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리의 변천은 사대부 형성" <동아대학보 제46호> 1959년 8월 15일, 1면
* 아래 포스팅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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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선생의 50년대 신문연재 글을 대충 다 살펴봤다고 생각하고 반납 준비를 하려니까, 해당 글이 실려있던 날의 신문기사가 끝내 눈이 밟혔다. 기왕 반납하는김에 이것도 같이 갈무리해두자 생각에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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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사의 의의가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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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이우성선생 자신이 밝힌 아래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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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관인으로의 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었다(1959년 5월)"
('고려시대의 촌락과 백성' "한국중세사회연구", 일조각, 1991, 36쪽; "한국중세사회연구"(이우성저작집 2), 2009,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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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대로라면 1959년 5월에 역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된 내용이 8월에 동아대학보에 실려있다는 것인데, 당시 기사를 참고하면, 실제로는 1959년 7월 18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나 싶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나온 동아일보 기사상으로도, 1959년 7월 18일로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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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의의가 하나 더 있는데, 해당 논문이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리하자면, 유명한 논문 '고려조의 '리'에 대하여'는 ⓐ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1959년 2월에 한번 발표된 것을 ⓑ 서울의 동국대에서 열린 7월 월례발표회에서 재발표하고, ⓒ 그것을 8월에 요약정리해서 동아대학보에 싣고, ⓓ그 요약과정에서 누락된 부분을 10월에 보충하여 동아대학보에 후속편을 기고하고, ⓔ 그걸 다시 수정한 버전을 64년 역사학보에 싣게 된 원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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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 막히면 그것만 빼곤 뭐든 극성스럽게 된다고 하던가.. 그래도 어쨌든 재미있는 발견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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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보 제46호> 1959년 8월 15일, 1면
"향리의 변천은 사대부 형성" 이우성 조교수 역사학회에서 연구발표.
역사학회 월례 연구 발표회가 지난 7월 18일 동국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 대학교 문리대 이우성 선생님의 "고려후기에 있어서 향리의 면역과 그 관인으로 진출"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지난 2월 역사학회 부산지회에서 발표한 바 있었는데, 우리나라 봉건사회를 설명하는 커다란 문제를 제시하여 준 것이다. 따라서 이번 역사학회 본부에서의 이 연구 발표는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연구 논문의 요지는 고려 중역 "무인 쿠데타" 이후에 나타나는 독서인의 진출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향리들로서 후에 사대부를 형성하여 고려후기 역사의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고 밝히며 이들의 문벌과 신분 관계를 '무인쿠데타' 이전의 지배질서와 구분하여 이들의 사회적 진출의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조건을 해명하여 고려후기의 역사를 명확히 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선생님은 정중부난 이후를 봉건사회 형성기로 보고 이조시대부터를 봉건사회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지방의 교수들로서 역사학회 본부에 출장하여 연구발표회를 하기는 이번의 이선생님이 처음이며, 이것은 지난 제2회 전국 역사학대회에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 교수님들의 연구를 상호교환으로 발표하자는 결정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