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메모

홍이섭, 1968, '한국사회사상사의 방법'

평시(lazyreader) 2019. 1. 11. 02:09


1) 홍이섭 선생의 문장은 김철준 선생의 것과 더불어 난문으로 악명이 높다. 홍이섭 선생의 경우에는 긴 문장과 '의'의 반복이 유독 두드러지는..

수식관계만 좀 다듬어도 훨씬 가독성이 높아질 듯도 보이지만, 일단 귀찮으니 그대로 옮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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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글 말고도 '한국정치사의 방법과 과제' 라든지 등등 읽고 생각할만한 글들이 꽤 있는데, 그 글들은 나중에 시간나는대로 조금씩 옮겨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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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사 많이하면 그 문투가 옮는다던데, 저 문투가 옮았다간 그거대로 문제긴 문제겠다..(농담)


4) 홍이섭 전집을 2000년대 추가발간된 7~11권까지밖에 안 가지고 있어서 앞부분은 빌려다 보거나 해야한다.. 사실 정인보 전집 사듯 한번 사 볼까도 생각했는데, 초반 1~6권까지만 15만원이나 하는 걸 사기는 너무 허리가 휠 노릇이라 보류해 둔 상태..

다만 개인적으로 과학사, 실학, 사상사 (1,3,4권)해당파트는 짬짬이 모으고 싶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본문도 4권에 실려있지 않을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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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섭, 1968, '한국사회사상사의 방법',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원재, 1962, "한국사상"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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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적인 서구중심주의에서는 한국사상사의 구성자체에 이의를 품기도 할 것이다. 먼저 한국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 사상-정신적인 과제를 표제로 내세운다면 유교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확립시키자 하던 여말선초의 사회적인 움직임과 유교주의와의 연관성의 이해에 있어 종전의 인식태도부터를 비판하여 인식된 유교주의에 대하여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에 있어 유교주의의 이념은 지배의 이념으로 또는 피지배층의 순종의 윤리로써 그 사회적인 확충과 정신적인 확립립은 한국근세에 있어 사상의 사회적 기능을 촉구하였었다. 앞서 사변적인 불교의 사회적 작용도 있었으나, 현실정치의 유교주의와는 달리 종교적이었음에서 이것은 전사적인 한국철학사에서 논구될 것으로 이와 구분될 사회사상사에서는 종교의존적이었던 전일의 사고에서 떨어져 나오는 유교주의의 정치이념으로의 기능을 국가사회적으로 지니게 되는 여선교체의 14세기말은 그 시점을 이룬다. 꼭 사상체의 역사적 인식에서뿐 아니라 어떤 인식을 위한 그 자체의 토론과 연구에 있어 방법의 문제는 흔히 선행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인즉 방법의 문제는 선후관계에 있어서는 순환관계를 지니므로 이러한 과제를 한국사상사에서 따져 본다면 일반사의 연구와 같이 이제까지 이 부문에 과거의 유산이 없는데서 흔히 외래적인 어떤 방법의 수용을 전제로 하게 된다.


물론 이 외래적인 방법은 어떤 기성된 인식체계인 만큼 거기에다 한국의 표재를 들이맞춘다는 직결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쉬우나 이러한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사상사에서 본다면 이미 이루어진 인식체계를 배태한 그 사회의 사상과의 비교 내지 어떤 차이에서 한국사상의 비교적 위치의 설정에 머무르기 쉽다.


이러한데서 체계화의 시험등에서 얻은 어떠한 유산이 없다는 것을 또한 주시하여야 할 일이다. 즉 여기서 사회사상사의 시험적 구성과 겸행한 방법의 논의가 문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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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원적인 작법을 통한 상호작용의 시론에서 「한국사상의」이해에서의 방법의 추구와 그에서 정화된 방법에서 따져진 사회사상의 사적 추이의 인식에서 비로소 구조적 이해가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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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사상사의 구성


-유학사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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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어 사회사상사라는 용어자체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됨도 엄격히 말하면 해방 이후 교육의 독자적인 향유에서라고 하겠다. 더욱이 ‘한국사상’을 운위하게되는 것도 대학의 강의과목에의 ‘조선사상사’(대체로1950년 동난이후 ’조선‘을 ’한국‘으로)를 계시한 것이 실질적으로 한국사상에의 인식을 촉구한 것이다.

