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기 유불관계와 '포용적 우월론'
생각보다 유불문제/불교 비판문제에서 그 존재가 거론되었지만 동시에 더 섬세하게 천착될 필요가 있는 테마가 바로 '포용적 우월론'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종교적 정체성과 학문적 정체성의 공존 가능성'을 설명했는데 그것과 별도로 성리학적 정체성을 긍정하면서도 불교 비판의 부분에 한정해서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이러한 요소를 '모모 인물이 상대적으로 성리학에 불철저한 결과'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는 단순히 철저/불철저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당초에 '정체성의 투철함'을 점수로 매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분야에 따라 저술점수, 척불성, 등등으로 항목화시켜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후에 의미있는글을 많이 남겼지만 그 논문이 간학문적 성과/대중교양서가 대부분인 역사학자와, 저술 수는 적지만 순수 아카데믹한 저술밖엔 남기지 않은 역사학자 중에 누가 더 '철저한 역사학자'냐는 것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래 소개된 사례는 그 '포용적 우월론'에 대해 실마리를 주는 율곡 이이의 저술이다.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참조하되 일부 철학적 논의에서 논리적으로 꼬이는 부분 몇몇을 다듬었다.)
-----
내가 풍악산에 구경 갔을 때에,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몇 리쯤 가니 작은 암자 하나가 나왔는데, 늙은 중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 일어나지도 않고 또한 말 한마디 없었다.
암자 안을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을 짓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되어 보였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중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무얼 먹고 굶주림을 면하오?” 하니, 중이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내 양식이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솜씨를 시험하려고 묻기를, “공자(孔子)와 석가(釋迦)는 누가 성인(聖人)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선비는 늙은 중을 속이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오랑캐의 교(敎)이니 중국에서는 시행할 수 없소이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순(舜)은 동이(東夷)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사람이니, 이들도 오랑캐란 말이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불가(佛家)의 묘(妙)한 곳이 우리 유가(儒家)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하필이면 유가를 버리고 불가를 찾아야겠소.” 하니,
중이 말하기를,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 같은게 있소.” 하자,
내가 말하기를, “맹자가 성선(性善)을 얘기할 때에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는데,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소. 다만 우리 유가에서 본 것이 실리(實理)를 얻었을 뿐이오.” 하니,
중은 긍정하지 않고 한참 있다 말하기를,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오?” 하자,
내가 말하기를, “이것도 앞에서 말한 경우라오.” 하니,
중이 웃었다.
내가 이내 말하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색이오, 공이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말은 진여(眞如)의 본체(本體)이니, 어찌 이러한 시(詩)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겠소.” 하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이오, 어찌 이를 본체라 하겠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유가의 묘(妙)한 곳은 말로써 전할 수 없고, 부처의 도(道)는 문자(文字)밖에 있지 않은 것이 되오.” 하니,
중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당신은 시속 선비가 아니오. 나를 위하여 시(詩)를 지어서,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글귀의 뜻을 해석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니, 중이 보고 난 뒤에 소매 속에 집어 넣고는 벽을 향하여 돌아앉았다. 나도 그 골짜기에서 나왔는데, 얼떨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사흘 만에 다시 가 보니 작은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중은 이미 떠나 버렸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진데 / 魚躍鳶飛上下同
저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로세 / 這般非色亦非空
심상히 한 번 웃고 신세를 돌아보니 / 等閒一笑看身世
지는 해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서 있네 / 獨立斜陽萬木中
율곡전서 1권. 풍악산(楓嶽山)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贈小庵老僧)에게 주다
(저술시기 1555년 즈음 추정)
----
해설
율곡이 여기서 요순과 부처를 동일시한 점, 동시에 非色非空의 불교적 문자를 유교적 개념과 연결하여 이해한 점 등은 분명 '척불적 성향'이라고 정의내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점일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율곡이 스스로가 유학자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하산 이후의 시기로 추측되는 본 저술에서 유학자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가 어느 부분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불교의 저술을 성리학적으로 흡수해 내려고 하는 시도를 율곡이 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대한 율곡의 명백한 자부심을 방증해주는 것이라는 과감한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그의 성향이 이전의 출가 전력과 맞물려 공박받게 된 점과, 그의 이후에 율곡 문하에서 율곡을 평가할 때 불교적 포용성에 대해서 언급을 피하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성리학 발전의 심화에 따른 사상적 척불의 당위성 강화' 측면보다는 성리학의 학문적 전승 형태의 (양적 심화가 아닌)질적 변화와, 그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한 정치적, 학문적 변화요인들을 검토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
부연
1)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말은 시경(대아 한록)과 중용 12장에서 활용된 이래 理와 道의 보편성을 설명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구절이다. 사실상 성리학의 정수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구절.(이를 요약한 연비어약鳶飛魚躍론은 퇴계詩의 핵심 키워드로 평가받기도 한다.)
즉 이 구절로 승려를 완전히 설복시켰다는 저 내용은 사실 불교에 대한 포용성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표출시킨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한 이 저술의 의미를 따질 때에는 이 글의 집필시기가 율곡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1559년 이전의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도 있다. 설령 율곡이 그 전에 하산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본인이 아직 관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술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은 돌려 생각해보면 관직에 있던 인물들 또한 '불가능한 저술'로서 쓰지 못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더 개인적인 저술의 영역에서 더 따져볼 문제겠다.
3) 이러한 '개인적 저술'의 영역을 '사적 교유'. 혹은 '개인적 신앙'의 영역에서 한정시키려고 하는 것 또한 기존 연구에서 흔히 이루어져왔던 접근법이다.
다만 이는 설득력있는 주장임에도, 극복할 필요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순수한 인적 교유의 측면이 아니라 율곡의 경우처럼 지적 사유가 분리되지 않은 경우도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적 파편들이 실제로 사유 저변에서 복류하여 이후로 전승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척불론 관련해서 빠져선 안 될 또 다른 함정은, 불교를 '성리학에 대치한 생존의 투쟁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불교는 숱하게 공격당한 것도 맞지만, 그 자체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말해지기에는 또 나름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도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즉 중요한 것은 성리학 사회에서 불교가 배척받았다는 것을 기본으로 두되, 그 와중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의 양상, 과정을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
5) 이건 부연이라기보다는 여담인데, 저 승려는 불교 자체의 견지에거 본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강단을 더 부려도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감이 있기도 하다.
사실 율곡의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운운은 일견 언어철학적인 견지에서 '형식으로서의 언어가 가진 의미'를 역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이를 랑그-시니피앙 운운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선불교적 진리관은 이런 언어적 형식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월론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철스님이 했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본다' 화두 식으로 밀어붙여도 안 될 것도 없었다....저 둘이 좀 더 많은 얘기를 더 했으면 좋았을텐데 저 상황 자체는 아쉽다면 아쉬운 일인 것이다.
201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