쓸모'를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납득시킬 논리같은 게 지금 추세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내가 납득이 된 가운데. 이를 필요에 맞게 응용만 하면 될 일인 것이지요..
- 물론 '펀딩 주는 사람 따라서 생각하자'정도로 자족한다는 뜻은 아니고, 당연히 더 넓은 전망을 고민할 필요는 있죠. 다만 '시민 교양'이라는 말(을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속에서도 워낙 다양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으니, 그에 맞는 적절한 논리는 따로 필요하다..그런 생각에 가깝습니다.
- 사실 스스로에게 연구의 구체적 쓰임새가 설득이 안 되어도 굳이 상관없습니다. 필요한 국면에 맞는 세일즈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이를 자신의 확신속에서 믿는건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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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 와중에도 악을 쓰고 안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갈길 가시게 보내드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 아닐까요.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라는 요구마저도 가끔 보면 인문학에는 너무 흔하게 요구됩니다. '나는 확고하게 이게 돈 낭비/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돌려보라'는 요구는, 어느 정도까진 시도됨직 하지만, 거기에 본격 투신하는건 별도의 영역이니까요. 그 의미에서, 누군가 저에게 '당신 강의/연구는 쓸모가 없소'라고 무례하게 지적한다면 (무례에 대한 응대를 담은)적당한 대답은 '딱히 댁이 꼭 들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딱히 댁한테 연구비 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를 깔고 "안녕히 가세요" 쯤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요. '쓸모'에 대한 문제를 시니컬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별 연구의 (독창성/논리적 엄정성/학술장에의 기여 등을 염두에 둔)'학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소비자의 지불 의사를 염두에 둔)'쓸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 '네 논문 별로야.'와 '네 논문 쓸모 없어.'는 설혹 겹치는 영역이 있다 해도 완전 다른 이야기란 뜻입니다.


4. 나가며

종합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의 효용"에 매번 답을 내리기 실패하는 것은, 어쩌면 한없이 묽은 질문에, 전가의 보도같은 답변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진 결과 나타난 필연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무거운 질문"자체는 유의미하지만, 일단은 연구를 일단 "제대로"하면서, 여러 상황에 맞게 그 가치를 그때그때 세일즈할 준비를 하는편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믿습니다.

"큰 대안을 가진 큰 스승"을 지향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결국 결과론적으론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하고 계신 바로 그 일들과 같이) 일단 상황에 맞는 구체적 대안을 낼 생각을 "그때그때-제대로"내는게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주절주절 말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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