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관련 잡담

다산의 오만함(자신감?)

평시(lazyreader) 2017. 7. 11. 04:03

건륭 신해(정조 15년. 1791). 내각의 월과(월별로 보는 과거시험)에 친히 (왕께서) 대학에 대해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였다.

"신이 망령되이 이르나이다. 대학의 극치와 대학의 실용은 효.제.자.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대학의 요지를 밝히려한다면 반드시 먼저 효제자 세자를 가지고 깨끗이 닦아 문장을 펼쳐야 대학의 전체.큰 용도를 가히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경문에 말한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곧 명덕을 밝힌다는 일의 귀착이 반드시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는 데에 달려있다는 한 구절입니다. 효도. 공경을 흥하게 하는 법과 고아를 구휼해 배반하지 않는 문화가 과연 명덕을 밝히는 일의 진면목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책문을 거두어가서 (왕께서) 제 1등으로 발탁하기를 명령하였으나, 당시에 채번옹(채제공)이 독권관으로서 "소위 명덕의 뜻을 말한 말이 (주자가 쓴) 장구에 위배된다"고 하여 2등으로 강등하고 김희순을 제 1등으로 만드니.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일이다..

정다산 "대학공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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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형제애. 자녀사랑(효.제.자)로 대표되는 도덕감정에 근거한 실천윤리론을 대학의 근본. 유교윤리의 근본으로 이해한 다산의 해석은 체제공의 지적 대로 격물치지로 대표된 주지주의적 수양윤리. 학습윤리론을 근본으로 한 주자의 전통적 대학 해석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말 그대로 '전통적인 학설에서 벗어난 소수설'이었다는 소리다.

경서에 대한 "정확한" 해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문경학.금문경학적인 해설을 달 생각은 없다. 다산의 해설이나 전통 학설 중 어느 쪽이 더 연구로서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도 (지금와서 가능하지도 않고)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시점에서 '일반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은' 학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평가절하의 근거가 된다는 저 상황은 당시 학계사정이 '학문적 전통이라는 이름의 권위'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좋은 지표라고 할 만한 것이고 이는 조선후기 다양한 학문 조류가 '등장' 한 것과는 별도로 기성 학문계의 입장이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의 반증이라 할 만할 것이다...


2013.3.3