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메모

<무당과 유생의 대결>(한승훈, 2021, 사우)

평시(lazyreader) 2021. 2. 1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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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유생의 대결

조선시대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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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맞이 독후감 하나.

 

한승훈 선생님의 신간인 이 책을 입수한지도 거진 2주가 다 되어간다. 나름 전공의/유관심분야와 밀접한 책이다 보니, 뭐라도 코멘트를 남겨야지 하다가, 좀 더 자신의 관점을 더 정제해/ 제대로 정리를 해 보려고 차일피일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이대로 다른 일들에게 우선순위를 무작정 미루다가는 정말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생각나는대로 대강이나마 메모를 해 본다.

-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런지 평소만큼 ‘말/글빨’이 도무지 안 난다. 말들이 정돈되지 않더라도 부디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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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계 내의 합의부터가 그리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조선 왕조를 ‘유교(정확히는 송대 이후의 신유학을 의미하고, 사실 ’유교‘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것 자체가 정교한 서술을 방해하지만, 일단 편의상 유교로 지칭)’를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은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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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게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인, ‘가부장제/신분제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를 상상하든, ‘숭유억불/중농억상/사대자소/군약신강’의 이념으로 무장한 학자·정치가들을 상상하든, 조선의 사상·문화를 설명하는 기초로 ‘유교’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대중 레벨에서 ‘유교’와 ‘조선시대’는 사실상 뗄 수 없는 키워드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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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관련 연구를 살펴 본 사람들에게는, ‘조선시대 유교’가 왕조 내내 동일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익숙한 설명일 것이다. 이른바 조선이 점차 ‘유교화’, 그러니까, 중앙 정계든 지방 사회든 ‘유교적 전환’을 겪어나간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유의미한 수준까지’ 유교화가 이루어진 기점이 어디인가는 학자마다 제각각 다르게 설명되었는데, 四書가 과거 과목이자 국학의 교과목으로 제정된 14세기부터, 16세기, 양란 이후, 18세기..등 다종다양한 설명들이 이루어졌다.(그 ‘조선의 유교화 시점을 설정하는 기준의 다양성’에 대해 열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거운 연구사 정리 논문의 소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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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훨씬 많은 것이 복잡해진다. 좀 거칠게 질문을 던져, 대관절 ‘유교화’가 이루어진 시기가 조선에 있기는 한 것일까.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어느 시기의 어떤 투철한 사상가조차 개인의 삶 모두를 그 사상에 일치시킬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투철한 유학자의 출현’으로 이를 기준삼기는 곤란하다. 지식인 사회 레벨에서 보려고 해도, ‘정통 유학/정통 성리학’이란 말로 연상되는 안정된 합의를 확고하게 구축된 시기가 대관절 언제냐(혹은 있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답변하기 쉽지가 않다. 일반적인 일상의 사회·문화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조선시기 어느 인물/사회/시기를 표본으로 삼아, ‘유교화의 완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좀 짓궂은 표현으로, “충분히 유교적이지 않은 사례는 조선 전기에도 후기에도 나오는데, 단지 차이는, 조선 전기에 그 사례가 나오면 ‘유교화가 충분치 않아서’그렇다고 말하고, 후기에 나오면 ‘사상적 권위에 균열이 발생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만이 다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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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한 가지 가능한 대안은 조선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교”(혹은 그에 준하는 사상·문화적인 요소들)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억불정책’은 조선의 멸망 시점까지 완전히 관철되지 못했고, 민간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부계적 질서(를 ‘유교’와 동일시할수 있을지는 또 설명이 필요하지만) 또한 스며들지 못한 사례가 고문서자료를 통해 발견되는 등, ‘유교화’의 완성태를 500여년 중 단 한순간도 거론할 수 없으니, 그냥 조선 사회의 변화는 유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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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또한 고려시기는 물론,, 조선 실록 등 자료에서도 꽤나 다양하게 나타나는 여러 유교적 변화의 징후들을 감안할 때 석연치는 않다. 지방 사회에서 벌어진 (그것이 '완전한 성공'으로 귀결된 적은 없지만) 사찰의 파괴, 엘리트 중심으로 하지만 점차 피지배층까지 전파되는 '불교적' 상장례 의식의 변화, 급기야 18세기 이후에는 유교가 피지배층의 '저항적' 언어로 전유되는 과정에 이르는 일련의 사례들이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제출되었다. 따라서 ‘이것만이 유교화의 징후이다’라는 식의 만족스러운 설명은 어려울지라도 무언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마저도 포기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변화된 것과, 변화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하는”(되다 말았다/미진했다 식의 설명보다는 당연히 더 정교한)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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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유생의 대결-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은 그 한 가지 유용한 설명의 틀을 제공한다. 종교사 연구자인 저자는, ‘공식종교/민속종교’라고 하는 두개의 종교 무대를 설정하여 그 난점을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의 지배세력의 합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공식종교의 장에서 이루어진 유교화’는 건국 초부터 ‘권도로서의 무속과 정통행(orthopraxy)로서의 유교’의 대립구도 하에서 ‘경전과 의례 실행에 대한 전례의 순수화’의 형태로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속종교의 장에서 이루어진 유교화’는 신이나 망자에 대한 스스로의 전문성을 주장하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들과 죽은 자들을 포괄하는 신앙체계 내의 영적 권위 확보’ 과정에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역 문화 내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지방관·재지사족 등 유자들과, 기존의 무당 및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을 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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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종교의 영역에서 나타난 이들의 ‘대결’은 어느쪽의 ‘승리’로 단순화되지도,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공존’으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본서에서 소개하고있는, 시기별로 그 무대를 달리하는 다종다양한 ‘대결’의 치열한 양상들은, ‘유교화’의 역동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특정 시기의 완성을 전제로 한, 양적 팽창으로 단순화할수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 의미에서 (물론 ‘조선의 유교화’라는 중대한 문제가 저자의 설명만으로 완결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조선 건국 이후의 일련의 상황을 ‘종교개혁’에 빗대는 저자의 과감한 시도는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경청해 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202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