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 및 기타

'인문학의 쓸모'라는 질문, 그 자체의 문제

평시(lazyreader) 2022. 11. 14. 00:18

트위터 등에 짤막하게 쓰고 있던 것인데, 타래가 이어지고 복잡해져서, 줄글로 모아보고자 정리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트윗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보니 호흡이 많이 짧을테고,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횡설수설한 썰풀이에 가깝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덧붙인 글이라서 엄청 장황하다. 나중에 좀 더 간명하게 글을 정리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여기에 내용을 더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트렌드(?)에 맞게 핵심주장 정리.
1.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 질문은, 대체로 구체적인 구매 대상자와 그 잠정적 지불 액수 등이, '사회 전체의-폭넓은 지원' 식으로 막연하게 설정되어 있는게 문제다. 그 질문의 막연함을 정정하지 않은 채 답변을 시도하니까 모두가 제대로된 대답을 못하거나 딴 길로 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2. 누구의, 무엇을 위한, 어떤 쓸모냐는 것은, 상황마다 다른 것이니 그 구체적 상황에 맞게 답변을 준비하면 될 문제다. 상황을 막론하고 통용되는+익명의+회의적인+다수 청중을 설득시킬 수 있는 쓰임새 논변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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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문학의 '무쓸모론'

사실 '학문의 쓸모'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설득이 된 가운데, 이를 그 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게 관건인 문제일 뿐, '시민 사회 전체에게 직관적으로 그 지불을 납득시킬만한 논리의 창출'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게 가능한 종류의 학문분과가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게 좀 까다로운 분과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게 까다로운, 업계 은어를 빌려 '기초학문' 분야에다가, '일반 시민들이 직관적으로 납득할' 논리를 만들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긴 하죠. (더 정직하게, 그런게 있던 시절이 지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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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하던 논리지만, 국내-한국학 분야가 오랜시간 '민족문화'라는 국가종교를 장악하면서 이를 사회 구성원에게 납득시켜왔기에, 그 세를 크게 키워왔고. 그 경향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단일민족' 메시지가 힘을 많이 잃어, '낯선 과거에 왜 그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는가'의심받곤하는 지금조차도, '국가 간 역사전쟁'같은 살벌한 표현 앞에서는 국가/시민사회의 적극적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솔직히, '동북공정/위안부/독도'이슈에 대한 업계 종사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 전쟁'같은, 좀 살벌한-한시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도, '역사학'의 쓰임새는 지자체의 관광상품, 조금 적극적으로는 개별 정책연구원에서 2차 정책 연구를 위한 레퍼런스 제공 등의 활용양상을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활용가능성과 '학문의 쓸모'는 개념의 무게가 좀 다른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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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개인이, '자기 공부의 향후 쓰임새'에 대해 말하기 힘든 건 거칠게 말해, 두 가지인듯 합니다.

1) '향후의 활용 가능성'같은 어마어마하게 불확실한 미래를 당장 연구자가 '모조리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2) 연구자의 작업은, 일단 자신의 눈 앞의 작업물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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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연구자가 2)의 공예가의 마음만으로 '오로지' 살 수는 없습니다. 가혹하지만, 연구자에게는 어느정도 '사회'를 향한 연구 세일즈의 의무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고, 더 솔직히는, 연구를 평가해야 할 '같은 연구자' 사이에도 타인 연구의 가치는 당장은 알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나아가 두 가지는 중요하게 첨언될 필요가 있습니다.