이에 앞서 사상사적 이해의 기반을 한국 이해에 두지 못하고 오히려 일반적인 인문사회과학적인데 두었으니만큼 한국 이해의 학문에 종사함에 있어 원전 해독이나 제도나 문학의 고실  증거(故失 證據)를 위한 실증주의 입장에서는 한국사의 이념적인 이해로 급격한 전환을 감행하지 못하는데서 사상사의 시론적 인식으로 접근키 어려웠고 일반적인 인문사회과학의 이해면에서는 원소재의 탐색을 위한 원전 해독이나 기본적인 문헌 탐구에 난점이 없지 않음에서 이 분리된 양편의 점은 접근한지 못한 채 그대로 양극을 이루었었다. 대학교육의 일면에서 한국사상사 해석의 기점을 설정한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 진전의 길을 마련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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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말에서 현재(1960년대)까지의 한국인의 정신적인 동향을 사회사상사의 일환으로 잡아 보는데 시간적으로의 단속과 사회적으로의 단층이 있겠으나 역사인식을 위한 일관된 추상화의 작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준비와 함께 이미 있었던 유산의 비판적 검토가 이 방면의 어떠한 일보다 앞서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자의적인 구성으로써만 안일히 처리하지 못할 작업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고 간주해 온 이제까지의 「한국사상」에 대한 자세부터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물론 통사적인 사회사상사로의 구성은 없었으며 이러한 방향에의 인도에서 보다 한국사상의 주체로의 「유교」의 한국적 계보를 우선 따지려고 하였음은 오늘에 와서는 그대로 한국근세에 있어 사회사상의 계보적인 탐색에 손잡이는 되고 잇다.

일찍이 장지연의 「한국유학연원」(1911)은 한국유학의 체계적 인식의 전초적인 문헌으로 그 역사적인 중요성을 더 한층 재인하게 된다. 해방 후에 있어 현상윤박사의 「조선유학사」(1949 후에 한국유학사로 개제)와 이병도박사의 「자료한국유학사초고」(1959년 유인)등은 서술과 체계에 있어 인식방법이 「조선유교연원」에서보다 사상사적 정리의 방향을 취했다고는 하기 어렵고 후일의 양자가 「조선유연원」을 도외시한데 있을 수 있는 학사적인 체계를 있는 그대로에서 이끌어 내었다 하더라도 학사적으로는 선구적인 장지연의 저작으로 돌아가 시점을 따지게 될 것이다.

삼자가 골격적인 구조로써 사승관계와 학사적으로 따져야할 저작의 소개와 학설의 1,2의 요점을 적출하고 종전의 왕정적 정치사의 기능에 결부시키고 있는데서 유학사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철학사로서나 보다 정치사상사 또는 더 포연(布筵)시킨 사회사상사로의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상거(相距)가 있다. 우리들은 기왕의 삼저작을 그것이 지니는 성도적인 방임에서만 주시할 것이지 사상사로써는 자세를 달리하여야 할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되면 유가적인 또는 실증주의사가로서 보다 사상사가로써의 정신적인 준비가 무엇보다 요청된다.


「조선유학」의 개별적인 이해자체가 사상적으로나, 철학적인 인식 검토가 없는데서 곧 그 총체적인 체계로의 전사를 논위(論謂)하기는 어려웁지만, 먼저 조선유학의 역사적 검색을 거친 사상사적 구성은 오늘의 현실로는 앞서 말한대로 이원적인 작업을 보행하는 것이 보다 긴한 일로 되어 있다.


19세기말 이후의 한국의 근대화과정이 경제적으로 한국사회자체의 자본주의화-근대사회로의 개진이 못되고 식민지로써의 전락과정이었음에서 현재까지 추이해 오는 동안에 사상적으로의 근대화에서 한 시기의 전락과정이 있으므로 주시하게 된다.


