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 2014, "조선시대의 외국어교육" 김영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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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의 구어인 한아언어(漢兒言語)를 기반으로 형성된 문장어를 '몽문직역체'와 '한문이독吏牘체'로 나누어 생각한 학자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문이독체가 북송때부터 시작되었고 몽문직역체는 원대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나 필자는 원대 북경지역의 구어인 한아언어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전자는 이를 문어화한 것으로 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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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그 주장은) 원대 이독문이 사법에서 사용될 때는 죄인의 공초라든지 소송의 소장에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구어를, 그것이 어떤 언어든지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어떤 언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북경지역에서 코이네로 사용되던 한아언어이며 원대 이독문에는 이러한 구어를 몽문직역체란 이름으로 잠정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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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원대에 사법이나 행정에서 주로 사용한 한문이독체를 '한이문'으로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한 '한문이독체' '몽문직역체'라는 한문의 변문은 실제로 원대 이문으로 구어를 직사한 것, 즉 그대로 베낀 것을 말한다. 특히 '한문이독체' 즉 원대 이후 발달한 중국의 이문을 고려 후기 이후부터 한반도에서 쓰이던 이문과 구별하여 한이문漢吏文이라 부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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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장"에 따르면 당시의 구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어휘가 있으며 고문이라면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어휘가 빈번하게 혼용된다....이러한 예로부터 필자는 원대의 한문 이독이 '한아언어'라는 구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다시말해 한아언어가 구어라면 원대 이문은 그에 의거한 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사 한이문 즉 한문의 이독 문체는 어디까지나 중국어이며 문법적으로는 고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아언어는 비록 어휘나 문법요소에서 몽고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법구조는 중국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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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문 이독 문체는 하급관리인 한인이 통치자인 몽고인에게 올리는 일체의 행정문서에서 일괄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전적 교양을 중시하던 옛 중국의 관습은 무너지고 실무의 지식과 기능이 중시되었다. 이때 선비보다는 실제 법률 지식이 풍부한 서리가 우대를 받았다. 몽고인의 통치를 받고 있는 원대에 한인이 출세하는 길은 버률, 행정 문서작성과 같은 실무 지식과 한이문에 정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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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필자는 원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이독의 한문 문체를 한이문으로 보려고 한다. 조선 전기에 한이과를 개설한 것은 사대문서를 작성하는데 한이문에 정통한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 때의 출제서로 앞서 소개한 한이문 교재들이 선택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렇나 한이문 학습을 이도 라고 하였으며 이독은 원래 한이문으로 쓰인 문서였으나 점차 한이문 작성 자체를 뜻하게 된다. 즉 일정한 공문서 서식에 따라 작성된 이문을 이독이라고 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전자에 대해 吏頭, 후자에 대해 吏讀로 한 글자를 고쳐 술어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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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어를 배우고 한자를 익혀 한문으로 된 각종 문헌을 읽고 또 스스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기록했다. 한문은 고립적인 문법구조를 가진 중국어를 표의문자인 한자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읽을 대는 우리말로 풀어 읽거나 교착적인 우리말의 문법구조에 따라 조사와 어미를 첨가하여 읽었다.. 이런 한문 독법 때문에 전자를 석독이라 하고 후자를 순독 혹은 송독이라 하며 이 때 삽입되는 우리말의 문법요소, 즉 조사와 어미를 구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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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말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에는 먼저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자로 쓰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한 한문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중국어로 번역 표기하는 경우 번역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이 있는데 인명 지명 고유의 관직명이 그러하다. 이 경우에는 한자로 번역하거나 발음대로 표기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신라 무장 거칠부居柒夫를 荒宗으로 적는 방법이다. 이것은 실제 신라어를 한자를 빌려 발음대로 표기하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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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대국어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의 어순으로 한자를 표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신서기석의 표기 방법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말 어순에 맞춰 한자로 표기한 문장을 지금까지 향찰문 혹은 이두문으로 불렀고 여기에 사용된 한자들을 향찰 혹은 이두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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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한자로 어순에 맞춰 표기하는 이두문에는 중국에는 없는 고유명사나 문법요소 같은 것을 한자의 뜻과 발음을 빌려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이두가 한자로 우리말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것이라면 구결은 한문을 읽을 때 삽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두문은 문법구조가 우리말에 기반을 둔 것이며 구결문은 중국어의 문법구조에 따른 한문 문장에 우리말의 형태부인 구결을 삽입한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구결이 우리말의 어미 및 조사와 같은 형태부를 기록하는 것에 국한되는 반면 이두는 고유명사를 표기하면서 의미부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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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토吐 가 있다. 이것은 이두나 구결에서 특히 우리말의 형태두, 즉 조사나 어미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을 말하며, 구결토와 吏吐가 있다. 이토의 경우에는 이두가 간혹 의미부를 기록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따로 독립되어 구별될 수 있지만 구결토는 구결이 대부분 형태부를 기록하는 것이므로 구별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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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문이 바로 이문이 아님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즉 한이문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변체 한문을 이용하여 공문서 작성에 유용한 문장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의 이문이 언제부터 정식으로 공문서의 공용문어가 되었는지는 아직 아무런 연구가 없다. 그러나 한이문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문이 이루어졌다면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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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문은 조선시대 공문서의 공용문어로서 모든 공문서는 이문으로 작성되어야 효력을 발생헀다.... 언문으로 쓴 것, 증인이 없거나 쓴 사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채권의 효력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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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종조에 최세진이 편찬한 이문대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조선 이문의 학습서로서 한이문에 정통한 최세진이 그것과 비견되는 조선이문 학습서를 편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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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이문은 한이문의 문체에 맞춘 것으로 이두문과는 구별되었다. 다만 이문대사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형식이 있고 특수한 관용구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쓴느 한문을 이문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문의 특수 관용구는 이두문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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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대사의 권두에 소개된 관용구는 대부분 이두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한이문의 문체를 사용한다.... .사자성구를 많이 사용하는 한문 문체는 한이문의 특징으로서 조선이문이 이를 본받은 것이다. 吉川辛次郞(1953)은 "원전장"의 한문 이독의 문체적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1) 사자구, 혹은 그 변형을 기본으로 하는 리듬
2) 어떤 종류의 구어적 어휘를 포함한 이독 특유의 말을 빈번하게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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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조선이문도 한이문과 같이 사자구를 기본으로 하는 문체적 리듬이 있고 구어적 표현을 가미했으며 이문에만 사용되는 관용구를 빈번하게 써 공문서로서의 구ㅕㅓㄴ위와 긴장을 유발한 것으로 봉니다. 이것은 이문이 한이문의 문체를 본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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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따라서 조선이문은 원의 한이문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며 한이문이 이른바 몽문직역체로 알려진 한아언어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 처럼 조선이문은 우리말 문법에 의거하여 신라시대의 향찰표기에 기반을 둔 이두문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항이문의 한문 문체를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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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이문은 갑오경장에서 한글을 공문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칙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유일한 공용 문어였다. 몇백년간 지속된 유일한 공용 문어인 조선이문에 대한 연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국어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37~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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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