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메모

이정, 2023,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푸른역사

평시(lazyreader) 2023. 12. 26. 14:31

복잡하게 따지려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영역까지 따져야 하는 책이라, 오히려 파편적인 감상을 옮겨보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1) 솔직히 처음 읽을때는 목차부터 내용까지, 너무나 산만하다고 느꼈는데, 두번째 세번째 읽을 때 되어서야 이거구나. 싶은 감탄이 나오는 책이다. 오히려 (시간 순서대로 쓰여진) 통사적 역사서술을 읽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처음에 더 헤메게 된다.

제목을 보면서도 놓치게 되는 것인데, 이 책의 핵심은 '장인과 닥나무'로 쓰여진 역사라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닥나무'를 역사서술 주체로 삼는,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적극 차용하여 글을 구성해낸 것이 파격적이다. 도대체가 '닥나무'가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그에대해 저자는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대신, 책 전체 구성과 내용을 빌어 이를 서술해냈다. 그게 저자의 대단한 기량이자, 그러한 이론적 전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읽기의 난관이 될 수도 있다.

 

2) 차라리 방법론적인 타당성, 정밀함보다, 저자가 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였는가, 이는 가치있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는가에 주목하는게 생산적일 것 같다. '구 민중사'가 한동안 유행한 이후 대강 21세기를 전후해서 그 열기는 시들어갔다. 생활사의 유행, 여성사의 부흥 등의 여러 새로운 바람이 불었지만 (무엇보다 전근대) '비 엘리트의 역사'는 성립시키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은근한 회의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도 했다. 당연히, 다른 무엇보다도 자료의 문제 때문이다. 전근대 여성사 연구의 큰 비중을 왕실 여성 연구가 차지하고 있고, 최근들어서 그 비중이 더 높아져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같은 복잡한 길을 택하게 된 것도, 기지機智같은 가시화하기 난해한 개념을 채택한 것도, 여러 난관 속에서 '비 엘리트의 기술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분투의 방편으로 읽어봄직 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민중사'의 새로운 트렌드를 열어낼 수 있을까? 그건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 어려운 과제에 기어이 성공해 냈다. 한국 전근대사 서술의 참신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저자에게도, 비 엘리트적 과학기술사의 한 사례를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해 본다.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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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그럼에도” 덧붙여 말하자면, 최근 10년 내 읽은 조선시대 연구서 중, 가장 특이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관련 분야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책이라는 점은 또다시 강조해보고자 한다. 특히 연대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특정 장절이 '시기'를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을거라고 저절로 예상하면서 글을 읽게되는 나 같은 사람은, 처음 읽을 땐 멀미가 날 수도 있다. 목차를 아주 신중히 음미하고 읽지 않으면 특히 그렇다. 닥나무>장인>종이>지식>기술.. 이라는 순서가 해당 장의 테마로 설정된 가운데, 해당 장 내에서는 시점이 앞뒤로 상당히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사실 서술체계의 차원에서는 좀 혼란하고 산만하다고도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 책이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즉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중요한 메시지로 삼고 있다)는 평을 접하면서, 순간 갸웃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기별 특징을 귀납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일 수가 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일독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분명 이 책은 변화에 대해 다루는 책이 맞다. 다만 정돈가능한 변화의 “법칙” 내지 “경위”에 대해 다루는 책이 아닐 뿐이다. 따지자면 닥나무-제지기술의 변화상을 시기별로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역동성-다이내믹스 그 자체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고 있노라를 다루는 책인 것이다. 그게 이 책의 독특한 점이겠다. 새롭게 정리한 바를 다시한번 곱씹어본다.

 

2024.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