그 전변과정에 있어 지니고 있던 주체적인 조선유학의 봉건교학으로의 정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며 어떠한 방향에서 사회적인 작용을 하였는지는 자본주의화과정을 그저 근대화과정이라고만 호칭하는 통념적인데서 한 걸음 벗어나 과도기의 한 사상의 전변에의 인식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추이에서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 이념이 근대화과정에 있어 역시 통념적이며 일률적인 규정에 따라서 유교주의적인데서 몰락할 수 있었다는 필연론의 추출에 추종함을 비판하고 탈피하는 동시에 필연적인 쇠퇴과정의 사상으로 유교주의봉건교학 속에서 움트고 있었던 봉건교학에의 도전적 자가비판은 이조봉건제사회 자체내에 그 온상이 마련되었으니, 이것은 한국의 소산이었음을 논증하는데서 한국사상의 보다 바른 인식의 길을 열 수 있다.

조선유학의 사상적 이해는 한국사회사상의 기반이 되며, 이 확증적 구명은 한국사상 이해의 불발이 된다. 유교주의의 지배적이었던 시기와 이 유교주의의 조류가 잠재화하며, 또 그것이 간접 직접으로 수용되는 서구적인 사상체에 반발을 일으키며 또는 동질적인데서 동조적인 단승의 지반을 마련하는 이십세기 전반기(극한은 1945년 해방이라는 사회적인 전환점에 두게 되지만)에 있어 식민지시대의 사상적 두 조류도 반발이든 동조이든 간에 잠재적으로는 유교주의가 그 저류를 이루고 있엇다. 일견 병폐적인 고질인데서 유교주의 정신의 비판적인 과제는 같이 유교주의사상을 봉건교학으로써 수용한 일본사회와도 다르며, 본향인 중국과도 다른 데에 조선유학의 획일적인 절대성을 달리 인식하여야 하게한다.


그러므로 먼저 한국사회사상사의 구성에서는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확립과 추이를 잡아 보아야 한다. 즉 이 시기가 여말선초에 걸쳐 주자학의 수용과 그것의 정치권력에 의한 학립 상층적으로는 정치이념으로 사회하부에 있어서는 국가윤리로서(특히 군신관계의 규정을 위주한 봉건적인 권위주의) 보다 사회적인 기반에서 가족윤리로써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송학에서도 종결적인 체계화를 기도한 주자학적 이념의 이식은 조선유학을 봉건교학으로 절대화하는 자연주의적 사상의 시점을 이루고 있다.


이 절대적인 교학의 이념을 계보적으로 보는데서 간취(看取)되듯, 유학자체의 아카데미즘을 지녀온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인 송학-특히 주자학의 이해과정에있어 정치적 이념의 「조선현실」에의 적용이라든지 「정치적 현실」의 비판에 있어 후일에 말하는 공리적(空理的)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흔히 공리적이라 한 것은 정치현실의 비판과 달리 윤리적이었던 예론과 철학적인 이기론과의 불분리에서 온 사상이해의 혼효(混淆)에서이었다. 이것은관료적인 유교주의학자들의 학문체계와 정치현실의 무비판적인 직결에서 오는 오인의 결과이었다. 주자학적 이념의 종합적 또는 유취적(類聚的)인 이해 즉 이기론-철학적, 체론-윤리적,정치이념-유교주의의기본사상의 체계적인 이해 또는 이것의 유취적 이해는 어떠한 방향에선 사상사적 타결을 갖게할 것이다.


