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김순남, 2022, 푸른역사)
'세조'라는 주제는 조선 초 전공자들에게 상당히 큰 쟁점에 속한다. 여기서 쟁점이란, 정말로 세조를 주제로 한 논쟁이 가시화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세조에 대한 기본 평가가 학자나 학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고, 그 평가의 향방이 조선 초의 정치-제도-사상사 전반을 평가하는 기준과도 큰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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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계유정난을 '구국의 용단'인양 평가하는 학자는 (적어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세조 이후에 벌어진 여러 사업들에 대해, (전후의 국왕들과 비교해) 평가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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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그 평가는 결국 '치적이냐 파행이냐'로 단순화된다. 그 '치적'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경우, 세조대 벌인 제천제, 단군 사당 신설, 자국사 편찬사업과 같은 '민족문화 부흥'(으로 평가되었던) 사업들, 그리고 호패법/보법으로 대표된 부국강병책과 대외정벌 등의 '자주적' 사업들이나, 세종대 만들어진 훈민정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규모의 불전 언해 사업들(다시말해 불교 진흥+훈민정음 활용 정책)에 대해 집중한다. 그러한 많은 성과들을 만든 세조의 성과를 강조하는 것이 '치적' 전통 위의 서술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파행에 집중하는 경우도, 굳이 '계유정난의 부도덕'문제보다도, 세종대까지 형성된 질서의 파괴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군신공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현전을 폐지하고, 유교적 이상군주제를 무너뜨린 것...그리고 수많은 '막말' 등의 파행으로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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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극단적으로 "경국대전" 간행 사업을 누구를 중심으로 조명하는가부터도, 연구자들 사이에 '전투 없는 전선'을 만드는 문제다. 과연 "경국대전" 간행의 공을 돌려야 한다면, 혹은 그 특징을 가장 반영한 시대를 꼽아야 한다면 어떤 국왕을 들어야 할까? 해당 사업을 시작한 세조일까, 이를 매듭지은 성종일까? 어쨌거나 '둘 다'라고 단순화하기에, 양 국왕의 너무나 다른 성향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해당 시기-주제로 논문 쓰는 저자는, (정말 밍숭맹숭하게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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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의미로 세조시기는 너무나도 '독특한'시기이자, 동시에 그 독특함에 대한 판단-그 판단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15세기 정치사에 대한 이해 등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라, 그리 길지 않은 시기임에도 다루기가 쉽지가 않다. 그 난감함은 여말선초 주제로 장기사적인 논문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인데, 세조를 한번 다루려고 하면 한 챕터를 할애하지 않을 수 없고, 짧게 다루느니 안 다루는게 낫다는 문제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결론으로는, 후자에 조금 힘이 실리는 듯도.. 별도의 챕터는 별고를 기약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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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작업에서는, 그러한 치적/파행의 한 부분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가능한한 많은 사건들을 최대한 건조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이나, 혹은 '세조만의 방식', '과감하지만 성급한 결정' '초월적 예치를 꿈꾸었으나 결국 미완으로 마감' '권력과 권위의 충돌'..등의 수식어를 사용해, 그 양면성을 가능한한 함께 다루려는 노력 등이 그에 속한다.
(저자의 작업은, 앞서의 분류에서 굳이 따지자면 치적에 집중하는 전통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한 그 '단서'를 달아두려 했다고나 할까. 언뜻 읽기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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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논쟁점에 대해 한쪽 편을 지지하지 않은 '중간'을 지키는 태도보다는, 한쪽을 명확하게 지지하고 보충하거나, 아니면 아예 제3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취향에서, 저자의 그 '중립적 태도'가 썩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 개의 전통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을 일반 독자에게 '세조가 가진 두 얼굴'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세조에 대한 '본격적인 단행본'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 상황에서, 읽어봄직한 책으로 감히 일독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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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대에 대한 평가의 기반이 되는 "세조실록"에 대한 문헌적 신뢰 및 세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 문제도 까다로운 사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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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층위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세조의 정통성 그 자체는 세조 사후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어쨌거나 명시적으로는 부정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육신 등이 추숭되는 와중에까지도 세조 본인의 정통성은 '병립'되는 문제이다.
ⓑ 그럼에도, 세조가 이행한 '독특한 제도운영'에 대해서는 세조 사망 직후부터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실록만을 따라 읽는다면, 세조의 '제도적 파행'이 세조 사후 예종~성종대에 이르러 정비되었다는 식으로 읽히는 부분도 매우 많다.
ⓒ 덧붙여, 세조실록 편찬자 자신들은 숭모의 의미로 내세웠지만, (현재를 포함한) 후대인이 읽기에는 낯뜨거운 내용들도 많다.. 일례로 세조의 '술자리 정치'는 분명 실록 맥락상으로는 세조의 호탕한 인품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 있겠지만,(불과 수십년 뒤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현대의 독자들에게 도무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 더 정직하게 말해, 재위 시절 세조의 많은 모습들을 보며, 나로서 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아무튼, 그런 요소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세조에 대한 평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그 긍정/부정론 자체가 본인 나름의 조선전기 인식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반복해 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