ⓐ 눈 앞의 연구를 제대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도의 심도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제대로'가 무언지 정의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같은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가치를 설득하지 못하는 연구'가 대체로 '제대로된 연구'일 가능성은 희박할 것입니다.
여기서 '최소한으로도 그 가치를 설득할수 있어야 할 -같은 분야-'는 어디까지인가.. 그것도 어려운 문제인데... 순전히 제 주변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러라고 <(국)사학과>라는 단위를 만들어 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다만 이건 학과마다 사정이 좀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네요)
- 학과 단위에서 학위논문 심사에 앞서 '예비발표'제도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과 다른 전공 교수/대학원생'들도 자리에 동석해, 그 논문의 연구가치-내지 논증 등에 대해 이런저런 토론이나 지적을 하게 되는 것 또한.. (논문 통과하려면) 거기 동석한 사람에게는 연구가치를 입증하라는 요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결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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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 길었네요, 어쨌거나, 흔히 제기되는 "쓸모를 입증하라"는 요구는 그냥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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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에 대해 일각에서 "시민 교양을 위한 고등교육론"으로서의 인문학의 필요론(그 사례 제시로서의 연구 가치론)이 최근 뜻있는 분들에게서 제기되고 있음을 알고, 그분들의 입장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해당 분과 심화연구"의 필요성까지를 정당화하는지는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예컨대 "지금과 동떨어진 시공간의 사람들이, 그들의 기준에서 내린 지적인 여정을 파악하여, 우리의 사고 훈련을 유도한다"는 방식의 대의명분에 공감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사고 훈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교육/사범계열"의 전문영역인 것이지 "인문-문헌학"분야의 일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필요에 따라 그, 연구 가치를 '보편적으로' 어필해야 할 타이밍이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게 논문이나 저서 서론에다가 일일이 밝혀야 할 만큼) 언제-어디서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어필할 '준비'가 될 필요는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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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연 '쓸모론'은 그 자체로 맞는 질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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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는 대체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학문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쓸모'를 논하려면. 'A컨텐츠가 → B집단으로 잠정된 소비자로 하여금 → C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게 할 → 가치 D' ..라는 의미로, A/B/C가 구체화된 가운데서 D란 무엇인가.로 접근해야 알찬 질문이 되는 것인데, 대부분은 특정하기도 힘든 소비자층이, 한정없는 범용성을 염두에 두고 쓸모를 묻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답변도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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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같지만, 극단적으로 '돈벌이'에만 한정해서 말하면, '취직한 대학의 전임교원'들에게, 당장 강의 등을 해야 할 자기 전공분야만큼 '중요하게 쓸모있는' 지식은 없습니다. 공학이나 반도체 기술같은거 다 필요없고, 자기가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제대로 아는게 제일 '중요한 쓸모'가 있는 일이죠. 이게 말장난 같지만 완전한 말장난은 아닙니다. 예컨대 수험생들이 대입 수험과목을 위해 기꺼이 수천 수억을 가져다바치는 것은, 그 지식-시험 트레이닝이 자기 인생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학원 강사들은 그 '쓸모있는 컨텐츠'를 생산해서 밥벌이를 하니, '대입 지식'은 학원가 수요상 '쓸모있는' 일이 됩니다.
왜 말장난이 아닌지 조금만 더 부연하겠습니다. 아무리 인문학이 그 대상을 '범 시민사회'로 설정하고, 그 지원자금도 '국세'쯤으로 범범하게 설정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특정한 목적을 띤 지불 담당자에게, 특정한 형태로 책정된 예산을 지원받는 일입니다. 설혹 국책사업에 지원을 받는달손 쳐도 '시민사회 전체'를 설득하는 일은 사실 실제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일도, 이루어질 일도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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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만든 지식컨텐츠를, 1차 소비자/투자자 외의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게끔 재가공'하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판매를 위한 적당한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냉정하게 말해, 이 '마케팅 포인트 확대' 조차도, 한번에 '사회 전체'쯤으로 도약하길 기대하는 경우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바보같은 예시지만, 에어컨 개발에서, 마케팅 타겟을 넓히는 요구가 나온다면, 이는 공기청정기 수요층까지를 노리라는 뜻이지, 한번에 인류 사회의 공공복리 증진같은걸 노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지금의 인문학 (무)쓸모론은 그런 황당한 도약 시도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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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말해지는 인문학의 쓸모. 라는 걸 따져보면 둘 중 하나 (혹 그 중간쯤)에서 답변이 이루어질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의 교육정책 담당자가 내 전공의 연구-교육에 예산을 할당해야 하는 이유

ⓑ내 전공에 무지한 일반 대중이, 내 전공에 대한 교양강좌를 듣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의 영역은 '잘 알면 훌륭한' 능력이지만, 그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연구자로 함량 미달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고, ⓑ의 경우, '일반 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전공에 대한 무지'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이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를 흐릿하게 설정한 채 기대치만 한없이 높여놓으니, 대답이란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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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쓸모가 '무엇이냐'와 별도로, 쓸모는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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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정말로 인문학자 자신에게 필요한 '쓸모'는 냉정하게 말해, 두 가지 요건만 만족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단언컨대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 스스로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 이를 잠정적인 독자층(+펀딩 주체)에 맞게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쯤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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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교의'를 만들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말입니다. '학문의 쓸모'를 '누구에게나-보편적으로'납득시킬 논리같은 게 지금 추세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내가 납득이 된 가운데. 이를 필요에 맞게 응용만 하면 될 일인 것이지요..
- 물론 '펀딩 주는 사람 따라서 생각하자'정도로 자족한다는 뜻은 아니고, 당연히 더 넓은 전망을 고민할 필요는 있죠. 다만 '시민 교양'이라는 말(을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속에서도 워낙 다양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으니, 그에 맞는 적절한 논리는 따로 필요하다..그런 생각에 가깝습니다.
- 사실 스스로에게 연구의 구체적 쓰임새가 설득이 안 되어도 굳이 상관없습니다. 필요한 국면에 맞는 세일즈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이를 자신의 확신속에서 믿는건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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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 와중에도 악을 쓰고 안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갈길 가시게 보내드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 아닐까요.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라는 요구마저도 가끔 보면 인문학에는 너무 흔하게 요구됩니다. '나는 확고하게 이게 돈 낭비/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돌려보라'는 요구는, 어느 정도까진 시도됨직 하지만, 거기에 본격 투신하는건 별도의 영역이니까요. 그 의미에서, 누군가 저에게 '당신 강의/연구는 쓸모가 없소'라고 무례하게 지적한다면 (무례에 대한 응대를 담은)적당한 대답은 '딱히 댁이 꼭 들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딱히 댁한테 연구비 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요?'를 깔고 "안녕히 가세요" 쯤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요. '쓸모'에 대한 문제를 시니컬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별 연구의 (독창성/논리적 엄정성/학술장에의 기여 등을 염두에 둔)'학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소비자의 지불 의사를 염두에 둔)'쓸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 '네 논문 별로야.'와 '네 논문 쓸모 없어.'는 설혹 겹치는 영역이 있다 해도 완전 다른 이야기란 뜻입니다.


4. 나가며

종합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의 효용"에 매번 답을 내리기 실패하는 것은, 어쩌면 한없이 묽은 질문에, 전가의 보도같은 답변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진 결과 나타난 필연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무거운 질문"자체는 유의미하지만, 일단은 연구를 일단 "제대로"하면서, 여러 상황에 맞게 그 가치를 그때그때 세일즈할 준비를 하는편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믿습니다.

"큰 대안을 가진 큰 스승"을 지향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결국 결과론적으론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하고 계신 바로 그 일들과 같이) 일단 상황에 맞는 구체적 대안을 낼 생각을 "그때그때-제대로"내는게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주절주절 말이 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