철학사 또는 도덕사상사와 구분될 사회사상사에 있어 유교주의의 차지한 성격은 자명해질 것이다. 혼효적 유학사의 자세에서는 사상사 특히 사회사상사에서의 인식은 자체 불가능하며, 이미 얘기하고 있는 학술사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종합적인 사상사의 관점에서 말하는 intellectural history에서 본다면 적어도 삼분해볼 유교주의이념의 상호작용과 유교주의치하에서 생성되어 온 사회문화의 제현상과의 관점작용-반작용에서 문학-미술-음악-연극의 유교주의적 봉건제사회와의 상호작용을 따져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유교주의의 확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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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주의의 정치적 확립 주자학의 기본이념에서 소학과 통감강목을 통하여 유교의 논리적인 이해의 사회적 보편화와 역사적인 인식의 틀을 마련하는데서 유교윤리의 체제로의 삼강오륜은 곧 한국의 역사적 실제를 따지게 한다. 이러한 실천면에 비하여 철학적인 면의 이해는 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었음은 근세한국인의 사색의 과정을 명시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해에의 시간의 소요와 다시송학에서의 전개에는 사색을 통한 한 층의 노력이 필요했었다. 한국근세철학의 형성과 발전에서의 소산을 중국의 것과 우열을 논하는 소박한 견해는 한국사상을 서구적인 것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결정지우려는 방법 이전의 초보적 단정이며 우열과 차이점의 견해만으로서는 중국의 유교사상이나 서구사상의 껍질을 벗기는 일로서 외래적인 요소의 제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국극에 가서는 원시적 종교신앙 그 조변의 사유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이해된 유교주의의 사회적 기능을 포착하며 그 영상에서 당해사회(當該社會)의 동향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유교주의의 이해와 실천여정에 있어서 삼분될 각 분야는 그대로 각 시기의 시대적인 조건을 지니고 있으니 이기설이 조선의 학적 수준을 규제하면서 사회적인 기반을 지니는 이황과 이이 두선생의 양립의시대에서부터 여타의 조건(정치적인 분파가 표면상의 (主潮)이엇으나, 후일에 와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게 학설자체에서 즉 學理에서 발발한다)에서 분파되는 것은 實踐禮論이 보다 정쟁에서의 분파와 밀착하는 것이요, 정쟁자체가 예론에서도 상론과 상호생성의 과정을 밟은데서 이미 순리론의 현실적인 이해를 촉구하는 연유가 된다.


제3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실천론은 여말선초에서 이이에 이르기까지 보다 1552년의 일본의 침략전쟁(임진란)이후 복고적 의식에서 한국현실의 비판적 인식에서 사회개혁-국가제도의 개편을 중국의 주체적 자연으로 돌리고자 하는 생각은 일종의 자연주의사상으로써 외양 중국적인 데의 의존, 사회제도면에서는 곧 복고적이었으나 이러한 생각은 시대와 함께 급진적인 사상(개혁)으로 전개되며 부분적으로는 혁명적인 요소도 있었다.


당시의 조선학자들은 조선현실에서 출발하였으나 시대의 추이와 함께 대륙국가의 사상적 다양성에서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이 외계에서의 정신적 자극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곧 명말청초의 복고적 복벽사상은 그대로 현실정치의 극렬적인 비판에 이르렀으며 이 복고의식에서 현실 부정에 가까운 생각을 발로하게 이르렀던 일부의 급진적인 사상은 서구의 계몽적인 사상과는 다른 생성기반에서 전개되었고 이것은 곧 개혁적인 조선학자에 수용되었으며, 다시 조선의 현실은 그러한 사상체를 여과시키었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의 여과는 곧 조선사회가 지니는 어떤 제약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여과된 사상은 그대로 조선현실의 비판과 인식의 새로운 태반의 작용을 하였다. 우리들이 실학사상이라고 호칭하는 일련의 사상적 계보는 이에 의존 생성되었던 것이다. 이 생성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움과 이 사상의 사회적 포연을 어떻게 한정지을 것인가는 유학사의 일부로서 지칭할 정치, 경제정책의 사상사적 논구에서만 결정지을 수 있다. 이 사상의 계열을 실학-실사구시학파라 호칭하던 1930년대의 좌익적인 한 논자에서는 현실학파라고도 지칭하였으나, 통용되는 실학파라는데서 그 학파의 사상적 핵심에 접근된 명칭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문제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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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학파-현실학파의 기본사상은 주자학적인 근간에 양명적인 지행합일의 정신이 농축되었으나 주자학지상주의의 이씨조의 사회풍조에서는 양명의 색채는 의식적으로 잔재시켰으므로 이 어느 것에의 편향성은 벗어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고경학-원시유학에의 회귀의 정신도 내보였음을 착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한편 명청의 대륙사회를 경유한 한역된 서구적인 정신으로의 중세 「스콜라」철학 내지 「가톨릭」사상의 수용-이해-찬양<신봉>은 이 자체가 종교적인데로 흘렀으나 이것과 동시에 서구의 「르네상스」기의 자연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실학파의 학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지식에서 새로운 서구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에 도달치 못한 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주자학적 관념세게를 뛰어넘지 못하였음과 서구적인 그것이 「스콜라」적인 단편적인 것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음에서다. 이런 제3의 외래사상의 작용이 일률적이지 못하였음에서 같은 학파의 학인들에게도 공통된 의식이 못된 것은 양명적인 정신도 같았던 데서 사회인식에 있어 시간적인 선후를 별도로 급진적이기도 하고 온건하기도 하며 비판적인데 편향적이기도 하며 또 체계적인 개혁론의 구축에 이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당시로는 이 현실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 십구세기 중엽에 와서 농민들의 ㅈ대중적인 동향에서 괴리되었음은 근세사상사의 단층이라기보다 어디가지나 유교주의 정치이념에 기반을 둔데서 유교주의자체가 근대화의 성격을 지니지 못한데서 결과될 윤리에서이라고 처리할 수도 있으나 ‘웨버’의 중국사회이론으로의 유교주의의 분절 이해를 차용할 것임에는 역시 시험을 거쳐 걸러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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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위 근대화과정


