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인의 언어를 향한 '적당한 거리'에 대하여
* 과거인의 언어를 향한 '적당한 거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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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고, 책을 읽다보면 '도무지 동의하지 못하였으나, 여러번 읽다 보니, (비록 그 생각의 방향에 완벽히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설복되지 않을 수 없는 글' 이라는 것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서는 고 김준석 선생이 쓰신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에 대한 서평(이라기엔 논문에 가까운) 일부인, 아래의 단락이 그 정확한 예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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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사 속의 행위자들 스스로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 주장을 음미하는 것은, 그에 동조하느냐 여부와 별도로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 까닭에 관료-사족을 '지배층'으로 통합하고, 그 아래에서 다분히 후자를 문제시할 목적으로 公權/私權을 나누어 파악하는 인용문의 접근법에 모두 동의하기란 (사실은 지금조차도) 어렵다. 더군다나 그들 나름의 입장들을 정교화-체계화하는 과정이 이 분야의 발전을 지금껏 이끌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舊說'이 '新說'보다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당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설의 유지'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신설이 아닌 구설을 유지해야만 보이는 저변'에 대한 설득이 불가피 한 것에 비해, 안타깝게도 (인용문을 포함한) '구설 지지층'에서도 충분히 그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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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꼭 인용문과 같은 방향이 아닐지라도, 과거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시선의 필요성만큼은 수없이 상기해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이는 우선적으로 21세기의 학문은 설령 과거인의 목소리를 매개할지언정, 결국 21세기 독자와의 호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과거인의 목소리에 대한 복원 그 자체만으로 학문의 목적이 아니기에, 과거인에 대한 거리는 상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한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과거인의 언어를 충실히 복원한다"는 당위가, "언어를 남긴 과거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믿는다"는 편협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경계심을 놓치지 않기 위한 거리감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결국 지배층들의 자기변명이지"식의 냉소가, 굳이 논의의 중핵에서 매사 작동될 필요까진 없겠지만, 논의의 '입구'와 '출구'쯤에서는 곱씹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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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 대한 여러 생각에도 불구, 일단 '어느정도는 설복되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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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위해 일부 문단 구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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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은 (중앙)정부․지배층․집권세력․중앙관료, 혹은 국왕 등으로 구분해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경우에도 구태여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방지배’에서 양반 사족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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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선왕조는) 그 중기에 이르러 불가피하게 사족들을 지방지배의 매개로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사족지배체제라는 조선시기 특징적인 지방 지배형태를 나타나게 했다“(184쪽)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이 중앙 정치권력과 재지사족을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서 파악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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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다. 우선 여기에는 조선시기의 국가는 양반이 양반을 위해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국가라는 사실, 이는 국가와 사족=양반의 입장에서 지방과 농민을 지배하는 체제이며 사족=양반이 농민과 양립하는 구도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자의 생각에, 국가의 의미에는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는 중앙과 지방을 일체로 통합해서 장악한다는 것, 그래서 실제로는 국가가 지방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중앙정부․지배층(사족)이 지방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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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족=양반을 국가=조선왕조와 대립하는 존재라는 측면만 부각시키다 보면 예컨대 왕조의 몰락이 국권의 상실과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 책임은 막연히 ‘국가’에 떠넘겨지는 것이 되고 만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이었던 양반 사족이 국권의 상실 과정에서 어떻게 책임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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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서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문제 설정, 접근 방법대로 한다면 단순히 양반의 역할을 중시하고 긍정하는데(평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그칠 뿐만 아니라 양반의 분열 대립과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고 그 반대 입장에 섰던 양심적인 양반이나 농민들의 반봉건적인 의식과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위치 설정하는 일은 그 만큼 부자연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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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동연구자들은 15세기 관주도 향촌지배의 한계․문제점을 부각시킴으로써 16세기 재지 사족 주도의 향촌질서가 출현하는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제1부 제1장 논문). 또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강대했고 따라서 사족의 향촌자치, 사족지배가 이에 대항하는 견제력이었다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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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세 집권국가의 관주도형 향촌지배는 기본적으로 한계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것은 조선전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관주도의 한계’가 사족이 향촌주도에 나서게 되는 한 배경일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것이거나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의 주장은 역시 사족의 사적 지배를 적극 긍정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의 이론을 도입한 사족층과 그들의 자치활동이 수령권(=국가 공권)에 대한 私的 지배력, 私權의 저항․신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점에서 그들이 15세기 재지 품관층과 그토록 확연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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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상도 일각의 ‘유향소 복립운동’이 설령 연구자의 주장대로 ‘관권의 일방성’을 견제하거나, 중앙 집권세력의 사적 특권의 확대에 반발하는 지방 양반세력의 결집이었다 하더라도 이 때의 중앙 집권세력을 국가 공권력과 동일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점에서는 역시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앙의 집권세력보다는 재지 사족층이 더 양심적이고 바람직한 지배세력이었다는 선입견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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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지 사족의 유향소 복립운동이나, 수령권 견제 활동은 그들 자신의 권익 신장, 기득권 옹호를 목적으로 한 집단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중앙 집권세력의 속성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들 사이에는 재지 사족인가 중앙의 집권세력인가의 차이, 즉 현실적․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함께 농민지배의 방식, 국가 공권에 대한 태도의 여부가 더 중요한 구분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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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석 2000 서평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역사학보 168, 384~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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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꼭 해두고 싶은데, 이 서평 및 그 대상이 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던 00년에는, (인용문 저자의 표현을 빌면) '사족에 의한 향촌주도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주류였는데, 대충 10년대쯤 접어들면, 그 흐름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전제로 너나할 것 없이 '국가 제도의 주도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거짓말처럼 유행이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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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흐름을 굳이 멀리서 파악한다면, 결국 '주도권이 누구냐'만 거짓말처럼 바뀐 것 뿐, 선행연구에 대한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 특정 주도층의 자기정당화를 사실 그 자체로서 믿고, 그 저력을 묘사하고 있다는 면에서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반복컨대, 김준석 선생 방식의 '지배층 환원론'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방법에 내포된 미덕에 대해서는 꾸준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최근 동향을 파악할수록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2023.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