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국가 느가라"(클리퍼드 기어츠, 김용진 역, 눌민, 2017)> 中
마음이 답답해져서 문득 "극장국가 느가라"의 한 부분을 펼쳐 읽어봤다.
본디 결론부의 비교인류학적(-혹 정치학적) 통찰이 아주 유명한 책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전반부에 쓰여진 '시대적 변동과 지속을 다루는 문제, (그리고 각각의 노선을 택한다는 것의 의미)' 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지적으로 충분히 훈련된 역사학자 중 '장기적 시각'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겠지만, 그 '장기적 시각'의 구현이란 게 (그냥 비슷한 현상의 지속을 말하는 정도를 넘어선) 안정된 모델 설정이 없이는 제대로 성립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요즘들어 부쩍 느끼고 있다.
그와 별도로 이 책은 올 하반기 들어서만 최소 10번 이상은 읽은 부분이고 그 만큼. 역사의 '연속성/단절성'을 생각할 때 음미해야 할 중요한 통찰이 담긴 명문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사실은 '상보적으로' '모두를 사용하겠다'는 식의 접근만큼은 내 취향이 아니다... 저자 자신부터가 모델 구성 방법을 전제로-민족지적인 노선을 선택하고 있는게 맞다면, (실제로 또 본문만 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그냥 그 방법을 채택한 이유를 쓰고, 그럼에도 다른 방식의 미덕도 함께 고려하긴 할 것임을 부연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
요새 어쩐지, '할 거면 하나만 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런가. 그래서 요즘따라 유독 이 부분이 좀 꺼끌거리게 읽히게 된다.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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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명의 역사를 주요한 사건들의 연속, 즉 전쟁, 군림, 혁명의 연속으로 묘사해볼 수는 있다. 이런 경우, 사건들이 역사를 형성하든 형성하지 않든 간에 그 사건들이 적어도 역사적 흐름 속에 나타난 주요한 변화들을 표시해주기는 한다.
다른 한편 위대한 문명의 역사를 날짜, 장소, 걸출한 인물들의 연속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발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국면들로 묘사할 수도 있다.
만약 첫 번째 종류의 역사 서술을 강조하면 역사를 잘 구분된 시대들, 즉 그 자체로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과되는 독특한 시간 단위의 연속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종류의 역사 서술에서 제시되는 것들이 바로 사일렌드라의 발홍, 자바 문명의 동부 이전, 마자빠헛의 몰락 등이다.
두번째 접근은 역사적 변화를 상대적으로 연속적인 사회문화적 과정으로 제시하는데, 이 과정 안에는 날카로운 단절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느리지만 유형화된 변화만이 감지될 뿐이다.
물론 이 과정의 전체적인 경로를 조망했을 때 발전의 각 국면들을 식별할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과거 상태가 끝나고 그다음 상태로 변화했는지를 짚어내는 일은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다하더라도 거의 항상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변화 혹은 과정에 대한 이런 관점은 사람들이 이룩했던 일에 대한 연대기적 기술보다는 누적적인 활동에 대한 형식적 혹은 구조적 유형을 더 강조한다.
시대별 접근이 일군의 구체적 사건들을 시간 연속에 따라 배열하고 그 연속체 안의 앞뒤에서 주요한 구분을 시도한다면, 발전주의적 접근은 조직 형태와 문화 유형을 시간 연속에 따라 배열하며, 이 경우 주요한 구분점의 존재는 그 전제조건이자 결과물이 된다. 시간은 두 접근 모두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이다. 첫 번째 접근에서 시간은 구체적인 사건들이 엮여 나오는 일종의 가닥이며, 두 번째 접근에서 시간은 어떤 추상적인 과정들이 관통하여 움직이는 매개체이다,
물론 이 두 종류의 역사 서술 모두가 타당성은 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역사 서술을 모두 해낼 수 있다면,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 된다.
특수한 사건들의 흐름을 매우 상세하게 연대기에 기록한다면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략적 개요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다. 한편 발전적 역사 안에서 구성된 국면들은 그 자체로 역사 인식을 위한 틀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재의 일부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범람하는 와중에, 그런 틀은 상황을 인지할 수 있도록 어떤 형태를 부여해주는 기능을 한다.
인도시대 인도네시아처럼 당시에 일어난 일의 대부분을 현재 복원할 수 없는 경우에는 신화와 비문의 행간을 아무리 열심히 읽으려고 해도, 오래된 유물에서 평행 관계를 아무리 직관적으로 유추해내려고 해도, 특수한 행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잘해봐야 가설적 사실에 대한 끝없는 논쟁으로 귀결되거나 최악의 경우 역사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정구슬로 지난 일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날조해내는 것으로 귀결되기 일쑤다(왜냐하면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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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의 종류에 해당하는 역사를 쓰는 작업은 결정적으로 사회문화적 과정에 대한 적절한 모델 구성이 어느 정도로 가능한가에 달려 있다. 단, 이때 구성할 모델은 개념적으로 정확하고 경험적으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문화적 과정 모델이야말로 고고학적 과거로부터 나 온 필연적으로 산발적이고 애매한 파편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 유형론적 작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델 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모델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더 철저하게 연구되어 있는 다른 지역, 예컨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아메리카나 고대 근동 지역의 발전 단계들과 비교함으로써 도출해내는 방법이 있다.
둘째, 광범위한 역사사회학을 기반으로 관련된 종류의 현상으로부터 핵심적 특징을 분리해내는 방법, 즉 이념형적 패러다임을 공식화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물론 막스 베버에 의해 유명해졌다.
셋째, 연구자가 재구성하려고 하는 과거의 것과 적어도 가족유사성을 지닌다고 믿을 만한 현재(혹은 최근)체계의 구조와 기능을 자세하고 묘사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가까운 것을 통해 멀리 떨어진 것을 비추어 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한 방법의 강점이 다른 방법의 약점을 교정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이 상보적인 접근 모두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 번째 방법, 즉 민족지적 방법을 내 분석의 중심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을 다루기에는 민족지적 방법이 가장 직접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더욱이 내 자신이 고고학자나 역사 학자라기보다는 사회인류학자이기 때문이다."
<"극장국가 느가라"(클리퍼드 기어츠, 김용진 역, 눌민, 2017), 17~20쪽> (가독성을 고려해 일부 문단 및 줄바꿈을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