-자본주의화=식민지화에 있어 민권과 독립의 과제

 

19세기 중엽에 있어 동학적 세계관의 형성은 한국인의 독점적 유교주의 정신세계에의 도전적인 사상의 형성이었으나 후대적인 해석으로의 사상적인 외피에 불과했던 당시의 정치사회가 폐쇄적이었다는데서 서학에 대항하는 동학으로 간주착각에서 인식의 각도가 틀렸던 것이다. 동학은 한국인의 전통적 사상의 종합체로의 동(東國)학(思想)이었던 것이고 배타적인 것보다 포섭적인 종합의 방향을 취하였었다.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농민층에 기반을 둔데서 19세기를 통하여 한국의 전역을 휩쓸던 동민반란과 사회적으로 관련성이 있었다. 19세기 후반기의 즉 소위‘근대화’(자본주의화-식민지화)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동학적 세계관과 거의 1세기간 이 사회를 휩쓸던 방방곡곡에 만연된 민요(농민반란)을 선결적으로 이해할 일이다. 안으로는 즉 사상적으로 유교지상주의 한국사회가 동학적 세계관을 지니는 것은 유학적 사상사에 한 전환점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유교주의의 이념, 전변하는 한국사회에 적응하여 중국중심주의정신을 자기중심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의 계기는 한국사회자체가 경제적으로 근대화할 준비가 성숙되었었다면 전진하려던 사회에 대하여 보수적인 반동의 소재에 멈추었을 것이나, 미숙한 단계에서 외계-외래자본주의에 접촉으로서 붕괴단계에 처하여 있었더니만큼 구미 내지 서구자본주의의 선도적 소임과 자기들의 침략을 기도하던 일본자본주의의 침투를 배제보다 방어코자하던 ‘양왜일체’의 배격론에서의 양화배척 ‘척사론’으로 꾸며졌으며 이항로같은 모화주의정신의 소유자의 ‘척사론’은 그 자신에 있어서 또 김평묵 등 그 문하생에 이르러 모화적인데서 국수적인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군벌을 선도로 하는 일본자본주의의 침략에 민족적인 항거로 나타나도록 되었었다. 이 유교주의의 전환은 동학적 세계관의 형성을 선도로 그 추이에 병행되며 유교주의적 주류의 변환에 따라 청,일본을 통하여 인식된 근대적인 발전양상은 일본인의 용어인 ‘개화’로 대표되었었다. 이 ‘개화’란 말의 사용은 곧 ‘개화정신’을 빚어 내었으며 함께 “프로테스탄티슴”이 그 자체에서의 민권의식과 실용적인 서구적 문화의 이식과 함께 민권과 민족의 독립주의의 정신은 외래자본주의의 침략에 抗立的이게 되었다.


대내적으로 보수적인 정체의 취약성과 전근대적이며 부패적인데 비난,공격을 감행하여 개혁을 강요했으나 시정적인 인선이나 농민군벌의 침략적이며 상부에서의 개혁으로 좌절되었다. 이러한 근대사상의 일련의 사실은 이른바 근대화의 여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일은 일본의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식민지화의 여정이었으며 사상사적으로 이 과정은 주류인 유교주의가 송학적 척사론을 국가보호의 자리에서 사=외래자본주의상품(양화)으로 전환시키는데서 다시 위정은 민권-민족의식으로 내밀게 되었다. 이 정신적인 기반에 이식된 서구적 근대사상은 주로 일본의 견문과 서적을 통해 수용되고 일부는 미국에서 유입되었고 청말의 사상적 동향에서 자극되었다. 여기에도 서적을 통하지만 영·미인이 현지 한국에서 절달한 바이었으니 근대사상 수용의 교량이 일본이나 청에 비해 퍽 빈약했고 질량에 있어 근소하였으나 거재필 유길준 장지연 등의 근대적 의식은 유교주의에서 근대적 사상에로의 전환기의 소중한 산물이었다. 민족의식은 지식층에 고아범히 퍼진 공통의식이었고, 이 의식의 표현은 개화운동과 함께 널리 퍼졌으나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론화되지 못하고 후일에 민족사관의 수립에 있어 신채호의 한국사의 이해만이 최후까지 자기 정신을 고수하며 기타는 그러한 의식선상에서 탈락됨은 한국이 자체의 근대사회로의 진전에 반한 식민지로의 전락에서 그 식민지시대의 사회적인 조건에 따른 것이나 민족의식 자체와는 달리 탈락은 탈락되는 인간의 심성과 기질에 따랐던 것이 명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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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식민지시대의 이율적 사상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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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적 변이에서 보다 1919년이전에 있어 민족적 의식의 응고화와 그 국제적 연계성의 확대강화와 함께 민권의식을 근간으로하는 민주주의적 사상보다 일제에의 저항에 있어 일본지역을 통한 ‘아나티즘’Anarchism(무정부주의라고 해석하고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반역적인 사상)의 수용 일본에 있어 일본인‘아나키스트’와 동반활동 등에서 사상적 이해 실천운동-투쟁은 곧 민족운동의 한 조류를 이루었다. 중국이역의 망명객이 또한 민족적 의식을 실천화하는데는 강력한 ‘아나키즘’의 노선을 밟았다. 이것이 정치적인 실천운동인데서 사상으로싀 유산은 달리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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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진영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진영에 대립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나키즘의 노선에서였음은 앞으로의 민족독립운동사에 제시된 사상사적 과제이다. 파괴적 아나티즘은 일본제국주의에의 항쟁을 감행하였음에서 저항적인 의식의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한편 1920년대에서 30년대 중엽에 걸친 공산주의운동에서 사상사적으로 맑스에서 레닌에 이르는 공산주의이론을 소용하게 되었다. 즉 공산주의사상 수용의 루트도 주류는 일본을 통한 것이었고 동시기에 있어 일본의 사상적 동향은 식민지-조선에 그대로 파급 작용함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반봉건적 자본주의발전하에서 겪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일본자본주의의 식민지로써의 성격에서 오는 사회적인 동태가 공산주의 이념의 이식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국제공산당을 통한 소비에트의 대립적인 정책에 따라 중국-만주-시베리아 경유로 조선국내에의 작용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합작과 파괴적 분리 항쟁으로 자체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 실제운동의 변이에 따른 이론적 전개와 지식으로서의 기본이론의 이해가 맑스주의 사상의 수용의 역사적인 테두리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대별한 두 주의 진영이 각 자체내에서의 분열이 끊이지 않았던 한국인의 정신구조는 식민지적인 또 전통적인데서의 조건과 아울러 따질 것이었다. 이러한 구조적인데 있어 공통의식으로써 두 주의의 진영을 합치고 분리시키었던 것이 곧 민족적 자립, ‘좌익적인 민족해방’즉 ‘독립’의식이었지만 이 민족적 공통의식은 식민지적인 현실에서 실천적인 노선은 사회인식의 방법적인 차이에서 먼저 분리될 수 있으니 민족주의 진영은 복고적인 민족의식의 선에서 1)망명적인 대종교의 운동으로 2)민족과 문화 국토 인식을 역사적으로 추구하는 민족사의 구성 3) 유교주의적 척사론에 있어서의 명분론적 민족의식의 고수를 통한 일제에의 항거정신으로 모두 민족의식의 고취에 향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보다 민족자체의 실천적 방향을 지시하는 4) 훈계적인 민족론의 제시는 이 진영의 사상적인 것으로는 주시할 바이었고 이러한 정신의 확대로써 ‘경제생활의 향상’을 전체적으로 추진하려던 5) ‘물산장려’운동을 대조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이 민족적인 자립-독립을 지향하는 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항거하는 행동이 요청되었다. 이것만은 끝까지 파괴적 테러리즘에서 기대할 수 있었으니 이 테러리즘의 정신은 민족의식을 최후까지 보장한데서 식민지시대 우리 사상사의 일면의 광휘였다. 여기서 민족진영의 테러리스트의 정신은 우리 사상사에서 역사적인 사실로써 재인식 재평가될 것이다. 물론 자체 사히내의 테러리즘과의 구분은 또한 엄하고 혹독해야 할 것이다.


맑시즘의 수용에 있어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인식은 식민지시대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판정신과 전투적 정신을 부여하였다. 일제 식민정신에 따른 민족경제의 파괴와 농민의 궁핍화 소작인으로 전락 이농(離農) 남북만주와 일본에의 이주 또는 화전민으로의 유랑, 저임금노동자의 점증, 이농자의 도시집중화, 도시무산자의 확대 등에서 오는 일제와의 민족적인 갈등을 계급적인 투쟁으로 전환확대하는데서 농민, 노동운동의 전개를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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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사회적인 기반에 생성된 지식인들은 중국 소비에트를 통하여 수용한 바도 있었지만 동시기의 일본의 교육, 메스콤을 통하여 근대적인 제사상 내지 공산주의 이념을 흡수하여 두 주의의 진영에 참가하였으나 의식적으로는 후자에의 가담을 증대시켰으며 문화적(문학 음악 연극 영화 미술)인 데에서는 보다 동반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역사적인 조건하에서 식민지문화의 정신적인 기틀에서 민족주의적인 것은 정치적으로의 저항의식으로 주제화되었으나 사상적으로 걸러지지 못한 채 민족의식에의 계몽적인데 흐르며 여기에 이르지 못한 것은 전통적 혹은 복고적으로 쇠퇴적인데서 오는 센티멘털리즘으로 흘렀다. 이 민족적 센티는 공산주의 진영의 문화운동에서도 떨쳐내지 못한 시대적으로 공감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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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맑스주의가 파시즘에 휩쓸릴 때 한국에서도 그 기풍 속에 휩쓸렸고 일체 민족적인 것이 부정-말소될 때 정치 또는 문화적인데서의 사상 행동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휩쓸리려 자체의 의식기반에서 탈거하느냐?에 있어 타협적인 정신의 탈락 배반과 함께 이 사회는 사상적으로 질식상태에 놓였었다. 물론 공산주의의 행동면이나 문화적 제운동도 운명을 함께 하였으며 파시즘 치하의 일본의사상적인 모색은 함께 식민지에도 작용하였으나 사회적 성숙조건이 다른데서 감도가 약하였고 또 은폐된 민족해방이란 목적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에서 국부적으로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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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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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이후의 한국사회의 추이에서 볼 때 외래적인 사상이 이식되어 그 자체가 성숙될 기반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동시기의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할 체계적인 수용-이해에 있어 곧 ‘한국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윤리적인 사상체계로 내밀려지나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새로운 사상으로 구조화되지 못하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성격을 분절 포착해야 할 것이 보다 큰 과제로써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방법적으로 일반론의 수용과 함께 여상(如上)의 사상사적 특질에서 봉건교학으로의 유교주의의 확립-전개 소위 근대화과정에 있어서 유교주의의 전변과 서구의 근대사상 식민지시대에 있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공통된 의식으로 지녀졌던 민족적 의식 등이 신조적으로 보다 역사적 사실로써 비판되는데에 현재적인 한국사회사상사의 현성과 인식이 가능하지 않은가 한다.


2014.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